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탓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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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고대상 : 
[http://woodykos.tistory.com/859] [내 탓이오]

•  신고자  : 피해주장자의 대리단체(한국인터넷 선교네트워크) 

•  신고내용 : 명예훼손 게시물 삭제 요청 

•  조치일자 : 2013/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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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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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가 된 원글은 다음과 같다.

도대체 이 글의 어디가 그분들의 심기를 거슬렀을까?

문제를 제기한 한국인터넷 선교네트워크 라는 단체(?)는… 아는 사람은 다 아는….  ㅋㅋ

(그 분들이 불편하게 생각하시는걸 보면… 써야할 내용을 쓴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ㅎㅎ)

그런데 다시 읽어보니, 내용이 명확하게 잘 드러나도록 글을 잘 쓰질 못했는데… 



한국에서 내가 대학때, (대학원 때였던가?)
천주교에서 ‘내 탓이오’ 라는 스티커를 배포했던 적이 있었다.

내 생각이 어린 때여서,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을 잘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 스티커는 또렷하게 기억한다.

우리가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가슴이 터지도록 답답한 것들을 많이 본다.
정치가 답답하고, 교육이 답답하고, 청소년이 답답하고, 무엇보다 교회가 답답하다.

(나를 포함해서)
그것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과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상당히 cool 해 보인다.

가령, 무상급식의 예를 들어보자.
가난한 어린이들이 상처받지 않고, 음식을 먹을 수 있게 해야한다는 논리,
무상급식이 사람을 spoil 시키는 복지를 만들어낸다는 논리 등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그런데,
왜 이런것이 이렇게 큰 이슈가 되었는가?
이제는 ‘선진국’ 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한국에서 왜 식사를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에 대한 것이 이토록 뜨거운 이슈가 되어야 하는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우리가… 내가… 우리 사회를 그렇게 만들지 않았던가.
양육강식을 정당하게 여기고, 약자를 배려할줄 모르고, 다른사람에게 손해를 입히며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정당화 하며.. 심지어는 교회도, 그리스도인들도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우리 사회를 그렇게 만들지 않았던가.
그 논리와 생각이 모두 고스란히… ‘내 안에’ 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청소년들이 자살을 한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우리가 청소년들을 그렇게 키웠다. 공부만 잘해, 친구들 배려할 필요 없어, 좋은대학만 가… 라고 우리가, 내가, 우리 사회가, 심지어는 교회도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가르쳤으니… 우리가 우리 사회를 그렇게 만들지 않았던가.
그 논리와 생각이 모두 고스란히… ‘내 안에’ 있다. 

한국과 미국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 사회의 리더로 여겨지는 이들의 integrity 문제,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어쩌면, 바로 내 안에 있는 그 논리와 생각을 발견해내는 일이 매우 중요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웃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단순히 이웃의 문제가 아니고,
그 이웃과 엮여져 있는 우리의 문제이고, 나의 문제이다.
그 이웃을 고통으로 밀어넣고 있는 그 논리와 생각이 고스란히 내 안에 있다.

이웃, 또 다른 우리.

시편이 그래도 조금 읽혀진다!

예전에… 내가 이런 얘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도대체 시편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별로 논리적이지도 않고,

어떻게 분석해야하는지도 모르겠고…

올해들어서 계속 성경통독을 하고 있는데, (새해 결심중 하나. ^^)

원래는 올해 한해동안 2독을 하는 것을 목표로 시작했으나…

요즘 시편을 읽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1독하고 약간 시간어 더 남을 수 있을 것 같다. -.-; 쩝..)

그런데,

물론 대단한 깊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요즘 문득, 아… 시편이 읽혀진다… 이런 느낌을 갖는다. ^^

그래도 세월이 지나면서,

내가 이제는 시편이 읽혀질정도의 깊이는 된 것일까.

뭐 아직 갈길이 까마득하게 멀긴 하겠지만서두…

사치

나는,

내가 가진 많은 것들을 ‘사치’라고 많이 생각했던 것 같다.

인류 역사상 많은 사람들에 비해,

사실 정말 그렇다.

내가 대단히 부자는 아니지만,

늘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대로, 현재 이 지구상의 모든 인류에 비하면 여전히 대단히 많은 것을 소유하고 누리고 있는 셈이고…

모든 사람이 누리지 못하는 교육의 기회를 얻었고,

모든 사람이 누리지 못하는 문화적 혜택, 사회적 자유 등등을 다 누리고 있으므로.

그런 시각으로 보면,

나를 포함해서 소위 ‘서구사회’ 혹은 ‘선진국’에 사는 사람들은,

태생적으로 이기적이고 몰인정한 사람들이 된다.

