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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토요일 성경공부.
기독교 신앙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아… 자신이 다니고 있는 교회의 어려움… 아니 조금 더 정직하게 말하면, 교회 다니는 것 자체가 힘들다는 이야기들을 많이들 했다.

토요일 성경공부 그룹은 한국에서 들어오는 사람도 있고, 뉴욕/뉴저지 지역, 플로리다, 델라웨어, 일리노이, 캘리포니아, upstate NY 등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인데…
그냥 교회 다니는게 힘들다는 거다. ㅠㅠ

어느때 부터인가,
예수님 믿는게 힘든게 아니고, 교회 다니는게 힘들다는 사람을 훨씬 더 많이 만난다.
오히려 예수님 더 잘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교회 다니는걸 힘들어하는걸 정말 많이 만난다.

뭐가 신학적으로 옳고 어쩌고를 떠나서…
예수님을 믿는것보다 교회다니는 것이 더 어렵고 고통스럽다면….
이건 분명 잘못된거다.
이건 분명 아닌거다.

아!

어제 주일 예배후,
정말 끝나고나서 기립박수라고 치고 싶었다.

설교가 얼마나 찐~ 하던지.
그리고 그 후에 함께 부른 찬양도.

새 목사님이 오신지 1년이 조금 지났다.
뭐 그럴 수 있지만 지금까지는, 아, 예전에 Ortberg 목사님이라면 이렇게 했을텐데… 그렇게 생각했던 순간들이 당연히 있었다.

그렇지만 어제는,
아, Ortberg 목사님은 이렇게 못했겠다 싶은 순간이 있었다.

정말 좋은 설교에 정말 감사했다.
계속 오래… 마음에 남는다.

God, the troubleshooter

자기가 힘들때만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그저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분일 뿐이다.

그런 사람들이 어려울때 하나님을 찾는 모습은 사뭇 진지하게 보이기도 한다.
정말 하나님만이 이 문제를 해결해주실 것 같다는 절박함도 있다.

그런데,
그 문제가 해결되고나면 그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사라진다.

최근에도 그런 사람들과, 나름대로 내 진을 다 짜내가며 힘들게 대화하고, 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로보게끔 하는 노력을 좀 했었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참 많이 해보게 된다.

그런데,
내 믿음은 그 사람들의 믿음보다 더 나은걸까… 하는 생각을 또 많이 해보게 된다.

흔들리지 않기?

요즘은 회사에서 소위 perf 라고 불리는 performance evaluation이 끝나고, 그것에 따른 지난 6개월동안의 ‘성적표’가 나오고, 이제 앞으로 1년동안의 연봉이 정해져서 나오는 시즌이다.

완전히 정신을 잃고 보너스가 조금 오르고 내리는 것 가지고도 엄청 신경을 쓰는 부류의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냥 괜찮은척… 그러면서 점잖게 지나기도 한다.

그렇지만 어쨌든 이때쯤이면 다들 ‘돈’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일이 늘어난다.

이럴때,
돈 때문에 내 모든 마음이 다 흔들려버리는 일이 일어나면 안되는데….
나도 그게 때로 쉽지 않다.

얼마나 받았나, 얼마나 올랐나, 주식은 어떻게 되나…

최근 회사에서 직원들 월급에 대해 어떤 이야기가 나누어지고 있는가 하는 것은 회사 내의 기밀이기 때문에 여기에 쓸 수 없지만…

  1. 사람들은 돈 때문에 정말 스트레스 많이 받는다.
  2. 자신이 받는 돈에 만족하거나 자족하는 사람은 정말 거의 없다.
  3. 늘 다른 어떤 회사 다니는 누구는 주식이 어떻게 올라서 그것 때문에 집을 샀다더라 하는 부류의 이야기들은 늘 넘쳐난다.

돈을 받으며 감사하고, 돈을 많이 나누고, 돈 때문에 내 마음이 다 흔들려버리는 것을 잘 잡으며 사는 것이… 참 힘들다.

내 친구 J

내 대학교 동창중에 J라는 친구가 있다.
이 친구는 나와 비슷해서 잘 통하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뭔가 제대로 배우는것을 좋아한다고나 할까.
정말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 근본적인 원리같은 것을 캐는 것을 좋아했다.

우리는 같은 재료공학과였는데,
재료공학과에서는 물리학과에서 배우는 수준의 양자역학을 공부할 필요는 없었다.
그 양자역학의 결과를 어느정도 이해하고, 그것을 고체물리에 적용할 수 있는 정도면 충분했다.

그런데,
우리는 대학때, 그 양자역학의 내용을…
‘이건 뭐 그냥 그렇다고 하고 넘어가자’고 하는 교수님의 접근에 불만이 많았다.
아니 그걸 좀 배우고 싶은데…

나중에 결국 우리는 그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어서 양자역학을 따로 공부했다. 물리학과에서 배우는 교재를 가져다가 끙끙거리면서 문제도 풀고 우리끼리 서로 이야기도 해 가면서.
J와 나를 비롯해서 그런 성향의 친구 3명이었던가… 그렇게 해서 결국 우리는 학부 수준의 양자역학을 하고 나서야 어느정도 직성이 풀렸다.

