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용 로보트

나는 내가 이런걸 만드는 일을 할거라고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은 수술용 로보트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일이 너무 많아서 완전 눌려 살고 있다. -.-;

구체적으로 내가 뛰어들어서 하고 있는 어떤 특정한 부분이 있는데, 그건 confidential이서 말하기가 좀 그렇고…

다음의 비디오 몇개는 수술용 로보트에 대한 간단한 소개들이다.
여기 주로 나오는 da Vinci라는 로보트는 우리의 경쟁회사에서 나온 건데, 사실상 현재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을 만드려고 하고 있는 것이고… ^^

흥미로운 무신론자들

지난 몇달동안 영국 Premier Radio에서 하는 Unbelievable이라는 라디오 방송의 podcast를 열심히 들었다.

이 방송은 기독교인과 그것에 반대하는 여러 입장들을 가진 사람들이 나와서 토론을 하는 것이 그 내용이다.
무신론자도 있고, 불가지론자도 있고, 이슬람, 시크, 조로아스터, 뉴에이지등 아주 다양한 종교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나와서 서로 토론을 한다.

계속 기독교 이외의 다른 관점의 이야기를 듣다보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들이 들었다.

  1. 나는 다른 종교에 대해 진짜 잘 모르는구나.
  2. 정말 좀 괜찮은 논리를 가지고 덤비는 무신론자가 생각보다 많지 않구나.
  3. 과학주의는 기독교의 적수가 되기 어렵겠구나.
  4. 기독교가 정말 아파할만한 그러나 정말 들어볼만한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듣기도 참 어렵구나.

그리고 무엇보다도 Stanley Hauerwas가 이야기한 것이 정말 맞다고 생각한다.

(주로 리차드 도킨스부류의 사람들을 지칭하면서)
오늘날의 무신론자들은 기독교에대해 흥미로운 비판을 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흥미로운 무신론자들이 잘 발견되지 않는 이유는 기독교가 제 기능을 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얼마나 볼품 없으면 그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재미없는 사람들만 있겠는가

아우토반 택시

지난주는 독일에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호텔에서 공항까지 택시를 탔는데,
택시가 자그마치 Mercedes E class!
아우토반을 달리는데, 시속 180km까지 달렸다.
길도 좋고 차도 좋아서 그렇게 빠른지 잘 몰랐는데, 계기판을 보니 장난아니었다.

안타까움이 없는 사랑이 가능할까?

내가 부모인데, 능력이 없어서 자녀에게 교육을 제대로 시켜주지 못한다고 하자.
그런 상황이라면 내 능력없음을 말로 다 할수 없이 한탄하며 안타까워할 것이다.

내 자신을 자책하는 것이 그 상황에서 유일한 해결책은 물론 아니지만, 그리고 그것이 꼭 건강하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지만…
자신에 대한 자책, 그리고 안타까움은 내가 사랑하는 대상에대해 더 해줄 수 없다는 것에 근거하고,
그런 감정은 사랑으로부터 비롯된다.
내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런 상황 속에서 안타깝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영적리더들이 진심으로 자신이 섬기는 사람들을 사랑하는지를 알아보는 판별식으로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사용하곤 한다.

(물론 이것은 나 자신에게도 비추어 적용해보는 기준이기도 하다.)

이 귀한 말씀을 가지고 이렇게 밖에 설교하지 못했다면서 안타까워 눈물을 쏟는 설교자에게서는 사랑이 보인다.

사랑을 배우기, 사랑하기

어떤 아이가 자꾸만 물건을 훔친다고 하자.
그 아이는 그냥 자기가 갖고 싶어서 옆의 가게에서 물건을 가지고 오는 것이다.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도 제대로 알지 못한채.

그 아이를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부모는,
그 아이가 물건을 훔쳐오는 것을 보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 아이의 감정을 공감하는 게 중요할까?
그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하는게 중요할까?
그 아이가 상처받지 않도록 사태를 수습하는게 중요할까?

