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kindle (5)

성령께 순종하는 것도 역시 내겐 매우 중요한 ‘불’의 요소 가운데 하나였다.

계속해서 내게 말씀하시는 성령을 인정하고,
그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면서 살아가려고 많이 애썼고,
그것이 참 많이 좋았다.

그 과정은 꽤 자주 ‘싸움’이었다.
내 안에 있는 나의 음성과, 역시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의 음성 사이에서 고뇌하며,
조금씩 더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여 나를 복종시키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그런데…
이건… 벌써 꽤 오래전부터 내게서 거의 사라져버린 ‘불’인것 같다.

내 안에서 들려오는 잘못된 목소리로 성령의 음성을 눌러버리는 일들이 정말 너무나도 많다.
그것 때문에 가시가 돋친 말을 쏟아내기도 하고, 불합리하게 화를 내기도 하고, 지나치게 초조해하거나 불안해하기도 한다.

성령의 음성에 순종해가며 그분께서 나를 잘 다드리도록 내어놓 모습,
그리고 내 안의 거짓된 음성과 싸우며 내 뜻을 꺾어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은 정말 내가 꽤 오랫동안 잃어버린, 다시 붙여야할 ‘불’이 아닌가 싶다.

Rekindle (4)

내게 있어 처음 다가왔던 그 불은,
내가 control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그게 눈이 열린거다. 어떻게 열렸는지 설명하기도 어렵고, 그걸 내가 막 만들어 내려고 해서 되는 것 같지도 않고.
그냥 눈이 열려 예전에 잘 보이지 못하던 것이 보이게 된 것이었다.

그런의미에서 내게 있던 ‘불’의 아주 중요한 핵심은 성령의 조명 (성령께서 깨닫게 하심)이었다.

그게 내 성격이나 성향 때문이었을까.
내게 그 깨닫는 가장 중요한 대상은 성경이었다.
성경 말씀이 막 이해가 되는거다.

아, 물론 그때 이해했다고 생각했던 성경은 그후로 여태껏 나름 꽤 열심히 공부하며 살아왔는데, 아직도 계속 더 깨닫고 있는 중이긴 하다.

다만, 그 ‘불’의 핵심이 성경공부는 아니었다.
성령의 깨닫게 하심이었다.

그런데 어쩌면 지금은 그 중심이 성령의 깨닫게 하심보다는 성경공부쪽으로 옮겨간 것이 아닌가 싶다.

아마 내가 다시 불을 붙여야 하는 (rekindle)이유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싶다.

Rekindle (3)

그런데 지금 나는 어떻게 살고 있나?

내게있어 기독교 신앙이 내게 주는 기쁨은,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서 새로운 삶의 의미를 갖게되는 것과는 다소 좀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때로는 더 깊은 성경 공부를 통한 지적 만족,
더 효율적인 사역을 통해서 열매가 맺히는 것,
신앙의 가치를 삶에 적용해서 어떤 깨달음을 얻거나 경험을 축적하는 것 등에 더 무게중심이 옮겨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그런 것들이 나쁜것들은 아니다.
모두 다 좋은 것들이고, 내 신앙이 더 깊어지고 성숙해지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그것이 내가 가져왔던 ‘불’은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님과 하나가 되고, 예수님과 동행하기 때문에 새롭게 나와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그 불은 아니라는 것.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과 하나가 되고 동행하는 것이 과거에는 신앙의 핵심이자 목표였다면,
이제는 그것이 너무 자주 신앙의 도구로서만 작동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렇다면…
그 ‘불’을 다시 켜는 것, rekindle이 내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Rekindle (2)

만일 내게 필요한 것이 re-kindle이라면, 내게 원래 불이 있었던가?

음…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여러가지 이유로 많이 잃어버린 것 같다.

그래서 생각해 보았다.
내게 있던 그 불은 무엇이었나?

더 깊은 신학적 지식, 더 효과적인 사역을 하게 되는 것, 내 삶을 더 잘 manage해서 살게되는 것 같은 것들이 물론 중요했지만,
그것이 내가 가지고 있었던 불의 핵심은 아니었다.

나는 대학3학년때쯤 마음속에 깊은 공허가 있었다.
글쎄… 그 공허가 무엇이었는지 참 뭐라 다 표현하기 어려운 그런 공허였다.
그 후에 그 공허를 나름대로 잘 설명해보려는 시도를 내 나름대로는 해 보았는데, 충분히 다 설명할 수 없는 것 같다.

그런데,
대학3~4학년을 거치며 나는 일종의 ‘회심체험’같은 것을 하게 되었다.
갑자기 잘 읽혀지지 않던 성경이 이해가 되고, 그것때문에 많이 흥분하고 감동하게 되었다.
혼자서 눈물을 흘리는 일들이 많아졌는데 아주 많은 경우 회개의 눈물이라기 보다는 감격과 기쁨의 눈물이었다.

그 속에서 나는 나와 세상이 아름답게 되는 꿈을 꿀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결국 그것이 내게 ‘불’이었던 것 같다.