(그리고 그런 시각은 사실 어느정도 일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미 인권, 자유, 문화 등등에 노출된 어떤 사람들에게는,

실존적으로…

그것이 사치가 아니라 필수요소가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가령,

어려서부터 부유한 환경 속에서 늘 자라오면서 경제적으로 절약하며 때로는 마음 졸이며 사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자라온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에게는, 꽤 풍족한 환경 속에서, 여러 문화적 경제적 혜택을 누리고 살면서도… 자신이 자라온 환경과 같이 살 수 없다는 것이 큰 어려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런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느끼는 각박함과 빈곤함 때문에 힘들어 한다면,

그 사람을 그저 비난할 것은 아니다.

동생과의 대화

최근,
내 동생과 나눈 대화가 머리 속에서 지워지질 않는다.

그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나는 근본적으로, 인간이 하는 결정 자체를 그렇게 많이 신뢰하지 못하는 편이다.
아니, 좀 더 좁혀서 이야기하면, 나 자신에 데헤서 내가 내리는 결정에 대해서 신뢰를 잘 못하는 편이다.
그것은 내 죄성, 비뚤어진 동기가 얼마나 내개 뿌리깊게 들어와 있는지 하는 것을 어느정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어떤때는, ‘circumstantial evidence’를 내 마음 속의 확신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가령,
내가 어떤 직장으로 갈까 하는 것을 고민하며 기도할때,
내가 가고 싶은 직장, 내게 끌리는 직장 을 선택하기 보다는,
여러 환경을 보니… 이렇게 인도가 되는 것 같다 고 느끼는 선택을 하는 것을 더 편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이야기하자…내 동생은 내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오빠는 민우가 어떤 삶을 살길 원하나.
creative하고, 자신이 가진 성품과 재능을 마음껏 누리고 그것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을 섬기며 사는 것을 바라지 않느냐.
하나님께서도 그렇지 않으시겠느냐.
예수를 그만큼 믿어 왔으면, ‘마음의 음성’을 좀 신뢰하고 결정해볼수도 있지 않겠느냐…

나는 내 동생에게,

나는 그럴 자신이 없다. 내 안의 성령께서 계신것을 알지만, 내 꼬여있는 죄성에 의해 지배당하는 가리워진 agenda를 피해나갈 자신이 없다.

라고 말했다.

동생과 그 대화를 나눈지 열흘이 더 되어 가는데,
아직도 마음 속에서 참 여러가지 복잡한 생각이 맴돈다.

동생과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게 참 감사하다.

살아있네! – 하나님을 신뢰하기

내가 대단히 오래 산 사람도 아니고,

또 내가 하나님을 잘 신뢰하면서 한평생 살아온 뭐 그런 사람도 아니고,

그래서 내 삶을 돌이켜보며 다른 이들에게 해줄 말이 있는 그런 사람은 더더욱 아니지만…

내가 주님과 동행했던 시간들을 돌이켜보면,

내가 가장 ‘살아 있었’던 때는,

주님을 깊이 신뢰했을 때였던 것 같다.

내가 뭐 대단한 security를 가져본 적은 없었지만, 그나마 그 security보다도 주님을 더 신뢰했을때,

내가 뭐 대단한 명예를 가져본 적은 없었지만, 그나마 그 명예보다도 주님을 더 추구했을때,

내가 뭐 대단한 성공을 거둔 적은 없었지만, 그나마 그 성공보다도 주님을 더 사랑했을때…

그리고,

때로는 매우 의도적으로 security, 명예, 성공등을 포기하는 결정을 했을때,

‘살아있구나’ 하는 것을 경험했던 것 같다.

주말에 쉬면서,

‘런닝맨’을 보다가 잠깐 든 생각. ^^

You May Leave Boston, but Boston Never Leaves You

보스턴에서 일어난 폭발물 테러 사건을 접하면서,

정말 마치 고향에서 일이 벌어진것과 같이 마음이 아팠다.

보스턴에서,

Patriots day면… 

긴 겨울이 끝나고 막 봄이 오는 시기,

학교가 다 쉬고,

오전 Red Sox 경기, 보스턴 마라톤…

그런데,

다음과 같은 기사를 누가 share했기에,

나도 여기에 share 한다.

(아마 내 아내나 민우에게 보스턴은 더 특별한 곳일텐데..)

You May Leave Boston, but Boston Never Leaves You

http://www.theatlantic.com/national/archive/2013/04/you-may-leave-boston-but-boston-never-leaves-you/275018/

말이 딸린다…

한참,

내 마음 속에 ‘불’이 있는 것과 같을때…

(사실 지금도 뭐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하긴 어렵다. ^^)

나는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하지 않으면 뼈가 녹는것과 같은 그런 느낌을 가졌었다.

예레미야서에서 나오는 것과 같이.

그런데,

이제 벌써 말씀사역을 하지 않은지 1년이 훨씬 넘은 지금,

(이렇게 오래 말씀사역을 하지 않았던 적이 예전에 있었다 싶다… 91년 이후로…)

요즘은 증상이 좀 다르다.

요즘은,

뭔가 발견하고 묵상하고 생각한 것을,

도무지 말로 표현할 방법이 없다고 느껴진다.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여러가지 생각들이 정리되어 말로 전달할 수 있을까.

