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 사이클

예전에는 잠이 쉽게 잘 들었고, 한번 자면 잘 깨지도 않았는데
나이가 들면서 전반적으로 sleep quality가 떨어졌다.

사실 나는 고등학교때부터 커피를 입에 달고 살았고,
박사과정때 즈음에는 정말 무지막지한 양의 커피를 마시면서 지냈다.
그리고 하루에 잠은 5~6시간정도 자면서 살았다.

이게 대충 45세~50세 사이쯤 부터 변화가 일어났다.
체력은 떨어지고 sleep quality는 낮아져서 여러가지로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sleep tracking을 하는 smatwatch (fitbit)을 사서 내 수면 패턴을 잘 분석을 해보았다.

전반적으로… 내가 6시간 침대에 있다면, 실제로 잠을 자는 시간은 5시간쯤 되었다.
일단 자면 전반적으로 deep sleep과 REM sleep의 비율등은 괜찮았지만 절대적으로 수면 양이 부족한 것이 내게 문제였다.

그래서 올해 초부터는 꽤 큰 변화를 주었다.
일단 저녁 9시 이후에는 컴퓨터 화면에서 blue light 나오는 것을 확~ 줄였다.
그리고 저녁 10시부터 천천히 shut down을 했다.

조금 여유가 있는 날은 10시 반정도, 늦어도 11시에는 잠자리에 들기 위해 노력을 했다.
그리고 아침 6~7시 사이에 일어나는 것으로.

그러니 전체적으로 8시간 정도를 ‘잠자는 시간’으로 확보를 하려고 노력을 한 것이다.

또, 커피를 거의 획기적으로 줄였다.
꼭 필요하다면 아주 아침에만 한잔. 늦어도 점심 시간 이후에는 커피를 마시지 않았고,
아침에도 가능하면 decaf를 마시려고 노력했다.
혹시라도 카페인이 들어있는 커피를 마신 날은 의도적으로 운동을 하거나 몸 움직임을 더 많이 해서 몸을 적당히 ‘피곤하게’만들기 위해 더 노력을 했다.
나는 커피를 많이 좋아하는데… 그래서 커피를 끊기가 쉽지 않았다.

또 움직이는 양을 조금 더 늘려보려고 노력했다.
회사에 가면 책상에 앉지 않았다.
다행히 회사에 standing desk가 있어서, 무조건 회사에서는 서서 일을 했다.
내 자리에 있을 때는 꼭 서 있고, 하루중 중간에도 잠깐씩 걷고 오는 일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꼭 필요하지 않은 경우에는 집에서 일하기 보다는 회사 office에 간다.
적어도 아침 일찍 집에서 일을 하고, rush hour traffic을 피해서 10시쯤 회사에 갔다가,
다시 rush hour traffic을 피해서 오후 3~4시에 집에 와서 나머지 일을 한다.
그렇게 회사에 있으면 아무래도 집에 있는 것 보다는 몸을 움직이는 양이 많고,
집에는 standing desk가 없지만 회사에는 있기 때문에 그것도 좋다.

요즘은 그렇게 하다보니…
전반적으로 하루에 7시간정도 잠을 자는 것 같다.
예전에 하루 5시간 자던 때 보다 훨씬 더 몸이 좋다.
저녁 잘 시간이면 적당히 잠도 잘 오고, 누우면 잠에 잘 드는 편이다.
어쩌다 새벽에 한번씩 깨더라도 쉽게 다시 잠에 들 수 있다.

나름 꽤 성공적인 것 같다.

딜레마

회사에서 이런 사람이 있다.
나는 Mike하고는 얘기도 안할래. 걔는 완전 엉망이야. 걔랑 일하는데에는 나를 끼워주지도 마라.

그 사람이 Mike에게 화가 난건 알겠는데…
대부분 그 사람이 그렇게 하면 완전 자기에게 손해다.
Mike가 미팅에 들어오면 아예 말도 안하고 꿍~ 하고 앉아서 그렇게 하고 있으면…
그 사람은 자신의 범위를 스스로 축소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그 Mike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사람이 있을때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그러나 공격적이지 않게 잘 해야 하는 것.

그 사람이 회사에서 엄청 높은 사람이어서 다들 자기 눈치를 보는 위치에 있다면 Mike에게 꿍하게 대하는 것이 공격이 되지만, 그 사람이 그렇게 높은 사람이 아니라면 꿍하고 있는 것이 그 사람에게 손해다.

나는…
조심스럽지만 지금의 한국-일본 관계가 그렇다고 본다.

미국 입장에서는 일본이 당연히 우선이다.
한국보다 일본이 훨씬 중요한 파트너이다. 뭐 속상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러니 어떻게든 일본-미국하고 자꾸 엮여가면서 한국의 영역을 확장시켜가야 한다.
자꾸 고립되어가며 영역을 축소시킬 것이 아니라.

