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아니되옵니다…

몇년 전,
내 manager가 layoff를 당한 일이 있었다.

나는 그 manager (A 라고 하자)를 아주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그 사람과 호흡을 맞추어가며 일을 하고 있었다.

A가 layoff되었다는 이야기는 A로 부터 직접 들었다.
우선 회사전체에… 이번에 layoff가 있다. 이번에 layoff된 사람들은 그 사람들에게 개별적으로 통보했다고 announcement가 나왔다.

그 후에,
A가, 팀의 사람들을 함께 모아놓고, “나 이번에 layoff 당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팀에서 다른 한 사람도 layoff에 포함되었다.

다들 그 사람이 그렇게 된것에 대해 뭐라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한 채 그저 묵묵히… 앉아있는데, 같은 팀에 있던 B가 그럼 자기의 manager는 누가 되느냐, 자기는 어떤 팀으로 가느냐, 자기가 하던 일은 어떻게 되느냐… 등등 모두 ‘자기’에 대한 질문들을 쏟아 놓았다.

힘든 표정으로 자신의 layoff 소식을 이야기하던 A에게 B가 하는 행동은… 그냥 보기에 너무 기가 막혔다.

아니, 물론 너도 너 자신에 대한 불확실성이 있고 그것이 궁금할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당장 이렇게 어려움을 당한 A를 위로해줘야 하지 않겠냐…

다행히도 다른 팀 사람들이 B의 이기적인 질문들을 살짝 무시하면서 A를 모두 함께 위로해주고, 너와 함께 일 할 수 있어서 좋았다는 이야기를 해주면 격려해주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A는 그 후 다른 회사로 갔고, 나는 A와 그 후로 다시 연락을 거의 잘 하지 않고 지낸다.
하지만 B는 여전히 지금 회사에 남아있고, 나는 B와 함께 일하는 일들이 여전히 많이 있다.

그렇지만 나는 A가 어렵던 그 순간에 B가 보여줬던 그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나는 여전히 B를 함께 일할 동료로 생각하고, 그 사람을 존중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그렇지만 B를 그렇게 신뢰하지는 않는다.
이 사람은 내게 어려움이 닥쳤을때 그저 자신의 필요와 문제만을 챙길 이기적인 사람이다.

회사에서 B를 매우 자주 만나지만,
B를 만나면 인사도 하고, 농담도 하지만…
또 B가 잘 한 일들에 대해 감사를 표하기도 하고 칭찬을 하기도 하지만…
B를 믿지는 않는다.

그러면 아니되는 것이다.

Professionalism

프로페셔널리즘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하는 것은 조금 큰 논의가 되겠다.
그렇지만 최근 내가 경험한 프로페셔널리즘에 대해 생각하게된 일이 있었다.

지난달에 우리와 함께 일하는 B 회사의 여러 사람들과 함께 출장을 가게 되었다.
그쪽 회사의 중요한 opinion leader들과 엔지니어들이 함께 가게 되었다.
그중 A라는 사람은 그 그룹의 리더이다.

그런데 A라는 사람은 그 전에 다리를 살짝 다쳐서 다리가 아직 좀 불편한 상태였다. 골절이 있었는데 캐스트를 풀기는 했지만 아직 많은 거리를 걷거나 하기에는 어려운 상태.
게다가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우리가 출장을 가 있는 도중 A의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을 해 있는 상태였다. 정확하게 어떤 일인지는 모르지만 A가 나보다 나이가 조금 더 많으니 A의 아버지도 연세가 많으실 것.

A는 우리가 함께 하는 출장 기간 동안에 자신의 다리가 불편한것이나,
그 아버지가 편찮으신 것을 ‘공적으로’ 표현하지 않으면서 자기가 해야하는 일을 아주 성실하게 제대로 해내었다.

함께 꽤 먼 거리를 걸어야 하는 일이 있었는데도 자신 때문에 그룹이 뒤쳐지지 않게 배려해가며 열심히 걸었고, 나중에 자신의 아버지가 편찮으신 것 때문에 해야하는 일이 지장받게하는 일은 없었다.
나중에 밤에 잠을 잘 자지못한 것을 이야기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걱정 때문에 그랬노라고 이야기해서 그때야 알게 되었다.

자신이 처해있는 개인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해야하는 일들을 해내는 것은 프로페셔널리즘의 하나의 덕목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보면,
프로페셔널리즘이란 자신이 해야하는 일을 ‘분리’할줄 알고,
그 일이 자신의 감정적 상태에 영향을 받지 않게 하는 것을 포함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일에 자신을 갈아넣는 모습은 프로페셔널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KOSTA Open Chat

금년에 KOSTA Open Chat이라는 프로그램을 새로 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성경에 대해서, 믿음에 대해서, 모임에 대해서, 교회에 대해서 여러가지 질문과 회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모임이다.

