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STA/USA-2010 conference를 마치고 (3)

복음

지난 두어달 동안 내가 많이 ‘확장시켰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복음의 개념에 대해 다소 회의적인 점검을 하고 있던 차였다.

현대 기독교에서 아주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복음을 사유화(privatization)하려는 시도에 있다고 여기고,
복음의 공동체성, 복음이 가지는 거대담론 등에 매우 깊이 빠져 있었다.
영혼 구원에 머무르지 않는 구원, 전 피조세계의 회복을 의미하는 구원의 의미에 대해 꽤 많이 곱씹으며 나름대로 연구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 두어달 동안에는 내가 취하고 있던 그 접근법을 여러각도로 재점검하고 있던 차였다.
복음이 사유화(privatization)된 것은 복음의 공동체성이 강조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볼수도 있지만, 복음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개인화(personalization)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전 세계를 구원하시는 복음의 속성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복음은 결국 개인적(personal)인 속성이 그 핵심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었다.

한동안 빠져 있었던 N.T. Wright에 대해서도, 결국 그분이 이야기하는 ‘righteousness'(의), ‘justification'(의롭게 됨)의 개념을 내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결론을 잠정적으로 내리면서 다소 혼란을 겪고 있던 차였다.

그러던 차에…
이번 집회에서 다루어졌던… old gospel, penal substitution을 강조하는… 보혈의 공로로 구원얻는 그 복음, 그 복음으로 인해 새로운 삶을 살게되는 그 복음을 나는, 다시 한번 주목하여 바라보게 되었다.
말씀 묵상을 통해, 설교를 통해… 그리고 내가 곱씹는 사색과 사고를 통해…
내가 얼마나 죄인이었던가, 그런데 그 죄인에게 주어지는 십자가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이었던가 하는 것에 다시 깊이 주목하여 잠기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내가 어쩌면…
그렇게 복음의 공동체성을 강조하려 했던 것, 거대담론을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 등은…
정말 복음의 core라기 보다는 그보다 더 넓은 영역을 복음에 넣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내가,
내 개인에게 주어진 구원의 감격에 대해 망각한 채,
사변적이고… 소위 ‘세상의 이상주의에 아부하는’ 방식으로 복음을 접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복음은,
모든 믿는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인데…
마치 그것을 내가 이루려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Tim Keller나 Don Carson 같은 사람들이…
이러한 움직임을 new legalism이라고 지칭했던 것이 어째 마음에 와 닿았다.

(그렇다고 복음의 공동체성이나 거대담론등을 포기했다는 것을 결코 아니다. ^^)

10 thoughts on “KOSTA/USA-2010 conference를 마치고 (3)”

  1. 말씀드렸나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제가 갖고 있는 NT Wright의 칭의론과 관련해 풀리지 않는 문제는 “현재의 God-fearer는 누구이겠느냐” 라는 것입니다. 결국 약간 과장되게 단순화 한다면, NT Wright은 당시 문맥에서 이방인 God-fearer가 할례로 대표되는 유대인의 표징을 따르지 않고도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속하게 된 것을 칭의로 보는데요. 이것을 현대의 문맥으로 가져올 때 생기는 질문인 거죠. 제가 아는 한, NT Wright은 역사학자로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 그리 관심이 있는 것 같지는 않는데요. 우리가 현대의 God-fearer를 소위 seeker로 보느냐 아니면 더 높은 혹은 낮은 기준을 적용하느냐에 따라서 적용점도 많이 달라지는 것 같고, 또한 비판을 할 수도 수용을 할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turning point가 아주 전통적인 복음을 통해 제 nothingness를 발견하는 데에서 시작되었지만, 가까운 주변에서 주님을 처음 만난 대부분의 case는 seeker를 위한 성경공부에서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두 입장 사이에 있는 논쟁에도 불구하고 어느 하나도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1. 저야 물론 NTW와 같은 뛰어난 신학자를 평가하고 비판할만한 사람이 못되지만요,
      여전히 제가 NTW를 적극적으로 embrace 하지 못하는 것은…
      이분의 basic idea가 시간을 통해, 그리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NTW에 대한 비판 중 대다수는… 말도 안되는 말꼬리 잡기이긴 합니다만… 그중 일부는 아주 설득력있는 훌륭한 critique이 있다고 보여지는데… JK가 이야기했던 것 같이 그런 critique에 대해 통쾌한 답변이 안되고 있다는 느낌이 좀 있습니다.
      JK나… ‘미운 사람’이나… 뭐 이런 사람들이 잘 연구해서 저좀 가르쳐 주시죠.

