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The Garden

정말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만큼 바쁜 한주가 시작되었다.

John Ortberg가 Willow Creek Church에서 너무 일이 많고 바빠서 정신없이 지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때 Ortberg는 Dallas Willard에게 지혜를 구하며 물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Dallas Willard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You must ruthlessly eliminate hurry from your life.
(너의 삶에서 분주함을 무자비할정도로 제거해야 한다)

바쁘게 사는 것은 때로 다른 선택이 불가능할때가 있다.
그냥 상황이 그러니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상황 속에서 마음이 쫓겨 살지 않는 것은 내가 선택해서 살 수 있는 것이다.

I must ruthlessly eliminate hurry from my life.

위의 In the Garden 찬송가는,
한글 가사를 참 나는 좋아했는데,
최근 영어 가사로 찬송가를 들어보니 아… 그거 참 좋다.

and he walks with me and he talks with me
and he tellls me I am his own
and the joy we share as we tarry there
none other has ever known.

우리 주님과 정원에서 거니는 거룩한 시간의 낭비는,
나를 분주함으로부터 지켜주는 것 같다.

사람에게 하는 원망을 멈추어야?

도대체 왜 이렇게 뻘짓을 하면서 제대로 못하는 거냐…
왜 이렇게까지 탐욕에 사로잡혀 교회를 망치고 있는 거냐…
왜 이렇게 무지에 사로잡혀 이토록 엉터리로 신앙교육을 하는 거냐…

신문기사를 읽거나,
기타 주변에서 접하는 교회의 이야기들,
등등에서 접하는 정말 추잡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한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읽으며 그런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때가 많다.

특히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어떤 작은 공동체를 그렇게 망치는 리더들을 보면,
정말 화가나기도 하고, 그 사람들을 원망하게 된일도 참 많았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사람들이란 늘 그래왔다.

사람들은 늘 그렇게 탐욕을 쉽게 버리지 못했고,
늘 그렇게 단순한 진리 앞에서도 무지했고,
그렇게 어리석어 지혜의 길을 따르지 못했었다.
다만 아주 소수의 사람들이 그 진리와 지혜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을 뿐.

그런데 어떤 시대에는 그 어리석은 사람들조차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일들이 나타나기도 하는 반면,
어떤 시대에는 지혜로운 사람들조차 무기력함과 낙심에 빠져 헤어나지오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니,
이토록 어리석고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들이 하나님을 알아 복음앞에서 제대로 반응하는 것 자체가 기적적인 것이고,
다수의 사람=들이 그 복음앞에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서는 일이 당연한 것은 아닌 것이다.

한편,
복음 앞에 제대로 서서 복음을 따라 걷지 않는 사람들을 책망할수는 있으나,
그 사람들을 원망할수는 없다.
그냥 그 탐욕과 무지는 그저 우리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값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해야하는 일은 기도가 아닌가 싶다.
사람에게 하는 원망을 그치고,
차라리 그 원망을 하나님을 향해서 하는 것이다.

하나님,
왜 예전에는 당신의 선하심이 많은 이들에게 비추어졌는데
지금은 그렇게 하시지 않는 것이냐고.

더 그렇게 눈물 뚝뚝 떨어뜨리며 기도할 일이다.

역사비평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계시를 하셨다는 전제를 가지고도 충분히 역사비평을 받아들일 수 있다.
아니 오히려 역사비평의 관점을 가지고 있으면 조금 더 rigorous한 성경해석의 결과들을 소유할 수 있는 큰 장점이 생긴다.

최근에 한국교회탐구센터에서 내고 있는 ‘역사비평 핵심논쟁’ 책 요약은 참 조심스러우면서도 친절하게 이런 관점을 소개하고 있다.

권력과 불화하는 기독교 (11)

이건 미국도 마찬가지다.
나는 심지어는 미국사회에서도, 여전히 여성이 약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인종차별이 존재하고, 유색인종들이 약자이기도 하다.
또 성소수자라던가, 이민자등은 여전히 약자이고,
특히 지난 수십년계속된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서 폭력적으로 진행된 빈익빈부익부 속에서 경제적 약자들이 많이 생겨났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니 미국 사회도 역시 어떤 의미에서 ‘권력’이 정말 교체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사상’, ‘철학’, ‘아카데미아’등의 세계에서는 그 권력의 역전현상이 일어났다고 본다.

