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적 희망 (15)

토니 캠폴로가 이런 이야기를 한적이 있다.

젊은이들이 기독교를 떠나는 것은 기독교가 너무 어렵기 때문이 아니다. 사람들이 기독교를 너무 쉬운것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너무 쉬운 도식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에 그곳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없게되어버린 것이다.

기독교에서 희망을 찾고, 삶을 투신해서 살았던 사람들을 생각해보라.
그 사람들에게 기독교는 쉬운것이 아니었다.
삶을 왜 저렇게 살아야만할까 하는 질문을 던지게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의미로 넘치는 삶을 살았다.
그 의미는 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희망을 그들에게 주었다.

대안적 희망 (14)

찰스 템플턴이라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빌리 그레이험과 함께 사역을 했던 사람이었다. 기독교계에서 매우 주목받는, 총망받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어느날 자신의 집에서 라이프 잡지에 나와있는 아프리카 기아의 처참한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이 사람들의 이 처참한 모습을 가만 두시는가…
결국 그는 기독교 신앙을 떠났다.

마더 테레사가 있다.
이 사람은 인도에서 극도로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면서 평생을 살았다.
그 어려운 삶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돌보면서 왜 찰스 템플턴의 질문이 없었겠나.
도대체 하나님은 왜 이 사람들을 이렇게 하시는 걸까.

그러나 마더 테레사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가 그 사람들을 볼때, 나는 그 사람들의 눈에서 그리스도를 본다…

한 사람은 자신의 편안한 집에서 잡지를 뒤적이다가 고통과 절망의 사진을 보고 신앙을 떠났고,
한 사람은 그 고통과 절망의 중심으로 자신을 던져서 살면서 그 고통속에 있는 사람들의 눈 속에 그리스도가 있다고 말했다.

어떤 모습이 우리에게 소망을 주는가?

대안적 희망 (13)

희망에 있어서 사랑이 제공해주는 또 하나 중요한 key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에 대해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 역시 현대교회에서 별로 듣지 못하는 이야기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사는 삶.

기독교인들의 이야기에서 늘 넘치도록 나오는 이야기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잘 맞추어 살아서 내가 잘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세상에…. 이게 무슨 기독교야…

우리가 사는 삶은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사는 삶인거다.

누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 새로운 삶의 의미와 다른 차원의 가치를 부여주기도 하지만,
내가 어떤 대상을 사랑한다는 것이 역시 새로운 삶의 의미와 가치, 희망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나는 기독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에대한 이야기를 다시 좀 해주면 좋겠다.

대안적 희망 (12)

삶의 의미, 삶의 희망은 추구해야할 가치, 목표등에 의해 주어지기도 하지만,
자주 그것은 관계로부터 주어지기도 한다.

내가 무엇을 더 이룰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느끼지만,
내가 어떤 가치가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나를 사랑하는 분을 위해서 그분이 기뻐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다.

나는 현대교회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그러니까 나를 잘 돌보아주신다는 정도로 이야기하는것이 참 답답하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결국 내 존재근거와 가치를 높여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때문에 이미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얻은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선물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를 이야기하는 교회에서, 결국은 이기적이고 속좁고 천박한 자기만족의 종교를 이야기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여전히 나를 기쁘게하는 한가지 요소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나를 기쁘게하는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나를 기쁘게하는 요소를 깡그리 쓸어버리는 것이될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예전에 나를 기쁘게했던 것이 더 이상 기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 사랑을 이해하면, 정말 그 사랑을 받아들이면,
나는 어떤 사람이 새로운 삶의 의미와 희망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다른건 모르겠고… 그 엄청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잖아.
그 사랑이 나를 휘덮어버리고 있잖아.
그럼 됐지 뭐. 그럼 내가 살만한 이유가 되는 거지 뭐.

