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어떤 사람이 음악을 참 좋아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사람은 음악 이론도 꽤 잘 알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자신은 음악 선생님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막상 그 사람과 대화를 해보면,
음악을 좋아하는 다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 훌륭한 음악가가 한 명언 등을 이야기하긴 하는데,
막상 음악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그렇게 많이 하지 않는다.

또 음악 선생님으로 예전에 활약했던 이야기를 하기도 하는데,
막상 음악을 배우는 사람들을 어떻게 인도해야하는가 하는 것에 별로 insight도 없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은 그 음악을 노래나 다른 악기로 연주하는 것을 잘 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늘 이야기한다. 자신은 음악을 좋아하고, 음악에 대해 잘 알고 있긴 하지만, 음악에 소질이 있는건 아니라고.

그렇다면,
이 사람이 음악을 좋아하고 음악에 어떤 전문성이 있다는 것을 무슨 수로 알 수 있을까?

여기…
음악을 ‘신앙’으로 바꾸어서 생각해보라.
그리고 당신이 떠올릴 수 있는 기독교 사역자들을 생각해보라.
얼마나 많은 기독교 사역자들이 이런 모습인지…

나도 역시 이로부터 자유롭지 않고.

성경공부

요즘은 성경공부 두그룹을 인도하고 있다.
한두에 두 그룹 성경공부를 하는 것 말고…
교회의 다른 그룹이 있어서 사실 저녁에 컴퓨터 앞에 앉아서 모임을 하는 것은 꽤 많은 편이다.

누가복음 본문으로 두 그룹을 하고 있는데,
한 그룹이 조금 진도가 빨라 대충 2주쯤 앞서 나가고 있다.

그런데…
어쩌면 요즘 나를 지탱해주는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 성경공부를 하면서 내가 말씀을 조금 더 깊게 보는 일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 성경공부를 하지 않더라도 이래저래 혼자서 성경을 공부하는 일은 쭉 해오긴 했지만,
무엇보다도 함께 하는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말씀을 정리해내는 일이 무엇보다 내가 아주 큰 유익이 된다.

게다가 함께 하는 사람들 중에서 아주 좋은 질문이라도 나오면…
아… 그야말로 대박.

이 성경공부를 하면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도 있고,
전혀 다른 시간대에서 들어와서 꼬박꼬박 숙제도 하고 열심히 참여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렇게 함께 성경말씀을 보면서 공부할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혹시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중, 이렇게 zoom으로 성경공부를 하기 원하시는 분은 내게 연락주시라. ^^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망가질수가 있는거지…

예전에 존경하던 어떤 목사님(들)이 망가지는 것을 보면서 심하게 좌절하고 치체되었던 적이 있었다.
그 목사님을 젊은시절부터 존경해오던 어떤 선배는, 마치 산이 무너지는 것 같다고 하면서 많이 힘들어 했었다. 곁에서 보기에 힘들어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명확해보여 그 선배를 보는 나도 덩달아 마음이 무거웠던 경험이 있다.

내가 20대에는 믿음의 거인과 같아 보였던 선배들이,
내가 이제는 그때 그분들의 나이가 되어버린 지금,
너무나도 심하게 망가져버려서…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망가질수가 있는 걸까…
그저 상황 파악이 안되는 거다.

아니 그렇다면…
그 때 내가 그분의 가르침을 받으며 용기와 힘과 위로를 얻었던 그것들은 다 거짓이란 말인가.
조금 더 아나가서…. 내 20대 30대의 신앙의 어떤 부분을 내가 신뢰살 수 없는 걸까.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고 어디까지 거짓이란 말인가…

어제 밤에,
한때 내가 존경했던 어떤 신앙의 선배의 현재 모습이 어떠한지 조금 알게되는 계기가 있었다.
아… 그분이 왜 그렇게 늙어가게 되는 걸까.
아니, 왜 그렇게까지 망가져야 하는 걸까.

예전에 내가 20,30대에는 나이가들면서 순수성을 잃어버리게 되어 사람이 타락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나도 계속해서 그 순수성,진정성을 잘 붙들기만하면 그렇게까지 망가지지는 않으려니… 그렇게 생각했다.

