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율 낮은 삶

1.
나는 그래도 나름대로 예수님을 따르며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내 기질이나 성품의 한계로 충분히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꽤 의도를 가지고 그렇게 살려고 한다.

2.
기독교인이라면 많이 하는 말이지만,
나도 역시, 내 삶의 모든 것을 주님께 드려 살겠다고 결심도 했고,
그렇게 나름 해보려고 한다.
역시 당연히 완벽하지 않지만 내 나름대로는 그렇게 살고 있다.

3.
그런데,
내가 살아가는 이 삶의 형태와 모습의 열매는 너무나도 더디다.
아니, 너무 자주…. 내 삶의 열매가 전혀 없다고 느껴지기도 하고,
심지어는 나라는 존재가 세상에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을 막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4.
사람의 존재를 효율로 계산하는 것은 참 우스운 일이고,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야 하겠지만…
내가 세상에 살면서 먹고 쓰고 살아가는데 들어가는 에너지가 어마어마 할것이다.
말하자면 크게 도움되지 않는 삶을 살면서 하루 세끼 꼬박꼬박 먹고,
나름 열심히 밤 늦게까지 이렇게 저렇게 일하고 공부하고 생각하고 연구한다.
말하자면 많은 에너지를 들여서 나라는 사람을 돌리고 있다.

5.
들어가는 에너지가 많은데, 나오는 결과가 없는 것은 효율이 낮은 것이다.
나는 대단히 효율 낮은 삶을 살고 있다.
아니, 어떤 때는 내 효율이 마이너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정말, 언젠가는, 그나마 희미하게라도 어떤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 될까?
그저 열심히 하는 것을 넘어서, 열매를 보게되는 일이 있을까?

6.
이 명령의 목적은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몇몇 사람은 이러한 목적에서 벗어나서 쓸데없는 토론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율법교사가 되려고 하지만, 사실은 자기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또는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디모데전서 1:6-7)

기독교가 대안이어야 할까?

깨어진 세상 속에서 살면서,
기독교가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한다.
나도 20-30대에 그렇게 믿으며 살았다.

그런데,
이젠 정말 그런지 모르겠다.

가령,
사람들이 소외되는 경제체제 속에서 기독교는 어떤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까?

그래서 ‘성경대로’ 희년을 해보자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면 ‘성경대로’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그 의견들이 모두 생각해볼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보지만,
적어도 그런 주장을 하는 분들의 상태 그대로는 현실 세계에서 적용할 수 없는 설익은 (그리고 어쩌면 영원히 익을 수 없는) 생각인것 같다.

오히려 기독교의 역할은,
establishment (기득권)에대한 비판(심지어는 그것이 대안 없는 비판이라 하더라도) 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떻게 해야할지는 모르겠는데, 이건 아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큰 사회 속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가치와 그 가치의 실현을,
개인의 영역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인 공동체라는 작은 영역에서 보여주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가령,
희년의 가치를 국가적 경체체제에 도입하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르나,
그 희년의 정신을 가지고 개인이 살아가는 것은 여러 형태로 해 볼 수 있다.
그 희년의 정신을 작은 기독교인 공동체에서 시도해보는 것은 할 수 있다.

그런의미에서,
기독교인의 공동체가 대안 공동체(alternative community)라는 주장보다는 대조 공동체 (contrast community) 혹은 저항공동체(countercultural community)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뒤틀려진 기독교

기독교인은,
하나님 이외에 세상에 다른 왕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닌 다른 그 누구든, 그 무엇이든 왕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것에 대항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적절한 자세일 것이다.

그것이 정치적 권력이든, 사회적 권력이든, 문화적 권력이든, 사상적 권력이든, 경제적 권력이든 말이다.

스스로 왕이라고 착각한 어떤 사람이 한국에서 대통령을 했다.
그리고 왕처럼 행동하려 하다가 큰 어려움에 부딛혔고, 아마도 그 사람은 그에 따른 벌을 받게 될 것이다.

미국에서는,
아슬아슬하게 경계에서 권력을 남용하는 사람이 다시 대통령이 되었다.
기독교인이라면 당연히 그런 시도에 대해 불편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기독교가 ‘야당’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야당의 권력에 대해서도 역시 기독교는 도전적이어야 한다.

하나님 이외에는 다른 왕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본질은 세상을 뒤집어 엎는 것이다. 그러나 실천에서 오히려 세상이 기독교를 뒤집었다. 기독교는 하나님 외에 어떤 신성함도 파괴하는 운동이다. 그러나 교회는 스스로 규범과 의식과 금기사항을 만들고 기독교라는 이름 이래 우상화에 앞장서고 있다.”

“기독교는 세상을 뒤집는 힘이나. 그러나 오늘날의 기독교는 민중의 아편이 되어버렸다.”