대안적 희망 (11)

내가하는 작은 일이 어떻게 하나님나라와 연관이 되느냐…

이건 정말 나도 매우 힘들게 다루었던 것 가운데 하나이다.
대학교 3학년때 복음에 정말 눈을 뜨고나서, 내 온 세상이 뒤집어 졌는데…
도대체 내가 하는 공부가 그 안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지 해결이 안되는 거다. 그게 90년이었는데,
결국 내가하는 공부의 의미를 어느정도 파악하고 나름대로 안정을 찾은 것은 내가 미국에 와서 박사과정을 하는 중간이었으니… 햇수로 7~8년 정도 걸렸다.

뭐 여러가지 이야기해야할 것들이 있겠지만,
그냥 딱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이거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 나라에 정말 큰 가치가 있다는 것이 다 눈으로 보이지 않더라도,
선하신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참 아름답고 좋은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내게 모든 것을 다 설명해주실 의무가 있는 분은 아니다.

참 다행스러운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뜻을 우리가 알기를 정말 원하시고 아주 여러경로로 설명해주시지만, 제한된 우리가 그 뜻을 한번에 다 이해할 수 있지 못하다.

그러니 그분의 선한 뜻을 조금씩 더 알게되는 과정을 겪어나가면서 가져야하는 중요한 자세는,
그 하나님을 신뢰하고 일상에서의 성실함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나 개인적으로는,
소위 ‘비전’이라던지, ‘하나님의 크신 뜻’이라던지 뭐 그런 것들보다…
‘하루 하루의 하나님 앞에서의 성실함’이 일차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꽤 획기적인 것이었다.

뭔가를 이루기위해 노력하기보다 성실하기위해 노력하는 것.
내가 그 모든 그림을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일단은 주어진 상황속에서 성실함을 유지하는 것,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더 큰 그분의 뜻을 더 알고자 노력하는 것을 그치지 않는것.

내게 있어 삶의 의미를 가져다준것은, 그런 의미에서 대안적 희망을 제공해준 것은…
큰 그림이 아니라 일상에서의 성실함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일상에서의 성실함을 더 이루어나가기 위해 나 자신과 많이 싸우고 말씀에 나를 복종시키는 노력을 많이 했던것이 내게 큰 의미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게 하나의 대안적 희망으로 작동했다.

대안적 희망 (10)

내가 하는 일이 이렇게 하찮은 것 같은데,
뭔가 의미있는 것 같지 않은데 이게 그래도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고?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세상을 통치하는 행위라고?

이걸 받아들이는데 또 다른 장애는,
노동소외의 문제다.

현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
개인이 일하는 것이 지나치게 큰 시스템의 부품과 같은 모습으로 되어있고,
자신의 앞길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결정에 참여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하는 일이 도대체 큰 그림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없고,
그래서 자신의 역할의 의미를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건 큰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로부터 아주 자주 듣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내가 이 회사에서 이렇게 일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그런 사람에게 네가 하는 일을 그럼에도 의미가 있다..고 이야기하는게 참 잘 먹히질 않는거다.

이 고민은 나도 역시 20대부터 계속해왔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80년대 후반, 90년대 후반에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걸 공부하면서 노동의 가치에대한 이야기를 들었을때 처음 듣고는 하..참 좋다… 이렇게 반응했지만,
곧이어… 아니, 그런데 지금 당장 내가 있는 이 현실에서 그게 잘 안보이는데 어쩌라는거지? 라는 답답함에 맞닥들일수 밖에 없었다.

20는 학생으로 보냈으니… 당연히 내게는 이 공부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는게 큰 문제였다.

회심의 경험을 하고 마음이 뜨거워졌지만, 그것에 걸맞을만큼 내가 하고 있는 공부가 그렇게 의미있다는 생각을는 것이 참 쉽지 않았다.

대안적 희망 (9)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그 놀라움을 어떻게 이야기해야할까.

우리가 사실은 하나님 안에서 그렇게 가치있는 사람이라는걸,
싸구려 자기중심적 아이디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중심이 되시기 때문에 인간이 마침내 가치있게 된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걸까.