나도 그랬지만 그 친구도,
대학원에서 공부하면서는 좀 진짜 공부같은 공부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적어도 아무도 모르는 뭐 하나를 새롭게 밝혀내는 것 하나 정도는 해야 학위를 받지 않겠냐… 뭐 그런 생각이 있었다.
뭔가 새로운걸 뚝딱뚝딱 만들어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좀 제대로 공부를 하고 싶다는 바람으로 유학을 왔다.
그렇지만 미국에서도 이미 흐름은… 기본적인 것을 파는 분위기라기 보다는 새롭고 cool한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쪽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나는 다소 고집스럽게 그래도 뭔가 기초적인 뭐 하나는 해야겠다고 바득바득 해가며 박사논문을 썼다.

….

지금 나는 그렇게 바득바득 기초적인 그 무엇을 공부한것과는 전혀 관계 없는 일을 하고 있다.
그때 그렇게 했던 것이 그때 당시 하면서 재미있기도 했고, 나름 보람도 있었지만,
그렇게 했던 것이 과연 내게 어떤 도움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지금 J는 뉴욕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그 친구 phase transformation을 statistical mechanics의 equation을 이용해서 푸는 걸 좋아하고 그랬는데….
그 친구는 변호사를 재미있게 하고 있을까?

문득 내가 무슨 일을 하면서 먹고 살고 있는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J가 생각났다.

손절

손절이라는말은 원래 주식 용어인데 손절매, 즉 손해를 보더라도 적당한 시점에서 끊어서 판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요즘은 그 손절이라는 말을 인간관계에도 많이 쓰는 것 같다.

나는 웬만하면 손절을 잘 못한다. 이게 그냥 내 마음이 그렇게 모질지 못해서 그렇다.

그러나,
어떤 사람과 교제하는 영역을 제한하는 일을 하기는 한다.

가령,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면 그것을 이해시키는데 너무 많은 에너지가 드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과는 그렇게 많이 에너지가 드는 일을 하는 영역을 차단해버린다.
그리고는 단순한 이야기, 안부 이야기만을 묻는 수준에서 그 사람과의 관계를 형성한다.

또,
조금이라도 감정이나 정서적인 이야기를 하는게 너무 어려운 사람은, 그런 영역을 차단한채 그 사람과의 관계를 형성하기도 한다.

당연히 이렇게 어떤 영역에 대하여 ‘손절’을 해버린 사람과는 깊은 나눔을 하는것이 불가능해진다. 안타깝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관계들에서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비해버리면서 내가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에.

그렇지만 내가 웬만하면 손절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나를 ‘이용’하는 사람들이다.
음… 물론 나를 이용하려는 사악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야 당연히 나도 가까이하려고 하지 않지만…

내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 중에 꽤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잘 지낼때는 전혀 연락도 하지 않다가,
자기가 어려운일이 터지만 내게 연락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는 내게 조언을 구하고, 때로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힘들다고 이야기한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내가 힘들때 그 사람들이 와서 도움을 주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내가 손절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의 그 순간에 나름 절박해서 내게 연락을 해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전까지도 죽겠다 힘들다 하면서 술마시고 전화하고 했던 친구가 있다.
나름대로 내가 할 수 있는한 그 친구와 이야기도 나누고, 카톡등으로 대화도 하면서 용기도 주려고 노력했었다.
그런데 그 친구는 그 후 그 어렵던 문제가 해결되었고, 당연히 내겐 연락한번 없다.
사실 그때 나는 꽤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었고, 그 친구도 그걸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가끔 그런 사람들이 섭섭할때는 있지만,
그런 사람들과 관계를 정리하지 않는다.
혹시 그 사람들의 그 어려운 문제에 도움을 주도록 하나님께서 이 상황에 나를 두신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다.

그러다보니…
때로 나도 인간관계가 힘들기도 하고 지치기도 한다…

Do I look that bad?

내 youtube feed에 재미있는 비디오가 떠서 봤다.
아마 TV 시트콤인것 같은데,
미국 사람이 프랑스에 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냥 이 사람이 미국 사람인걸 바로 아는 거다. 불어로 뭘 물어보면 영어로 대답해주고.
“내가 미국 사람인걸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더니, ‘너 옷 입은 꼴이 그렇다’는 표정.
그래서 파리의 옷가게에서 옷을 사서 입었더니 그제서야 사람들이 불어로 말을 하더라는…

내 생각에 나는,
미국 기준으로 보더라도 좀 심하게 옷을 아무렇게나 입는 것 같다.
많이 허름하게.
그런데 이게 나만 그런게 아니고, 우리 회사에서 나와 가까이 일하는 사람들은 대충 다 그렇긴 하다.

