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질문

지난 주일에는 교회에서 설교를 했다.
내가 웬만하면 우리 교회에서는 ‘설교’를 하지 않으려 하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그렇게 되었다.
지난주까지 독일에서 바쁘게 보내다가 결국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설교문을 써야 했다. ^^

=== 아래는 설교문 ===

오늘 본문은 여러분이 대부분 매우 잘 아는 내용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 뿐 아니라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매우 유명한 이야기이지요?
아마 여기계신 아무나에게 한 두어시간 시간만 드리면 여러분도 이 본문가지고 설교를 하실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 종교 지도자, 사회적 저명인사 다 그냥 지나쳤는데 소외받고 배척받는 사람이었던 사마리아인이 선행을 했다. 그러니까 우리도 사마리아인처럼 선행을 하자.
예수님도 그렇게 본문의 끝에서 말씀하셨죠?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오늘은 여러분이 늘 아시던 이 본문을 살짝 다른 각도에서 한번 바라보려고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 전체의 구조를 가만히 한번 보십시오.
우선 25절에 율법교사가 와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겠습니까? 로 질문을 시작해서요,
29절에 오면 누가 내 이웃입니까? 라는 질문까지 이어집니다.
여기까지는 초등학교 수준의 reading comprehension(독해) 교육을 받았다면, 뭐 다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지요.
그런데, 그 다음이 조금 이상합니다.
누가 내 이웃이냐는 율법교사의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뜬금없이 이야기를 하나 꺼내십니다.
아니 갑자기 왠 이야기를?
그게 이야기를 하시는 건 좋은데, 그 마지막에 예수님이 뭐라고 이 이야기를 끝내시지요?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행하라’고 하시는 걸로 이야기를 끝내십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너도 가서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어라”라고 대답을 하신거죠.

바로 이런걸 동문서답이라고 하지요.

율법교사가 ‘누가 내 이웃이냐’고 물었다면, ‘이러이러한 사람이 네 이웃이다’라고 대답을 해 주셔야 정상적인 대화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엉뚱한 대답을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논리가 엉망이신 분이셨나. 

자,여러분 지금부터는 팔을 걷어 붙이고 공부를 한다는 심정으로 제 이야기를 한번 들어봐주시기 바랍니다.
어렵진 않을텐데, 찬찬히 논리를 잘 따라오셔야 이해가 되실 수 있을 겁니다.
한번 가보겠습니다.

이 율법교사가 물어보는 질문을 한번 잘 보십시오.
25절에 “선생님,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나서 예수님의 대답이 나오니까, 29절에서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다시 질문을 했다고 누가가 해설을 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묻는게 누가 나의 이웃이냐고 묻지요.
이 율법교사의 모든 생각의 중심에 누가 있어 보이십니까?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겠느냐,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누가 나의 이웃이냐…

이 율법교사의 모든 관심은 자기 자신에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동문서답을 하시는 이유는, 그 대화를 통해서 율법교사의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그건 제가 후에 조금 더 설명하겠습니다.

그런데요,
벌써 우리가 누가복음 10장을 보고 있지만요,
복음서에, 특히 공관복음서 – 마태, 마가, 누가 이 세 복음서를 공관복음서라고 하지요 -에 나타난 복음의 모습은요, 예수믿고 개인적으로 누가 천당간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물론 개인적인 구원을 포함하지만, 개인적인 구원의 이야기가 아닌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겁니다.

1945년 8월 15일에 우리가 일본치하에서 해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순간 일본의 국민이었는데 그때부터는 한국의 국민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건을 두고, 강원도 철원에 사는 김만복씨가 일본국민에서 한국국민으로 바뀐날 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날은 온 나라가 해방된 날인거죠. 그게 1945년 8월 15일의 이야기인거죠. 물론 그것 때문에 그 안에 있는 강원도 철원의 김만복 할아버지의 국적이 바뀌었습니다. 그렇지만 개인의 국적 회복이 그 날의 main event는 아닙니다.

복음서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왔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너희들에게 다가왔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 있는 사람들중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가게 되겠지요. 그리고 영생을 얻지요. 그렇지만 그것보다는 훨씬 더 큰 이야기가 되고 있습니다.