      NTW를 기존의 good old gospel에 대한 complementary 한 것으로 본다면 conflict가 적을텐데, (적어도 저는 그럴경우 conflict를 거의 느끼지 못합니다.)
      NTW 자신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NTW의 주장이 good old gospel을 reform 하는, 혹은 refresh하는 것이 니까요.

      그리고,
      저 개인적으로 복음전도 message를 할때,
      기존의 사영리식 접근보다…
      The true story식의 접근을 소위 ‘젊은 세대'(80년대상)에게 해보려는 시도를 해본적이 있었는데요,
      의외로 이 젊은 세대에게도 the true story식의 접근보다, 예수께서 네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접근이 더 powerful하게 다가가는 것같이 느껴졌습니다.
      물론 data point가 많지 않으므로 매우 crude한 conclusion이 되겠습니다만….

      부족하지만.. 성경을 연구하며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의 한 사람으로서.. 성경이 ‘good old gospel’을 지지한다는 conviction을 약화시킬만한 결정적인 그 무엇을 발견하지 못했고요,
      그리고 clinically try해본 결과도 good old gospel이 잘 먹히더라…
      뭐 그런 이중적 tentative conclusion에 접근해가고 있는 중입니다.

      KOSTA를 섬기는 사람들이 함께 계속 고민하고 기도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 같은 사람에게도 많은 깨달음도 주시고요. ^^

  2. “충실한 현재, 진정한 현재라는 것은 그 안에 현존성과 만남과 관계가 실제로 나타날 때만 이룩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현재는 ‘너’가 현존할 때에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다. (중략) 실재적인 것은 현재를 산다. 이에 반하여, 대상적인 것은 과거 만을 살고 있다” (Martin Buber의 ‘나와 너’ 중에서)

    제 생각에 NTW가 고전적 복음에 대해 반대하는 많은 부분이 바로 ‘과거가 되버린 복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의 자녀’의 반열에 오르고, 그리고는 그 자녀가 된 ‘과거의 사실’에 걸맞는 오늘을 살라고 하는 접근 말입니다. 마르틴 부버의 생각을 적용하자면, 복음이 대상화한 것이 아닐까요?

    NTW 등 New Perspective에서 강조하는 복음의 개인적인 측면도 상당합니다. 우리는 ‘죄’와 ‘죽음’의 노예가 되어 있는데 (그것에 이용당하는 ‘율법’의 노예까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런 노예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죽음’밖에 없는 거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죄’와 ‘죽음’에게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소위 ‘죽음에 죽음을 선포’하신 거고요. 이런 것이 죽음의 이중적인 차원이고요.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요구되었지만 그들이 이루지 못한 것들을, 예수님의 순종으로 이루셨고, 우리는 예수님과의 연합을 통한 ‘순종’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에 머물게 되는 것이고요.

    여기서 New Perspective와 Old Perspective의 공통점(개인 구원의 관점에서만)은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점입니다. 차이점은, 과연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소위 ‘칭의’의 상태가 주어졌는가하는 점이지요. Old Perspective는 ‘유대인들처럼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의에 도달하려는 노력을 그치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함으로’를 강조하는 반면, New Perspective는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율법의 요구를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구체적으로 살아내는 것’ 자체를 ‘칭의’로 보는 것이고요.

    Old Perspective의 경우,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칭의’를 과거의 사건으로 ‘대상화’하게 됩니다. 하지만, New Perspective는 ‘현재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율법의 요구를 ‘예수님의 순종하심’에 연합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냄’의 상태를 강조함으로 현재에 집중하게 하고요.

    그러다보니, New Perspective는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을 이야기하면서, 구약의 율법의 요구와 성취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겠고, 또 그러다보니 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셔야 했는가를 설명하려고 인간의 타락과 회복을 언급할 수 밖에 없었겠고요. (개인적인 측면에서 시작해서 접근해 보면 그렇습니다.) 이걸 소위 ‘메타 네러티브’라고 부르는 것 같고요.

