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내 항변은…

그렇게 삶을 돌아보면서,
그래도 내가 하나님께 항변하고 싶은건 이거다.

나는 내가 뭐 엄청난 목표를 가지고 살지 않았다.
그저 주어지는 일들, 당장 내 앞에 떨어지는 일들을 내가 감당해야한다고 생각하고 했었다.

20대 초반, 후배들 기숙사 방을 두드려가며 사람들을 모아서 성경공부를 했을 때도,
사람들이 그걸 안하니까.. 나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한 것이었다.
교회를 다니면서 여러가지 일들을 맡아서 했던 것들도,
그걸 해야할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이 안하니까 그냥 내가 했던 것들이었다.
캠퍼스에서 성경공부를 만들었던 일, 여러개 교회를 개척하는데 참여했던 일, KOSTA를 계속 도왔던 일들…
그저 나는 다 당장 그 상황에 내가 던져졌고, 그런 필요들이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안하니까… 나라도 하자고 해서 많은 경우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성경공부도 하고, 교회 새벽기도 셔틀 운전도 하고, 음식 만드는 일도 하고, 연극 대본도 쓰고, 찬양 인도도 하고, 설교도 하고, 주일학교 선생님도 했다. 후배들 밥도 사주고, 무리해서 헌금도 하고, 시간과 재물과 노력을 그렇게 나름대로 들여가며… 누군가는 해야할 것 같은데 아무도 안하는 일들에 달라붙어서 그렇게 해 왔다.

그러니…
내가 내 욕심으로 한 것도 아니고, 그거 늘 쉽고 즐거웠던 것도 아닌데…
그 모든 일들에 열매를 좀 허락해주시면 안되느냐고…
그런 정도 항변을 하나님께 좀 해볼 수 있는 거 아닐까. ㅎㅎ

뭐 그것도 뭐 이러다 말거고,
나는 또 누군가는 해야하는데 아무도 안하는 어떤 것들을 보면 그저 그거 내가 해야하는 것이려니… 그렇게 하겠지….

딱 세 사람이 아니어도…

어제의 글에 이어서,
그런데 한편 드는 생각은…
그러면 어떠냐 하는 것이다.

그래, 내가 부족해서, 내가 생각했던 그 삶을 살지 못했다.
이 땅에서 열심히 예수님을 따르며 살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별로 열매 없이 그렇게 살게 되었다.
그러면 어떠냐.

그래… 뭐 사실 그렇다.
내 삶에 열매가 별로 없다는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지금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그것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려니… 그렇게 여기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정말 그렇다면…
나는 마치 내가 복음을 아는 것인냥 그렇게 나대지는 말았어야 했다.
마치 내가 하는 일들이, 내 삶이 뭔가 꽤 거창한 의미가 있는 것 처럼 착각하지는 말았어야 했다.
그냥 나는 내가 꿈꾸는 열매를 맺을만큼 충분히 훌륭하지 않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어야 했다.

한편 안타깝기도 하고 후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생각들이 엄청 비관적이거나 슬픈 생각이기만 한것은 아니다.
그저 이제야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가 많이 부족했다는 것을 더 깨닫게 된 것이다.

딱 세 사람만

내가 20대에 했던 생각이랄까… 결심이랄까.. 그런게 있었다.
내가 평생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나를 통해서, 적어도 나보다 훌륭한 그리스도인을 딱 세 사람만 키워낼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내가 이 땅에서 산 삶이 의미있게 여겨질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였다.

물론 어떤 누구도 어떤 한 사람으로부터 전적으로 영향을 받아서 성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어떤 사람은 내게서 0.1만큼 영향을 받을수도 있겠고,
어떤 사람은 내가 그 사람의 성숙에 0.3만큼 도움을 주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그것들을 다 모았을때…
그 사람들이 나보다 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면 좋겠고,
그렇게 된 사람이 세 사람만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생각엔 적어도 지금까지의 삶을 돌이켜 보면,
그렇게는 안될 것 같다.

