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산업의 부흥?

나름대로 나도 한때는 반도체 공정쪽의 일을 했던 사람인데… ㅎㅎ

사실 한국에서 석사는 그 당시 ‘차세대’ 메모리 반도체에 들어가는 capatitor 재료에 대한 것을 했었고,
미국에서 박사는 반도체를 만드는데 꼭 필요한 플라즈마 에칭공정에 대한 것을 했었다.

사실 내가 한국에서 석사를 마친 실험실 졸업한 사람들의 아주 대다수가 반도체 회사에 갔고,
미국에서 박사를 마친 실험실의 졸업생중 아주 다수는 역시 반도체 관련 회사들에 갔다.

그런데 내가 박사를 마칠때쯤에는 벌써 반도체관련한 것들은 살짝 좀 유행이 지난 분위기가 있었다. 그때는 한참 ‘나노 테크놀로지’라는 것이 hot하게 느껴지던 때여서 나 같은 쪽을 연구하는 사람들도 나노 테크놀로지를 한다고 박박 우기는 경우도 꽤 있었다. 나도 졸업을 하면서 job을 찾을때 내 resume에 nanotechnology라는 것을 억지로 넣어서 썼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지난주에 Biden 대통령이 앞으로 반도체 생산과 연구 개발등에 $52 Billion (한국 돈으로는 67조 정도 되는건가)을 지원하는 법에 서명을 했다.
이게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아마 미국의 여러 학교등에서도 반도체관련 게다가 반도체 공정관련 연구비가 엄청나게 뿌려지지 않을까 싶다. 그러면 그렇게 돈이 몰리면 그쪽으로 사람도 많이 뽑을 가능성도 많고.

그런데 문제는…
적어도 내가 판단하기에…
미국의 주요 연구중심 대학들에서 전통적인 반도체 공정쪽으로 연구를 하는 사람들은 정말 극소수다. 그리고 아마 그 사람들도 대개 지금은 나이가 꽤 많을 것 같다.

가령, 내 박사과정 지도교수는 그야말로 전통적 의미로 반도체 공정쪽을 연구했던 사람인데, 그 제자로서 교수를 하는 사람들중 반도체 공정쪽을 계속 하는 사람들은 사실상 없다.

이게 어떻게될지는 정말 잘 모르겠는데….
정말 이렇게 해서 미국에서 반도체를 만드는 여러가지 환경들이 다시 갖추어질 수 있을지…
솔직히 나는 꽤 회의적이다.

은혜

“Grace is not opposed to effort, it is opposed to earning. Earning is an attitude. Effort is an action. Grace, you know, does not just have to do with forgiveness of sins alone.”

Dallas Willard

기독교가 은혜의 종교라는 것은 대단한 선언이다.
그러나 그 은혜가 우리의 책임과 행동을 필요로하지 않는 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은혜의 반대말은 ‘노력’이 아니다. 은혜의 반대는 ‘내가 열심히 해서 얻었다는 자세’이다.
기독교에서 노력이 실종되어버린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왜 화를 내지 않지?

내가 한국 뉴스를 그냥 좀 띄엄띄엄 보고 있기도 하고,
더군다나 나는 facebook이나 다른 경로로 사람들의 생각들을 듣는 경로가 막혀 있어서 잘 모르고 있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내가 그냥 생각하기에,
이번에 반지하에서 사람들이 희생된 사건과 세월호 사건이 비슷한 점이 꽤 많은 것 같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을때 그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의 답답함과 무거움이…
반지하에 있는 사람들의 비극을 접하면서 몰려온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이번에는 그렇게 분노하지 않지?
이건 아니라고 좀 이야기해봐야 하는거 아닌가?
그냥 그건 그 사람들의 가난 때문이니 어쩔 수 없는거라고 그냥 그렇게 여기고 있는 건가?
그저 ‘공정한 경쟁’만 주어지면 세상이 공정해지고, 그러면 그 공정한 경쟁에서 뒤쳐진 사람들은 버려져도 된다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여전히 고용상황은 좋은건가?

큰 실리콘밸리의 회사들은 확실히 엔지니어들을 덜 뽑는다.
그런 확실한 것 같다.
그런데, 여전히 low-to- mid-range의 소득을 받는 position들은 아직도 계속 사람을 뽑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미국에서도 정말 많은 경우에,
사람이 부족해서 시설을 다 돌리지 못하는 경우가 정말 많고,
음식점에서 일하는 사람들, 수퍼마켓에서 일하는 사람들 등등 구하기는 여전히 대단히 어렵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로 뭔가를 만들어내는 제조업에서 일할 사람을 채우는 것도 많이 힘들다는 이야기를 여러곳에서 듣는다. 이게 조금 힘든 정도가 아니고, 아주 심각한 수준으로 사람이 부족하다.
내가 캘리포니아에 있는 PCB를 만드는 회사와 일을 최근에 조금 했는데, 정말 사람이 없어서 line을 돌리지 못하고 있다는 거다. 그러면서 그 사람도 힘들다고 엄청 볼멘소리를 한다.

나 같은 수준에서는,
지금 돌아가는 경제의 상태가 어떤건지 도무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아니 recession이 오고 있다면서 왜 사람은 계속 뽑는거고, 왜 사람 뽑기는 지금 이렇게 계속 어려운거야.
이렇게 다들 사람 뽑는게 어려운데 이게 recession일 수 있는건가?

힘을 숭상함

회사에서 일을 하다보면,
아니 뭐 회사일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냥 살아가다보면,
그저 자기가 해야할 일을 제대로 해내는 사람들이 참 소중하다는 생각을 하게되곤 한다.

뭐 하나 부탁했는데 제대로 못해내거나,
약속한대로 일을 하지 못하거나,
여러번 말해도 말을 못알아들어먹거나…
그런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것, 아니 그냥 그런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자체가 매우 힘든 경우가 많다.

