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돈과 시간이 있다면

만일 내가 지금보다 조금 더 돈과 시간의 여유가 있다면 하고 싶은 일은….
개를 키우는 거다. ^^

그것도 비글같이 완전 장난꾸러기 강아지를 아주 어린 놈을 입양해서 간난아기때부터 훈련시키면서 키워보고 싶다.

그래서 한번 생각 해보았다.
어느정도의 돈과 어느정도의 시간이 있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아마 처음 어린 강아지를 데리고 오면,
처음 몇주~몇달 정도는 집에서 강아지 배변 훈련도 시켜야 하고, 중간중간 산책도 시켜가며 밖에서 볼일을 보도록 해야 할 거다. 아마 처음 1달 정도는 집에서 많이 일하고, 하루에 3~4시간 정도는 써야 하지 않을까. 처음에는 밤에 깨서 잠도 잘 안자고 그럴테니 처음에는 시간이 더 들수도 있겠고.

그리고나서 어느정도 훈련이 되고 자리를 잡더라도, 그 후에도 산책도 시켜야하고, 가끔 한번씩 수의사에게도 데리고 가야한다. 대충 하루에 2시간정도씩 드는 일이 아닐까.

얼마나 돈이 드는지를 알아보기위해서 google search를 해 보았다. 그랬더니 일년에 750~1750불 정도가 든다고. 일년에 1200불, 한달에 100불 든다고 치자.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우리집 같은 환경은 누가 집에 있지 않는 한 강아지를 키우기가 쉽지 않다는 거다. 집에 마당이 좀 넓게 있고, 강아지가 드나들 수 있는 doggy door같은 것이 마련되어 있으면 훈련을 시켜서 급할때 나갔다 오도록 훈련을 시켜볼 수 있는데, 우리는 그런게 없으니.
ideal하게 강아지를 좀 잘 키울 수 있는 환경이라면 마당이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야… 쿨럭.

뭐 그렇게 이사를 가는 것 까지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루에 2시간, 한달에 100~150불 정도면 강아지를 키울 수 있다는 건데…
한달에 100불은 뭐 어떻게 하면 해볼 수 있을 테지만 하루에 2시간은… 쉽지 않다. ㅠㅠ

돈이 더 많아서 마당이 좀 넓게 되어있는 집이라면 키우는데 전반적으로 여유가 더 있을 것 같고.
(키울 수 있는 종류도 그것에 따라 더 다양한 option이 있겠고)

게다가 나 같이 out of town을 많이 하는 사람은 더더군다나 키우기가 만만치 않다.
괜히 내 아내만 더 고생하게 될거고.

예전에 뭣 모르고 개를 입양해서 키웠고,
그때는 뭐 이렇게 저렇게 개를 결국 키웠었는데…
웬지 점점 엄두가 나질 않는다.

그래도 한번쯤은 다시 키워보고 싶다… 돈과 시간이 조금 더 있다면

꿈과 현실

이건 살짝 좀 부끄러운(?) 비밀인데,
나는 꽤 클때까지 꿈과 현실을 구분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내 생각엔 대충 국민학교 3학년때쯤 되어서야 꿈과 현실을 어느정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어릴때 어떤 사람을 막 때리고 괴롭히는 꿈을 꿔 놓고, 그 후로 한 1년 넘게 그 사람에게 계속 미인해했던 기억이 있다.
그게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그런 꿈을 꾸웠다는 것이 미안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그렇게 괴롭힌 것이 미안한 것이었다.

이제는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나이는 지난지 오래다.
그렇지만 가끔은 현실 속에 꿈이 좀 들어왔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다.

꿈이 아니고는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아름다운 삶의 모습,
많이 지치고 힘들었을때 꿈 속에서 이루어지는 멋진 안식과 위로,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고, 아픈 사람이 건강하게 되고, 궁핍이 사라지고, 고통이 그치고…

국민학교 2~3학년때 나는 내가 꿈과 현실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이 힘들게 느껴졌었다.
나는 왜 그때 일어났던 그 일이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를 구분해내지 못하는 걸까….
그래서 현실을 살 때 혼란스러울 때가 가끔 있었다.
지금 내가 경험하고 있는 것은 꿈일까 현실일까… 하는 것을 가끔 한번씩 확인하는 습관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가끔,
내 현실과 꿈의 바운더리가 좀 희미해지는 일들이 한번쯤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때가 있다.
나이가 들고 철이 들면서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것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게 되고, 아름다운 바람들이 그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갖혀버린 상황에서…
다시 그 바운더리가 좀 희미해진다면 이 삭막한 나도 다시 꿈을 꾸게 될 수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하나님 나라’는 그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 같기도 하다.