혹시 이 내용이 새롭게 들리신다면, 누가복음을 처음부터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임했다는 관점으로 다시한번 찬찬히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매우 새로운 발견을 하시게 될 수도 있습니다.

자, 복음은,
이제 깨어진 세상에 선하신 하나님의 통치의 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제는 악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지고, 그 백성의 눈에서 눈물이 씻겨지는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교사는 그런 와중에 와서…
그런데, 제가 영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를 묻고 있는 겁니다.

개인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에서도 개인이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강조는 반복해서 나옵니다. 그렇지만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 세상을 눈을 열어 보게되면, 그제서야 하나님을 기준으로 내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나를 기준으로 하나님의 좌표를 설정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은 아닙니다.

전제가 잘못되어 있으면, 잘못된 질문을 던질수 밖에 없습니다. 

이 율법교사도 전제가 잘못되어 있었기때문에 질문이 이상했던 겁니다.
완전 맹구같은 이상한 질문을 한거죠.

여러분,우리들이 던지는 질문들은 무엇입니까?
내 커리어를 어떻게 할까?
지금 이걸 디딤돌로 해서 조금 더 나은 직장에 가봐야 할텐데.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안정될 수 있을까?
내 필요를 어떻게 채울까?
내 자녀를 어떻게 키우나?
왜 내 남편은 내 뜻대로 안해주는 걸까?
아, 여기서 집은 언제 살수 있나?
내 인스타그램 포스팅에 like가 왜 안달리나?
다음 휴가 여행은 어디로 가지?

여러분, 질문이 틀렸습니다.

그 질문들이 전혀 무가치한것은 아니지만, 그건 지금 이 율법교사 수준의 질문인겁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하는 말씀은,

우리가 우리 삶의 주인이 되면 우리가 망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삶의 주인이 되었을때 망한 case들을 많이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우리 삶의 주인이되어 망한 세상을 행해 하나님께서 불타는 사랑을 꺾지 않으시고 그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이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주인을 나로 삼지 않고 하나님으로 삼으라고 초청을 하시는 거지요.

우리는 잘못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내 커리어의 성공을 위해서 가족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는 일,
내 진로를 펼치지 못한 책임을 배우자에게 떠넘기는 일,
잠깐 더 내 필요를 채우는 무엇을 하기 위해 옆에 있는 사람의 필요를 무시하는 일,
지금 당장 눈 앞의 성취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초조해하며 내가 사랑할 사람들을 괴롭게 하는 일,
다른 사람들의 성공과 성취를 보면서 마음 가득히 시기와 질투를 갖는 일…
잘못된 질문을 던지고 있는 사람들이 맺는 망가진 열매들입니다.

오해하시지 말것은, 여러분의 개인을 다 포기하라는 말씀은 결코 아닙니다. 그건 그것만으로 따로 많은 내용을 다루어야 할 것 입니다.
다만, 내 성취와 만족을 최우선으로 두는 것이 얼마나 파괴적인가 하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어느시대인든지 늘 영웅의 이야기는 있습니다. 그런데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나누었던 영웅의 이야기와, 지금 포스트모던 시대에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영웅의 이야기는 조금 결이 다릅니다.

고대의 영웅이야기는요,
대개 자신을 희생하고 자신의 한계를 극복해서 공동체가 추구하는 가치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현대의 영웅 이야기는 공동체의 기대를 거슬러서 자신의 꿈을 이루는 것들입니다.

내가 정말 authentic한 내가 되는 것입니다. 

사회는 내게 무엇이 되라고 하고, 가족은 내게 무엇이 되라고 하고, 전통은 내게 무엇이 되라고 하지만…
나는 그게 내 길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고뇌하던 끝에 나는 내 자신을 발견하고 사회나 가족이나 전통의 족쇄를 벗어버리고 내 길을 찾는 것.

내 안에 있는 나를 발견해 내는 것. 이런걸 expressive indivisualism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지요.