에이, 그럴바엔 그냥 내가 하지… 그렇게 되어버리는 때가 많은데…

그러다가,
그냥 자기가 해야하는 일을 제대로 해내는 사람들을 만나면 어찌나 반가운지!
아… 속이 확~ 풀리곤 한다.

그렇게 자기 일을 충실하게 잘 해내는 사람들은 결국 많은 사람들에게 참 유용하면서도 도움이 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사랑하기위해서는 그런 힘과 능력이 필요한 것이라고 이야기할수도 있을 텐데…

그런데 그럴때 내 갈등은,
내가 그저 능력, 혹은 힘을 숭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내가 복음을 이해함에 있어 요즘 가장 깊이 고민하고 있는 문제이다.

직접적으로 비판하기

때로는 너무 속터지도록 답답한 상황이 있는데,
그걸 직접적으로 비판하기 보다는 에둘러서 혹은 비유나 은유로 글을 쓸때가 있다.
대개는 어쩌면 그 본인이 내 글을 읽을지도 모른다는 걱정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고…
그냥 너무 직접적으로 신랄한 비판을 하는 것이 뭔가 너무 심한게 아닌가 싶어서 그렇게 한다.

자칫 비판은 내가 마치 괜찮은 사람이라도 되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한다.
비판함으로써 일종의 비뚤어진 우월감을 갖게되는 것이다.
내가 직접적으로 신랄한 이야기를 쓰고 싶어하지 않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내가 그런 비뚤어진 우월감에 빠지고 싶지 않아서 이기도 하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내가 이 블로그에서 그렇게 쓰는 글의 의미를 잘 찾아내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 듯 하다. ㅎㅎ

그래서 요즘 하는 생각은,
그냥 조금 더 비판을 직접적으로 하는 시도를 해보아야 겠다는 것.
다만 그러는 중에 내가 망가지지 않도록 무지하게 노력을 해가면서…

여유로움과 사랑

시간에 쫓겨살면서 빠지기 쉬운 가장 큰 함정은,
사랑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싶다.

많이 바쁘고 시간에 쫓겨 살면, 아무래도 그것들 속에서 <<내가>> 생존하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결국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자꾸 잊게 된다.

조금 더 신앙의 고수가 되면,
웬만큼 바빠지는 것으로는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게되는 경지에 이르게 될까…

수염을 못 깎겠다 ㅠㅠ

벌써 수염을 기르게된게 10년도 넘은 것 같다.
처음 수염을 길렀을때는 내가 아시아에 있는 회사와 일을 하는데 어느정도 나이들어 보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시작했다.

그러나 이제는 수염을 깎아도 어리게 보일 것 같지 않은데….
그래도 수염을 깎는 것이 좀 이상할것 같다.

그게…
날이 갈수록 머리숱이 줄어들고 있어서 뭔가 주의를 분산시킬 필요도 있고,
이제는 수염을 깎으면 사람들이 낮설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그런데 무엇보다도 수염을 깎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매일 면도를 하는 것이 엄청 귀찮을 것 같다.
그냥 일주일에 한번정도 조금 잘라주는 정도로만 해도 되니 수염을 길르는 것이 훨씬 더 편한 것 같기도 하고.

공개일기

지난주 KOSTA follow-up 세션을 하는 중에,
김교신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분이 성서조선에 쓰신 ‘공개일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내가 처음 이 블로그를 하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김교신 선생이 공개일기를 쓰신 것을 따라해보겠다고 한 것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공개일기를 쓰기시작한지 14년 정도 되었다.

나는 당연히 김교신 선생과 같은 분에게 비교할 만한 사람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고,
내가 쓰는 이 공개일기가 그분이 쓰셨던 것 만한 수준이나 가치가 있을수는 없겠다.

그렇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14년전에 이 블로그를 시작했을때보다 지금의 나는 많이 성장한 것 같다.

나이 40에 블로그를 시작해서 그로부터 14년동안 이 글을 쓰면서 성장할 수 있었다면…
적어도 내 이 공개일기 프로젝트는 어느정도 성공하고 있는 것 같긴 하다.

참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아주 아주 오랜만에…
내가 내 자신을 칭찬해본다.

신앙의 스승들

내가 20대, 30대에 그분들의 저작들을 읽으며 많은 도움을 얻었던 분들이 이제는 세상을 많이 떠나고 있다.
지난 주말, Ronald Sider가 돌아가셨다는 뉴스를 듣고는 정말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Ronald Sider, John Stott, James Packer, Eugene Peterson, Dallas Willard 등등.

엄밀하게 말해서, 내가 당연히 그렇게 즐겨 읽었던 그분들의 생각에 모두 동의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부터 내 생각이 더 evolve 해 오기도 했지만,
어쨌든 이분들은 내 20대-30대에 내 생각을 세우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분들이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지금 20-30대는 누구를 읽으며 그런 영감과 통찰을 얻고 있을까?
내가 Ronald Sider를 처음 접했을때는 아마 대충 Ronald Sider가 지금 내 나이 쯤 되었을 것 같다. 혹은 나보다 더 젊은 나이였을 듯.

그렇다면, 지금 20-30대가 읽으며 그렇게 통찰을 얻게되는 그런 50대 60대가 얼마나 존재하는가?

여러방면에서 늘 하게되는 생각이지만….
지금 내 세대는 내 바로 윗 세대로부터 참 많은 것을 받았다.
그런데 그것이 아랫세대로 발전된 형태로 흘러가는 것이 멈추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때가 많다.

내 생각엔,
전반적인 미국이나 한국교회의 기울어짐은 지금의 20-30대에서 멈추어질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최소한 한 세대정도 더 교회의 기울어짐이 지속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