엄밀하게 말하면 죽어서 이제는 천국갈 수 있다는 안도감 그런것이라기 보다는,
내가 예수님을 받아들여서 이제는 내가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다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내게서 공허함이 사라졌다.
의미가 생겼다.
생각해보면 그것이 내겐 ‘불’이었다.

권력과 불화하는 기독교 (11)

이건 미국도 마찬가지다.
나는 심지어는 미국사회에서도, 여전히 여성이 약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인종차별이 존재하고, 유색인종들이 약자이기도 하다.
또 성소수자라던가, 이민자등은 여전히 약자이고,
특히 지난 수십년계속된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서 폭력적으로 진행된 빈익빈부익부 속에서 경제적 약자들이 많이 생겨났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니 미국 사회도 역시 어떤 의미에서 ‘권력’이 정말 교체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사상’, ‘철학’, ‘아카데미아’등의 세계에서는 그 권력의 역전현상이 일어났다고 본다.

미국에서 liberal democracy라는 이름으로 함께 언급되는 많은 가치들…
그 가치들의 대부분에 내가 동의하면서도…
한편 사상, 철학, 학문등의 분야에서 이미 일어난 권력역전현상을 생각해 보았을때,
그 가치를 주장하는 어떤 그룹의 사람들과 기독교가 동일화되는 것은 또한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어쩌면 조금 더 나아가서 만일 사상, 철학, 학문등의 분야에서 이미 권력 역전현상이 나타났다면, 이제는 그 분야에서 주도적 사상체계가 되어버린 그것들과 진지하게 불화를 모색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고민을 해보게 된다.

어쩌면 나는 이것이 Stanley Hauerwas가 그렇게도 liberal democracy를 까대는 이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Stanley Hauerwas에 따르면 이 liberal democracy는 invitation for not-thinking 이란다. liberal demoracy라는 가치만 일단 들이대면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론도 하지 못하고 다 근야 받아들인다는 거다.

기독교가 과연 어떻게 권력과 불화해나가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해…
조금 더 생각을 하게 하는 포인트다.

(글이 길어지고 지루해져서 이쯤에서 줄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ㅎㅎ)

권력과 불화하는 기독교 (9)

나는 이런 생각이,
정치적으로 대단히 양극화(polarized)되어 있는 한국과 미국같은 사회에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제발…
교회가 어떤 정치집단을 지지하는 일은 좀 하지 않았으면 한다.
목사가 강단에서 어떤 정치집단이나 정치가를 지지하는 발언등을 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것은 교회가 비정치적이되어야한다는 말과는 다르다.
교회는 여전히 정치적일 수 있다.
정치적으로 중요한 agenda에 대해 기독교와 교회가 분명히 그 가치와 신념을 바탕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그 가치와, 그 가치를 추구 하는 정치집단을 동일시 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특히 더 힘들 수 있다.
가령, 625전쟁을 겪은 사람들에게 그 북한과 전략적으로 평화적공존을 추구한다는 것은 대단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이민자들에게 배타적인 입장을 견지해온 어떤 정치집단에 대해 그 배타적 입장으로인해 피해를 입은 이민자 집단이 미국에서 그 정치집단을 지지하기란 쉽지 않다.
혹은 대학때 독재정권과 싸웠던 자신, 혹은 자신의 동기들을 실제로 보았던 세대는, 그 독재의 잔재를 아직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정치집단을 받아들이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다고 해서…
어떤 정치집단과 기독교적 정체성을 동일시 하는 잘못을 범하지는 말아야 한다.

어떤 정치집단을 배격하고 반대하는 것은 차라리 괜찮다.
그러나 어떤 정치집단을 지지하는 것은, 적어도 기독교인들에게는, 더 특별한 주의가 요구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권력과 불화하는 기독교 (7)

기독교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동등한 존엄을 가진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가치제계이고,
그렇기 때문에 어떤 형태의 억압과 폭력등에도 저항할 수 있는 내재적인 힘이 있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대로 기독교가 그렇게 저항해야하는 대상, 불화해야하는 대상과 불화했을때 기독교는 기독교만의 힘을 가져왔다.

가령,
어떤 사회에서 어떤 특정 지역출신이 부당하게 차별을 받고 있다고 하자.
그러면 기독교는 그 부당하게 차별받는 약자의 편에 서서 그 사람들에 대한 차별이 부당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데 몇세대가 지나면서 그 부당하게 차별받던 사람들이 정치적 세력을 규합하고 내부적으로 더 단결해서 권력(정치권력, 경제권력, 혹은 문화권력 등)을 쟁취해냈다고 하자.
그러면 기독교는 그 사람들이 가지는 그 권력이 다른 약자를 억압하는 것에대해 다시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어떤 특정 그룹과 연계되는 종교라기보다는,
끊임없이 권력과 불화하는 종교라는 말이다.
그 권력이 설사 바로 얼마전까지 기독교가 보호하고자 했던 약자그룹이었더라도 말이다.

그것은 어떤 사람들의 그룹도 절대 선이 될 수 없고,
하나님만이 절대 선이 되신다는 생각과 연결된다.