그건 내가 너무 훌륭해서 나만큼 따라오는 사람이 없다는… 그런 부류의 말도 안되는 생각은 당연히 아니다.

어떤 사람은 내가 꽤 많이 신경을 쓰고 노력을 했는데도 여러가지 한계 때문에 그 성숙과 성장이 딱 멈춰버렸다.
이런 사람은 비록 내가 그 사람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할수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이 나를 뛰어넘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을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어떤 사람은 내가 신경을 쓰고 노력을 했고, 그 사람이 정말 아주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숙해져갔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기에도 나보다 더 훌륭하다고 여겨질만 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그 사람은 내가 아니어도 그렇게 되었을만 한 사람인 것 같다.
그 사람의 성장과 성숙에 내가 별로 도움을 준 것 같지 않은 것이다.

나름대로 여러가지 형태로 복음을 가지고 살고, 복음을 나누고, 복음으로 격려하는 일을 하면서 살려고 많이 노력했다.
그런데 딱 3명만… 이라는 20대의 어설픈 꿈은 나 정도의 부족한 사람이 꿈꿀 수 있는 꿈이 아닌 듯 하다.

눈물

나는 어릴때 전학을 많이 다녔다.
내가 3학년때 한번, 4학년때 한번, 6학년때 한번.
그리고 그 국민학교 친구중 같은 중학교 간 친구가 많지 않고,
중학교 친구중 같은 고등학교 간 친구는 전혀 없다.
그러다보니 늘 친구들과 헤어지곤 했는다.

국민학교 3학년때 선생님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분은 내가 눈물이 많다고 늘 놀리셨다. 남자가 뭐 그렇게 우냐고 맨날 장난으로 놀리곤 하셨다.
그리고 내가 3학년때 전학을 갈때, 교실에서 아이들과 작별 인사를 할때 또 울었던 모양이다.
선생님이 또 운다고 그러실때 나는… 아, 내가 정말 눈물이 많은 건가… 싶었다.

전주에서 3학년 1학기까지 다니고, 3학년 2학기에 서울로 이사왔는데,
집에 아무도 없던 어떤 날, 전주의 친구들이 보고 싶어서 많이 혼자서 방에서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시커먼 사춘기 남자아이들이 한반에 70명 넘게 있는 중학교에 가면서부터 뭐 눈물을 흘리거나 그랬던 기억이 많지 않다. 고등학교때도 그냥 그냥 그랬고.

그 후 일종의 회심체험을 하면서 나는 엄청 다시 눈물이 많아졌다.
대학교 4학년 1년, 석사과정 1년정도를 거의 매일 울다시피 하면서 보냈던 것 같다. 감격의 눈물이었다.

그 이후 나는 다시 눈물이 많아졌다.
그런데 요즘 내가 눈물이 많은지 잘 모르겠다.
웬만하면 눈물을 잘 흘리지 않는다. 그나마 기도할때나 좀…

두렵다. 눈물이 메마른 것은 아닐까 싶어서.

부지런함

예전에 내가 알던 어떤 사람의 이야기.
자기가 하는 어떤 일이 있는데 일이 진전이 없고 힘들다는 거다.
그래서 그 일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가만히 들어보았는데….
음…. 내가 판단하기론 일을 열심히 하고 있지 않은게 문제였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자기는 일을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일도 해라, 저런 것도 생각해봐라, 일을 조금 더 ownership을 가지고 밀어붙여봐라… 이런 이야기를 해도 잘 먹히질 않는다. 자기는 이미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

상황이 엉망이고, 뭔가 많이 부족하고, 꽉 막힌 것 같아 잘 풀리지 않고…
그럴때, 최소한 좀 열심히라도 한번 해보는건 정말 중요한 것 같다.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이 일이 내게 주어진 책임이니 내가 책임 지겠다는 생각으로 어떻게든 해 내려는 노력은 참 소중하다.

