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rning: Declaration of Share_RSS::get_link($url, $text, $title, $query = '', $id = false) should be compatible with Sharing_Source::get_link($url, $text, $title, $query = '', $id = false, $data_attributes = Array) in /homepages/27/d202715304/htdocs/clickandbuilds/WordPress/MyCMS2/wp-content/plugins/feedly-insight/inc/jetpack/class_Jetpack_Share.php on line 152

이 와중에 출장 ㅠㅠ

참 이상한건,
내가 어디가서 해야할 설교준비를 좀 많이 해야하거나,
KOSTA같은 것들을 준비해야하거나,
뭐 기타 그런 종류의 것들이 닥치면… 그때 매우 자주 회사일이 엄청 겹쳐서 바빠진다.

정확하게 분석해본적은 없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더 정성을 쏟아서 준비를 잘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설교 혹은 강의 시리즈 등을 준비할때는 아주 높은 확률로 엄청 바빠진다.

정말 밤에 잠을 줄여서 준비해야하는 이 와중에,
나는 오늘은 당일치기 LA 출장이다.
새벽 첫 비행기 출발, 밤 막 비행기로 돌아오는. 중간에는 빡빡하게 미팅, 미팅, 미팅.

뭐 바쁘다고 막 티내는 거 아니고, 다보다 더 바쁘게 사는 분들이 아주 많이 계시니.
그리고 바쁘다는게 좋은 것도 당연히 아닐테고.
게다가 나는 일반적으로 그 바쁨에 대한 tolerance가 매우 낮은 것 같다.
조금만 바빠도 아주 허덕대는 것 같다.

그런데…
때로…
아주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서 정말 최선을 다해서 그 소중한 message를 준비할때 이런식으로 무지막지하게 바쁜 일들이 몰아칠때면…
그렇게 준비한 message가 어떤 사람(들)에게 꽤 큰 도움이 되는 경험도 많이 했다.
당연히 그렇게 바쁘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message를 가지고 가지 못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그렇게 바쁜 것을 뚫고 꾸역꾸역 무엇인가를 준비해서 가면 그것으로 어떤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들이 생긴다.

글쎄… 이번에도 그런걸까.
그래서 이렇게 바쁜걸까.
이거 일종의 미신 같이 생각될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이런걸 영적 공격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겠지만…
그냥 내 경험상으로는 나로 하여금 더 정신 바짝 차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블랙커피같다.

우아… 죽도록 바쁘다…
그런데 바빠서 죽은 사람은 없다.
나도 안 죽는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바쁜건 그저 내가 더 정신 바짝 차리라는 하나님의 어시스트 쯤 되지 않나 싶기도 하다.

정말 뜬금없는 감사함

나같이 마음이 딱 막혀있고, 고집세고, 생각 짧고… 그런 사람에게는 성령께서 뭔가를 말씀하시기가 쉽지 않다. ㅎㅎ
뭔 말씀을 하시고 싶어도 뭐 들어야 말이지…

그런데,
정말 성령님께서 아주 급하시면, 이런 내게도 뭔가를 말씀하시려고 한다는 경험을 할때가 있다.

다음주 KOSTA를 앞두고 그냥 몇년동안 이메일도 한번 제대로 하지 못했던 사람들로부터,
갑자기 너를 위해 기도한다… 라던가,
KOSTA를 위해 기도한다… 라던가,
갑자기 KOSTA 생각이 나면서 네게 연락하게 되었다… 라던가,
그런 연락을 받을때가 있다.

한편 그렇게 오랫동안 연락못했다는 것이 그 사람에게 많이 미안해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기도해준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감사한지.

언제부터인가 내가 KOSTA를 섬기는 것도 그렇고, 뭐 다른 여러가지 하나님 나라 관련된 사역을 하는 것들은… 그냥 거의 누구로부터도 ‘도움’이나 ‘지원’을 받지 못하고 한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러면서 점점 외로움이 깊어져가고, 그저 그 외로움 꿀꺽 삼키고 해야할일을 묵묵히 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때가 많아졌다.

이게 어디 나만 그렇겠는가.
KOSTA를 섬기는 많은 사람들이 아마 그럴거다.
현실적으로 그렇게 탄탄한 network으로 섬겨내는 사람들의 연결/구조가 사실상 거의 와해되어가고 있으니… 한국교회의 몰락을 그런의미에서 아주 피부로 느끼고 있는 거지.

그래도 그런 짧은 격려나 연락이 참 반갑다.
그리고 신기하기도 하다.
아… 나 같이 성령의 음성 잘 듣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성령님께서 이렇게 좀 급하게 해주시기도 하는 구나.

In The Garden

정말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만큼 바쁜 한주가 시작되었다.

John Ortberg가 Willow Creek Church에서 너무 일이 많고 바빠서 정신없이 지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때 Ortberg는 Dallas Willard에게 지혜를 구하며 물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Dallas Willard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You must ruthlessly eliminate hurry from your life.
(너의 삶에서 분주함을 무자비할정도로 제거해야 한다)

바쁘게 사는 것은 때로 다른 선택이 불가능할때가 있다.
그냥 상황이 그러니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상황 속에서 마음이 쫓겨 살지 않는 것은 내가 선택해서 살 수 있는 것이다.