나도 나이가들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그 순수성, 진정성이라는 것이 정말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define하기도 대단히 어렵고,
설사 그 순수성을 잘 define 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지키겠다고 아둥바둥하게되면 그 순수성을 지키는 자세 자체가 딱딱하게 굳어버려 오히려 순수성이 무엇이었는지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엄밀한 의미에서 젊은 시절에 생각했던 순수성과 진정성은….
그때 당시에는 그것이 정말 깨끗하고 더럽혀지지 않은 고귀한 것이라고 생각했으니…
이제와서 보니 그때의 나도 역시 순수하지 않았고, 그저 단지 무지하고 어리석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때 내가 순수하다고 생각되었던 이유는, 내가 무식해서 그랬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내가 해보는 나 자신에 대한 솔직한 점검은…
나는 어떻게 하면 망가지지 않는 것인지… 그걸 모르고 있다. ㅠㅠ
섬뜻한 일이다.

새해 결심 중간 점검

새해결심이 흐지부지하게되는 평균은 보통 2월 둘째주라고 한다. ^^

나는 올해 초에,
생각을 더 하면서 살자.
더 빠릿빠릿하게 살자.
생각의 여유를 두고, 생각의 재료를 섭취하자.

이런 류의 결심을 했었다.
이 블로그에 자세히 쓰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위해서 내가 했던 결심은 매일 일정표를 짜고 그것에 맞추어서 생활을 하되, 생각하는 시간을 따로 더 확보해 놓는 것이었다.
괜히 쓰잘떼기 없이 인터넷 페이지 넘기면서 시간 버리는 것을 줄이고, 여러가지 공부하는 시간을 따로 떼어놓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게 잘 되고 있느냐…?

처음 한달 정도는 정말 열심히 잘 했다.
그후 한달은 대충 80점쯤 줄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은… 60점 수준.ㅠㅠ

결심이라는건 뭔가 잘 안된다고 생각했을때 다시 새롭게 결심하면 되는 것이니…
3월 초에 다시 한번 결심한다.

더 빠릿빠릿하게 살자.
생각의 여유를 두고, 생각의 재료를 섭취하자.
생각을 더 하면서 살자…

특권을 누릴 수 있는 평등?

지난번 Kamala Harris가 부통령이 되었을때,
민주당에서는 여성이 유리천창(glass ceiling)을 깬 것이라며 축하하고 환영했다.
민주당 뿐 아니라 많은 feminist들도 마찬가지로 환영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또한 흑인과 인도인의 혼혈이 부통령이 되었다는 것에도 대단히 큰 의미를 부여했다.
최초의 Asian American, Indian American 부통령이라고.

한편 여성이, 유색인종이… 부통령이 되었다는 것이 나도 역시 의미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권력층을 백인 남성만이 가지고 있는 체제는 건강하지 못하다고도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 내가 이것을 보면서 갖게되는 불편함도 여전히 있다.

Kamala Harris가 높은 자리에 올라갔으므로 이제는 어린 소녀들이 새로운 소망을 갖게 되었따는 식의 레토릭이다.

글쎄…
실제로 그 어린 소녀들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을까?
남녀평등, 인종평등이 완벽하게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어린 소녀들중에 그 자리에 올라갈 수 있는 사람들은 지극히 소수인거다.

이제는 여성이, 유색인종이, 유리천장을 깨고 특권을 가지는 role model이 생겼으니,
다들 그런 꿈을 꾸어버라는 것… 이것이 정말 얼마나 가난한 유색인종 소녀들에게 희망이 된다는 거냐?

나는 Kamala Harris의 부통령 당선이 이렇게 선전되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미국인중 약자 혹은 소수에 해당하는 여성, 유색인종이 공평하게 대접받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다. Kamala Harris는 그런 약자와 소수자의 입장에 서 있는 그런 사람들의 목소리가 국가 운영에 포함되도록 선출받았고, 그 일에 충실하게될 것이다.
어떤 특정 그룹의 사람들만이 대부분의 권력을 가지는 것은 사회를 건강하지 못하게 만들고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가 꾸어야 할 꿈이다…

나는 특권을 누릴 수 있게되는 것이 평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레토릭은 오히려 사회를 더 병들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로마서 8장 28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건 참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성경구절이다.
하나님께서는 어쨌든 간에 모든 것을 잘 해서 각 사람에게 선하게 일이 되게 해주신다는 말씀으로 이해하고 위로를 받기도 한다.

그런데…이 성경을 RSV로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있다.

We know that in everything God works for good with those who love him, who are called according to his purpose.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과 <함께> 선한 일을 하신다는 말씀!

선한일이 그 백성’에게’ 되도록 하나님께서 해주신다는 말씀이 아니라,
선한일을 그 백성과’함께’ 일하신다는 말씀이 되는 것이다.

Οἴδαμεν δὲ ὅτι τοῖς ἀγαπῶσι τὸν θεὸν πάντα ⸀συνεργεῖ εἰς ἀγαθόν, τοῖς κατὰ πρόθεσιν κλητοῖς οὖσιν.