과거 영웅의 이야기는 어려움을 뚫고 공동체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었다면, 요즘 영웅의 이야기는 공동체의 가치를 뚫고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가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모두 잘 알고있는 현대의 철학자 엘사가 한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Don’t let them in, Don’t let them see
Be the good girl you always had to be…
Let it go. Let it go.. Can’t hold it anymore
I don’t care what they’re going to say…

Coco, incredible, Moana 같은 애니메이션들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다 똑같은 패턴입니다. 내 안에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해서 사회나 시대나 가족의 통념을 깨고 내 꿈을 이룬다. 그게 시대 정신입니다.

그런데, 나 자신은 나 자신을 자꾸 파서 발견되어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많은 사회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이런식의 expressive individualism은 coherent한 문화를 만들어낼수 없다고 진단합니다.
모두가 내 꿈을 이루려고하는 세계관은 그 내부에서 붕괴할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꿈을 이루려고 하는 세계관이 공동체적으로도 coherent하지 않지만, 그건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 입니다. 내꿈을 이루려고 사는 삶은, 결국 그 안에서 논리적으로 붕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말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고 이야기합니다.
정말, 정말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에 함몰되면 안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우리를 채울만큼 크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게는, 어떤 가치가 내가 추구할 만한 가치냐를 따져볼때 사용하는 판별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것을 위해 죽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냐 라는 질문입니다.
그것을 위해 꼭 죽으라고 강요하는 말은 아닙니다. 그것을 위해 죽는 것이 논리적으로 말이 되느냐를 따져보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보지요.

제가 만일 온 인류 전쟁문제를 해결하기위해 내 자신을 헌신해서 살다가 죽는게 논리적으로 말이 됩니까? 저는 그럴 자신이 없지만, 논리적으로는 말이 됩니다.

왜냐하면 온 인류의 전쟁문제는 나 보다 큰 개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 그 것은 나라는 그릇에 담으면 내가 차고 넘치는 거지요.

그렇다면 인류의 기아문제 해결은 제가 추구할 만한 가치인 겁니다.

그런데,
내가 내 성공을 위해서 죽는다는게 논리적으로 말이 될까요? 내가 내 행복을 위해서 죽는다는 건요?
말이 안되죠.
아니 내가 죽는데 성공이나 행복이 무슨 소용입니까.
왜 그렇죠? 성공이나 행복은 나 자신을 채울만큼 큰 개념이 아닌겁니다. 
내가 성공이나 행복보다 크기 때문에, 그걸로 나를 다 채워도 내가 채워지지 않는 거죠.
그렇다면 제 성공이나 제 행복은 제가 그것에 목매어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닌겁니다.
나 자신에 집중해서 내 필요를 채우고, 
내 꿈을 이루고,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현대에 heroic narrative로 여겨지고 있긴 하지만…
그건 결코 heroic하지 않습니다.
그건 coherent하지도 않습니다.
그건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큰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본문의 율법교사로 돌아가 보지요.

이 율법교사의 관심은 그 자신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자신이 믿는 종교의 힘으로 자기가 구원을 받고, 자기가 옳게 보이는 걸 추구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완전히 핀트가 맞지 않는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한가지 더 생각해보지요.
그럼 이 율법교사는 영생을 얻었을까요?
글세요…
그런데 이렇게 생각할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율법교사는 하나님 나라, 영생이라는 개념에 대해 심각하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한된 시간 동안에 그 개념을 이 곳에서 다 설명할수는 없겠지만, 혹시 그 구체적인 내용이 궁금하시면 제게 끝나고 물어봐주세요.

예수님은 그것에 대해 신학적 대답을 줄줄이 해주시는게 아니고, 대화를 통해서 그 율법교사가 잘못된 위치에 있음을 드러내보이시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던지는 질문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던지는 질문은 잘못된 질문은 아닙니까?