워낙 신뢰할만한 훌륭한 분들이 인도를 맡아주셔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참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들도 대단히 진지하다.

그중에는 스스로를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이야기한 사람들도 있고,
교회에 다니고 있지 않은 사람들도 있고,
믿음을 떠나는 과정중에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직 모임이 진행중이고,
나름대로 나도 조금 더 곱씹어봐야 하겠지만…

몇가지 생각

  1. 정말 이거 시작하길 잘했다.
  2. 이 인도자들은 정말 precious하다! – 이분들 clone하는 기술이 있다면 그러고 싶다!!! 정말 눈물 쑥 빠지게 감사하다.
  3. 이렇게 들어오는 사람들중 어떤 사람들은, 절대로 대부분의 교회는 다니지 못하겠구나… 젊은 사람들이 그럼에도 교회에 다녀주는 것이 안쓰럽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하다.
  4. 어쩌면 내게도 이런 모임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

아직 마지막 세션 (교회에 대한 Open Chat) 등록을 받고 있으니, 혹시 관심있는 분들은 서두르시길.
(몇자리 남아 있으니)
KOSTA Open Chat

아주 흥미로운 생각 하나

내가 하고 있는 생각을 재검검 해보는 것에 대한 흥미로운 철학적 논증.

이것에 대한 두가지 내 생각.

소위 무한 루프에 빠지는 메타-인지가 해답없는 질문이 된다는 것에 대한 나의 해답은 초월성에 대한 인정이다. – 내가 유신론자인 이유.

또,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내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많은 이야기를 하긴 하는데, 그 이야기가 전달되지 않는, 정리되지 않는 기독교의 리더들이 다시 생각해봐야 할 포인트.

언어의 독점과 버블

소프트웨어 개발을 하는 사람들을 ‘개발자’라고 부르는 것은 불합리한 언어의 독점이다.
부동산을 개발하는 사람도 있고, 여러가지 비지니스를 개발하는 사람도 있고, 하드워에를 개발하는 사람도 있고, 관계를 개발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말이다.

유튜브에서 어떤 contents를 올리는 사람들을 ‘크리에이터’라고 부르는 것 역시 불합리한 언어의 독점이다.
음악, 미술, 글 등 다양한 영역에서 창조활동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말이다.

….

반면 그런 언어의 독점은,
그 사회에가 그 언어를 독점적으로 그 특정 일부가 쓸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으로 보아,
그 특정 일부 분야들이 과대표될만큼 지나치게 주목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의미에서…
그냥 내 대략적인 생각은,
개발자(소프트웨어 개발자)나 크리에이터(youtube contents creator)에는 일종의 ‘버블’이 이미 있다고 생각한다.

Another thank you

Grace Chapel의 Bryan Wilkerson 목사님이 내년에 은퇴를 한다고 한다.
Grace Chapel은 우리가 보스턴에 있을때 다녔던 교회이고, 그분의 가르침은 내게 매우매우 큰 영향이 끼쳤다.

그분과 대화를 나눈 것은, 교회 로비에서 그냥 hi 하고 인사 한두번 한 정도이고, 그분이 당연히 나를 기억하실리 만무하지만…
내 삶의 up&down을 그분의 설교와 함께 했다.

지금도 아내와 함께 Grace Chapel 온라인 예배를 주일 예배로 드릴때가 꽤 있기도 하고,
그분의 설교는 그 교회를 떠난지 20년 가까이 되었는데도 지금도 거의 매주 빼놓지 않고 듣고 있다.

지난주 설교에서,
자신은 local church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존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중 하나라고 이야기했다. – 이게… 그냥 나이 많은 목사님이 교회가 중요하니까 교회에 우선권을 두라고 이야기하는 tone이 아니었다. 자신은 지역교회가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지역교회를 위해서 쏟아왔다는 자기 고백이었다.

그리고는,
교회가 내부지향적으로 되는 위험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세상을 사랑하고, 그 세상을 섬기는 교회에 대한 강조를 했다.

Bryan 목사님 감사합니다.
당신의 많은 설교가 저를 그리스도인으로 살도록 지켜주었습니다.

