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llas Williard

달라스 윌라드가 세상을 떠난지 거의 10년이 다 되어간다.
아주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고 볼수는 없겠지만,
요즘 기준으로는 일찍 떠난 셈이다. 80이 되지 못해서 세상을 떠났으니.

최근 여러가지 필요가 있어서, 달라스 윌라드의 명저 Renovation of the Heart를 다시 보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집에 보니 그 책이 없는거다

영어책은 ebook이 있는데, 한국어책은 ebook이 없었다.
한국어로 읽어보고 싶어서
인터넷 서점에서 주문을 한 후,
주말에는 달라스 윌라드의 강의들을 인터넷에서 찾아서 열심히 들었다.

일단… 이분이 철학자여서, 전반적으로 설명이 좀 어렵다.
말하자면 문장에 which, who, what 같은 ‘관계 대명사’가 많이 들어간다. 문장이 길기도 하고. 그래서 이분의 글이나 강의는 한번에 후루룩~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오랜만에 달라스 윌라드의 실제 육성을 들으니,
뭐랄까 예전에 배웠던 좋아했던 학교 선생님을 다시 만난 느낌이 든다. 괜히 더 친숙하고 반가운 느낌…

금요일에 COVID-19 booster 맞고,
토요일에 그 핑게로 누워서 빈둥빈둥…
그러면서 달라스 윌라드 강의들을 binge watching 했다.

최선을 다하기

내게도 up&down이 당연히 있었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 꽤 열심히 하는 건 잘 했던 것 같다.

일단 할 일이 많다 싶으면,
잠 줄이고, 무지막지하게 집중하면서, 그 일들을 부지런히 하는 식으로 많이 해왔다.

학생때 정말 열심히 공부할때는,
그냥 며칠씩 잠을 안잘때도 있었고,
실제로 고등학교때 이후 거의 50대가 될때까지 하루 평균 5~6시간 정도자면서 살았다.

뭔가 해도 안되는 것을 열심히 노력만으로 극복하려고 하는 것은 지혜롭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해도 되는데 그걸 안하는건 그냥 무책임한 것이다.

50대가 넘어서면서
밤잠의 깊이도 예전같이 충분히 깊지 않아서 예전보다는 더 긴 시간을 자야하게 되었고,
조금만 무리해서 운동을 하면 탈이나는 경우도 많고,
예전과같이 꾸준히 계속 ‘최대의 추진력’으로 사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예전보다는 쉬는 것도 더 해야하고,
잠도 더 자야하고…

그래도 내가 여전히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은,
계속해서 꾸준히 진실되게 최선을 다하여 사는 것이다.

적어도 내게있어 그렇게 끈질기게 최선을 다하는 가장 큰 동인 (motivation)은,
기준을 낮추지 않는 것이고,
기준을 낮추지 않게되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믿는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내가 절대 선이신 하나님을 믿고,
사랑의 궁극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기에,
내 노력이 항상 그에 미치지 못하고,
그러니 계속 더 그 부르심에 맞추어 살고자 최선을 다하면서 사는 것이겠다.

때로,
그 복음을 알고 나누는 사람들 속에서,
holy discontent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과 대화하다보면,
그냥 매우 낮설게 느껴지곤 한다.
그리고 어느 이상 그 사람과 더 대화를 할 수 없게되는 벽을 경험한다.

내가 만족하는 내 직업, 직업이 만족하는 나

직업이 만족하는 이라는 표현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영어로,
My job satisfies me, or I satisfy my job
이라고 쓰면 조금 더 말이 되려나.

그러니까,
내가 그 일을 하면서 얼마나 만족을 느끼고 사느냐 하는 것과,
그 위치에 주어진 일을 얼마나 제대로 해내느냐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

회사에서,
주어진 역할에는 큰 관심이 없고, 자기가 얼마나 그 속에서 만족하느냐를 따지며 사는 사이 있다면,
우아… 그거 정말 완전 재앙이다. ㅠㅠ

그런 사람이 팀에 한 사람 끼면, 팀 다 망치고, 완전 엉망.

그런데,
내가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어떨까?
내가 기독교인이 되어서 얼마나 내게 만족이 있느냐 하는 것과,
기독교인이된다는 기준에 내가 얼마나 만족시키고 있느냐 하는 것을 비슷하게 생각해볼 수 있지는 않을까?

