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하나님 사이의 비밀

유난을 떨면서 가까운 친구사이는 물론이고,
함께 오래 살았던 부부사이에도,
그냥 정말 친밀한 사이라면, 그 사이에만 있는 독특한 비밀/정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하다못해 회사에서 오래 함께 일한 사람들 사이에도, 그 둘 사이에 나눈 이야기들, 일하면서 알게된 서로의 스타일 등등 그저 둘 사이에만 존재하는 ‘비밀’이 있게 된다.

이게 꼭 둘 사이에서만 꼭꼭 감추어두려고 하는 것이 물론 있을 수도 있지만,
그걸 구구절절 다른 사람들에게 다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별 의미가 없기도 하고, 그걸 다 설명해내려면 너무 많은 context를 설명해야하기 때문에 그렇게 둘 사이의 ‘비밀’로 남을 수도 있다.

어떤 개인과 하나님 사이에도 그런 비밀이 있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그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오래되고 깊어지면 더더욱.

나는 목회자나 설교가는 아니지만,
어쨌든 나 같이 다른 기독교인들과 말을 많이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하나님과의 비밀의 깊이가 얕아지게되는 경우가 있다.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깨닫게 된것, 알게된것을 부지런히 퍼내가며 다 이야기하게되기 쉽기 때문.

그런데,
그렇게 나와 하나님 사이만의 비밀을 다 퍼내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지나치게 ‘객관화’되어서,
하나님과의 친밀함 자체도 그저 말로 설명하는 수준이 되어버리게 도는 우려가 있다.

내가 여러 social media에서 구구절절 내가 하는 일들을 쓰거나 표현하지 않는 커다란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 블로그다.
이 블로그에서 거의 매일 하나씩 글을 쓰다보면, 나와 하나님 사이의 그 은밀한 비밀이 이곳에 흘러나오고, 나와 하나님 사이의 친밀함이 얕아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게 된다.

나는 두가지를 배웠다

하나님께서 한 가지를 말씀하셨을때에, 나는 두 가지를 배웠다.
‘권세는 하나님의 것’ 이요,
‘한결같은 사랑도 주님의 것’ 이라는 사실을. (새번역)

Once God has spoken;
twice have I heard this:
that power belongs to God,
and that to you, O Lord, belongs steadfast love. (ESV, 시편 62:11-12)

가끔은 늘 알던 성경말씀이 심장 깊이 박힐때가 있다.

다음주 고난주간을 앞두고, 이 말씀이 그렇게 움직인다.

정치 과몰입

한국의 국회의원 선거가 한달도 남지 않았다.
그래서 내 news feed에도 온통 그 이야기다.
미국 뉴스도 그렇다. 매번 미국 대통령 선거 이야기다.

나는 20대부터 지금껏 한국이나 미국이나 모두 한쪽만을 지지해왔고, 나는 한국 국회의원 선거나 미국 대통령 선거나 둘 다 투표권이 없지만, 만일 투표할 수 있다면 이번에도 같은 쪽에 투표할것 같긴 하다.

그러나,
정치가 마치 모든 것의 해결책이 될 것이라는 착각으로부터 나를 떼어놓으려고 정말 노력하고 있다.

한국은 특히,
지금 어떤 정치 집단이 너무 비이성적이고 비상식적이어서 어떻게든 그 반대쪽이 힘을 얻는 것이 정상을 회복하는데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궁극적 해답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다시 remind 해본다.

어떤의미에서,
나이가 들어갈수록 나는 정치적으로는 점점 anabaptist가 되어가는 것 같다.

밥은 먹어야지…

내가 한국에서 석사과정을 할때,
일은 많고, 시간은 부족하고… 그냥 마음에 여유가 정말 없었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연구소에 다니던 그 형은,
점심시간에 내 실험실 근처까지 와서는, 나와 밥을 먹어 주었다.
그러면서 내게 하는 말. “오승아,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 나와라. 나랑 밥 먹자”

그 형이 그렇게 불러내어서 함께 밥을 먹으며,
쫓기며 살던 내게 하나님을 기억하도록 도움을 주었던 기억이 난다.

지난 주말,
그 형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왜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났는지 알 수 없지만…
그 형을 만나지 못한지 20년도 더 지났지만…
그 형에겐 지금도 참 고맙다.

아직 내 믿음이 형성되어가던 시기에 (뭐 지금이라고 다 형성되었냐 하면 그건 아니겠지만)
그 형은 내게 참 큰 힘이 되어주었다.