나는 한국에 가면 사람들이 흔히 영어로 말을 걸어온다.
인천공항에서 내게 한국어로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보다 영어로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이 보통 훨씬 더 많다.

아마 그 사람들이 속으로 그러는 것 같다.
‘너 하고 다니는 꼴이 그렇다…’

기독교와 관용

돌이켜보면 내가 정말 20대 ‘복음의 열정’에 불타올랐을때, 내게 관용은 매우 부족했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면,
기본적으로 내가 생각하는 방식이, 내가 이해가 되지 않으면 받아들이기 매우 어려워하기 때문이기도 했고,
또, 또 내가 배웠던 복음은 늘 ‘타협함이 없어야’한다는 것을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20대, 내 신앙의 영웅은 Francis Schaeffer였다. 그분은 로잔언약마저도 성경의 무오성을 지켜내지 못한 것이라고 비판했던 사람이었다.

그 불관용의 복음을 그야말로 밤낮으로 묵상하고 지냈으니, 내게 관용이라는 것이 자리잡기 매우 어려웠을 것.

그런데….
만일 내가 그때 타협함이 없는 복음에 대한 강조를 묵상하지 않고,
사랑과 포용과 은혜의 복음에 대한 강조를 묵상했다면…
아마 내 20대 이후 지금까지의 삶이 많이 달라졌을 것 같다.

물론 내 기질적으로, 논리적인 계층구조가 다 해결되지 않았는데 포용하는 것은 여전히 힘들었을 테지만.

Oh, I Want To Know You More

“오 주님 알기 원하네” 라고 한국어로 번역이 되었는데,
영어가사의 맛을 정말 잘 살리지 못했다. 아마 번역을 하되 원래 운율에 맞추다보니 어쩔수 없었겠다 싶지만…

요즘 이 노래를 많이 혼자서 부른다.
참… 가사가 좋다.
내 나름대로 직역에 가까운 의역을 한번 해 보았다.

(1절)
내가 내 자신에게 빠져있다고 느끼는 그 순간에,
내가 세상의 부에 내 마음이 빼앗겼다고 느끼는 그 순간에,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다.
나는 그것이 성령님의 부르심임을 안다.
그리고 내 세상적인 방황은 그분의 사랑 안에서 녹아져 내린다.

(코러스)
오, 당신을 더 알고 싶습니다.
내 영혼 깊은 곳에서
당신을 더 알고 싶습니다.
오, 당신을 알고 싶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심장을 느끼고, 당신의 생각을 알고 싶습니다.
당신의 눈을 바라보면 내 마음 안에 소용돌이가 생깁니다.
외칩니다. 오 당신을 더 알고 싶습니다.

(2절)
내 매일의 행동때문에 주로 생명과 노래를 잃어버릴때,
내 가슴에서는 피가 흐르고,
그분에 대한 민감함이 사라집니다.
내가 열심히 살지만 내 자신만의 모습으로 살아,
망가진 영혼을 마주하게 될때,
부드러운 예수님의 팔이 완전해지고자하는 내 바람을 따뜻하게 만들어줍니다.

(마무리 부분)
내가 마지막 숨쉬는 때까지,
당신의 죽음과 부활안에 있는 당신을 알고 싶습니다.
오 당신을 더 알고 싶습니다.
오 당신을 알고 싶습니다.
더 알고 싶습니다.
오 당신을 더 알고 싶습니다.

이해관계자를 적으로 돌리지 않는 개혁

한국에서 의대정원 확대건으로 꽤 시끄러운 뉴스가 들려온다.
나는 한국에 구체적으로 의사 수가 적절한 수준인지 아닌지 하는 data를 이야기하고자 하는건 아니고…. (내가 알기론 현재 의사수가 그냥 통계 data상으로는 비슷한 수준의 다른 나라들보다 적다고..)

뭔가 일을 하려고 할때, 그 이해관계자를 적으로 돌리거나 어떤 한 이해당사자를 소외시키는 방식으로 하는건 참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의사가 공정한 수준보다 훨씬 더 높은 소득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타도해야할 기득권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사람들이나, (주로 좌파)
아무런 생각없이 그냥 표를 얻으려고 의사 집단의 생각을 무시한채 비합리적이거나 비상식적인 방식으로 일을 밀어붙이는 사람들이나 (지금 정부)
궁극적으로 더 좋은 의료현실을 만드는데에는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어쨌든 그 이해관계자가 함께 노력해서 하도록 더 창의적이면서도 발전적인 방법을 연구해서 해야하지 않을까.

특히 한국의 의료체계에서는, ‘수가’를 조정하지 않는 한, 절대로 지금 상황이 개선될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
비현실적인 수가조정이 어떻게든 이루어져야 모든 의대 졸업생들이 서울 강남에 피부과나 성형외과를 하려고 하는 상황이 개선되지 않을까.

정말 생명을 살리는 의사로서의 자부심과 자존심이 잘 세워지도록,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그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도록, 그렇게 개혁이 좀 이루어지면 좋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