기독교인들중, 특히 소위 ‘사역자’들중에서…
그 사람이 얼마나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하느냐 하는 것보다,
얼마나 그냥 그 속에서 내가 만족하느냐 하는 것에만 주로 관심을 갖는 사람도 정말 많다.

이거 완전 재앙아닌가?

No Masks?

지난주에 MD&M West 라는 큰 tadeshow / expo에 다녀왔다.
COVID-19이 퍼지기 직전, 2020년 2월에 다녀오고 2년만에 간 것이었다.

사람들이 아주 많이 모이는 큰 event였는데,
정말 놀라운 것은 사람들이 마스크를 거의 하고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스크를 하는 사람들의 부류는 대충 다음과 같다.

  • 계속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 – 가령 등록 접수를 받는 사람들이라던가, 그 컨벤션센터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마스크를 한 사람들이 더 많은 편이었다.
  • 아시아계 사람들 – 이건 아주 여전히 흥미로운 것이었다. 아시아계 사람들은 마스크를 쓴 비율이 훨씬 높았다.

하루는 우리가 함께 일하는 회사가 근처에 있어서 그 회사에 방문했었는데,
그 회사 사람들은 office에서 그래도 어느정도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그러니 모두가 다 마스크를 벗는 분위기는 아니지만, 여전히 어디서는 마스크를 쓰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사실 우리 회사 office에 가더라도 회사 내에서 계속해서 마스크를 쓰고 있는 사람은 사실상 없다.
출퇴근할때 쓰고, 잠깐씩 필요하다 싶을때 쓰기도 하지만, 자리에 앉아서 일을 할때는 대부분 마스크를 쓰고 있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마스크를 쓰는 것은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 바이러스를 더 확산시키는 것을 막는 일종의 이웃사랑의 실천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그런 의미에서 마스크를 벗어버리는 것을 조금은 주저하고 있다.

다들 너무 마스크를 안쓰니까,
회사에서도 그냥 사람들과 좀 떨어져있는 내 자리에 앉아 있을때는 마스크를 벗고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다른 사람들보다는 조금 더 마스크를 쓰고 지내는 것 같다.

Easter Paradox

2020년 부활절.
대단히 당황스러웠다.
부활절이 되었는데 다들 교회 예배당에 갈 수 없었다.
온 세계가 두려움과 혼란에 빠져 있었고, 앞으로 무엇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안드레아 보첼리가 밀라노의 텅빈 교회당 앞 광장에서 Amazing Grace를 불렀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안드레아 보첼리는 Amazing Grace의 마지막 구절,
I was blind but now I see. (나는 앞을 볼 수 없었으나 이제는 본다)을 아주 멋지게 불렀다.

나는 그것이 이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아주 강력한 부활절 메시지라고 생각했다.

텅빈 광장, 텅빈 예배당에서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이제는 보게되었다는 찬송을 부르는 것.

은혜

나는 교회에서 2014년, 2015년생들 (7-8살) 아이들 주일학교 교사를 하고 있다.

부활절에게 나름대로 꽤 정성을 다해서 예수님의 부활의 신학적 의미를 설명해 주었다.
부활절이라는 늘 있지 않은 기회를 활용해서, 아직 아이들이 어리긴 하지만 중요한 신학적 내용들을 설명해주고 싶었다.

나는 아이들과 공부를 하면서,
우선은 아이들이 재미있게 느끼도록 하는 것이 무조건 제 1순이다.
아이들이 나중에 커서 교회란 따뜻하고 즐거운 장소라는 인상이 남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이다.

그렇지만 한 두어달에 한번씩은 약간 더 아이들에게 좀 어려울 수 있는 이야기를 설명해주기도 하고, 복음의 핵심이라고 생각되는 이야기를 해주기도 한다.
그리고 아이들이 얼마나 그 복음의 핵심을 잘 이해하는지 확인해보기도 한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은혜’라는 개념을 쉽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일방적이면서도 상응하는 댓가를 지불하지 않는 선물이라는 차원에서의 은혜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것도 좀 어려워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은혜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이해시키는 것도 꽤 어렵다.

은혜에 대한 설명도 해주고, 여러가지 이야기도 다 해준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것이 왜 그러냐는 질문을 해보면,
여전히 우리가 착해야한다…는 식의 대답이 대부분이다.