나도 멋지게 죽고 싶다

Tim Keller가 세상을 떠났다.
그분의 설교와 글들은 내게 아주 깊고도 깊은 영향을 주었고, 그분의 도움을 정말 나는 많이 받았다.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날,
그 가족들과 함께 기도를 많이 했고, 이제 곧 예수님을 볼것을 기대한다. 가고 싶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I can’t wait to see Jesus. Send me home.)

몇년전에 세상을 떠난 Eugene Peterson은 마지막으로 “Let’s go”라고 말했다고.

몇년전 빌립보서를 공부하면서 어쩌면 죽음을 맞닥드리고 있는 바울이, 끝까지 “finish well”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나는 몹시 인상 깊었다.
그분은 자신이 살아온 것의 연장 속에서 죽음을 이해하고 있었고,
그 죽음 이후의 모습 역시 지금의 연장 속에서 이해하고 있었다.

그것은 다르게 보면,
그분이 살고 있는 현재의 모습이 죽음 이후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에서 현재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나중에 Tim Keller 목사님을 직접 뵐 일이 있다면,
꼭 이 말씀을 드리고 싶다.

참 감사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데 말로 다 할 수 없는 많은 도움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상 떠나는 모습까지도 제겐 배우고 싶은 모델이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그분의 많은 책들 가운데 한권에 그분의 사인을 받고 싶다. ^^

요즘의 경험

요즘 블로그에 왜 그렇게 교회와 교회지도자 혹은 목회자들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를 많이 쓰느냐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내가 계속해서 접하는 사람들과의 대화 때문일 것 같다.

계속해서 나는 교회에서 상처받은 사람들, 더 이상 교회를 나가지 않는 사람들, 기독교의 경계에 있는 사람들과 여러 interaction을 하고 있다.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보면… 아… 정말 몹시 난감하다.
나는 웬만하면 다니는 교회에서 나오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 너무 심한 상황으로 힘들어 하는 사람에게, 일단은 네가 살아야 한다. 어떻게든 그 교회에서는 나와라…라고 이야기해야만하는 상황도 있다.

하는 질문들을 듣다보면 심하게 왜곡되어있는 목회자들의 신학을 쉽게 접한다.

그러다보니 어쩔 수 없이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되고, 그런 글을 많이 쓰게 되는 것 같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사람에게 마음이 상해서 그러고 있다거나, 어떤 특정인을 공격하려고 하는 건 당연히 아니다.

어떤 이들에게, 그 교회로부터, 그 목회자로부터의 구원이 정말 필요한 상황인 것 같다.

진실와 경험

개나리가 노랗다는 것은 ‘진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돌연변이로 흰색을 가진 개나리를 보았다면 그 사람에게 흰색 개나리는 ‘경험’이다.

그렇지만 그 사람의 ‘경험’이 ‘진실’을 뒤엎을 수는 없다.
다만 그 ‘진실’에 예외가 발견되었을 뿐이다.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신앙이 이야기하고 있는 ‘진실’들이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어떤 ‘경험’들을 하면서 살아간다.

대부분의 경험들은 그 ‘진실’을 잘 세우는데 도움이된다.
그렇지만 어떤 경험들은 그 진실을 대표하기 어렵다.
그 진실 내에서 하나의 분류로 인식되거나, 아니면 그 진실의 예외일 뿐이다.

설교를 듣거나, 기독교 간증서적 같은 것을 읽거나, 기독교 계열의 강연 같은 것을 듣거나, 하다못해 교회 주보에 나와있는 목회자 컬럼 뭐 그런것들을 읽을때…
그냥 흰색 개나리를 보았을 뿐인데 개나리가 흰색이라고 우기는 것들을 자주 접한다.

대부분은 그분들을 내가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니까 뭐 그냥 그렇게 짧은 글 읽고 지나가지만….
그분들의 그런 오해는 정말 많은 어그러짐(distortion)을 낳고 있는 듯 하다.

스탠리 하우어워즈가 했던 말.

“사람들은 의대의 교육을 신학교의 교육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잘못 교육받는 의사가 그들을 해친다는 것을 믿고 있지만, 잘못 교육받은 목회자가 그들을 해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도 명예도…

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대한민국의 국가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 가사가 너무 전투적이 아니냐고 이야기할 사람도 있는데…
프랑스 국가 가사를 들어보면 완전 장난 아니다.

가자, 조국의 자녀들아,
영광의 날이 왔노라!
우리에 맞서 저 폭군의
피 묻은 깃발이 올랐도다, (반복)
들리는가, 저 들판에서
고함치는 흉폭한 적들의 소리가?
그들이 턱밑까지 다가오고 있다,
그대들의 처자식의 목을 베러!

임을 위한 행진곡 정도면 정말 점잖은 수준인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