    뭐… 밤을 새워가며 이야기해야 하는 내용을 이곳에서 다 할 수는 없겠지요. 단, 제 생각에 권간사님께서 언급하신 “성경이 ‘good old gospel’을 지지한다는 conviction을 약화시킬만한 결정적인 그 무엇”을 저는, ‘old gospel’이 구원과정을 ‘과거’로 규정하도록 하기 쉬우며 그래서 대상화하고 있다고 본다는 거지요.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의 생각을 도용하자면, 구원의 가치를 ‘공간’에 잡아두려고 노력한다고나 할까요?

    그리고… 조금 다른 이야기가 되겠지만…. 복음을 ‘거대담론’ 가운데서 이야기하고 사셨던 분들의 말년과 복음의 ‘개인적 측명’을 강조하시는 분들의 말년의 모습이 비교가 되면서… 어쩌면 그 이유가, ‘너’가 아닌 ‘대상’이 되어 버린 복음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계속 들어서… 저는 점점 더 ‘거대담론’ 쪽으로 기울어 갑니다.

    * 동일한 단어를 양쪽이 다르게 정의 내리고 있어서, 표현하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 Alister McGrath의 ‘하나님의 칭의론’은 읽어 보셨는지요?

    1. 저도 말씀하신 부분에 많이 동의하고 공감합니다.

      다만 약간 관점을 바꾸어서 보면서 제가 할 수 있는 몇가지 comment는요

      1.
      제가 이 글과 답글을 쓰면서는 New Perspective(NP)와 Old Perspective(OP)의 대결구도를 생각하고 쓴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NP를 포함하는… 공동체적 관점과 Grand Narrative를 강조하는 관점을 모두 총괄한 ‘어떤 흐름’을 생각하면서 쓴 것이지요.
      NP도 그렇고, pacifism도 그렇고, emerging church movement도 그렇고… 다 그렇게 loosely categorize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썼습니다. 물론 그것들 간에 현저한 차이와 함께 묶을 수 없는 내용이 내재하고 있습니다만…

      또한, 저는 NTW이 New Perspective(NP)의 derivative중 한 branch라고 생각합니다만 NTW=NP로 보지는 않습니다. NTW는 스스로도 자신을 NP로 규정되는 것을 약간 불편하게 여기는 것 같기도 하고요.

      2.
      과연 과거가 대상적인것이고 현재가 실재적인 것일까 하는 것에 약간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또한 오히려 good old gospel(GOG)을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에 과거를 대상화시킨 것이라는 반론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과거=대상화=옳지 못한 것 이라는 등식을 설정해놓고 그러므로 GOG는 제한적이고 NP가 필요하다는 것은 한편 설득력있고 저도 공감하는 바이지만, 그것에 제가 개인적으로 올인하기엔 totally convincing하지 않아 보입니다.

      3.
      학자로서의 NTW를 매우 존경합니다만, 적어도 제가 접한 NTW를 보면… 학자의 연구로 진리를 탐구한다기 보다는, 자신의 확실한 agenda를 세워놓고 그것을 지지하는 연구를 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참 많이 받습니다.
      어느 학자가 그런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마는… NTW를 스스로도 그 의도를 숨기지도 않고 있고요… 때로는 매우 과감하게 그 의도를 주장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NTW의 그러한 agenda와 의도가 물론 저는 매우 건강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가끔은 그 의도가 지나쳐서 무리한 시도를 하는 것 같이 보일때가 있습니다. (justification에 대한 입장이 그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제가 NTW를 the prime scheme으로 받아들이는데 주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4.
      저는 NTW가 이야기하는 많은 부분을 오늘날의 교회가 적극적으로 embrace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사람중 하나 입니다. ^^
      그러나 NTW의 주장을 성경이 지지하는 것 이상으로 GOG의 주장을 성경이 지지하는 것이 약하지 않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적어도 한쪽이 다른 한쪽을 밀어내고 왕좌를 차지하는 것이 적절하지는 않다고 본다고나 할까요.
      다만 GOG를 잘못 이해하는 것이 가지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그리고 일반적인 GOG이 이야기하는 것을 오해할경우 생기는 부작용을 없애기위한 컴플리멘터리한 입장으로서 NTW를 받아들이는 수준에서 어정쩡하게(?) 제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논문으로 보면 appendix나 acknowledgment 정도에 들어가는 수준이 아니라. conclusion의 bullet point 하나를 차지할 정도로 중요한 수준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5.
      현상적으로 보더라도요…
      어찌보면 지나치게 치우쳤다고 보여질수도 있는 형태의 GOG의 gospel에 의해서, NTW가 주장하고 바라는 모습이 이땅에 구현되는 모습들을 역사속에서 많이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NTW의 주장(혹은 그러한 입장)을 받아들여 GOG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펼친 예는 더 제한적이라고 생각하고요. (초대교회가 그런 것이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아직은 conclusive한 학문적 연구가 완성되었다고 보기 어렵지 않나 하는 조심스러운 생각을 저는 가지고 있습니다.)