권력과 불화하는 기독교 (6)

나 같은 비전문가가 내가 어떤 신학자를 좋아한다는둥… 그런 얘기를 하는게 좀 건방지게 들릴 수도 있지만… 나는 Stanley Hauerwas를 좋아한다.

이분은 때로 전달하고자하는 어떤 내용을 아주 강렬하면서도 명확한 표현으로 이야기를 하시곤 하는데,
매우 자주 이분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liberal democracy)를 아주 신랄한 톤으로 비판하시곤 한다.

아니, 민주주의를 비판한다고?
이게 다소 충격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데…

이분은 자기 주변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추종하는 친구들을 당황스럽게 하기 위해서 자주,
“나는 신정주의자(theocrat)이다”
라고 이야기를 하신다고 한다.

신정주의(theocracy)라면 신의 뜻에 따라 통치한다는 명목하에 말도안되는 일들을 자행하는 매우 미개한 체제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데, 그리고 많은 경우 그 사람들의 생각이 맞지만,
Stanley Hauerwas는 자신이 신정주의를 지지하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면 주변의 사람들이 깜짝 놀라면서 긴장한다고… ㅎㅎ

그렇게 의도적으로 충격적인 표현을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어떤 심오한 내용을 전달하는 것은,
Stanley Hauerwas나 되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겠지만…
나도 그분이 이야기한방식 대로라면 역시 신정주의자이다.

권력과 불화하는 기독교 (5)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 같이,
기독교가 세상의 어떤 가치들을 선호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매우 자주,
하나님이외에 다른 신을 우리에게 두지 않는 우상의 거부의 행동일 수 있다.

그렇게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기독교는 그 시대의 권력을 잡고있는 어떤 가치나 사조, 체제나 경향들과 싸우게 되기 쉽다.
그것들이 그 시대의 우상이 되어 버렸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그러니,
권력과 불화하는 기독교,
우상을 거부하는 기독교,
기독교 다운 기독교의 생명력을 계속 유지하는 것에는….

어항 속의 물고기가 그 어항의 물을 거부하는 것 같은 모습을 나타낼수도 있다.

때로 무엇과 싸워야하는가 하는 것을 분별해내는 것도 매우 어렵고,
설사 그 싸워야 하는 대상을 분별해 내었다 하더라도 그 대상과 어떻게 맞서는게 가능해? 하는 생각이 들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독교는 어쩌면 십계명의 제 1계명조차도 무시하는 엉터리 기독교가 되어버려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데 있어 중요한 장애요인은…
게으름이다.

지금 이 정도면 됐지… 내가 배워왔던 기독교면 충분하지…
이렇게 생각하면서 죽어있는 종교에 머무르게 되는 것이다.

아… 얼마나 많이 보는 기독교의 모습인지…

(다음주에 계속됩니다.)

권력과 불화하는 기독교 (4)

기독교가 계속해서 거부할만한 것들은 분명히 있다.
폭력, 미움, 죄, 음란함, 탐욕 등등은 상황이 어떠하든지 간에 기독교가 거부하는 것들이아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심지어는 이런것들까지도,
어떤 특정 상황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가령,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수영복을 입고 수영을 하는 것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든 여자든 18세기 조선에서 지금과 같은 수영복을 입고 수영을 하겠다고 한다면 그건 사회적인 큰 물의를 일으키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 사회 기준등을 적용해 보았을때 피해야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할만한 것이다.

이게…
수영복과 같이 비교적 쉬운예도 있을 수 있겠지만,
사실 더 많은 것들은 이렇게 단순하지 않다.

가령,
기독교는 정치적으로 우파를 지지해야 하는가?

20세기 중반의 상황에서,
공산주의의 폭력이 사람들을 억업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그 공산주의의 폭력에 대항하기 위한 여러가지 정치적 선택 중에서 우파를 지지하는 것이 있을 수도 있겠다.

그것은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우상으로 삼아 그것을 위해서는 어떤 희생을 감수해도 괜찮다는 폭력에 대항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 상황에서 싸워야하는 우상이, 공산주의의 어그러진 이상주의와 그로인해 비롯된 폭력이라면, 제한적으로 정치적 우파를 지지할수도 있다.

그렇다면…
지금 21세기에는 어떤까?
지금도 공산주의가 현대세계가 싸우고 있는 주된 우상인가?

그런 완전 시대착오적 생각이다.
지금 현대 세계가 싸워야하는 우상은 오히려 이념대결에서 승리를 거둔 자본주의체제 안에 있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
현대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탐욕, 쾌락추구, 그 속에서 나타나는 약자에 대한 폭력성 등등이 싸워야하는 더 큰 우상이 될 수 있다.

그러니 맹목적으로 정치적 우파가 기독교 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고도 잘못된 일이다.

이처럼,
어떠한 우상도 타파하는 기독교가 그 기독교적 생명력을 가지고 싸워야 하는 대상은 고정적이지 않을 수 있다.

어떤시대에는 공산주의의 폭력이었다가 시대가 지나면서 그것이 자본주의의 폭력으로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