뒤틀려진 기독교 by 자크 엘룰

분노하지 않는 어리석음

화를 내야할 것에 화를 내지 않고,
화를 낼 필요가 없는 것에 짜증을 내는 것은 어리석음의 징표라고 할 수 있겠다.

세월호 아이들이 그렇게 죽어갈때,
대통령이라는 작자가 자신의 국정을 그냥 자기가 아는 사람에게 위탁한채 횡설수설했던 것에대해,
그렇게 분노했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태원에서 젊은이들이 죽고,
무고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자기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절제없는 폭력을 허용하는 리더에게,
술 쳐먹고 아침에 출근도 제때 하지 않는 리더에게,
심하게 분노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어리석은 것이겠다.

한국에서 대통령을 체포한 것에 대한 뉴스가 넘쳐나고 있다.

그런데 인터넷의 한 구석에서는,
그렇게 체포를 한 행위를 ‘멧돼지 사냥’이라고 표현을 하는 것도 보았다.
사람을 그렇게 심하게 표현하며 몰아세우는 것이 정당하냐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대상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분노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리석음이다.

지난 몇달, 조금 더 길게는 지난 3년,
마음속으로 얼마나 쌍시옷 들어가는 단어의 욕을 했는지 모른다.
아직도 그냥 내 마음속으로는 충분히 욕하지 않았다는 찜찜함이 남아 있다.
나는 그렇게 아직 어리석은 것 같다.

아주 나이가 많은 사람의 특징

최근에 읽은 Practicing The Way에서 나온 말.

아주 나이가 많은 사람들을 보면,
대개 양쪽의 극단에 치우쳐져 있다고 한다.
한쪽의 사람은 많은 지혜와 인격이 갖추어진 사람,
다른 한쪽의 사람은 이기적이고 폭력적이며 매우 얄팍한 사람.

결국 사람은 그 삶의 궤적 속에서 추구면서 살아온 것이 그 사람의 현재 상태를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말.

결국 인생을 통해서 모든 사람은 어떤 사람이 되어간다.
나도 그렇다.

20대의 내가 생각했을때,
50대의 나는 지금의 나보다 훨씬 더 성숙의 경지에 이르러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쯤이면 정말 많은 유혹으로부터 자유롭고,
사랑이 많고, 너그럽고, 쉽게 화내지 않고…
그렇게 될줄 알았다.

지금이라도 내가 바짝 다시 마음을 잡지 않으면,
나는 그저 이렇게 얄팍하고 천박한 사람으로 내 인생의 끝을 마주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정말… 우리 예수님과 함께 24시간을 살아가야…

묻지 말아도 되는 질문들, 물어야 하는 질문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질문들을 중요한것처럼 생각하면서 산다.

TV에 나오는 무슨 배우의 남자친구가 누구인가,
옆집의 아무개는 어느 회사에서 연봉이 얼마인가,
내 친구 누구는 이혼을 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이건 묻지 않아도 되는 질문이기도 하고, 어쩌면 묻지 말아야하는 질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막상 꼭 물어야 하는 중요한 질문들은 놓치기 쉽다.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
나는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는가,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고,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쓸데 없는 질문들에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영원의 가치가 있는 질문들에 집중할줄 아는 것이야말로 성숙의 표지가 아닐까 싶다.

봄학기 성경공부

봄학기에는 세 그룹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세 그룹의 내용을 모두 다르게 하기로 했다.

한 그룹은 빌립보서와 복음서 본문 성경공부
이 그룹에서는 내가 많이 해왔던 대로 빡쎄게 본문 공부를 할 예정이다.
현재까지 신청한것을 보면 이 그룹이 제일 클 것 같다.

두번째 그룹은 John Mark Comer의 “Practicing the Way” 책읽기 그룹.
(한국어로는 24시간 나의 예수와 라는 제목으로 번역이 되었다.)
이 그룹에서는 조금 더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면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이 그룹을 준비하면서 책을 미리 읽어보고 있는데, 평소에 내가 여러 강의등을 할때 사용하던 내용들이 거의 똑같이 들어가 있는 것이 많아서 놀라고 있다.
아마 John Mark Comer도 나도 둘 다 John Ortberg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 책을 나도 읽으면서 유익을 얻어보려고 한다.

세번째 그룹은 간사들과 함께 금년 주제인 ‘Shalom’에 대해 공부를 해보려고 한다.
어떤 내용을 함께 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막상 쉽게 공부할 만한 자료들이 없고 해서,
일단 인터넷에서 찾은 “God’s Shalom Project”라는 다소 낮선 책을 함께 보면서 공부해보려고 한다. 성경의 주된 스토리가 ‘샬롬’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 같다. Bernhard Ott라는 분이 썼는데, 이분도 전혀 내가 잘 모르는 분이다. 그래도 얼핏 보니 내용이 괜찮은 것 같고, 무엇보다 쉬운 것 같아서 함께 읽어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상반기에는 무지하게 많은 business trip들이 예정되어 있다.
이걸 어떻게 할 수 있을지 좀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일단 저질로 보려고 한다.