여기서 이 설교를 마무리 하면요, 이 설교의 내용은 앞으로는 질문을 잘 하고 살아라 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니까 좋은 질문을 던지자… 더 잘 해보자….  이런 도덕종교적 설교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는 그런 도덕종교적 접근을 취하지 않습니다.
저는 질문을 잘하자 라고 이 설교를  끝내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질문을 잘하자고 결심해서 질문을 잘하게되는게 아니라고 저는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 여기서 율법교사의 질문과 예수님의 질문을 한번 대비시켜봅시다.
율법교사의 질문은 누가 내 이웃이냐 하는 것이었고요,
예수님의 질문은 누가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요, 율법교사의 질문, 즉 누가 내 이웃입니까? 라는 것에 대해 답을 얻는 것과
예수님의 질문, 즉 누가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냐? 라는 것에 답을 얻는 것 중에서,
어떤 대답이 그 사람을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까요?
누가 내 이웃이냐에 대한 답을 혹시 얻었다면 이 율법교사는 이웃과 이웃 아닌 사람을 편가르고, 그 안에서 종교적 생활을 열심히 했을 겁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율법교사에게 던진 질문, 누가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냐? 라는 질문은 그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이 사람을 조금 더 원래 질문에 충실하게 사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거죠. –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종교지도자가 처음 물어보았던 ‘영생의 삶’에 더 근접한 것입니다. 

종교지도자가 완전 봉숭아학당 맹구같은 질문을 하고 있는데요,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그 사람의 질문의 관점 자체를 완전히 바꾸어주십니다.
누가 네가 사랑해야하는 너의 이웃이냐고? 네가 이웃을 사랑해봐.

자기자신에 온통 빠져서 그것만 생각하고 있는 이 율법학자에게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이 보고 있지 못하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해주십니다.

그 다른차원의 이야기를 해주심으로써 율법학자의 질문 자체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드러내시는 한편, 아이러니컬하게도 누가 내 이웃이냐는 그 질문에 대해서 한단계 더 높은 대답을 해주시는 겁니다.

저는 이게 예수님과의 만남이 한 사람에게 깨달음을 가져다주는 일반적인 모습을 잘 그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내 커리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아 왔는데,
나는 재정적 안정이 짱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는데,
나는 다른사람으로부터 받는 인정에 목말라 살아 왔는데,
나는 그냥 내 자신의 꿈을 이루고 싶었는데…
그런데 예수님과 만나고 나니 내가 잘못된 질문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는 일을 하게 되는 거죠.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어떤 질문을 던지며 살고 계십니까?
계속 내 필요, 내 꿈, 내 성취, 내가 받은 찬사와 인정에 목매어 사시고 있으시지 않으십니까?

여러분,
질문이 잘못되었습니다.
그 질문은 아무리 파고들어도 대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 질문들은 점점 여러분을 갉아먹어 갈겁니다.

예수님께서 새롭게 열어주시는 새로운 차원의 해답에 눈이 열리기 전 까지는,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여러분에게 초청하십시오. 그분과 대화해보십시오. 예수님에게 여러분의 귀를 여십시오.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으십시오. 

제가 이 말씀을 이렇게 간절하게 드리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제 자신에게 여러분이 간절하게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저도 이곳 Bay area에서 살면서 제 욕심이라는 족쇠 때문에 몹시 고통스럽습니다.
옆에서 누가 잘되면 말로 다 할 수 없이 마음 깊은 곳에서 시기가 불꽃처럼 일어납니다.
제 탐욕이 제 영혼을 갉아먹고 있습니다.
매일 독주를 마시며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만일 여러분중 누가, 그 진리가 자유케하는 그 길을 사는 모습을 보게된다면,
제가 조금 더 용기를 내어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제게는 정말 desperate하게 여러분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요,
그렇게 엉뚱한 질문을 하는 우리를 위해,
우리를 진정으로 해방시키시기 위해,
그리고 세상을 그 깨어짐으로부터 해방시키기위해,
십자가에서 모든 수모를 겪으셨습니다.

십가가에서 그 처절한 고통을 감수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해 그 고통 다 참으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 그분이, 지금 왜 우리를 포기하시겠습니까?
왜 우리를 돕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가 우리 마음을 열기만 하면 말입니다.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겁니다.