형… 20여년 못보았는데, 그 사이 먼저 가셨네요.
앞으로 한 몇십년 후딱 지나면 형 다시 보겠지요.
그때 형에게 고마웠던거 많이 이야기할께요.

바울과 요한

지난달인가,
동네 목사님 한분과 식사를 했는데,
그분이 나보고 바울같은 스타일의 사람이라고 하셨다.

음…
나는 아니라고 막 그랬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내가 바울같은 사람이 아닌 근거 몇가지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1. 바울은 엄청 천재였다.
    나는 아니다. 아마 평균보다는 살짝 더 높은 수준의 지능을 가지고 있을 것 같긴 한데, 당연히 천재는 아니다.
  2. 바울은 완벽주의자였다.
    나는 아니다. 가끔은 다른 사람들이 catch하지 않는 detail을 찾아내는 경향이 있지만, 나는 완전 빈틈이 많고 그 빈틈이 많은 속에서 살아간다.
  3. 바울은 자신에대한 확신이 늘 강했다.
    나는 내가 가진 생각이나 믿음에대한 회의가 늘 내게 가득하다.
  4. 바울은 결단력이 강했다.
    나는 꽤 우유부단한 편이다. 가끔 급하게 생각과 결심을 해야할때는 정말 이를 악물고 내 본성을 거스러서 하는 편이다.
  5. 바울은 그칠줄 모르는 엔진같은 사람이었다.
    낮에는 텐트를 만드는 생업을 하고, 밤에는 열을 팍팍 내면서 설교를 하고…
    그러다가 마침내 자신은 땅 끝 까지 가겠다면서 방방.
    나는 꽤 게으르다. 내가 가끔 부지런하게 보일때가 있는데, 그건 내게 닥쳐오는 일을 가능하면 효율적으로 처리하고 빨리 나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다는 바람때문에 폭풍처럼 일을 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혹은 일이 밀어닥쳐서 내가 감당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두려워서 그렇게 후다닥 내게 떨어지는 일을 처리해내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반적으로 바울은 에니어그램 1번이나 8번 이 아닌가 싶고, 나는 3번이나 6번에 가깝다.
이렇게 나는 바울 스타일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오히려 나는 요한에 더 가깝지 않나 생각한다.
의외로 나는 꽤 관계적이다.
특히 하나님을 생각할때 그렇다.
내게 있어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사랑하는 분이다.
내게 주어진 사명을 불도우저같이 감당하기 보다는, 그분이 나를 사랑하시기에 그 사랑때문에 그 안에 머물러 충성하는 스타일이 아닌가 싶다.

문제는 내가 훈련과 교육을 받아온 길이,
나의 관계적인 면들을 잘 develop하도록 나를 이끌어주지 못했던 것 같고,
그래서 나는 functionally 그저 열심히 일하는 사람같이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아주 예전에…
한 30년쯤 전에, 나를 잘 관찰하던 한 형이 내게 그렇게 이야기해준적이 있었다.
너는 요한과 같은 사람인것 같다고.

그때 나는 엥? 내가? 그렇게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그 형이 나를 잘 보았구나 하는 생각을 더 하게 된다.

John Mark Comer

최근 Christianity Today에 “내 학생들이 John Mark Comer를 많이 읽는다. 이젠 나도 왜 그런지 알겠다” (My Students are reading John Mark Comer, and Now I Know Why)라는 글이 실렸다.

그리고 최근에 교회 설교에서 한 목사님이 John Mark Comer의 글을 언급한 적이 있었다.

나는 John Mark Comer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지난 두주 정도 동안 이분의 글들, 이분의 강의나 설교 등을 폭풍 흡입(?) 했다.

John Ortberg에 대해서 나는 늘,
어려운 Dallas Willard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좋은 선생님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John Mark Comer는 젋은 사람들 (young generation)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Dallas Willard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분의 어떤 글이나, 이분의 어떤 설교등은 깊게 마음에 울리는 공명을 만들어내었다.
부지런히 폭풍 써치를 해보니 이분이 80년생인 것 같다.
이제 44세인건데, 음… 그렇게 젊은 나이에 그렇게 깊을 수 있는건가 싶을만큼 놀랍다.

실제로 The Ruthless Elimination of Hurry 라는 책을 보면, John Mark Comer는 John Ortberg를 ‘멘토’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Dallas Willard – John Ortberg – John Mark Comer로 이어지는 라인이… 아… 참 멋지고… 참 부럽다.