며칠 블로그를 (거의) 쉽니다.

내일부터 두주동안 아시아에 있게 됩니다.

글 쓸 여건이 쉽게 생길 것 같지 않아,

두주동안 블로그에 글을 띄엄띄엄 쓸 예정입니다.

출장을 가면,

아침 6시 기상, 

30분 기도, QT

30분 밀린 이메일 처리

30분 운동

30분 식사, 몇가지 챙기기…

8시에 출근

그리고 내내 일하다가…

다시 호텔방에 10시-11시쯤 돌아와서,

역시 일을 좀 더 하다가 12시쯤 쓰러져 자는 일정을 반복합니다.

일과중엔 식사 시간도 찾기 어려울만큼 바쁘고요.

(뭐 출장 안갈때의 일정과 거의 비슷하긴 하군요. ^^)

혹시,

어쩌다 30분 여유가 생기면 그래도 글쓰기를 시도해보려고 합니다.

그럴 여유가 생기지 않게되면,

두주 후에 뵙겠습니다. 꾸벅~ 

(이건 만우절 이벤트 뭐 그런거 아닙니다. ㅋㅋ)

진통제가 치료제는 아니다?

진통제는 통증을 약화시키는 것이지 그 병의 근원을 고치는 약이 아니다.

진통제는 그렇지만 병을 고치는 과정을 잘 지낼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때로는 별도의 약을 먹지 않고 자연스럽게 몸이 회복을 하는 과정에서 진통제가 통증을 줄여 주기도 한다. 이럴 때는 진통제 이외에 다른 약을 먹지 않으므로 진통제가 유일하게 복용하는 약이 된다.

혹은 질병을 치료하는 약이 너무 강해서, 통증을 줄여주고자 진통제를 쓸 수도 있으려나…

그렇지만 여전히 진통제는 치료제가 아니다.

깨어진 피조세계에 사는 인간은 모두,

병든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어떤 이는 그 영혼의 병이 더 심하기도 하고, 어떤이는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깨어진 인간은 영혼의 병 혹은 flaw를 가지고 있다.

이런 영혼의 질병에는 여러종류가 있다.

유난히 자의식이 강하다거나, 성취욕구가 강하다거나, 자존감이 낮다거나, 교만하다거나, 참을성이 없다거나, compassion이 부족하다거나, 깊이 사색할줄 모른다거나…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매우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서…

그 영혼의 질병을 다루어내시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잘 견디어 내도록 우리에게 일종의 진통제를 허락해주시기도 하신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성숙의 고통’문제를 다룰때,

너무 자주 ‘진통제’에 머문다.

하나님과 대면하며 다루어야 하는 이슈는 때로,

매우 고통스럽고, 자신의 성향과 충돌하는 방식으로 다루어야 하는데,

자신이 편한, 자신을 편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다루어내는, 진통제에 만족하면서,

본질을 마주하기 꺼리기 쉽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 자신을 편하게 만드는 것, 혹은 문제를 대하는 긴장을 풀어주는 것등은…

치료제라기 보다는 진통제인 경우가 많지 않나 싶다.

이것들은 치료를 돕는 탁월한 효과가 있을 수 있지만,

궁극적인 치료는, 하나님과의 encounter로부터만 올 수 있다는 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다.

가끔은,

진통제를 복용해서 통증이 완화되면 그것이 치료된 것으로 착각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영혼의 질병을 다룸에도 비슷한 우를 범할 수 있는 것 같다.

좀 너무 편협한 생각일까…

실패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라고? 성공은?

실패를 두려워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돌아올 수 없는 다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아닐까 싶다.

즉, 

한편 실패하면 그것으로부터 회복되지 못할 것과 같은 걱정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재기 불능 뭐 그런 생각.

물론,

많은 경우 그런 생각은 합리적이지 않다. 비록 우리가 사는 세상이 많이 깨어져 있긴 하지만, second chance 자체가 완전히 봉쇄되어 있는 세상은 아니다.

그런데…

성공은 어떠한가? 그것이 ‘돌아올 수 없는 다리’는 아닐까?

가령…

어떤 사람이 대단히 뛰어난 연구 업적은 남겨서 노벨상을 받았다고 하자.

학자로서는 대단한 성공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노벨상 수상자’라는 타이틀로부터 평생 빠져나올 수 없다.

다시 말하면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되는 것이다.

내가 믿기로는,

하나님께서는 ‘loser’의 상태에서만 경험하는 독특한 은혜를 ‘loser’들에게 제공해주시는 분이시다.

소위 ‘성공한’ 사람들은 이런 약자들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깨닫지도 경험하지도 인정하지도 못한다.

성공을 하고 나면…

적어도 약자들에게 베푸시는 은혜는… 이제 다시 경험할 수 없는… 상태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의미에서 성공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는 것,

혹은 좀 더 심하게 표현하면, 독사과를 한입 베어무는 것과 같을 수도 있다.

참 무서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