좋은 영화

이번엔 유난히 stress를 많이 받는 출장이었기 때문에 완전 긴장 바짝하고서 다녀왔는데…

그래서 독일에 다녀오면서 왕복 비행기 안에서 영화를 딱 한편만 볼 수 있었다.
나머지 시간엔 자거나 일하느라…

영화를 많이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뭘 볼까 조금 뒤적이다가 새로 나온 알라딘 영화를 보았다.
인터넷에서 이 알라딘 영화에대해 좀 혹평하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살짝 나서 망설였는데 그냥 딴거 볼것도 마땅치 않고 해서 보게 되었다.

내 평가는, 완전 좋았다!

우선, 알라딘과 자스민 공주라는 좀 진부할 수 있는 이야기를 새롭게 update해서 만들어놓은게 좋았다.
자스민 공주는 passive하게 사랑을 기다리는 진부한 공주님이 아니라, 백성을 사랑하여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능동적인 사람으로 그려졌다.
영화를 다 보고나서도, 알라딘에 대한 인상보다 자스민 공주에 대한 인상이 더 깊게 남았다.
특히 Speechless 라는 이미 많이 알려져있는 곡을 부르는 장면에서 자스민 공주의 표정연기가 아주 좋았다.

윌 스미스도 내가 보기엔 지니를 새롭게 해석해내는데 성공한것 같아 보였다.
오히려 예전의 지니보다 윌 스미스의 지니가 내겐 더 좋아 보였다.
지니가 알라딘의 종속된 캐릭터가 아니라 알라딘과 동등한 캐릭터로 그려지는게 좋았다.그러고보니 상대적으로 알라딘의 비중은 그래서 영화 전체적으로 살짝 더 줄어들게되었다.

아쉬웠던 것은,
자파와같은 악당의 내면묘사등이 더 들어갔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러면 아이들까지 다 보는 영화로서는 좀 너무 복잡해질수 있었을 것 같기도 하고…
또 하나 아쉬웠던 것은 알라딘과 자스민의 노래였다.
Speechless같은 곡은 뭔가 좀 더 힘있게 부르는 사람이 해주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그건 너무 여리여리한걸 좋아하지 않는 내 취향일수도…
어떤 사람들은 자스민공주를 맡은 나오미 스캇이 중동사람이 아니라는 것으로 불평을 하던데, 내겐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나오미 스캇의 연기는 좋았고, 어차피 알라딘의 배경이 허구의 나라이니까.

민우에게도 한번 보라고 권해봐야겠다. ^^

아, 음식 안 맞아서…

처음 미국에 왔을때,
나는 아주 오랫동안 한국음식을 먹지 않고도 잘 지냈었다.

처음엔 그저 계속해서 학교 식당에서만 먹었고,
영어도 잘 못했으니, 뭔가 복잡하게 customize하지 않는 것만 먹느라 맨날 똑같은 것만 먹길 반복했었다.

그때는 내가 20대였다.

그런데,
아… 독일에서 한주 이상을 보내는건 이제 정말 힘들다. -.-;
이 사람들은 왜 음식을 이렇게 해서 먹는걸까? 하는 생각이 살짝 들만한 것들을 많이 먹는다.
특히 큰 도시의 음식점에서 먹는게 아니라, 회사식당 같은데서 먹는 음식은 정말 퀄리티가 장난 아니게 허술하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익숙하지 않은 음식을 계속 먹는게 지겨워진다.

독일 같은 곳 뿐 아니라, 심지어는 일본 출장도 조금 오래 하면,
뭔가 좀 매콤한게 막 먹고싶어 진다.

방문하는 회사에서 나름대로 식사 대접을 해 주는데,
그거 안먹기 깨작거리기도 미안하고…
덕분에 맛 없는거 잔뜩 먹고 살 많이 쪄서 돌아가게 된다…. 쩝.

출장을 다니면서 좋은점

나는 커피를 참 좋아한다.
아주 sophisticated한 커피를 즐길 수준이 되지는 않지만, 그냥 향긋한 커피를 마시는게 참 좋다.

그런데 요즘은 커피를 마시면 밤에 잠을 잘 못잔다. -.-;
그래서 아침에도 가능하면 커피를 마시지 않으려고 노력을 한다.