물론 이게 각각 어떤 개인이 열심히 하는 것을 넘어서 어떤 집단이나 조직이나 사람들이 함께 그렇게 힘을 내어서 열심히 하는 노력은 때로 몹시 아름답다.

잔재주와 큰걸음

소위 처세술이라고 해야할까, 자기가 하는 일에 잔재주를 잘 부리는 사람들이 있다.
기술자들이다.

정치에있는 정치꾼들, 법조계의 법기술자들같이 뉴스에서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당장 회사에서도 그런거 잘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어떤 일정 기간을 놓고 보면 그런 잔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승승장구하는 것 같아 보인다.
또 그런 잔기술이 잘 먹히는 어떤 상황이나 흐름같은 것들이 있다.

실리콘밸리에서 그래도 꽤 오래 일 하면서,
완전 실력도 없고 능력도 없는데 잔기술 잘 부려서 월급 많이 받고 하는 사람들을 꽤 많이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들이 먹히는 기간은 모두 한때 뿐이다. 어느 일정 기간이 넘어가면 결국 그 사람이 잔재주로 살아가는지 큰 걸음을 걸어가는지 하는 것이 보이게 된다.

그런데….
현실에서의 문제는 그 먹히는 한정된 기간이… 때로는 어떤 사람의 인생만큼이나 길다는 거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얍씰한 잔기술로 결국 평생을 풍요롭게 살게 되기도 한다.

대개 그런 한정된 기간이랄까 그런 것은 위기의 순간에 끝나게 되는 것 같다.
위기 상황이 되면 그런 잔기술보다는 큰걸음이 먹히게 되고, 그런 잔기술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걸러지게 되는 것 같다.

그냥 한국의 정치 상황을 보면서 하게 된 생각.

정치권력

요즘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process를 통해서 누구를 뽑느냐 하는 것에 많은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누구든 그 사람이나 집단이 권력을 잡으면 그들에게 권력을 전적으로 위임하고 신경쓰지 않는다. 다음 선거때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이기도록 하는데 다시 모든 관심을 갖는다.

이것은 정치를 게임으로 여기는 경향을 만들어 내는 것 같다.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이기면 기뻐하고 반대편을 혐오하는 형식의 게임이다.

그러나…
사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그 정치판에서 그런 종류의 게임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정치 권력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우리가 선출하는 사람들이나 집단은 그 권력을 대신해서 실행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그 사람들이 그 위임된 권력을 제대로 사용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감시, 견제, 때로는 저항등을 해야할 책임이 있다.

물론 그 권력이 합당하게 공의를 행하는 역할을 할때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응원하는 일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정치권력에 대한 견제를 할때 그 정치 권력의 모든 방향에 사사건건 딴지를 건다거나 반대쪽 정치집단을 응원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가 그 정치 권력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바라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한국의 상황에서,
적어도 지금은, 그 공의가 어떤 방향인가 하는 것이 꽤 명확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번 선거에서 어떤 집단은 매우 공개적이고도 의도적으로 그 공의와 반대되는 입장을 취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떤 정치 집단의 생각에 자신의 identity를 두지 말고 그 집단이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어내는 도구로 사용되도록 하는데 노력해야 한다. 어떤 정치집단은 그렇게 도구로 사용되기에 조금 더 적절할 수 있고, 어떤 정치 집단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나는, 이번에 선거에서 이긴 정치집단이 승리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이번에 그 반대쪽 집단이 하고 있는 악한 일들 때문에 일방적인 선거가 되길 바랐다.
내가 바랐던 것 만큼 일방적인 선거가 되지는 못한 것 같다.
그렇지만 그나마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지지하거나 응원하는 정치인이나 정치집단이 선거에서 승리했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는 아니며, 그것 자체가 공의의 실현은 아니라는 것을 나 스스로 기억하려고 한다.
오히려 그 권력자와 그 정치집단이 어떻게 그 공의를 이루어가느냐 하는 것을 보며 한편 응원하고 한편 비판하면서 정치가 하나님의 도구가 되도록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Allergy