I must ruthlessly eliminate hurry from my life.

위의 In the Garden 찬송가는,
한글 가사를 참 나는 좋아했는데,
최근 영어 가사로 찬송가를 들어보니 아… 그거 참 좋다.

and he walks with me and he talks with me
and he tellls me I am his own
and the joy we share as we tarry there
none other has ever known.

우리 주님과 정원에서 거니는 거룩한 시간의 낭비는,
나를 분주함으로부터 지켜주는 것 같다.

사람에게 하는 원망을 멈추어야?

도대체 왜 이렇게 뻘짓을 하면서 제대로 못하는 거냐…
왜 이렇게까지 탐욕에 사로잡혀 교회를 망치고 있는 거냐…
왜 이렇게 무지에 사로잡혀 이토록 엉터리로 신앙교육을 하는 거냐…

신문기사를 읽거나,
기타 주변에서 접하는 교회의 이야기들,
등등에서 접하는 정말 추잡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한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읽으며 그런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때가 많다.

특히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어떤 작은 공동체를 그렇게 망치는 리더들을 보면,
정말 화가나기도 하고, 그 사람들을 원망하게 된일도 참 많았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사람들이란 늘 그래왔다.

사람들은 늘 그렇게 탐욕을 쉽게 버리지 못했고,
늘 그렇게 단순한 진리 앞에서도 무지했고,
그렇게 어리석어 지혜의 길을 따르지 못했었다.
다만 아주 소수의 사람들이 그 진리와 지혜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을 뿐.

그런데 어떤 시대에는 그 어리석은 사람들조차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일들이 나타나기도 하는 반면,
어떤 시대에는 지혜로운 사람들조차 무기력함과 낙심에 빠져 헤어나지오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니,
이토록 어리석고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들이 하나님을 알아 복음앞에서 제대로 반응하는 것 자체가 기적적인 것이고,
다수의 사람=들이 그 복음앞에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서는 일이 당연한 것은 아닌 것이다.

한편,
복음 앞에 제대로 서서 복음을 따라 걷지 않는 사람들을 책망할수는 있으나,
그 사람들을 원망할수는 없다.
그냥 그 탐욕과 무지는 그저 우리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값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해야하는 일은 기도가 아닌가 싶다.
사람에게 하는 원망을 그치고,
차라리 그 원망을 하나님을 향해서 하는 것이다.

하나님,
왜 예전에는 당신의 선하심이 많은 이들에게 비추어졌는데
지금은 그렇게 하시지 않는 것이냐고.

더 그렇게 눈물 뚝뚝 떨어뜨리며 기도할 일이다.

역사비평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계시를 하셨다는 전제를 가지고도 충분히 역사비평을 받아들일 수 있다.
아니 오히려 역사비평의 관점을 가지고 있으면 조금 더 rigorous한 성경해석의 결과들을 소유할 수 있는 큰 장점이 생긴다.

최근에 한국교회탐구센터에서 내고 있는 ‘역사비평 핵심논쟁’ 책 요약은 참 조심스러우면서도 친절하게 이런 관점을 소개하고 있다.

권력과 불화하는 기독교 (10)

내 블로그를 읽는 분들을 내가 모두 다 개인적으로 알고 있지 못하지만,
오늘의 이 글은 어떤 분들을 살짝 불편하게 만들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80년대에 대학을 다녔다.
전두환이 대통령일때 대학에 들어갔다. 87년 민주화항쟁을 대학생때 겪었다.
나는 민주화운동을 할만한 용기가 있는 사람은 아니었고, 내가 그런 사회문제에 눈을 뜨게된건 후에 예수님을 믿고난 후 였다.

내 경험에 근거하면,
사회적 약자, 권력의 반대편에 서 있는 민주화 운동 투사들, 여성, 어떤 형태로의 소수자(minority) 등은 늘 정의에 가까웠다.
그것은 한편 그 사람들이 정의로왔기 때문일수도 있었겠지만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집단이 워낙 악했기 때문이었기 때문일수도 있겠다.

자기 국민을 학살한 독재자와 그 추종자와 맞서는 사람들이 있을때,
그것에 맞서는 사람들이 당연히 독재자와 그 추종자보다는 더 정의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지금 나는 그런 공식을 좀 깨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에 맞섰던 사람들이 가지는 권력이 이젠 꽤 커졌기 때문이다.

나는,
80년대 약자였던 그 그룹중 일부가 권력을 가지는 모습에 환호했고, 그들을 응원했다.
그리고 그 그룹이 여전히 한국 사회의 전체적인 권력 세력을 보았을때 더 약한 그룹이라는 것에도 공감하고 동의한다.

그러나…
이젠 그 사람들도 권력자들이 되었다. 그것도 아주 강한 권력자들.