이것들이 모두 다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아이에게 도둑질이 나쁜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리고 도둑질보다 훨씬 더 가치있고 좋은 일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Therapeutic한 현대의 기독교는,
진리를 말하려 하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핑게하에 사랑하지 않으려 한다.

나이가 들지만 늙지않기

나이가 이제 겨우 40조금 넘었거나, 50조금 넘었는데,
마치 ‘통달’이나 한 것 같이
“그거 해도 안되는거야”
“옛날엔 나도 그랬지”
“그건 네가 아직 젊어서 그래”
식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완전 맥빠진다.

나이가 들지만 여전히 청년의 열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참 감동이 있다.

다음의 video는 Stanley Hauerwas가 로마서 13장에 관해 토론하는 짧은 clip이다.
2014년에 비디오가 올라온걸로 보면, Hauerwas가 74세일때의 모습인데,
분명 할아버지이긴 한데, 정말 청년의 기개가 넘친다.

정말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


내 삶을 내가 control 할 수 없음을 느낄 때

나 처럼 겁이 많은 사람은 내 삶을 내가 control할 수 없다고 느끼는 순간 대단한 공포를 느낀다.
그래서 어떤 형태의 변화이던 간에 모든 변화를 기대를 가지고 맞이하는 일이란 거의 없다.
특히 내가 무엇인가를 실패했다고 느낄때나, 내게 무엇인가가 부족하다고 느낄때 그런 공포는 더더욱 심하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만일 나보다 큰 초월자가 내 현재 상황으로부터 나를 끄집어내고자 한다면 어떻게 하실까?
당연히 그 상황을 변화시키거나, 심지어는 무너지게 하셔서 새로운 길로 이끄시지 않을까?

이게 이성적으로는 당연히 그렇다는걸 아는데,
겁이 많은 나 같은 사람은 그런 상황이 되면 심장이 뛰고, 얼굴이 빨개지고, 땀이 나고, 당황한다.

나 같은 이런 사람들에게는 두가지가 필요한 것 같다.

첫번째는,
그런 경험을 반복해서 해보는 것이다.
처음엔 그러면 죽을 것 같은데, 자꾸 해보면 그래도 죽지 않는다는걸 체험적으로 깨닫는다.
그리고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런 과정 속에서 하나님을 대면하기도 한다.
그리고 예전에는 들어서 알던 하나님을 얼굴을 맞대어 아는 것 같이 알게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두번째는,
나의 약한 부분을 공동체에 의지하는 것이다.
가족이 될수도 있고, 친구가 될수도 있다.
그냥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누구에게 조금 기대어 부축을 받는 것이다.
불행히도 내겐 그런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내가 패닉에 빠졌을때 내게 기댈 어깨를 내어주는 사람이 정말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패닉에 빠진 사람들에게 내 어깨를 내어주는 사람이 되고싶다는 생각이 참 큰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한편 내가 적극적으로 그렇게 도움을 구하기도 해야하고, 어쩌다 도움이 살짝 왔을때 그 도움을 수용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 그래, 나 같은 쫄보에겐 그런것도 용기다.

젊은 놈들!

내 부모님은 그러지 않으시지만,
내 나이 또래나 나보다 조금 더 젊은 사람들의 부모님들을 보면 ‘극우’의 정치적 입장을 가진 분들이 많다.

그중 어떤 분들은 아주 적극적으로 태극기나 심지어는 가스통을 드시는 분들도 있다. -.-;

나는 그 어르신들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분들이 가지는 비이성적 두려움과 분노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래서 그분들중 많은 분들은 매우 진정성을 가지고 그렇게 행동하시는 것 같아 보인다.
(그걸 이용해먹는 정치꾼들은 정말 나쁜 놈들이라고 생각한다.)

그 어르신들은 나 같은 사람들을 보면 진심으로 ‘빨갱이’가 되었다고 걱정하실수도 있겠다.
나는 빨갱이가 보기엔 완전 반동주의자일텐데 말이다. ㅎㅎ
그 분들의 눈으로는 나 같은 사람의 입장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니들이 빨갱이를 몰라 라는 말이면 그저 대화가 거기서 더 이상 진행되기가 어렵다.