금년은 Bay area에 allergy가 심하다.
이게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금년에 유난히 심하다고 한다.
그게 결국 기후변화와 연관이 있을 텐데,
정상적인 경우보다 꽃가루등의 allergen들이 훨씬 많아져서 사람들이 다들 기침하고 콧물 흘리고 난리다.

allergy와 천식이 있는 나는 올해 그래서 고생을 더 하고 있다.
천식용 inhaler도 쓰고, allergy 약도 먹고…

어떤 사람들은 같은 allergy에 더 심하게 반응해서 더 힘들어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꽃가루가 많이 날리지만 그 속에서 더 덤덤히 살아가기도 한다.

참 감사한 것은 그렇게 약을 쓰면 그래서 훨씬 더 살만하다.
allergy약을 개발한 사람들 모두가 allergy때문에 고생하는 사람은 당연히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개발된 약 때문에 나는 훨씬 삶의 질이 좋아졌다.

만일 어떤 사람들이 allergy가 중국 스파이가 퍼뜨린 약품 때문이라는 유언비어를 믿는다거나,
allergy란 없다. 그저 그 사람의 정신상태가 문제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한다거나,
그래서 allergy가 있는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그러면 그냥 훨씬 힘든 사람들이 생기는 거다.


정치적 혼란, 부패하거나 무능하거나 타락한 정치적 리더의 문제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무게로 다가오지는 않을 것이다.
대통령이 미친짓을 해도 나는 뭐 살만하다… 그런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미국에 살고 있는 나 같은 사람이 그렇다.
그렇지만 그것 때문에 훨씬 더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냥 마음이 힘든 것을 넘어 생계가 어려지거나 다른 더 힘든 상황에 놓이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래도 상관없다고… 나는 살만하다고… 지금 내 문제가 아니라고…
그런 무관심 때문에 어떤 사람들의 고통은 더 심해진다.

혹은, 이상한 음모론이나 거짓 뉴스를 믿고 엉뚱한 주장을 한다면,
그냥 어떤 그룹에 대한 증오나 혐오만으로 사실을 왜곡한다면,
어떤 사람들은 세상 사는게 정말 힘들어 지는 거다.

allergy약이 allergy 문제를 다 해결하지 못하는 것 처럼,
정치가 세상의 문제를 다 해결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최소한 어떤 사람들에게 조금 더 살만한 약을 제공해주는 역할 정도는 할 수 있다.
아니, 독을 약으로 알고 먹고 있는 사람들이 더 이상 독을 먹지 않도록 할 정도는 최소한 할 수 있다.

정치적 지향

지난번 한국에서 계엄이 선포되었다는 뉴스를 보았을때,
나는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모른다.

내가 느꼈던 첫 느낌은… 모욕감이었다.
아니, 감히 네가 이 나라를 이렇게 망가뜨려?
뭐 정치적 입장이나 견해가 어떠하냐를 떠나서 그건 정말 몹시 화나는 일이었다.

정치가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이 분은 정말 쉽게 삭여지지 않는 것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정치라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 때는 전두환 독재정권이 있을 때였다.
80년 광주에서 벌어진 일을 대학에 들어가서 알게 되었고,
겁이 많고 이기적인 사람이었지만 그 마음 속에 쌓이는 분노는 내가 어떤 그룹을 절대로 지지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굳건히 갖게 했다.

그 후 그 독재자들의 후예들이 만들어온 정치집단을 내가 좋아했던 적은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그룹에 대한 극렬한 분노는 더 이상 내게 없었다. 다만 더 사회적으로 약한 세력이 정치적 힘을 갖게되는 것이 이 세상을 그나마 덜 기울어지게 만들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한쪽을 지지하는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

대충 2020년대에 들어오면서,
이제는 한국의 리버럴이 더 이상 약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제는 나도 예전에 가졌던 입장으로부터 조금 자유로워질 수 있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건 정말 아니다. 이건 정말 정말 아니다.

