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kindle (3)

그런데 지금 나는 어떻게 살고 있나?

내게있어 기독교 신앙이 내게 주는 기쁨은,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서 새로운 삶의 의미를 갖게되는 것과는 다소 좀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때로는 더 깊은 성경 공부를 통한 지적 만족,
더 효율적인 사역을 통해서 열매가 맺히는 것,
신앙의 가치를 삶에 적용해서 어떤 깨달음을 얻거나 경험을 축적하는 것 등에 더 무게중심이 옮겨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그런 것들이 나쁜것들은 아니다.
모두 다 좋은 것들이고, 내 신앙이 더 깊어지고 성숙해지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그것이 내가 가져왔던 ‘불’은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님과 하나가 되고, 예수님과 동행하기 때문에 새롭게 나와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그 불은 아니라는 것.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과 하나가 되고 동행하는 것이 과거에는 신앙의 핵심이자 목표였다면,
이제는 그것이 너무 자주 신앙의 도구로서만 작동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렇다면…
그 ‘불’을 다시 켜는 것, rekindle이 내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Rekindle (2)

만일 내게 필요한 것이 re-kindle이라면, 내게 원래 불이 있었던가?

음…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여러가지 이유로 많이 잃어버린 것 같다.

그래서 생각해 보았다.
내게 있던 그 불은 무엇이었나?

더 깊은 신학적 지식, 더 효과적인 사역을 하게 되는 것, 내 삶을 더 잘 manage해서 살게되는 것 같은 것들이 물론 중요했지만,
그것이 내가 가지고 있었던 불의 핵심은 아니었다.

나는 대학3학년때쯤 마음속에 깊은 공허가 있었다.
글쎄… 그 공허가 무엇이었는지 참 뭐라 다 표현하기 어려운 그런 공허였다.
그 후에 그 공허를 나름대로 잘 설명해보려는 시도를 내 나름대로는 해 보았는데, 충분히 다 설명할 수 없는 것 같다.

그런데,
대학3~4학년을 거치며 나는 일종의 ‘회심체험’같은 것을 하게 되었다.
갑자기 잘 읽혀지지 않던 성경이 이해가 되고, 그것때문에 많이 흥분하고 감동하게 되었다.
혼자서 눈물을 흘리는 일들이 많아졌는데 아주 많은 경우 회개의 눈물이라기 보다는 감격과 기쁨의 눈물이었다.

그 속에서 나는 나와 세상이 아름답게 되는 꿈을 꿀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결국 그것이 내게 ‘불’이었던 것 같다.

엄밀하게 말하면 죽어서 이제는 천국갈 수 있다는 안도감 그런것이라기 보다는,
내가 예수님을 받아들여서 이제는 내가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다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내게서 공허함이 사라졌다.
의미가 생겼다.
생각해보면 그것이 내겐 ‘불’이었다.

Rekindle (1)

“…그대 속에 간직하고 있는 하나님의 은사에 다시 불을 붙이게 하려고 합니다.” 디모데전서 1:6b

여기에서 다시 불을 붙인다고 번역한 말을 어떤 영어 성경에서는 kindle afresh 라고 번역을 했다. (NASB)

그런데 원어는 거의 ‘다시 불타오르게 한다’는 뜻을 가진 단어인 것 같다.
그래서 ESV에서는 ‘to fan into flame’이라는 표현을 썼다.

연말에 쉬면서 여러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생각하게 된것은 rekindle 이었다.

내게도 정말 어떤 형태로든 rekindle되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2023년이 내게 The Year of Rekindling이 되길.

2023년!

우아, 참 잘 쉬었다.

잠을 푹 잘 잤다. 가족과 함께 짧은 여행도 다녀왔고, 갔던 곳이 완전 시골이어서 난생처음 은하수도 볼 수 있었다.
우아, 하늘에 그렇게 별이 많다니!

책을 읽거나, 생각을 하거나, 계획을 짜거나 하는 것 따위 거의 하지 않고,
정말 쉬었다.

이제 다시 시동걸고 출발이다.
새해엔 조금 더 성실하게 살아볼 생각이다.
어쩌면 내게 더 필요한 것은 조금 더 성실하게 사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중.

올해를 정리하며

아마도 오늘의 글이 올해의 마지막 포스팅이 아닐까 싶다.
내일부터는 새해 1월 초까지 잠시 휴가를 가지려 한다.

