Ownership

어디서든 일을 하다보면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책임감을 가지고 하지 않고 그저 그때 그때 주어진 작은 것만 해내는 사람이 있다. 물론 전반적으로 일에 경험이 부족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조금 더 생각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귀찮거나 더 하기 싫어서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책임감, 혹은 이 일이 자신의 것이라는 소유감(?)이 없다고 할수도 있다.

그냥 여러가지 일을 할때도 그렇지만,
삶을 살아갈때도 그렇다.

어떤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때, 마치 이것이 내 삶이 아닌것처럼 그때그때 주어진 일만을 간신히 한다. 다른 생각은 귀찮아서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은 가득하고 자신의 위치를 일부러 축소시킨다.

20대 초반, 내가 부모님 차를 몰고 나갔다가 앞차를 아주 살짝 들이박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쪽에서는 거의 뒷목을 잡고 나오더니 고함을 쳤고, 나중에 우리집에 전화해서는 욕설을 퍼부어가며 난동을 부렸다.
어머니께서는 그 사람들과 전화하고 만나서는 그 고약한 사람들을 한편 달래고 한편 조용히 타이르시면서 일을 해결하셨다.
생각해보면 그때 어머니는 지금 내 나이보다 더 어릴때였다.

어머니가 그렇게 하셨던 이유는 아직 사회생활 경험이 부족한 내가 이 일을 해결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셔서 자신이 감당해야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셨던 것이었을 거다. 그래서 그 유쾌하지 못한 일을 나서서 ‘내가 해야할 일’이라고 감당해서 하셨던 것이다.

그게 ownership이다. 삶과 상황에 대한 책임과 무게를 내가 지겠다고 나서는 것.

그건 내 삶의 방향에 대한 결정을 할때도 그렇고,
내가 맞닥드리게된 고통이나 어려움을 대하는 모습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맞닥드린 상황 속에서 먼지를 툭툭 털고 떳떳하고 당당하게 그것을 마주하는 ownership.

나이가 꽤 들어서까지 그렇게 하지 못하는 어른들을 꽤 많이 본다.
그리고 그런 모자란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젊은이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Jordan Peterson vs 20 Atheists

최근(?)에 Jordan Peterson이 20명의 무신론자들에 둘러싸인채, 그 사람들과 1:20으로 논쟁(debate)하는 이벤트를 한 모양이다.

나는 그 전체 video를 보지는 못했는데, 정말 Jordan Peterson은 내가 ‘믿음’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여러각도로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이 사람의 논증은 흔히 CS 루이스같은 부류의 기독교 변증과는 매우 다르다. 혹은 알빈 플랜팅가 같은 철학자들이 하는 접근과도 다르다.
철학적 변증을 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인 철학적 개념으로부터 신의 존재 기독교의 정당성등을 논증하려고 하고,
CS 루이스는 현상적 경험으로부터의 추론을 가지고 논증하려고 한다고 생각하는데…
Peterson은 뭐랄까.. 딱 찝어서 이야기하기는 어려운데… 뭔가 반대쪽 끝에서부터 접근해 온다는 생각이 든다.

Peterson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공개적으로 울컥 하면서 이야기했던 것은 내게 꽤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리고 내가 이해하고 있는 Peterson의 사상이 어느정도 맞는다면 그는 철학적/신학적 foundation으로부터 따라와서 신을 발견했다기 보다, 지금 신이 없이는 세상이 설명되지 않는다는, 어찌보면 다소 포스트모던한 접근을 통해서 신과 만난것 같아 보인다.
그래서 아마 이 사람이 무신론자와 논증할때도 그런 입장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내가 잘 이해 했다면)

지난 1~2년동안,
나는 소위 ‘변증’이라는 것에 대한 일종의 회의랄까 그런 걸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가 변증의 대상일까, 변증이 과연 기독교를 증명해내는데 도움이 되는걸까 하는 질문 때문이었다.
그런데 Jordan Peterson식의 접근은 그런 내 질문과 회의에 완전 다른 커브볼을 던지고 있다.

Jordan Peterson의 생각에 내가 다 동의한다는 것도 아니고,
그 입장을 다 이해한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렇게 믿음에 접근하는 것이 내게 매우 신선하기도 하고, 어쩌면 post-modern generation에게 일종의 돌파구가 될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을 가지고 있다.

요한복음

요한복음을 공부해보고 싶은데…
영 어렵다.

내가 20대 초반에, 같은 교회에 있던 약간… 뭐랄까… 좀 도사같다고나 해야할까… 그런 스타일의 형이 있었다.
그 형은 약간 신비체험같은 것도 많이 했었고, 기도도 좀 독특하게 하는 형이었다.
그 형은 나를 보면 늘, 너는 요한 스타일이야… 라고 말하곤 했었다.
그 형이 보기에 나는 공관복음적 믿음을 가지고 있기 보다는 요한복음 스타일의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그때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공관복음이 뭐고 요한복음은 뭐야… 그냥 다 복음서지.