그런데 이렇게 다른 시간대에 있는 장소에 오면,
어차피 밤에는 잠을 잘 못자고,
낮에는 빠릿빠릿 깨어있어야 하고…
해서 아침이면 좋아하는 커피를 정말 양껏 마신다. ^^

오늘 아침에도 4시에 일어나서 정말 에스프레소를 양껏 마시고 ㅋㅋ
아침 7시에 호텔에서 나가 지금 밤 10시까지 일을 하고 돌아왔다.

내일 아침에도 맛있는 커피를 많이 마실 생각에 마음이 따뜻하다~

United 1K

United가 내년부터 마일리지 프리미엄 멤버가 되는 기준을 많이 높인다.

나는 출장을 많이 다니므로, 마일리지의 등급이 그래도 늘 꽤 높은 편인데, 특히 출장을 갈때 united나 Star alliance의 그 제휴 항공을 타는 경우가 거의 80% 이상 된다.

그래서 나는 늘 United의 제일 높은 레벨인 1K가 되는 기준 근처정도까지 늘 왔다갔다 하게 된다.

1K가 되면 좋은점이 꽤 많다.
Domestic과 international flight에 free upgrade가 있고,
Economy는 무조건 economy plus를 타고,
International flight을 탈 경우, 모든 star alliance 라운지를 다 쓸 수 있고,
Economy를 타면 스낵이나 식사도 공짜로 받고,
문제가 생겨서 전화를 하면 1K 전용 라인이 따로 있다.

그런데 내년부터 United가 1K가 되는 기준을 많이 높인다.
마일리지와 무관하게 얼마나 돈을 많이 썼느냐 하는 기준으로 정하는데,
1K가 되려면 일년에 24,000불을 써야 한다.
Platium은 15,000불
Gold는 10,000불
Silver는 5,000불 이다.

요즘 같아서는 내년에 1K가 되는건 그리 어렵지 않을 추세다. -.-;
보통 한달에 비행기표로 평균 5000~6000불 정도는 쓰고 있다.

지금도 또 뮌헨에 와 있다.
금년에도 1K는 또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앞으로 거의 두주 가까이 블로그 업데이트가 잘 안될수도 있습니다.
출장 끝나고 나면 다시 부지런히 업데이트 하겠습니다~^^

그냥 현장에서 느끼는 학벌 (6)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어떤 장관을 심하게 몰아붙였던 지난 두어달간의 광풍은,
결코 정상적인 정의를 향한 움직임으로 보이지 않는다.
적어도 내겐 그렇게 보인다.

나는 class (계급)는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주라는 이유로 죽창으로 사람을 찔러 죽인 공산혁명가들은, 아무리 그 의도가 선했다 하더라도 나는 동의할 수 없다.

나는 학벌이 계급이 되어버리는 것을 막는 key 가운데 하나는,
현재 하층계급이 되어 있는 사람들을 먹고살게 해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저 삶 자체를 증오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조금 풀어지도록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뜬금없이 학벌이야기를 쓰기 시작했지만,
한국의 뉴스를 들으며 하도 마음이 답답해서 이렇게라도 뭔가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단결석

예전에, 나는 집착이 심한 모범생이었다.
횡단보도를 건널때도 대충 걸쳐서 대각선으로 건너는 것을 못견뎌했다.
숙제를 미룬다거나 심지어는 하지 않는 일은 상상하지 못했다.

대학때에도 나는 수업을 딱 두번 빼먹었다.
한번은 친구가 갑자기 수술을 할 일이 생겨서 그 친구랑 병원에 가느라,
다른 한번은 내가 자전거타다가 넘어져서 턱이 찢어서 병원에 가느라.

그런 내게 무단결석은 대단한 용기이자 일탈이다.

지난 이틀,
블로그를 무단 결석했다.
일탈이었다.

왜 그랬는지는 차차 더 설명할 기회가 있을 수도 있겠으나….
기본적으로는 세상 돌아가는게 마땅치 않아 하나님께 많이 좀 따지고 싶었다.
블로그 안쓰는 대신 그 시간에 기도라도 조금 더 하고 마음이라도 조금 더 추스리겠다고 했으나…
그건 완전 뜻 대로 안되었다.