올해를 시작하면서 나름대로 한해동안 좀 성숙해지는데 집중해보겠다고 결심을 했었고,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기능’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이 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내가 그냥 계속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내 인격 자체에서 맺혀야하는 열매를 맺고 살고 있지 않다는 생각에서 였다.

그러기위해서 규칙성으로부터 때로는 벗어날줄 아는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도 해 보았다.

한해를 돌이켜보며 내가 조금 더 그렇게 살았을까를 생각해본다.
아닌 것 같다.

그런데 희망적인 것은,
한동안 급격하게 내가 기능하는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경향이 가속화되고 있었는데, 그 가속화 흐름은 확실히 꺾였다. 추세가 달라졌다고나 할까.

연말에 조금 잘 쉬어볼 생각이다.
쉬면서 하나님과 사람들과 나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보려고 한다.

Mary, Did you know?

Mary, did you know that your baby boy
Would one day walk on water?
Mary, did you know that your baby boy
Would save our sons and daughters?
Did you know that your baby boy
Has come to make you new?
This child that you delivered, will soon deliver you

Mary, did you know that your baby boy
Will give sight to a blind man?
Mary, did you know that your baby boy
Will calm the storm with his hand?

Did you know that your baby boy
Has walked where angels trod?
When you kiss your little baby
You kiss the face of God

Mary, did you know?
Mary, did you know?
Mary, did you know? Did you know?
Mary, did you know? Mary, did you know?
Mary, did you know? Mary, did you know?
Mary, did you know? Mary, did you know?

The blind will see, the deaf will hear
The dead will live again
The lame will leap, the dumb will speak
The praises of the Lamb

Mary, did you know that your baby boy
Is Lord of all creation?
Mary, did you know that your baby boy
Would one day rule the nations?
Did you know that your baby boy
Is heaven’s perfect Lamb?
That sleeping child you’re holding is the great, I Am

Mary, did you know? (Mary, did you know?)
Mary, did you know? (Mary, did you know?)
Mary, did you know? Oh

마리아 당신 알고 있었나요 당신의 그 아기
언젠가 그가 물 위를 걷고 우리를 우권할 것을
마리아 알고 있었나요 당신의 삶이 바뀔 것을
당신이 낳은 아기 당신을 살릴것을

마리아 당신 알고 있었나요 당신의 그 아기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폭풍을 잠잠케 할 것
마리아 알고 있었나요 그는 하늘에서 온 이
당신이 입맞춘 얼굴, 하나님의 얼굴

눈먼 자를 보게 하고 죽은 자 살리고
저는 자를 뛰게하고 벙어리를 찬양케
오 마리아 당신 알고 있었나요
당신의 그 아기가 만유의 주
마침내 그가 온 세상 통치할 것을
마리아 알고 있었나요
당신 품의 그 아기가 하나님의 어린양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

Bell labs, IBM research, HP labs

내가 대학생일때, 그 후에 박사과정 전반부까지만 하더라도
Bell labs이나 IBM TJ Watson 연구소 등에 가서 일하는 것이 꿈이었다.

사실 내가 박사과정을 했던 분야에서 거의 절대 강자는 Bell labs의 어떤 그룹이었다.
거의 넘사벽에 가까울 정도로 훌륭한 논문들이 그곳에서 나왔다.

그리고 IBM research도 역시 그랬다.

그런데…
내가 박사과정을 마칠때 쯤 해서 Bell labs의 위상은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Bell labs라는 연구소가 여기 저기 소속을 바꾸더니만, 거기서 하던 기초 연구들은 급격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IBM research는 Bell labs가 없어지는 것보다는 그래도 조금 더 늦게 이루어졌지만 역시 거기도 마찬가지 였다.

내가 박사를 졸업하고 취직한 첫 직장은 HP labs였다.
특히 내가 들어간 그룹은 DVD-RW를 처음 개발한 그룹이었다!
또 HP labs에는 여전히 ink jet printer를 처음 개발했던 사람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
교과서에서 이름을 보았던 사람도 그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나름대로 그곳에서 참 재미있게 일했고,
거기서 한 일들이 그 분야에서는 아주 크게 주목을 받는 일이 되었다.

내가 HP labs를 떠날때 즈음에는
HP labs도 매우 급격히 쇠퇴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떠났고, 연구소의 크기를 급격하게 줄였다.
그곳에서 20년 넘게 일했던 나이 많은 연구원들이 layoff를 당하는 것들을 보았다.