(원래 오늘 끝내려 했는데, 아무래도 다음주로 넘겨서 한두번 더 써야 할 듯)

권력과 불화하는 기독교 (8)

그런의미에서 나는 기독교가 어떤 특정 정치세력과 연계되는 것을 극도로 조심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인이라면 당연히 종교의 자유를 이야기하는 쪽을 지지해야지,
기독교인이라면 당연히 경제적 약자를 돌보는 쪽을 지지해야지,
기독교인이라면 당연히 남북평화를 추구하는 쪽을 지지해야지,
기독교인이라면 당연히 자유와 공정을 이야기하는 쪽을 지지해야지…

뭐 다 맞는 말일 수 있는데,
나는 당연히 기독교인들이 나름대로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추구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기독교인들은 그 자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추구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가령 종교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은 옳지만,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는 정치집단과 기독교를 동일시하면 안된다는 말이다.

경제적 약자를 돌보는 일에 관심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경제적 약자를 돌보는 것을 주장하는 정치집단이 기독교적이라는 환상은 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정치집단은 근본적으로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그 권력은 근본적으로 기독교와 불화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가치를 주장하되, 어떤 정치 집단을 기독교 신앙과 동일시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Goodbye Jim

우리 회사에 Jim(가명)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의 last name은 Wagner(역시 가명)이라는 독일식 이름이다.

그런데,
완전 한국사람처럼 생겼다!

2년전인가,
함께 project를 할 일이 있어서 개인적인 이야기도 조금더 나눌 수 있었는데,
자신이 한국사람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엥? 그런데 너 성이 Wagner잖아?

자신이 미국의 부모에게 입양이되어서 그렇다고.

나는 Jim하고 그래도 꽤 가깝게 일하면서 지냈다.
이 친구 정말 똑똑하고 일 잘하고, 참 함께 일하는게 즐거웠다.

지난달에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는데,
자기를 낳아주신 부모님을 찾았다고. 자기의 한국 이름은 조성철(가명)이라고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면서 자신은 이렇게 완전 아시아사람으로 생겨서 Wagner라는 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에 대한 갈등이 그래도 있었다고.
자신의 생부모를 찾으면서 자신이 정말 누구인지를 더 많이 고민하게 되었다고 이야기를 해 주었다.

사실 우리 회사 오기전에 한국의 대기업에서도 일을 했었는데,
참 일하기 쉽지 않았단다.
한국어도 잘 못하기도 할 뿐더러, 완전 한국 사람으로 생겼는데 생각이나 문화가 그렇지 않으니 사람들이 잘 이해를 못했고, 그것이 많이 힘들었다고.

여전히 우리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도 그런 고민이 계속 많은 것 같았다.

이 친구가 결국 우리 회사를 그만두고,
싱가폴의 작은 회사로 옮긴하고 이야기를 해 주었다.
아무래도 아시아에서 조금 더 살아보고 싶다고.
한국에서 사는건 아무래도 너무 난이도가 높고,
싱가폴은 그래도 영어를 쓰니까 자기가 가서 살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마지막 인사를 아주 어눌한 한국말로 했다.
성철씨, 함께 일해서 참 좋았어요. 감사해요.

그랬더니 Jim은,
오승님은 눈치가 많고 항상 열심히 일하이는데 같이 일 하는 시간을 잘 됐어요.
라고 했다.

완전 이해했다!

그래도 내가 Jim에게…
자신을 힘들게 했던 한국 사람들과는 다른 한국사람이 되었길 바란다.
그리고 Jim이 싱가폴에서는 조금 더 자신의 identity를 잘 찾을 수 있기를 바라고.

성철씨, 수고 많았고, 함께 일해서 좋았어요.

원칙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결국 내가 그분의 생각과 자세를 배우겠다고 생각했던 모든 분들은,
소위 그냥 ‘믿음이 좋은’ 분들이 아니었다.

결국 자신이 똑바로 서서, 그 믿음을 그 삶의 모습에서 펼쳐보려고 했던 분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그 분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믿음을, 자신의 상황에 펼치며 적용할때, 자신이 지켜야하는 어떤 기준들을 세심하게 세우고, 그것을 끝까지 잘 지키며 살았던 분들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그분들이 가지고 있던 그 삶의 원칙들은,
universal한 것이라기 보다는 대단히 상황적인 것들도 많이 있었다.

가령,
고위 공직자가 되어서도 부서가 다 함께 회식을 하러 갈때 공금을 규모있게 사용하기위해서 제일 먼저 싼 음식을 시켰다는 어떤 분의 이야기는….
그 당시 내게도 참 감동이었고, 참 배우고 싶은 모습이었지만,
지금 그렇게 하면 꼰대, 갑질 그런 이야기를 들을 만한 모습이라고 할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분이 살았던 그 당시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정말 필요했고,
그분은 신앙을 그 분의 삶 속에서 그런식으로 적용하며 살았던 것이다.

결국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데에는,
universal한 원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universal한 원칙을 그 당시 상황에 맞게, 심지어는 그것이 universal한 것을 벗어난다고 하더라도, 적용하며 살아가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