무단결석도 해본 놈이나 하는 것 같다.
내겐 아무런 유익도 효과도 없는 듯…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

최근 몇년에 걸쳐서 한국의 소위 ‘보수 기독교’ 목사들과 교인들을 보면서,
나는 이분들과는 분명히 다른 종교를 믿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점점 굳혀가고 있다.

그렇게 내가 선을 긋게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예전에 내가 신앙의 선배로 생각하고 존경하던 분들도 포함되어 있다.

적어도 내가 믿는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셔서 그 아들을 이땅에 주신 분이시다.
절대적 사랑의 절대적 하나님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늘 겸손의 사랑을 잃지 말아야 한다.

내가 그 삶을 배우고자하는 한국인 신앙인들은,
길선주, 손양원, 김교신, 장기려와 같은 분들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자기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신 분들이다.

지난 목요일 한국에서 일어난 일들을 남은 뉴스를 보면서…
아, 이제는 정말 내 마음 속에서 한가닥 남아있었던 아쉬움의 끈 조차도 끊어버리고,
그분들과 나는 다른 종교를 믿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증오, 폭력, 거짓, 술수를 따르는 사람들과 나는 다른 종교를 믿는다.

Andrew Yang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내가 주목하는 사람은 Andrew Yang이다.
이 사람이 후보가 될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이 사람이 주장하는 것이 참 흥미롭다.

인공지능등의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일할 수 있는 직업은 계속 없어질 것이다. 그런데 반면 Google, Amazon과 같은 회사는 사람들이 계속 인터넷을 사용하는 한 더더욱 돈을 많이 벌게될 것이다.
그래서 Yang은 이런 high tech 회사들로부터 세금을 더 걷어서, 미국의 모든 사람들에게 ‘기본소득’ (universal basic income)을 지급하겠다는 것이다.
이 사람은 미국의 모든 사람들에게 한달에 1천불씩 주겠다는 주장이다.

이게 어떻게 보면 미국판 허경영이 아닌가 싶은 황당한 주장 같아 보이는데,
나는 이런 방향이 미래 사회를 맞이하면서 모든 사회가 지지하게 고민해보아야 하는 논리라고 생각한다.

정말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점점 더 많은 직업들이 없어질텐데,
그것을 대체할 다른 직업들이 어떻게 나타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Google, Amazon, Facebook은 점점 부자가 되고, 다수의 사람들은 점점 더 가난해지는 극도의 빈익빈부익부가 나타날 수 있다.
그러면 사실상 지금상태의 자본주의가 더 이상 지탱될 수 없다.
중산층의 소비가 없어지는데 어떻게 자본주의가 가능하겠는가.

기본소득의 개념은 그래서 진보적인 일부의 사람들에의해 별써 수년전부터 이야기되어 왔는데,
미국에서는 major 정당의 후보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민우가 요즘은 Elizabeth Warren을 지지하는 것 같아 보이는데,
이번 Thanksgiving에 집에 오면 Andrew Yang에 대해 민우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좀 들어봐야 겠다.
(민우가 대학에서 어려운것들을 배우더니면 요즘 훌쩍 더 유식해졌다. ㅎㅎ)

답답한 사람들과 일하기

회사에서 일 잘 못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이런 사람들과 일하려면 정말 완전 속 터진다.
나는 100m 전력질주를 하면서 가려고 뛰는데 버벅거리면서 내 허리춤을 붙잡고 질질 끌려오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우아.. 속 터져…

그런데…
나는 유난히 그렇게 빠릿빠릿하게 일을 잘 못하는 사람을 잘 견디지 못하는 것 같다.
내가 생각하기에 당연히 그런건 잘 해야하는 것 같은데 그렇게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냥 많이 답답해한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나는 그런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도와주는 일을 참 잘 하지 못한다.
그냥 내가 그 사람의 일을 다 해주는게 차라리 낫지…

왜 나는 그렇게 못되 처먹었을까?

가만히 생각을 해보았는데,
내 문제 가운데 하나는 내가 일을 ‘열심히’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일을 할때 이루는 성과를 내 능력때문이 아니라 내 노력 때문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성과를 내지 못하는 사람은,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노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기 의’가 충만한 것이지…

I need Gr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