실리콘 밸리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
그리고 그 에코 시스템에서 일하고 있는 회사들…
그 속에서 젊은 나이에 고액의 연봉을 받으며 마치 이 시절이 영원할 것 같이 살고 있는 사람들…
또 그 속에서 한 몫 잡으려고 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정말 이 이야기를 꼭 해주고 싶다.

그거 영원하지 않다. 그 속에 취해 있으면 안된다. 하나님을 두려워 해라.

이것이… 내 삶속에 경험한 버전의 전도서다.

하나님을 믿는 우울함?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일기”라는 책은 거의 30년쯤 전부터 한번쯤 읽어야지 하고 생각만 하고 있으면서 막상 한번도 읽어보지 못한 책이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편집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사실상 우울증이 있던 사람이었던 으로 보인다.

나는…
심각한 우울증과 싸우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지만,
때로 내 신앙이 나를 우울하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아, 물론 내 삶의 여정 속에서 약간의 우울증과 싸워야 했던 기간도 있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이번 연말 휴가기간에 읽을 책으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일기를 뽑았다.
마침 ebook으로 나온 것이 있어 바로 샀다.

도대체 하나님을 믿으며 내가 가지고 있는 이 깊은 영적 목마름,
그로 인한 깊은 우울감,
때로는 그것 때문에 하나님과 거리를 두게되기 까지 하는 이 증상들이 도대체 어떤 것들인지 조금 더 살펴보고자 한다.

정치의 위험성

James Davison Hunter가 지은 “To Change the World”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사회가 건강할때는 사회의 여러 분야가 함께 종합적으로 작동한다.
경제, 교육, 문화, 예술 등등.

그러나,
사회가 건강함을 잃어버리면,
그 사회는 그 해결책을 정치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 이유는,
정치는 자신의 의지를 강압적으로 성취하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승리하면, 그것을 이용해서,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따라야만하는 법/체제/행정등을 운영할 수 있게 되고, 그것은 자신의 의지를 강압적으로 모두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음…
이거 정말 완전 맞는 말인 듯.

나는 이 책을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
인터넷에서 이 책에의 이 부분만 언급하는 것을 보고, 우아… 옳다…고 생각했다.

그런의미에서,
정치가 세상을 바꾸는 유일한 방법인것 같아 보이는 사회는,
심하게 병든 사회이다.

지금의 한국이나 미국은… 불행하게도 그렇다.

Francis Schaeffer

나의 20대 신앙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아마도 Francis Schaeffer였을 거다.
대학생일때 처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읽고서는 한참동안 그 충격과 감동을 가졌던 것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 후 Francis Schaeffer의 여러 글들을 읽으며, 또 그분을 추종하는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며, 나는 참 많은 것을 배웠다.

불행하게도 그 후에 Francis Schaeffer의 어떤 입장들이 지나치게 치우쳐져 있다는 것과 그 계열의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후에 미국의 우파 정치세력과 결합하여 변질되는 것을 보게 되었고, 나는 조금씩 Francis Schaeffer로 부터 멀어졌다.

어제 문득, Francis Schaeffer를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그리고서는… 과연 Francis Schaffer의 어떤 영향이 내게 남아있는가를 생각해보았다.

무엇보다도 제일 내게 깊게 영향을 준 것은,
모든 생각과 삶과 행동 그 모든 것을 온전히 그리스도의 주권아래 두어야 한다는 생각인 것 같다.
그 전제 아래 그분이 생각했던 것들중 어떤 부분에는 내가 더 이상 동의하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주되심 앞에 삶의 전 영역을, 세상의 모든 것을 드린다는 것은 여전히 내게 가장 소중한 가치이다.

그리고 또한,
그분이 이야기했던 어떤 형태의 변증(apologetics) 역시 내게 지금까지 영향이 있는 것 같다.
결국 Francis Schaeffer는 세상이 ‘객관적’이라고 이야기하며 펼쳐놓은 대화의 장 자치게 객관적이지 않다는 주장을 했었고, 한편 그것에 지금도 동의하고 있는 듯 하다.

Francis Schaeffer에 대해 실망하고 멀어지면서,
한동안은 그분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았는데,
어제는 문득… 내가 20대에 Francis Schaeffer를 만났다는 것이 blessing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