미국에서 liberal democracy라는 이름으로 함께 언급되는 많은 가치들…
그 가치들의 대부분에 내가 동의하면서도…
한편 사상, 철학, 학문등의 분야에서 이미 일어난 권력역전현상을 생각해 보았을때,
그 가치를 주장하는 어떤 그룹의 사람들과 기독교가 동일화되는 것은 또한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어쩌면 조금 더 나아가서 만일 사상, 철학, 학문등의 분야에서 이미 권력 역전현상이 나타났다면, 이제는 그 분야에서 주도적 사상체계가 되어버린 그것들과 진지하게 불화를 모색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고민을 해보게 된다.

어쩌면 나는 이것이 Stanley Hauerwas가 그렇게도 liberal democracy를 까대는 이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Stanley Hauerwas에 따르면 이 liberal democracy는 invitation for not-thinking 이란다. liberal demoracy라는 가치만 일단 들이대면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론도 하지 못하고 다 근야 받아들인다는 거다.

기독교가 과연 어떻게 권력과 불화해나가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해…
조금 더 생각을 하게 하는 포인트다.

(글이 길어지고 지루해져서 이쯤에서 줄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ㅎㅎ)

권력과 불화하는 기독교 (10)

내 블로그를 읽는 분들을 내가 모두 다 개인적으로 알고 있지 못하지만,
오늘의 이 글은 어떤 분들을 살짝 불편하게 만들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80년대에 대학을 다녔다.
전두환이 대통령일때 대학에 들어갔다. 87년 민주화항쟁을 대학생때 겪었다.
나는 민주화운동을 할만한 용기가 있는 사람은 아니었고, 내가 그런 사회문제에 눈을 뜨게된건 후에 예수님을 믿고난 후 였다.

내 경험에 근거하면,
사회적 약자, 권력의 반대편에 서 있는 민주화 운동 투사들, 여성, 어떤 형태로의 소수자(minority) 등은 늘 정의에 가까웠다.
그것은 한편 그 사람들이 정의로왔기 때문일수도 있었겠지만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집단이 워낙 악했기 때문이었기 때문일수도 있겠다.

자기 국민을 학살한 독재자와 그 추종자와 맞서는 사람들이 있을때,
그것에 맞서는 사람들이 당연히 독재자와 그 추종자보다는 더 정의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지금 나는 그런 공식을 좀 깨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에 맞섰던 사람들이 가지는 권력이 이젠 꽤 커졌기 때문이다.

나는,
80년대 약자였던 그 그룹중 일부가 권력을 가지는 모습에 환호했고, 그들을 응원했다.
그리고 그 그룹이 여전히 한국 사회의 전체적인 권력 세력을 보았을때 더 약한 그룹이라는 것에도 공감하고 동의한다.

그러나…
이젠 그 사람들도 권력자들이 되었다. 그것도 아주 강한 권력자들.

(원래 오늘 끝내려 했는데, 아무래도 다음주로 넘겨서 한두번 더 써야 할 듯)

권력과 불화하는 기독교 (9)

나는 이런 생각이,
정치적으로 대단히 양극화(polarized)되어 있는 한국과 미국같은 사회에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제발…
교회가 어떤 정치집단을 지지하는 일은 좀 하지 않았으면 한다.
목사가 강단에서 어떤 정치집단이나 정치가를 지지하는 발언등을 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것은 교회가 비정치적이되어야한다는 말과는 다르다.
교회는 여전히 정치적일 수 있다.
정치적으로 중요한 agenda에 대해 기독교와 교회가 분명히 그 가치와 신념을 바탕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그 가치와, 그 가치를 추구 하는 정치집단을 동일시 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특히 더 힘들 수 있다.
가령, 625전쟁을 겪은 사람들에게 그 북한과 전략적으로 평화적공존을 추구한다는 것은 대단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이민자들에게 배타적인 입장을 견지해온 어떤 정치집단에 대해 그 배타적 입장으로인해 피해를 입은 이민자 집단이 미국에서 그 정치집단을 지지하기란 쉽지 않다.
혹은 대학때 독재정권과 싸웠던 자신, 혹은 자신의 동기들을 실제로 보았던 세대는, 그 독재의 잔재를 아직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정치집단을 받아들이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다고 해서…
어떤 정치집단과 기독교적 정체성을 동일시 하는 잘못을 범하지는 말아야 한다.