그런데….
나는 피부로 제대로 느끼지는 못하지만,
지금 한국의 젊은 세대가 이번 법무장관 임명에 관련해서 가지고 있는 분노를 각종 매체를 통해서 일부 접했다.

나는 그 사람들이 가지는 분노를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을 했다가도,
아니, 저건 합리적 분노가 아니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마디로 그 사람들의 ‘정서’가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일베를 하는 아주 극소수 20대를 이해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냥 이 상황에서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정상적인 20대를 이해해보려고 하는 것이다.

내가 한국에 있지도 않고,
그나마 미국에서도 20대의 한인 학생들을 많이 만나면서 지내질 않으니
그 생각과 정서를 이해할 기회를 얻기란 정말 어려워 보인다.

내가 제한적으로 접한 20-30대를 보면서,
사고방식과 논리구조가 다르다는 것에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그렇지만…
나는 정말 이 사람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좀 더 이 사람들을 이해하고 이 사람들에게 공감해보고 싶은데 말이야…

우리 윗세대 어른들이 ‘니들은 빨갱이를 몰라’라는 것에서 대화가 끊기듯이,
내가 그 사람들에게 던지는 어떤 말에서 그들과의 대화가 끊기지는 않으면 좋겠다.

치사한 짓

회사에서 치사하거나 졸렬한 짓을 하는 사람들이 당연히 있다.
어느 인간사회든지 그런 사람들은 있기 마련이다.
그런 사람들은, 아… 자기가 올라서기위해 저렇게 까지 하나 싶은 일들은 한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험담 퍼뜨리기,
공개적으로 다른 사람들 망신주기,
몰래 뒤에서 사람들을 자기편 만들어서 멀쩡한 사람 뒤통수 치기 등등.

그런데, 그런 짓을 하는 사람들의 90% 이상은 사실 실력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실력으로 안되니까 그렇게 해보려는 것일까.

회사든, 정치든 어찌 그리 똑같을까.

비가역적 개혁

Obama가 대통령일때,
Obama care를 정말 아주 열심히 밀어붙였다.
여론도 그렇게 좋지 않았다.
보수 언론과 보수 정치인들은 Obama care가 사회주의라고 비난했고, 가짜 뉴스도 떠돌았다. 그것에 영향받은 대중은 부정적으로 반응했다..

민주당 의원들은 이러다 우리 망한다며 반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이번에 다시 뽑히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 개혁은 해야한다며 그 개혁을 지지했던 민주당 의원들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Obama care는 의회에서 통과되었고, 그 민주당 의원들중 많은 사람들은 그 중간선거에서 떨어졌다. 민주당은 다수당의 위치를 잃어버렸다.
(나는 그렇게 떨어진 민주당 의원들이 unsong hero라고 생각한다.)

그 후에 Trump가 Obama care를 뒤집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 했다. 그렇지만 Obama care를 뒤집기란 그리 쉽지 않아보인다. Obama는 비가역적 개혁을 이룬 것이다.

Obama care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이전의 상태보다는 큰 진보를 이룬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 진보와 개혁은 비가역적이 되었다.

요즘 한국에서 들려오는 뉴스들을 읽으며,
지난 밤에 이곳 시간으로 한밤중에 자다 깨다 하며 청문회를 보다가,
잘 보지 않던 facebook에 들어가서 new feed를 읽으며,
극렬한 반대와 극렬한 찬성 사이에 고성이 오가는 것을 보며,
이 와중에 광을 팔고 있는 한국의 어느 권력집단을 보며,

Obama care와 비가역적 개혁을 생각한다.

비가역적 개혁에는 희생에 동참하도록 요청할수 있는 자신감있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비가역적 개혁은 누군가가 그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
비가역적 개혁은 당연히 쉽지 않다.

그러나 비가역적 개혁은, 비가역적이다. 역사는 그렇게 진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