Google이 직원복지를 줄인다?

최근 Google의 직원복지 (employee benefit)을 줄인다는 기사들이 많이 떴다.
정말 그런가.

나는 Google 직원은 아니지만 Google의 모회사인 Alphabet의 직원이고,
한주에 이틀정도는 Google office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이것에 대해 어느정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보통 내 office에 한주에 이틀정도 나간다.
그런데 가보면 전체의 30% 가 안되는 사람들이 나와 있다.
여전히 많은 다수는 집에서 일하는 것이다.
하기야 나도 한주 5일 중에서 이틀 정도만 내 책상에 가니까.

게다가 rush hour traffic을 피해서 가기 위해 나만해도 아침 처음 일은 집이나 집에서 조금 더 가까운 회사에서 일을 하고, 그리고 나서 차가 막히지 않을때 내 office에 가곤 한다.
오후에도 가능하면 일찍 일을 마무리하고, 차가 막히기 전에 출발해서 나머지 일들은 집에서 끝낸다.
그러니 내가 회사 내 자리에 있는 시간을 매우 짧다.

게다가 내가 한주에 이틀정도는 집에서 가까운 google office에서 일을 하는데,
사실상 거의 텅 비다 시피한 건물을 찾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상당히 많은 건물들은 전체 자리의 10%도 차지 않는 일이 많이 있다.

내가 보기엔 여전히 사람들이 완전히 RTO (Return-to-Office)를 하지 않은 것 같아 보인다.
그리고 아예 뽑을때부터 이제는 full remote를 조건으로 뽑힌 사람들도 꽤 있고.

그러니….
회사에 여러가지 음식을 줄이고, 일부 cafe를 닫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놓은 보물과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면, 제자리에 숨겨두고, 기뻐하며 집에 돌아가서는, 가진 것을 다 팔아서 산다.

또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과 같다. 그가 값 진주 하나를 발견하면,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산다.

….

하나님 나라가 radical하다는 것은,
그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는 것이 그 사람에게 많은 희생을 요구한다는 말인 경우도 있지만,
더 중요하게는, 그 나라의 삶을 사는 것이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살만큼 좋은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 나라가 radical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살아가기 주저한다면,
그건 믿음이 부족한 것이 라기 보다는….
하나님 나라를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너그러움, 원칙, 인성

대학교에 다닐때, 교회에서 존경받는 한 교수님이 계셨다.
평신도이지만 웬만한 목사님들보다 설교도 잘 하시고, 성경공부를 인도하는데 아주 탁월하셨다.

그런데 그분의 학교에서의 평판이 그렇게 좋지많은 않았다.

뭐 부정직하다거나 그런건 아니었는데…
지나치게 원칙적이다보니 학생들 입장에서는 비인간적인 인성 별로 좋지 않은 교수님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음….
나는 그 교수님이 잘 이해가 되었다.
그분은 정말 자기 자신에게도 그렇게 철저한 분이셨고, 그래서 원칙을 잘 지키며 타협하지 않는 그분의 모습은 존경할 모습이었다.
그리고 사실 그분과 개인적으로 대화를 해보면 그분은 기꺼이 자기 시간을 내어서 대화를 해주셨고, 좋은 조언도 주셨다.

나는 그분과는 다른 학과에 있었기 때문에 그럴 일이 없었지만,
만일 내가 그 학과 학생이었다면 그분을 지도교수로 선택했을까?
글쎄… 잘 모르겠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자비롭고, 어떻게 너그럽고, 어떻게 원칙을 지켜야하는가 하는 것이 하나의 해답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지만…
어쨌든 단 하나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나는,
내 삶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선택과 결정을 해야하는 것 같기는 하다.

나이가 50대 중반이니,
나도 지난 시간 살아온 삶의 이력 때문에 내게 누적된 어떤 인성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떻게든 내게 누적된 경험으로 인해 형성된 그 인성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해서 더 많이 고민해가며 자라는 일들은 멈추지 않으면 좋겠다.
아직 갈길이 멀다.