당분간 약간의 덕질을 할 대상을 찾은 듯…
다만, 내게 조금만 좀 시간의 여유가 있다면…

흥미로운 강의 시리즈 하나 추천

요즘 한주에 하나정도씩 들으면서 나름대로 내가 많이 무식하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있는 강의 시리즈 하나.

그리고 이 비디오가 올라온 채널은 유대교쪽 채널인데, 개신교인인 나도 도움을 많이 얻기도 하고 공감을 많이 하게 되기도 하는 내용이 참 많다. https://www.youtube.com/@KEDEMChannel/videos

찾아보니 이분 (Israel Finkelstein)은 꽤 유명한 분인 듯.
요즘 계속 구약 통독을 하고 있는데 이 영상들 덕분에 후다닥 넘어가지 못하는 부작용이 좀 있긴 했다.

어제 한 뜬금없는 공부

나는 소위 ‘health technology’ 회사에 다니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의료쪽에대해서는 정말 거의 아는게 없었다.
그냥 내가 아는건… 미국은 의료비가 너무 비싸다는것 정도.

그런데 나름 그래도 이쪽 회사에 몇년 다니다보니 귀동냥으로 듣는 것들이 있어서,
미국의 healthcare쪽의 문제를 아주 쬐~끔은 이해해 가고 있는 중이다.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에 대해서 회사 안과 밖에서 여러 이야기들이 있지만,
적어도 내가 진심으로… ‘아, 이 회사가 좀 잘되면 이런건 좋겠다’고 생각하는게 있다면,
innovation을 통해서 전반적으로 사람들을 건강하게 하고, 의료비를 낮추는 것이다.
낭비되고있는 치료, 약 처방, 의료보험등을 innovation을 통해서 줄여보겠다는 것이다.

그걸 다 설명하려면 너무 길기 때문에 여기에서 하루의 짧은 글에 다 담아낼 수 없는 것인데….

한국에 요즘 의대 정원을 늘리는 문제를 가지고 한참 시끄럽다.
나는 내 아버지께서도 의사셨고, 내 동생도 의사이기 때문에 내게 가깝고 소중한 사람들이 직접 이해당사자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그저 ‘밥그릇 싸움’이 되고 있는 것 같고,
일반 대중도 결국 밥그릇 싸움으로 이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계속 한편에서는, 어쨌든 더 큰 문제는 의료체계가 비효율적인 것이 문제가 아닌가…. 그런 생각을 많이 했었다.

그런데… 나는 뭐 한국 의료체계 그런거 잘 모르니…

그런데,
어제 흥미있는 youtube 영상을 하나 봤다.
적어도 내가 이해하고 있는대로라면, 아.. 이런 식의 이야기가 조금 더 나와야 하는게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의대정원 늘리는 것이나 수가 조정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더 큰 문제를 이야기하는 영상이었다.

Burden of Spiritual Leadership

세상의 어떤 자녀도, 자신의 부모가 형편없는 사람이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다.
자신의 부모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길 바란다.
그렇지만, 모든 부모가 그렇게 훌륭하지는 않다.
그런데…
아주 일부 예외가 있긴 하지만, 자신이 부모로서 정말 좋은 부모가 되기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는 부모는 거의 없다. 아이들을 위해서, 자신의 제한된 능력 안에서, 정말 대부분의 부모는 최선을 다 한다.

세상의 대부분의 교인들은,
자신의 목사가 훌륭하지 않는 사람이길 바라지 않는다.
자신의 목사가 훌륭하길 정말 간절히 바란다.
물론 모든 목사가 그렇게 훌륭하지는 않다.
그런데 거기에 더 큰 문제는…
모든 목사가 그렇게 최선을 다하지도 않는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건 여기까지려니…. 대충 자기 나름대로 선을 그어놓고 나머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고 만다.

이건 목사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형태로든 spiritual leadership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는 burden이다.

어떤 형태로든, 누구에게 spiritual leadership을 행사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러므로 정말 온 힘을 다해서 예수님을 잘 믿어야 한다.
아…나는 대충 이 정도만 예수님 믿으면 된다면서 쉽게 타협해버리면 안된다.
그 사람을 따르는 사람들은, 정말, 진심으로, 그 리더가 훌륭한, 아니 최소한 최선을 다하는 리더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