이걸 보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표현한 단어가 συνεργέω (수네르게오) 인데, 이건 영어로 synergy (시너지)와 어원이 같다. 그러니까 함께 일한다는 단어이다.
여기서 사용하는 단어가 συνεργέω (수네르게오)이기 때문에, dative (여격)를 사용하고 있는 τοῖς ἀγαπῶσι (those who love)라는 구절에서
이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for/to) 라고 번역하는 것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with) 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본 것이겠다.

그러니까,
로마서 8장 28절은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 잘되게 해주신다는 말씀이 아니라,
그 백성이 모든 선한일을 하는 중요한 공동의 주체임을 이야기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최근에 N T Wright이 이 본문을 그렇게 해석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한편 무릎을 치게되는 해석이었다.
특히 바로 그 다음에 나오는 29-30절이 그렇게 해석을 하면 더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기도 하고.

그런데 한편으론….
이렇게 성경말씀을 볼때마다…
아, 옛날에 이거 읽으며 위로 받고 그랬던 것이 살짝 그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ㅠㅠ

거짓됨

상당히 놀랍게도…
내가 국민학교때 무슨 신문사였나… 주최하는 전국 어린이 글짓기 대회에서 2등인가 3등인가 했던 적이 있었다. 그 와중에 시를 써서 상을 받았다.

오래 시간이 지나서 그 시 자체는 잊어버렸고…
원고지나 공책이나 뭐 어디 그런데 쓰여져 남아있는 것도 없지만,
대충 내용은 독서에 대한 것이었고,
책을 읽으면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는 내용의 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충 국민학교 3~4학년때가 아니었다 싶은데,
그때 나는 그 시를 쓸 때 당시의 생각을 명확하게 기억한다.

상을 받으려면 이렇게 써야햐지 않을까…
딱 그런 생각으로 썼다. ㅠㅠ

어린이의 상상력, 그것을 담아내는 적당한 어휘, 그러나 너무 화려하면 어린이 답지 않으니까 다소 쉬운 단어들을 써가면서… 그렇게 쓰는게 좋겠다고 생각을 했고, (나름 치밀한 작전이었다.)
내 작전이 잘 맞아들어갔다.

나는 책을 읽으며 그 책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한적이 없었다.
심지어는 독서를 그렇게 즐기는 아이도 아니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 새로운 셰계에 들어가는 신비가 있어 좋다는 시를 썼고 그것으로 상을 받았다.
그냥 그 시 자체가 다 구라였던 거다. 어린 놈이, 심사위원들이 무엇을 좋아하겠다 싶은 내용을 머리를 굴려 써 놓은 구라였다.

나는 그 이후 ‘시’라는 장르에 완전 흥미를 잃었다.
구라가 통해서 상을 받게된다는게 그냥 완전 별로였다.

그런데… 만약…
그렇게 구라를 치는것에 많은 보상이 따라온다면 어떻게 했을까?
가령 시를 잘 쓸때마다 엄청나게 칭찬을 받는다건가, 많은 맛있는 과자를 선물로 받는다던가, 내가 좋아했던 조립식 장난감을 많이 받을 수 있었던가 했더라면?
어쩌면 그랬다면 나는 계속 구라를 치면서 시를 더 썼을지도 모르겠다.
어느순간 뽀록이 났겠지만.

신앙을 이야기하며,
구라를 치는 것은 참 쉽다.
그냥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이야기를 풀어놓는거다. 그게 내 이야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뭔가 멋진 신앙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구라를 치지 않도록 하는 가장 강력한 예방책은,
구라를 쳐서 얻어지는 유익이 없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장난감을 주면 엉터리 시를 쓸 수 있었듯,
구라를 쳐서 떨어지는 떡고물이 있으면 구라를 치는것 자체 때문이 아니라 떡고물 때문에 계속 구라를 치게 되는 것이겠지.

그래서 나는…
성경공부를 할때나 다른 신앙의 이야기를 할때,
나를 칭찬해주는 것을 듣는 것을 아주 심하다 싶게 피한다.

10살이 조금 지난 나이에 구라를 쳐서 상을 받은 경력이 있는…
아주 약아빠진 놈이 아직도 내 안에 있기 때문에 그렇다.

Back to the office?

정말 COVID-19 터널의 끝이 보인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같다.
회사에서도 office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들이 꽤 진지하게 나오고 있다.