80년 광주 때문에, 그 만행을 반성하지 않는 그 정치 집단을 극도로 혐오하게 되었던 것 처럼,
이번에 일어난 미치광이 사건, 미치광이 정권 때문에, 그 만행을 반성하지 않는 그 정치 집단을 한동안 또 다시 극도록 혐오하게 될 것 같다.

이번에 어떤 후보가 한국의 대통령이 될 것이 확실해 보이지만,
그리고 나도 정치적 보복 같은 것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지만,
적어도 선거의 결과만으로는 완전히 한쪽이 한쪽을 압살해버리는 결과가 나오길 응원하고 있다.

개인윤리

1.
내가 20대에 만났던 기독교는,
어쨌든 보수적인 기독교였고 (지금도 나는 보수적인 기독교인이다.)
그러니 개인윤리에 대한 강조가 참 컸다.

정직함, 성적 순결, 다른 사람을 도구로 생각하지 않고 대함, 관계에 대한 진지함, 돈에 대한 탐욕을 피함, 사람의 칭찬에 의지하지 않음, 성실함, 자기 성찰, 내적 통일성(integrity) 등등…

처음 소위 ‘회심경험’을 했을때 나는 이렇게 내가 맞닥드린 여러가지 개인윤리의 요청들이 정말 기쁨으로 다가왔다.
정말 그랬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으로서 그렇게 살아가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것,
그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이 정말 좋았다.

2.
기독교가 개인윤리에만 한정되는 것은 신앙의 공공성이라는 매우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나도 정말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개인윤리에 대한 건강한 고찰과 강조가 없는 신앙의 공공성은 절대로 유효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매우 자주, (언제나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신앙의 공공성은 건강한 기독교적 윤리로부터 비롯된다.

3.
한국의 검찰이 문제가 많다고 한다.
그 문제의 매우 중요한 핵심 가운데 하나는 출세지향적, 권력지향적 검사조직이다.
그거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출세 지향적, 권력 지향적 삶이 아닌 다른 삶이 있다는 개인윤리를 누군가가 보여주지 않는다면,
정말 대안적인 삶의 모습이 있다는 것을 누군가가 더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이 좇아야할 표적이 될 수 있단 말인다.

4.
한국과 미국의 소위 ‘보수’ 혹은 ‘극우’집단의 문제가 심각하다.
이 사람들의 특징은 어떤 사실을 왜곡하고 거짓을 이야기하고, 말꼬리를 잡아 사람들을 선동하는 일들을 즐긴다.
권력을 위해서 개인윤리를 포기하는 것이다.
만일 정말 보수적인 기독교인이 그 상황 속에서 끝까지 정직하고, 끝까지 희생적이고, 끝까지 권력지향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서 있다면 상황이 어떻게 변할 수 있을까?
어떤 보수 기독교인들이, 정치인들의 정직함과 윤리성에 대한 것을 이야기한다면 이 상황에 어떤 모습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5.
한국도 미국도,
그리고 그 극우를 지지하는 보수 기독교의 문제 역시 심각하다.
그런데…
건강한 보수 기독교라면, 개인윤리에 대한 깊은 강조가 있어야 하는거 아닌가?
사회개혁이나 그런가 보다도, 각 개인이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것에 대한 강조가 지나치다 싶게 이루어져야 하는거 아닌가?
그래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는 이야기를 넘치도록 해야하는거 아닌가?

그 보수 기독교가,
건강한 개인윤리를 다 포기한채, 극우적 아젠다를 받아들여버렸다.

진보적 기독교는 세상의 변화를 이야기하고,
보수적 기독교는 세상의 변화를 거부하는데…
그 속에서 아무도 건강한 기독교적 윤리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6.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어떤 사람들을 보고싶다.
몹시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