한국은 일본이나 미국이나 중국등에게 엄청 배짱을 부릴만한 강대국이 아니다.
그렇다고 아주 아무 것도 없는 약소국도 아니지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일본의 과거 식민지배”라는 카드를 삐져서 이야기하지 않는데 활용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대화 속에서 우리가 우위를 점하는 카드로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감정적 반응보다는 전략적 대응이 우리에게 훨씬 더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의 보수는 전략도 감정도 없이 움직이고 있는 것 같고
지금 한국의 진보는 감정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당연히 외교와 정치쪽의 전문가 집단이 정부쪽에 있을 테고,
그분들은 아마 지금의 상황에 속이 터져 죽을 지경이겠다 싶다.

Holy Week – Easter

그 날, 곧 주간의 첫 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요한복음 20:19

나는 매우 자주,
교회에서 부활절 예배를 드리고나서 몰려오는 공허함에 힘들곤 했다.

40일동안, 그리고 고난주간 7일동안 말씀을 깊게 묵상도 하고,
여러가지 사색과 기도도 하면서 보냈는데…
막상 교회의 예배에서 그 부활의 기쁨과 소망을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집에 오게되는 일들이 참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하고나면 나 혼자서 한참동안 성경을 더 읽거나,
기도를 하거나,
심지어는 내가 내 스스로에게 하는 설교문을 써보는 일들을 해가면서 어떻게든 그 부활절을 그냥 보내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곤 했다.

예수님께서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Peace be with you”라고 하신 것은 참 아이러니컬하다.
사실 그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 있는 제자들 입장에서,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이 엄청난 충격이고 한편 기쁜 일이긴 하지만…
이들에게 ‘평화’는 온전히 있지 않기 때문.

아니,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는데도 아직 그 평화가 충분하지 않다니…

그래서 이 본문의 바로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예수님의 plan은 그냥 그 제자들에게 이 다음 일들을 일임하시는 것 같아 보인다.

그리고 plan B는 없다.

이 땅에 살면서 부활절 예배를 드리고 나서도 그 부활의 기쁨이 충분히 담기지 않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할수도있겠다.
아직 그 평화가…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 충분하지 않는 것.

그렇지만 할 일은,
그럼에도 몸부림처가며 그 부활을 인지하고, 그 부활을 받아들이고, 평화를 누리며, 그렇게 사는 것.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을 세상으로 보내신다.
부활을 알지 못하는 세상 속으로.

Holy Week – Saturday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요한복음 20:1a

Holy week의 토요일은 거의 매년 내게 있어 내 삶을 제대로 반추해보게되는 날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토요일의 세상이기 때문.

금요일을 고통이 계속되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막상 그 금요일의 고통의 흔적이 생생하게 우리를 지배하고 있고,
그러나 아직 부활의 영광이 온전히 찾아오지는 않는 것 같은 날.

아직 그래서 세상은 어둡고,
우리 삶도 그 안에서 어둡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부활의 영광을 고대하지만,
금요일의 아픔이 여전히 짓누르고 있는 현실.

아직 어둡다.
아직 아프다.
여전히 무겁다.
그렇지만 새벽이 오고 있다.

Holy Week – Good Friday

그 때에, 나는 노래를 지어,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련다.
감사의 노래로
그의 위대하심을 알리련다.
이것이 소를 바치는 것보다,
뿔 달리고 굽 달린 황소를
바치는 것보다,
주님을 더 기쁘게 할 것이다.
온유한 사람들이 보고서
기뻐할 것이니,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아,
그대들의 심장에
생명이 고동칠 것이다.
주님은
가난한 사람의 소리를
들으시는 분이므로,
갇혀 있는 사람들을
모르는 체하지 않으신다.

시편 69:30-33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심을 묵상하는 절정의 날에,
시편 69-30-33을 선택한 브루그만의 판단에 나는 별로 동의하기 어려웠다.

사실 시편 69편 바로 앞에 보면 고난받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니, 그 앞부분을 묵상하도록 해야 더 좋은 거 아닌가?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결국 그 예수님의 고난이 가리키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인데…
예수님의 고난은 예수님의 고난 자체에 머물러 있도록 요청하지 않으신다.

그 고난이 이야기하는 흐름의 다음 step에는,
고통 받는 사람들, 소망 없는 사람들에게 소망이 되신다는 것이 있는 것.

정말 세상에는…
자신의 노력으로 소망을 발견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부유하거나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노력에 소망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 훨씬 어렵긴 하지만,
의외로 그런 사람 중에서도 그런 자각을 하게되는 사람이 있는 것 같긴 하다.
그렇지만 물론 자신의 노력으로 소망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들은,
정말 낙오한 사람들, 힘 없는 사람들, 아픈 사람들, 상처 받은 사람들이다.