      6.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는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핵심 가운데 하나가…
      인간이 하나님에대한 반응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선포와 계시와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인간 밖에서 해결책이 주어졌다는 것이지요.

      그런 차원에서 제가 1번에서 언급한… 공동체, 하나님 나라, grand narrative 등의 흐름등은 잘못 강조되었을 경우 extra nos라는 기독교만의 기본적인 특성을 약화시키거나 거부하는 이율배반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지 않는 하는 생각을 해보고 있습니다.

      아,
      물론 이런 제 생각이 결코 conclusive한 건 아닙니다.
      ‘미운 사람’과 하루밤 토론하고 나면 후딱 뒤집어 질 수 있을만큼 약한 ground에 서 있는 겁니다. ^^
      제 이 답글은 쓰신 comment에 반박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제 어정쩡한 입장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 하나님의 칭의론 안읽어봤어요. 읽으셨으면 내용좀 한번 summary해서 가르쳐 주심이… ^^

  3. 지금 당직 중이랑 윗글에 대한 답은 길게 못하겠고요 (밤을 샌 상태라 너무 졸려서리. 쩌비…)

    저는 매주 화종부 목사님 설교를 듣다보니, 거의 매주 GOG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화종부 목사님께서 J.I. Packer의 ‘십자가를 아는 지식’을 읽어보라고 하셔서 읽었는데, 동의가 되지 않는 부분이 제법있어서 저도 사뭇 당황했습니다.^^

    ‘십자가를 아는 지식’, ‘십자가와 구원’, ‘하나님의 칭의론’, ‘What St. Paul really said’ 등등 읽고 토론 좀 했으면 좋겠습니다. 혼자 읽고 정리하기엔 역부족이란 생각이 듭니다.
    토론하실 의향이 있으시면, 저는 이 책들 또 읽고 읽을 의향도 있습니다. 하실래요?ㅎㅎ

    * 참, 저같은 경우 NTW의 생각은 로마서 주석을 본격적으로 보면서 좀더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걸 보심이 어떠실지…

  4. 왜 KOSTA간사님들의 글들은 이렇게 어려워야 하나요? 무슨 말하는지 당췌 알아먹을수가 있어야지 원 -.-;;

    거의 못 알아들었지만 원글의 “복음이 사유화(privatization)된 것은 복음의 공동체성이 강조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볼수도 있지만, 복음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개인화(personalization)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에 한표 던져 봅니다.

    1. 글쎄말입니다.
      JK나 미운사람 같은 사람들의 페이스에 말리면 안되는데…
      함께 말을 나누다보니 말려서…

      전 원래 그렇게 글 어렵게 쓰는 사람은 아닙니다요. ㅋㅋ

  5. Post-KOSTA 독서토론을 신청하신 분들께 메일을 보내야 하는데…
    아예 십자가를 아는 지식’, ‘십자가와 구원’, ‘하나님의 칭의론’, ‘What St. Paul really said’ 로 해볼까요?

    1. 저는,
      쉬운책, 혹은 덜 controversal한 책으로,
      알찬 sharing을 하는 쪽에 지지를 보냅니다.

      십자가를 아는 지식이 어떨지요?
      (사실 저도 안읽어 봤습니다.)

      그리고,
      너무 어려운 말 쓰지 말기….
      현학적인 접근하지 말기…
      뭐 그런 rule들이 있어야 많은 이들에게 유익이 있을 것 같습니다.
      (어려운 말을 꼭 해야 할 경우엔 따로 그런 사람들만 뒤에서 소곤소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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