그런데 실제로 나는 요한복음을 좋아하긴 했다.
그게 읽으면 유난히 더 잘 읽혔고, 요한복음 15장의 다락방 강화나… 21장의 예수님이 제자들을 다시 만나는 장면은 정말 하루에 몇번을 읽어도 질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 후 성경공부라는걸 조금 더 하게 되면서 나는 점점 요한복음 보다는 공관복음을 좋아하게 되었다.
특히 지난 10~15년 정도는 더 그랬다.
아마 historical Jesus라는 토픽에 관심을 갖게되면서 더 그렇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요한복음과는 좀 소원해졌다고나 할까.
그리고 지금은 요한복음을 어떻게 잃어야 하는지 그 감을 잃어버린 듯 하다.
요한복음이 어렵다. ㅠㅠ
잘 이해가 안된다.

요한복음이 어렵게 느껴진다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Christology 가 혹시 치우쳐져 있다는 의미일까?
나는 성경을 균형읽게 읽는 방법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요한복음을 좀 공부해보려고 하는데…
여전히 어렵다.

나와 다른 신을 믿는 기독교인들

예전에는, 믿는 교리에서 조금 다른 것이 있으면 나와 다른 기독교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래서 특별히 내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똑같이 강조하지 않는 다른 기독교인들을 불편해하곤 했다.

나는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핵심은 의외로 별로 넓지 않아서, 그 핵심을 서로 공유하고 동의한다면 작은 차이는 용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용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요즘 한국과 미국의 정치뉴스에 등장하는 어떤 종류의 ‘보수’ 기독교인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나와 같은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들의 교리가 나와 다르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의 행동이 그들의 교리와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이다.

사랑, 은혜, 정직, 낮아짐, 섬김, 투명함 등등…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소중하게 생각해야할 개인윤리가 있다.
그런데 이들은 정치적 소신 때문에 자신의 보수적 신앙을 저버린 사람들이다.

정치뉴스에 나오는 그런 사람 뿐 만 아니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열심히 하는’ 목사님이나 교회 지도자들 역시,
그들과 대화할때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신뢰하기 대단히 어렵다.
그저 잔머리를 굴리고, 속이고, 꼼수를 써가면서 결국 자기 배를 채우는 사람들…
그러면서 자신이 보수적인 신앙인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

나는 훌륭한 보수적 기독교인과 같은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도 역시 보수적 신학을 가진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나와는 다른 신을 믿고 있는 듯 하다.

맥빠진 두주

지난 두어주는 약간 맥이 빠진 상태로 보냈다.
아마 육체적으로 좀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을 수도 있겠고, 많은 생각과 정신을 쏟아야 했던 것이 한단계 지나서 좀 정신적/정서적으로도 쉬는 것이 필요했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렇게 쉬다보니 밤에 괜히 멍하게 youtube에 반복되는 뉴스들, 시덥잖은 영상들이나 보고 있고,
별로 가치있게 시간을 보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그다지 쌈빡하게 잘 쉬지도 못하면서 애매하게 시간을 보낸 듯 하다.

그러다가,
아… 가을학기부터 성경공부를 또 해야하는데… 하는 생각에 여러가지 성경공부 자료들을 모으고, 나름대로 본문도 살펴보는 일을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주부터 follow-up도 다시 시작하고 나니 이메일이나 카톡등으로 질문들이 들어오기도 하고.

다시 몸과 마음을 추스리고 좀 열심히 해야겠다는 다짐을 부르르 떨면서 해보았다.

이제 나도 비로소 금년 PKS가 끝난 듯 하다. (PKS: Post-KOSTA Syndrome)

High maintenance

회사에서 두종류의 정말 매우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 있다.

A는, 빠릿빠릿하지 못하다. 뭘 이해하는데 시간이 오래걸리는데 이 사람이 또 엄청 detail을 챙긴다. 그리고 눈치가 없다.
그래서 이 사람이 미팅 중에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질문하기 시작하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을 이야기하느라 소중한 시간을 다 써버리게 된다.
이 사람에게는 매우 자주, 지금 해야하는 중요한 일이 무엇이고, 오늘까지 무슨 일이 되어야 하고, 오늘 미팅의 목적은 무엇이다… 등등의 이야기를 따로 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이 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지 않는다.

B는 말하자면 지나치게 자존감이 낮다. 무슨 말을 해도 자기 변명을 하는데 오랜 시간을 쓴다.
문제는 그 사람의 변명이 전체 팀에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거다.
그 사람에게는 또 매우 자주, 네가 잘한다. 너 문제 없다. 네가 한건 중요하다 등등… 엄청 칭찬을 많이 해주어서 이 사람이 쉽게 낙심하거나 심하게 방어적이 되지 않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이 사람 역시 그리 똑똑하지 않아서 뻘짓을 꽤 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내 나름대로는,
어쨌든 그런 high maintenance 사람들 조차도 쉽게 dismiss하지 않고 여러가지로 격려하고 지지해보려 하는 것인데….
참 쉽지도 않고 에너지도 정말 많이 든다. ㅠㅠ

그런데 예수님이라면,
그런 사람들을 나처럼 귀찮게 생각하거나 그러지 않았을 테지. 그 사람들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고, 그 사람들의 독특한 것들을 잘 세워주셨겠지….