예수님의 고난이 그런 사람들에게 소망이 된다는 것이 명확해질때에야 비로소,
예수님의 고난이 부유하거나 권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소망이 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게 되는 것.

세상의 아픔과 고난에 대해 아무말도 할 수 없는 교회는,
세상의 아픔과 고난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는 교회는,
그러므로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는 교회인 것.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
정말 그분께서 온 세상에게 소망이 되시고자 돌아가셨다.
그것에 정말 소망이 있다.

Holy Week – Maundy Thursday

주이며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겨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과 같이,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요한복음 13:14-15

예수님께서 발을 씻겨주시면서 ‘새 계명’을 주신 것을 기념해서 이 고난주간 (Holy Week)의 목요일은 Maundy Thursday 라고 불리기도 한다. (Maundy는 라틴어로 commandment를 가리키는 mandatum으로부터 유래되었다고)

예전에는 나는 이 Maundy Thursday를 기념하는 것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더 깊이 묵상하는데 약간의 distraction이 된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정말 예수님의 고난의 본질이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보면,
서로의 발을 씻어주지 않는 세상으로부터 배척당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발을 씻어주시면서 너희는 나를 따라서 해라. 세상에서 하는 것 같이 하지 말아라… 고 말씀하신 것.

예수님께서 발을 씻어주시고 그 후에 음식을 제자들에게 먹이신 것은 그렇게 보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분이 선포하시는 하나님 나라가 무엇이고, 우리에게 어떤 삶을 요청하시는가 하는 것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사건이다.

얼마전 성경공부 시간에,
이렇게 사는 사람들을 정말 실제로 얼마나 보느냐는 질문을 나눈 적이 있었다.
정말 다니고 있는 교회에서, 알고 있는 사람들중 그렇게 자신을 포기하고, 다른 이들을 위해서 자신을 내어주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느냐고.

미국 전역에서 여러 교회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나오는 대답은… 침묵이었다.

지금 교회는 더 힘차게 복음을 선포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무너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복음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었다는 그 복음.

Holy Week – Wednesday

지금은 이 세상이 심판을 받을 때이다. 이제는 이 세상의 통치자가 쫓겨날 것이다. 내가 땅에서 들려서 올라갈 때에, 나는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어 올 것이다.

요한복음 12:31-32

심판은 무엇이 옳고 그르다는 것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사건이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이 옳고 그르다는 것을 명확하게 드러내시게 된다.
그분이 하나님의 임재이시고, 하나님이 통치이시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배척의 대상이 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분께로 달려가야하는 희망의 대상이 된다.

나는…
점점…
더 많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하는 그룹에 속해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결국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것에 머무르고 있는 그 종교는,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을 배척했지만
지금도 그 예수님을 배척하고 있다.

Holy Week – Tuesday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믿음에서 오는 모든 기쁨과 평화를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주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여러분에게 차고 넘치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15:13

소망을 찾으려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그 소망이 없으면 절망하며 의욕을 잃게되곤 한다.

기독교가 그렇게 절박하게 소망을 찾으려는 사람에게 하는 이야기는,
너희가 찾는 그 소망이 헛되다는 것.
그리고 그것과는 다른 ‘대안적 소망’이 있다는 것.

그러니…
나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consumerism으로 가득찬 교회는 그 복음의 본질을 잃어버린 것이다.

세상이 알지 못하는 소망,
예전에는 꿈조차 꿀 수 없었던 소망,
대안적 소망.

그것이 우리 예수님께서 살아내셨고, 보여주였고, 말씀하셨던 소망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죽으시기까지 하셨고. 부활하셨고.

대안적 소망

Holy Week – Monday

여러분은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이 되어서, 내 기쁨이 넘치게 해 주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지,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자기보다 서로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또한 여러분은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 주십시오.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2-8

이 구절은 예전에 개역성경으로 달달 잘 외었던 구절이다.
너의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하나님의 나라를 갈망하던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는,
그 왕이 자기 권리를 버리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

나의 꿈을 찾으려하고, 내 권리를 찾으려 하고, 내 자신을 나로부터 발견하려고하는 모든 시도는 그런 의미에서 반기독교적이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유사 힌두교회(?)가 있다.
그 이름은 Church of Self-Realization.

내가 아는 어떤 형이 그 이름을 보고는, 아니 저렇게 모순적인 이름이 어디있어! 라고 이야기했다.
정말 그렇다.

‘나’를 중심에 놓고 세상을 해석하려는 시도가 가득한 이 세상 속에서,
나를 비우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은 참 어렵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말 나를 찾을 수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