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Week – Good Friday

그 때에, 나는 노래를 지어,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련다.
감사의 노래로
그의 위대하심을 알리련다.
이것이 소를 바치는 것보다,
뿔 달리고 굽 달린 황소를
바치는 것보다,
주님을 더 기쁘게 할 것이다.
온유한 사람들이 보고서
기뻐할 것이니,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아,
그대들의 심장에
생명이 고동칠 것이다.
주님은
가난한 사람의 소리를
들으시는 분이므로,
갇혀 있는 사람들을
모르는 체하지 않으신다.

시편 69:30-33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심을 묵상하는 절정의 날에,
시편 69-30-33을 선택한 브루그만의 판단에 나는 별로 동의하기 어려웠다.

사실 시편 69편 바로 앞에 보면 고난받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니, 그 앞부분을 묵상하도록 해야 더 좋은 거 아닌가?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결국 그 예수님의 고난이 가리키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인데…
예수님의 고난은 예수님의 고난 자체에 머물러 있도록 요청하지 않으신다.

그 고난이 이야기하는 흐름의 다음 step에는,
고통 받는 사람들, 소망 없는 사람들에게 소망이 되신다는 것이 있는 것.

정말 세상에는…
자신의 노력으로 소망을 발견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부유하거나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노력에 소망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 훨씬 어렵긴 하지만,
의외로 그런 사람 중에서도 그런 자각을 하게되는 사람이 있는 것 같긴 하다.
그렇지만 물론 자신의 노력으로 소망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들은,
정말 낙오한 사람들, 힘 없는 사람들, 아픈 사람들, 상처 받은 사람들이다.

예수님의 고난이 그런 사람들에게 소망이 된다는 것이 명확해질때에야 비로소,
예수님의 고난이 부유하거나 권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소망이 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게 되는 것.

세상의 아픔과 고난에 대해 아무말도 할 수 없는 교회는,
세상의 아픔과 고난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는 교회는,
그러므로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는 교회인 것.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
정말 그분께서 온 세상에게 소망이 되시고자 돌아가셨다.
그것에 정말 소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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