이 아이들에게 그것이 그렇게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그것이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어제도 아이들에게 은혜와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해준 후에,
과연 나는 그 은혜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질문을 던져보았다.

성 금요일

적어도 지난 30여년 동안은,
고난주간이면 어떻게든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더 마음에 새기려고 노력을 해왔었다.

주로 많이 했던 것은,
고난 주간 내내 오전 금식을 하고 금요일 하루 금식을 하면서 식사시간에 대신 십자가를 묵상하는 것.
그리고 하루 종일 십자가와 관련된 찬송가를 많이 듣고 부르는 것.

예전에 너무 직장일로 바쁘던때에,
점심을 굶고는 대신 그 시간에 주차장에 있는 차에 혼자 가서 기도를 하고 찬송을 부르다가,
갑자기 십자가의 예수님 사랑이 넘치도록 마음에 느껴져 눈이 팅팅 붓도록 울었던 적도 있었다.

일주일 내내 금식도 하고 묵상도 했는데
아무런 감동도 없고 그냥 dry하게 지내다가,
그 부활주일 아침에 갑자기 예수님의 부활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하는 것이 마음에 확~ 다가오면서 미친듯이 기뻐하고 좋아했던 경험도 있었다.

물론 이렇게 나름대로 여러가지 생각도 하고, 묵상도 하고, 기도도 하고… 그렇게 했는데도,
그저 아무런 감동도 없이 그냥 지나간적도 많이 있었다.

올해는 갑자기 월요일부터 어제까지 출장을 가는 바람에 많이 집중해서 고난주간 묵상을 잘 하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이번주간에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내가 발견한 것은,
생각보다 내가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사는 삶으로부터 많이 떠나와 있었다는 것.
나름 열심히 예수님 잘 믿어보려고 노력하면서 살고 있음에도, 이렇게 쉽게 그 본질로부터 내 신앙의 기반이 drift away해갈 수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정말 오늘 하루,
더 간절히 기도하며 매달려 볼 작정이다.
제게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가 더욱 생생하게 느껴지게 해주십시오…
꼭… 그렇게 해주십시오….

눈물이 그렁그렁했을 베드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이야기는 복음서에 다 나온다.
그런데 베드로가 그렇게 예수님을 부인한 사실을 복음서 기자들은 어떻게 알았을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현장은 사실 베드로가 혼자서 몰래 간 것이므로 베드로밖에는 몰랐을 것이다.

베드로가 자신이 예수님을 부인한 장면을 이야기하면서 아마도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사람들에게 그랬을 거다. 그때 내가 우리 주님을 모른다고 사람들에게 그랬어. 내가 바로 이 입으로 그렇게 이야기했어…

십자가앞에서는 자랑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허물을 내려놓는 것이어야 하지 않나 싶다.

내가 무엇을 안다고, 떠벌이기 전에,
어쩌면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분량으로 십자가 앞에 선 부끄러운 나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왜 고통 당했나

예수님께서 처형당하신 그 십자가를 보며 많이 가슴아파하며 우는 것이 있지 않고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누리는 기쁨이 온전해지지 못한다.

그것은 결국 이런 아이러니를 가져온다.
십자가에서의 눈물 없이 기쁨 없다.

정말…
늘 울어도 그 큰 은혜 다 갚을 수 없다. 정말 그렇다…

영광

영광이라는 히브리어인 ‘카보드’는 글자그대로는 ‘무게'(weight)을 의미한다고 한다.

도대체 영광이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알고 싶어서 CS Lewis의 The Weight of Glory 라는 글을 읽어보기도 하였다.
한편 그분의 그 글이 좀 어렵기도 하였지만, 궁극적으로 거기서 이야기하는대로 영광이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notice 하시는 것’이라고 설명을 하는 것에는 다소 실망을 한적이 있었다.

또 예전에 내가 아는 어떤 목사님이,
자기는 ‘하나님의 영광’과 같은 주제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하고 이야기도 못하겠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고는 많이 속상했던 기억이있다.
아니, 목사님이신데…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고요?

어제 우리 교회 소그룹모임 (겨자씨 모임)에서 영광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그것을 ‘하나님의 존재감’이라고 이야기가 나왔는데, 나는 그게 참 마음에 들었다.
하나님의 존재감.

하나님의 존재감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만큼 극렬하게 나타난 곳은 없을 것이다.

그 십자가를 바라보면 결국,
나는 하나님의 그 강렬한 존재감에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