LA 산불

최소한 1000개 이상의 건물이 불에 탔고,
1백만명 이상이 영향을 받는 정전이 생겼고,
3만명 이상에게 대비령이 내려졌다고 한다.

뉴스에서 보는 모습은 정말 무슨 지구 종말 영화 같은데서 나오는 것 같다.

그나마 바로 산불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들도,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라고 한다.

내가 이렇게 저렇게 아는 사람들도 영향을 받아서 피신한 것 같고,
여러가지로 영향을 받고 있는 듯 하다.

그냥 당황하며 기도하는 수 밖에…


여호수아

나는 성경의 내용을 무리하게 해석하면서 내가 처한 현실의 상황에 빗대어서 읽는 것을 불편해하는 편이다. 그것은 성경의 내용을 읽기 보다는 내가 처한 현실을 성경을 통해서 읽어내는 것이고, 결국 성경 텍스트의 내용을 왜곡하게 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 매일성경 본문인 여호수아는,
내가 코스타를 생각하면서 하고 있는 고민을 많이 담아 읽게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게 잘 안된다. ㅠㅠ

결국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출애굽이라는 부흥의 시기를 지낸 사람들이 아니라,
40년의 광야를 지내고 그곳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라는 것.
그들은 한편 40년동안 많이 흩어지고 잃어버렸을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대해 다시 remider가 되었어야 했을 거다. 실제로 여호수아서 초반부에 이 사람들에게 할례를 하는 것으로 시작을 한다. 광야에서 태어난 남자들이 할례를 하지 못했던 것.

아마 가나안에 들어가기전 나이 많은 일부 사람들은 출애굽의 영광을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요즘 아이들’을 보면서 암담하게 생각했을 수도. 자기들도 직접 출애굽을 경험하지도 못했으면서…

하지만 여호수아가 세워졌고,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갔다.

내 바로 윗 세대는 나름 그들이 모세와 같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실제로 나도 그렇게 믿었다. 그들중 어떤 분들은 모세와 같은 분들이라고.
그런데…. 내 윗 세대로부터 여호수아는 세워지지 않은 것 같아 보인다.
그리고 모세의 세대는 망가지고 말았다.

이걸 어쩌나….

어떤 사람들은 한국 교회는 본받아 지킬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많은 한계와 부족함이 있었지만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공산당에 핍박 당하고, 독재에 항거하고, 그 속에서 사랑을 베풀고 전도를 하고 기도를 하고 교회를 세우며 헌신해갔던 선배들이 있었다. 그로인해 사회가 달리지는 것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보이지 않는다….

내 바람은,
어떻게든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을 통해,
여호수아 같은 사람들이 세워지도록 하는 것이다.
광야 40년의 암담함 속에서, 어쨌든 새로운 세대가 자신의 언어로 신앙을 이야기하고
나와 내 가족은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

가능할까?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섬기고 살아가는 노력이 열매로 맺힐 것이라는 희망이 희미해져가는 것 같이 느껴진다.

단 한번의 승리, 그 희망

  1. 앞이 깜깜한 것 같은 상황을 마주할때, 선택은 둘중 하나다.
    희망을 갖거나, 혹은 절망하거나.
  2. 삶을 살다보면 반복해서 벽을 마주한다.
    깊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경험한다.
    침체, 의욕없음, 우울함등에 압도 당하기도 한다.
  3. 그런데 희망과 절망 사이에는 일종의 비대칭성이 존재한다.
    어떤 상황에서 절망하기 위해서는 반복된 실패와 좌절이 필요한다.
    딱 한번의 실패나 좌절로 절망하는 일을 흔하지 않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 희망을 갖기 위해서는 희미한 가능성만으로도 가능하다.
    혹은 딱 한번의 승리의 경험만 있어도, 그 승리의 경험이 어두움에서 희망을 갖게하는 동기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 좌절을 극복하는 것이 희망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훨씬 더 쉽다.
    혹은 희망을 갖는 것이 좌절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쉽다.
    딱 한번의 승리의 경험, 그것이 희망의 근거가 된다.
  4. 그래서,
    어두움과 침체 속에서 아파하는 것이 한편 꼭 필요한 일이고, 그것을 무시할 것은 아니지만,
    그 속에서 충분히 아파하는 것으로 희망을 갖게되지는 않는다.
    희망은 그 딱 한번의 승리의 기억이 있을때 강력하게 작동한다.
  5.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딱 한번의 승리의 근거를 제시해준다.
    그것 때문에 소망을 갖게되는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더럽더라도, 힘들더라도, 초월적 소망은 그렇게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