적어도 COVID-19이 시작할때 어떤 정부나 단체보다도 가장 신속하고도 적절한 반응을 했던 곳이 실리콘 밸리의 회사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회사들이 COVID-19의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하는 것이 내게는 이 상황 전개와 관련된 아주 중요한 판단기준이다.

역시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office로 돌아가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회사 뿐 아니라 다른 회사도 마찬가지라고 들었다.
꽤 다수의 회사들이 그래서 office로 돌아가는 여러가지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한다.

물론 실리콘 밸리에서 영구적으로 집에서 일하는 것을 허락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그런 회사의 많은 수는 Google같은 큰 회사와 경쟁해야하는 작은 회사들이고,
좋은 사람 뽑는 경쟁에서 그런 회사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일하는 장소에대한 유연성(flexibility)을 제공해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볼수도 있겠다.

그래서… 정리하자면,
1. COVID-19 터널의 끝이 가까와오고 있는 중이 아닐까 싶다.
2. 의외로 permanent work-from home 을 받아들이지 않는 회사들이 많이 있을 것 같다. – 심지어는 직원들이 그걸 원하지 않는다.

한국인

민우에게 친구중에 한국이 어디 있는 나라인지 잘 모르는 친구가 있느냐고 물어보면 그런 친구는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민우가 보스턴에서 초등학교를 다닐때는 그런 친구들이 있었단다.

나는 미국에 처음 온곳이 보스턴이었고, 내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육수준이 높았으므로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면 한국이 어디냐고 물을 정도의 사람은 없었다. 그렇지만 그냥 한국이라는 이름 이외에 더 이상 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지금 나는 이곳 미국 실리콘 밸리에서 일하고 있는데, 한국인이라는게 꽤 이익이 된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뭔가를 만들어보고 싶을때 한국의 회사들에게 연락을 해서 빨리 일이 되게 하는 것이 가능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 회사와 일을 할때 내가 중간에서 의사소통이 잘 안되는 것을 풀어주는 경우도 꽤 있었다.

Kpop도 그 위세가 대단하고, 삼성, LG, 현대/기아 등이 한국 회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작년에 기생충이 아카데미상을 다수 받으면서 뜨기도 했고, 금년에는 미나리라는 영화가 한참 인기다.

이곳에서 만나는 미국 사람들도 고추장이라는 소스를 아는 친구들도 있고,
fried chicken이라면 당연히 korean fried chicken을 먹어야한다면서 이 동네의 한국 치킨집을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들을 만나게되기도 한다.

한국 기술, 한국 문화, 한국 음식 등등이 그냥 신기한 외국것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의미있게 존중받을 만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국민학교때 밥에 보리를 넣었는지를 검사했던 기억, (나라에 쌀이 부족해서.. 혼식을 반강제적으로)
낮기온이 영하 5도 이하로 떨어지지 않으면 교실에 난로를 때지 않았던 기억,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이런 새마을 노래를 불렀던 기억,
학교에 점심을 싸오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던 친구들이 늘 있었던 기억…

나만 하더라도 우리나라가 정말 ‘가난한 나라’였을 기억이 분명히 있다

그러니… 한국인이라는게 advantage로 여겨지는 이런 상황이 내게도 참 신기하다.

아이러니

한국 밖에서 존경받는 신학자, 목회자 등이 한국에 방문면서 이상한 행보를 하는 것 같이 보이는 경우가 있다.

번영신학이나 기복신앙에대한 신랄한 비판을 해온 P 목사가,
적어도 내가 생각하시엔 번영신학과 기복신앙을 아주 열심히 이야기하는 교회에가서 집회를 한 뉴스를 본적이 있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우상’의 개념을 잘 분석해내고 그것에대한 비판을 잘 했던 K 목사가 한국에 가서는…
자기중심적 신앙과 신학을 견고하게 지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다가 왔던 것을 본적이 있다.

그런데 참 흥미로운 것은,
번영신학을 그렇게 비판하는 P목사의 메시지를,
번영신학을 추종하는 그 사람들이 ‘은혜롭게’듣는다는 거다.

그리고 자기중심성을 비판하는 P목사의 이야기를,
자기중심성이 신앙의 중심이라고 설교하는 사람들이 아멘으로 듣는다는 거다.

이건 멀리서만 발견하는 건 아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신학자라고 이야기하면서 어떤 신학자를 자주 소개하는 어떤 신앙인이,
사실은 그 신학자의 관점과는 매우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

이건 정말 이상한거다. 아이러니다.

그러면서 문득 드는 생각은…
나는 그런 아이러니로부터 자유로울까? 내가 열심히 읽고, 듣고, follow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는 정말 이해하면서 그렇게 follow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