결국 예수님 입장에서는, 나도 high maintenance인 셈이다.
그런 원칙을 자꾸만 remind 해주어야 하니 말이다.

고통

어떤 사람의 고통은 내게 그렇게 큰 고통으로 느껴지지 못하고,
어떤 사람의 고통은 내게 연민을 가져다주고,
어떤 사람의 고통은 더 큰 아픔을 주지만…
어떤 사람의 고통은 차라리 그 고통이 내것이었으면 하고 느끼게 한다.

그 사람의 고통을 내가 함께 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에 좌절하고,
그 고통 속에 함께 있고 싶어하게 된다.
심지어는 내가 겪는 고통보다 더 힘들고 무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대단히 거룩하거나 숭고하지는 않다.
종교적이거나 아름답게 여겨지지도 않는다.

그저 그 고통 속에 내가 있다는 자각이 있을 뿐이다.
그 고통을 더 함께 하지 못하고 있다는 안타까움이 있을 뿐이다.

십자가는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선포의 대상이라는 케네스 리치의 말을 더 깊게 생각하게 된다.

삐딱한 사람, 간절한 사람

믿음에 대해 삐딱한 사람이 믿음에 대해 물어오는 경우.
이때는 그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에 최대한 도와주려고 노력하지만,
한편 그것에 대한 부담감은 더 적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어차피 내가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하더라도 큰 실망이나 상처를 받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과의 대화에는 대개 내쪽에서의 안타까움과 간절함이 큰 경우가 많다.

믿음에 대해 간절한 사람이 믿음에 대해 물어오는 경우,
이때는 대개 무슨 이야기를 하든 그 사람이 쏙쏙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고,
이런 사람은 어떻게든 이 모든 노력을 통해서 좋은 것을 얻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 믿음에 대해 대답을 해주는 내가 좋은 사람이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대화에 임한다.
그러니 어찌 어찌 하다가 그 사람이 실망하거나 심지어 상처를 받게되면 그 사람의 실망과 상처는 매우 깊다.
이런 사람들과의 대화에는 대개 그쪽의 간절함이 더 크지만 내가 매우 큰 영적 부담이 있다.

그래서 어떤 부류의 사람과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것이 믿음에 대한 대화라면 늘 마음에 부담이 가득하기 마련이다.

힘들고… 무겁다…ㅠㅠ

Self Evaluation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눈이 생기면 생길수록 그 사람은 더 성숙해진 것이다.

그것은 개인으로 보아도 그렇지만,
어떤 조직이나 단체, 운동 등도 마찬가지다.

처해진 상황이나 주변의 환경때문에 주변으로부터 객관적인 feedback을 받는 것이 매우 부족한 경우,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는 자기 자신이 해야하는 한계에 도달할 수 밖에 없게된다.

그러면 그 개인이나 단체는 자신과의 매우 외로운 싸움을 해야 한다.

KOSTA가 끝나고 많은 목소리들이 들린다.
어떤 분들은 자신이 했던 일들이 잘 되었다고 축하를 하기도 하고,
어떤 분들은 자신이 겪었던 경험이 매우 가치있고 소중했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또 드물긴 하지만 비판적인 이야기가 들리기도 한다.

내가 KOSTA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기적인 바람은,
사람들이 나의 존재를 별로 기억하지 않는 잔치를 베푸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다.
내가 그걸 잘 하느냐 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냥 좀 그렇게 하고 싶다.

바빠서 정신없이 다니다가,
캠퍼스 곳곳에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기도를 하기도 하고, 함께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설명하기 어려운 기쁨이다.

많은 이들이 설교에 집중하며 반응하고, 기도를 하면서 눈물을 닦는 모습을 보는 것은,
중독성이 있을만큼 감동적이다.

Somehow, 내가 하는 작은 일들이 어떤 이들에게 큰 기쁨이 된다는 것은 참 짜릿하다.

그렇지만,
그런 모든 감정들은 내가, 우리가 했던 일들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반성하는데 큰 장애가 되기도 한다.

숙제

지난주 나름 엄청 뛰었다.
이번에는 나름 할일이 많지 않고 여유로울 것이라고 착각했으나…
해야겠다고 했던 일들도 제대로 하지 못한채,
하루 4시간씩 자며 한주를 보냈다.

결국 숙제를 잔뜩 안고 돌아왔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숙제일지 잘 몰라 고민중이다.

삶은 빡빡하고, 고민은 많고, 무게는 무겁고, 풀리지 않는 숙제는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