겉도는 옳은 말

‘옳은 말’이긴 한데, 그 옳은 말이 context에도 맞지 않는 그냥 텅 빈것과 같은 것인 경우가 있다.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 하는 이야기가 딱 틀린 이야기는 아닌데, 그냥 그 옳은 이야기가 뭔가 계속 겉도는 그런 사람도 있다.

겉도는 옳은 말…

내가 고등학교때,
나와 내 룸메이트는 ‘양자역학’이라는 것을 처음 접하면서 완전히 흥분했었다.
그 당시로는 Shroedinger equation같은 것을 풀수 있는 수준이 되지 않았고, 양자역학에서 많이 쓰는 operator같은 것들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 되지 않았으므로, 그저 우리가 아는건 양자역학에 따르면 이렇다더라… 하는 정성적인 설명 뿐이었다.

그럼에도 고등학생으로서 그 양자역학은 정말 흥미로웠다.
완전 신세계였다.

그리고는 우리는 쉬는시간에도 양자역학에 대한 이야기를 부지런히 떠들면서 재미있게 시간을 보냈다.우리가 그때 했던 양자역학에 대한 대화들은 대부분 ‘옳은 것’들이었다.
어떤 입자의 존재가 확률에 근거한다는 것이라든지, tunneling, quantum jump, quantum entanglement… 뭐 이런 이야기들에 대한 ‘옳은 지식’을 나름대로 서로 나누면서 즐거워 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양자역학을 알고 있었다고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미분 방적식을 배우고, 그것으로 복잡한 system에서 wave function을 구해보고 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 양자역학의 개념을 응용도 해보고, 실제 현상을 설명해보기도 하는 과정을 통해서… 결국 조금씩 양자역학을 알게 되는 것이다.

겉도는 옳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의 옳은 지식도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지식이 없지는 않은데, 그 지식이 그 사람에게 뿌리내리지도 않았고, 그 사람이 그것을 엄밀한 의미로 알고 있지도 않은 것이다.

G80 렌트카

최근 렌트카를 할 일이 있었다.
avis에서 렌트카를 했는데, 놀랍게도 Genesis G80 전기차를 내주었다.

나는 그냥 완전 보통차 예약했는데…

이게 뭔 횡재냐 싶어 넙죽 받아 신나게 타보았다.

우아…
완전 신세계.

일단 내가 여태껏 살면서 타본 모든 차 중에서 제일 고급차가 아닌가 싶다.
예전에 독일 출장갔을때 Audi A7 렌트카가 나온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내가 운전한 것이 아니어서…
그런거 보면 나는 아주 고급차를 타는 친구가 없다는게 명확하다. ㅠㅠ

그런데 그것보다 내게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첫 전기차 경험이었다.

나는 전기차를 운전해보는 것도 처음이었는데,
우아…. 정말…. 토크가 엄청났다.
그러니 순간 가속이 장난 아니고, 그냥 밟으면 쭈욱~ 가고 싶은 대로 가는 느낌!

내가 그런 정도의 고급차를 사서 탈 것 같지는 않지만,
어쩌면 지금 타고 있는 차의 다음차 정도는 전기차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고 있긴 한데,
내겐 정말 새로운 경험이었다.

기독교 리더들을 평가하는 것이 가능할까

적어도 내가 경험하는 실리콘 밸리의 회사들은 정말 치열하게 서로 feedback을 주고 받는다.
나도 내가 하는 일을 6개월마다 평가를 받고, 연중 서로 내가 어떻게 일했는지를 평가해달라는 부탁을 여기 저기에서 받는다. 내가 부탁을 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내가 무엇이 부족한지 무엇을 잘 했는지를 계속 점검한다.

회사의 리더들도 마찬가지다.
결국은 performance를 계량화해서 그 계량화한 결과에 따라서 꽤 잔인한 평가들을 받는다.
웬만한 크기의 회사들에서는 CEO가 회사 직원 전체로부터 질문을 받고 대답을 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꽤 일반적이다.

어떻게든 서로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를 점검하고 평가하고 feedback을 주고 받는 것이다.

교회에도 그런 것을 하는 것이 가능할까?

가령, 목사님, 장로님들의 performance review를 객관적으로 하면서 그분들이 더 잘 할 수 있도록 무엇을 잘했고 무엇이 부족했는지를 이야기하는 통로를 열어놓는 것이 가능할까?