나는 여기서 한가지 좀 볼멘소리를 해보고 싶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
정말 회심을 경험한 사람들이라면,
비록 그 신학이 완벽하게 잘 서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 회심이라는 경험이 너무나도 엄청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그 사람의 삶 전체를 송두리채 흔들어버리게 된다.

이것은 회심이 어느 한순간에 충격적인 사건이어야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회심의 경험이 그 사람의 ‘구원’여부를 확증짓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유한한 사람이 무한한 신을 만나는 경험,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라는 분에게서 드러났다는 사실,
그분이 스스로를 희생하면서까지 사랑을 보여주셨다는 것,
그리고 그분이 악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는 것…
이것이 어떻게 도대체 가볍게 여겨질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게 정말 그렇게 엄청난거라면,
평생을 이 이야기만 하고, 하고, 또 해도 지치지 않을만한 이야기가 아닌가.

이토록 정말 그렇게 엄청난 일이 일어났음을 믿는다면,
시시때때로 그 사랑과 은혜의 스케일에 압도되어 감정을 추스릴수 없을만하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나라가 가져다주는 새로운 의미를 갖게되는,
그래서 새로운 소망을 갖게되는 일은,
궁극적으로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 가져다주시는 어떤 ‘경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냥 어떤 진리를 알고 있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그 진리가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May the Truth be Real.

대안적 희망 (8)

더 큰 내러티브에 삶을 투신해야 의미가 생긴다는 이야기는 자칫 신앙을 소영웅주의로 몰아갈 수 있다.

뭔가 대단한 것을 해야 신앙이 의미가 있다는 것.

그래서 해야하는 중요한 포인트는,
그 부르심의 대상, 부르심의 목표가 부르심의 형식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통해서 온 피조세계를 다스리는 것이 우리의 부르심의 핵심이고,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는 삶은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소하고 지루한 일상을 포함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소한 일들, 집안 청소를 하거나, 아이 기지귀를 갈거나, 다른 사람 심부름을 하는 것등도 모두 하나님의 통치행위를 하는 중요한 일들이 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복음이 주는 매우 독특한 삶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삶이 대단할 필요가 없다. 그 삶이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기만 하다면,
심지어는 그 사람이 스스로 대단한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삶은 대단히 소중하고 가치있는 것이다.

이것은 때로,
금방 쉽게 직관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다.
여전히 내 삶은 지루하고, 여전히 내 삶은 별볼일 없다고 느껴질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새로운 삶의 의미와 이유가 대안적 희망의 매우 중요한 key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게 그렇게 쉽지않다.
이게 실제로 희망으로 여기며 사는것에는 여전히 많은 어려움이 있다……

대안적 희망 (7)

요즘 젊은이들의 최대 희망이 ‘정규직’이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참 마음이 아프다.

한때는 젊은이들이라면 달라진 세상을 꿈꾸고, 더 큰 가치에 자신을 던져보겠다고 이야기하는 기상이 있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을 바꾸어내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젊은이의 기상이라는게 이젠 그냥 철 지난 구호처럼 들려버리는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무조건 윽박을 지르면서 너희들 더 힘을 내야지~ 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에게 꼭 해줘야하는 한가지 이야기가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네 삶을, 너만을 위해 살지 말라는 것이다.

결국 삶의 의미를 자신 내부로부터 찾아내려는 포스트모던적 시도는 삶의 기준을 자신에게 두도록 요청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삶의 의미와 동기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내 삶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대안적 희망을 이야기할때 매우 핵심적이고 중요한 이야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의미에서, Lordship에 대한 이야기가 잘 강조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님께서는 나의 ‘주님’이 되신다. 그것은 그분이 내게 어떻게 살라고 명령하실 수 있음을 의미한다. 내가 주님에게 명령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내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다가 지쳐버린 이들에게, 그 의미가 외부로부터 주어진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기에 생경하게 느낄수 있겠지만…
결국 그렇게 해야 이들이 다시 삶의 의미와 희망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요즘은 ‘나의 선호(preference)’ 가 내게는 진리(truth)가 되어버리는 세상이다.
나는 어떤 음식을 좋아해. 그러니까 나는 그 음식을 먹어야해.
나는 어떤 종류의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아. 그러니까 나는 내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야해.