어떤 정치집단을 배격하고 반대하는 것은 차라리 괜찮다.
그러나 어떤 정치집단을 지지하는 것은, 적어도 기독교인들에게는, 더 특별한 주의가 요구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권력과 불화하는 기독교 (8)

그런의미에서 나는 기독교가 어떤 특정 정치세력과 연계되는 것을 극도로 조심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인이라면 당연히 종교의 자유를 이야기하는 쪽을 지지해야지,
기독교인이라면 당연히 경제적 약자를 돌보는 쪽을 지지해야지,
기독교인이라면 당연히 남북평화를 추구하는 쪽을 지지해야지,
기독교인이라면 당연히 자유와 공정을 이야기하는 쪽을 지지해야지…

뭐 다 맞는 말일 수 있는데,
나는 당연히 기독교인들이 나름대로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추구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기독교인들은 그 자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추구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가령 종교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은 옳지만,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는 정치집단과 기독교를 동일시하면 안된다는 말이다.

경제적 약자를 돌보는 일에 관심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경제적 약자를 돌보는 것을 주장하는 정치집단이 기독교적이라는 환상은 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정치집단은 근본적으로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그 권력은 근본적으로 기독교와 불화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가치를 주장하되, 어떤 정치 집단을 기독교 신앙과 동일시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권력과 불화하는 기독교 (7)

기독교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동등한 존엄을 가진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가치제계이고,
그렇기 때문에 어떤 형태의 억압과 폭력등에도 저항할 수 있는 내재적인 힘이 있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대로 기독교가 그렇게 저항해야하는 대상, 불화해야하는 대상과 불화했을때 기독교는 기독교만의 힘을 가져왔다.

가령,
어떤 사회에서 어떤 특정 지역출신이 부당하게 차별을 받고 있다고 하자.
그러면 기독교는 그 부당하게 차별받는 약자의 편에 서서 그 사람들에 대한 차별이 부당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데 몇세대가 지나면서 그 부당하게 차별받던 사람들이 정치적 세력을 규합하고 내부적으로 더 단결해서 권력(정치권력, 경제권력, 혹은 문화권력 등)을 쟁취해냈다고 하자.
그러면 기독교는 그 사람들이 가지는 그 권력이 다른 약자를 억압하는 것에대해 다시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어떤 특정 그룹과 연계되는 종교라기보다는,
끊임없이 권력과 불화하는 종교라는 말이다.
그 권력이 설사 바로 얼마전까지 기독교가 보호하고자 했던 약자그룹이었더라도 말이다.

그것은 어떤 사람들의 그룹도 절대 선이 될 수 없고,
하나님만이 절대 선이 되신다는 생각과 연결된다.

권력과 불화하는 기독교 (6)

나 같은 비전문가가 내가 어떤 신학자를 좋아한다는둥… 그런 얘기를 하는게 좀 건방지게 들릴 수도 있지만… 나는 Stanley Hauerwas를 좋아한다.

이분은 때로 전달하고자하는 어떤 내용을 아주 강렬하면서도 명확한 표현으로 이야기를 하시곤 하는데,
매우 자주 이분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liberal democracy)를 아주 신랄한 톤으로 비판하시곤 한다.

아니, 민주주의를 비판한다고?
이게 다소 충격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데…

이분은 자기 주변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추종하는 친구들을 당황스럽게 하기 위해서 자주,
“나는 신정주의자(theocrat)이다”
라고 이야기를 하신다고 한다.

신정주의(theocracy)라면 신의 뜻에 따라 통치한다는 명목하에 말도안되는 일들을 자행하는 매우 미개한 체제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데, 그리고 많은 경우 그 사람들의 생각이 맞지만,
Stanley Hauerwas는 자신이 신정주의를 지지하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면 주변의 사람들이 깜짝 놀라면서 긴장한다고… ㅎㅎ

그렇게 의도적으로 충격적인 표현을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어떤 심오한 내용을 전달하는 것은,
Stanley Hauerwas나 되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겠지만…
나도 그분이 이야기한방식 대로라면 역시 신정주의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