적어도 내가 다녔던 모든 교회에서 그것을 제대로 했던 교회들은….
한인 교회중에는 없다.

책임감과 리더쉽

리더쉽의 핵심 가운데 하나는 책임감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2020년 가을에 빌립보서를 공부했었다.
그때 빌립보서를 보면서 바울에게서 드러나는 리더쉽의 끝판왕을 보았던 기억이 있다.

자신이 섬기고 있는 사람들이 끝까지 믿음을 잘 지키며 살도록 이야기하는 중에,
결국 자신은 그 사람들의 믿음으로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평가받게될것이라는 진지함이랄까 그런 것이 팍팍 들어 있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죽는 날까지 finish well 하겠다고,
죽을때까지 정말 쭈욱~ 신실함을 유지하며 푯대를 향해 달리는 삶을 살겠노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잘 나타나 있었다.

여기서 바울이 자신이 섬기고 있던 사람들의 믿음의 상태를… 하나님께서 자신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것,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의 믿음의 상태가 다 자신의 책임이라는 그런 입장을 가진 것이 정말 명확히 드러나 있었다.

예전에 KOSTA에서 ㅎ 간사님께서 하셨던 어떤 말씀이 생각난다.
그때 간사중 한가정에서 아이를 유산하는 일이 있었다.
그때 ㅎ 간사님께서는 그것에 대해 깊이 기도하지 못한 것, 그 상황을 더 세심히 돌보고 살피지 못한 것에 대한 깊은 자기 책망을 하셨다.
나는 정말 그 모습이 계속 잊혀지지 않는다.
아니…. 아이를 유산하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아니 그게 어찌 ㅎ 간사님 책임인가.

그런데,
리더란 그런 것이다.
자신이 돌보는 사람들의 고민과 아픔이 그저 다 자신의 책임인 것으로 여기는 것.

그런 영적리더를 보지 못한지 정말 너무 오래 되었다.
그저 그런 책임감 없는 사람을 영적 리더로 두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아프고 안타까운 마음이 가득하다.

Francis Collins!

어제 우리 회사에 Francis Collins가 왔다.
“Truth, Trust and Science”라는 제목으로 하는 대담이었다.

아침까지 그게 내 calendar에 들어와 있는지 모르고 있었는데, 아침에 하루 일정을 쭈욱~ 보다보니,
허걱! Francis Collins라고!!!

비록 가까이가서 대화를 나눌 기회는 없었지만 (나는 불행하게도 어제 다른 office에 있었다. ㅠㅠ)
그냥 회사 video cast로 Francis Collins를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완전 refreshing한 것이었다.

처음 이야기를 시작할때부터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백신을 불신하는 이야기를 꺼내면서, I’m a person of faith라고 이야기했다.

종교이야기를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여겨지는 우리 회사같은 분위기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밝히면서 한편 어떤 종류의 그리스도인들을 비판하면서도 다른 한편 자신의 신앙과 과학이 서로 적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모습은, 정말 정말 refreshing했다.

그러면서 ‘진리’라는 것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결국 그 ‘과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 ‘객관적 진리’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매우 학문적인 과학 이야기를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Jesus Christ, resurrection, cross, sermon on the mount 같은 이야기를 자유자재로 하면서,
종교라고는 1도 관심없는 사람들에게 진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모습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함께 왔던 사람들도 주로 Biologos 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왔던 것으로 보면, ‘과학’이야기를 하면서도 결국은 ‘the truth’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하는 agenda를 가지고 왔던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럼에도 그냥 종교적으로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과학, 철학, 종교, 정치, 문화 등등을 넘나들며 자유자재로 여러 영역들을 터치하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초조하게 자꾸만 기독교 이야기를 끼워넣으려고 하지 않고, 매우 당당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여러 이야기들을 담아내는 것을 보면서…
그냥… 참 좋았다.

아참, 그리고…
Francis Collins의 talk에 참여해서 질문을 던지는 어떤 사람들을 보면서…
아, 알고보니 저 사람도 Christian인 것 같다…. 그렇게 사람들을 더 알게되는 유익도 얻게 되었다.

직접 Dr. Collins에게 가서 이야기할 기회를 얻지는 못했지만,
정말…정말… 감사했다.

Thank you, Dr. Colli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