자신의 입에 맞는 음식을 찾는것이나, 자신이 더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찾는 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삶의 목표가 되어버릴때 그 사람은 삶의 목표를 잃어버리게 된다.
자신의 선호를 Lordship(예수님의 주되심)앞에 굴복시키는 어려운 결정을 할때야 비로소 삶의 의미를 찾게될 수 있다는 것이다.

Lordship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렵게 느껴진다.
복음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차라리 이게 전혀 생소한 개념이기 때문에 나을수도 있다.
교회 안에서 오랫동안 자기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해온 사람들에게, 그것으로부터 깨어나와야 네가 정말 자유로와질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훨씬 훨씬 훨씬 훨씬 더 어렵다.

10년, 20년, 심지어는 50년이상 그렇게 자기중심적 신앙으로 살아온 사람에게,
당신의 신앙이 심각하게 병들었다는 이야기가 잘 먹히겠는가.

대안적 희망 (6)

첫째 살아가는 의미에 대한 새로운 발견.

1930년, 시골에서 평범하게 농사를 짓던 청년이 독립투사를 만날 기회를 갖게 되었다.
하룻밤을 지내면서 독립투사가 해주는 역사 이야기, 독립에 대한 소망의 이야기,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냥 평범하게 농사를 짓던 이 청년은 그 독립투사의 이야기를 듣고서 마음에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결국 이 청년은 망설이던 끝에 자신도 조국 해방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이 시골 청년이 새로운 인생의 의미를 갖게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건, 자신이 살고 있는 내러티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더 큰 내러티브가 있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게 새로운 의미를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복음이 제공해주는 것이 이런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냥 삶에 커다른 의미 없이, 그냥 살아가고 있었는데,
복음을 알고 나니 자신이 사는 것이 하나님나라 라는 커다란 내러티브의 일부라는 것을 알게되는 것이다.

이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이야기하는,
“네 마음의 목소리를 찾아라. 네 꿈을 이루어라” 와는 꽤 다른 삶의 방식이다.

오히려 복음을 통해서 파편화되어 있는 삶의 의미를 통합해내는 것이 된다.

내가 만나는 제한된 그룹의 사람들을 보면,
일종의 영적 우울증에 빠져있는 것 같아 보일때가 있다.

우울증은, 감정이 우울한 것이 아니라, motivation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신앙의 motivation 자체를 잃어버린채 살고 있는 것 같아 보이는때가 정말 많다.
그것을 다루기위해 상담도 하고, 공감도 하고, 함께 울어도 주고…
나는 이런것들이 모두 가치있고 때로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더 궁극적으로는 혹은 더 기본적으로는 이런 사람들에게 복음이 이들의 삶을 던질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더 해줄 필요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정말 복음의 내러티브를 알고 나면 그런의미에서 새로운 motivation이 생기게되고,
무기력감으로부터 벗어나서, 전에 없었던 활기를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Tony Camplo가 이런 이야기를 한적이 있다.

젊은이들이 기독교를 떠나는 것은 기독교가 너무 어려워서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기독교를 너무 쉬운 것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나는 정말 동의한다.
이것은 기독교의 교리를 더 복잡하고 어렵게 설명해야한다는 의미가 당연히 아니다.
기독교를 가볍게 여기고 그저 자신의 가벼운 life style 선택정도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삶 전체를 집어삼키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때로…
그 안에서 안정을 찾고 그 내면의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삶 전체를 던져야만하는 더 큰 헌신의 대상을 이야기해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