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obal shortage

나와 같이 이런쪽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신문등을 통해 일부 접했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요즘 전 세계적으로 각종 기본 재료, 소자등이 엄청나게 부족한 상태이다!

자동차용 반도체가 부족해서 자동차를 제대로 만들지 못하기 시작했다는 뉴스는 좀 나오는 것 같다.
그런데, 요즘은 사실 하다못해 PCB 기판 같은 것도 엄청 물량이 부족하다.

여러가지 반도체 소자가 부족한 것은 말할것도 없고,
그나마 PCB 기판을 구한다 하더라도 PCB 회로를 만들기위한 여러가지 기초재료/소자들도 엄청나게 부족하다. 작은 부품들이나 구리판등도 구하기가 정말 힘들다.

평소 3~4주 면 만들 수 있는 간단한 전자제품들이 그래서, 3달이상 걸리는 경우도 많다.
또 가격도 엄청나게 비싸졌다.

지금 상황이 왜 이렇게 되었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사람들마다 조금씩 분석이 다른것 같다.
제일 많이 나오는 분석은 COVID-19때문에 집에서 소비되는 여러가지 전자제품의 소비가 늘었는데, 그것을 제대로 공급해주는 여러 공급망(supply chain)이 COVID-19때문에 제대로 돌아가지 못해서 이렇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엄밀한 의미에서는 COVID-19이전에도 일부 소자들이 조금 구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제한적이지만 조금 있어왔다. 내가 피부로 느끼기에는 대충 2018년정도부터는 조금씩 여기저기저기에서 소자/재료 구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그 여파로 꽤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고 꽤 여러가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흥미로운 것은,
전반적으로 가격이 올라가고 재료구하기가 어려워지니까, 공급망을 local에서 해결해보려는 시도들이 조금 있는 것 같다.
아주 큰 스케일의 생산을 미국이나 유럽등에서 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겠지만,
약간 작은 volume의 생산-공급망중 일부를 local에서 해결해보려는 시도들이 일부 조금씩 보인다.

COVID-19이 과연 이런 식으로 globalize되어있는 여러가지 공급망을 새롭게 재편하는 역할을 하게될까?

나같이 세계의 여러나라의 공급망과 일을 해야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현재의 상황이 하는 일을 매우 어렵게 만들긴 하지만…
나와 같이 globalized되어 있는 경제체제가 약자에게 가혹한 체제라고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혹시 이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약간의 희망을 가져다주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해보게 된다.

Getting things done

미국의 의료비가 참 많이 비싸다.
이건 뭐 워낙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이게 많이 비싼것을 가지고 사람들이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는다.
그러니까 영리를 목적으로하는 병원을 허가하면 안된다고 한국에서 이야기하는 이야기도 듣고,
사설 의료보험이 만악의 근원이라고 이야기하는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그리고 또 미국에서도 결국은 의료보험체제를 개혁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했던 Obama care같은 것도 있었고.

원칙적으로는 나는 동의하는 부분이 많이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미국에서 그걸 하는데는 정말 많은 어려움이 있다. 어쨌든 현실적으로 개인의 자유, 자유로운 영리추구가 훼손되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고, 그런 입장을 가진 major 정치집단이 있는 것이 사실이므로… 원칙과 이상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쉽지는 않은 것 같아 보인다.

적어도 내가 지금 있는 회사에서는 그 문제를 조금 다른 방법으로 풀어보려고 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의료시스템 자체를 더 효율적으로 만들고, 병이 걸렸을때 그것을 치료하는것보다 병이 걸릴 위험을 줄임으로써 그 cost를 줄이는 쪽으로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데에는 결국 새로운 innovation을 일차적으로 받아들여야하는 일선의 병원이나 의료보험회사의 저항이 그렇게 크지 않다.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만들면 결국 병원의 경영에 도움이 되고,
reactive(병을 치료하는 방식으로)하게 문제를 다루지 않고 proactive(병을 사전에 적극적으로 예방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다루어 cost를 낮추는 것은 의료보험회사들이 환영하는 방법인 거다.

그러면 이런 식으로 하면 소위 stakeholder들을 배제시키지 않고 그 사람들을 참여시키는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게 정말 될까?
물론 나도 잘 모른다. 적어도 우리 회사에선 그걸 해보려고 이것저것 노력을 하고 있는 중인거고.

어떤 문제에 대해서 소위 ‘이념적 (idealogical) 접근’을 하는 정치집단을 보면 좀 답답하다고 느낄때가 있다. 이념적 접근을 큰 틀을 짜서 vision casting을 할때는 도움이 될지 모르나, 그 구체적인 실행방안이 부실하면 목소리는 크고 갈등은 키우고 일을 제대로 안되는 일들이 벌어지고 만다.

한국이나 미국에서,
진보진영이든 보수진영이든 모두 이런 우를 범하는 것을 자주 본다.

한국의 경우에는 박근혜 정부때 빛내서 집사라고 했던 거나… 문재인 정부에서 대출규제를 통해서 집값을 잡아보겠다고 하는 것 같은게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싶다.

적어도 무엇인가를 execute하는 사람들은, 그냥 좋은 이상만으로 일이 된다고 생각하며 안된다.
그 이상을 현실적으로 이루어내는 창의적이면서도 혁신적인 실행계획들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제대로 실행해내는 능력도 있어야 한다.

이건 정치나 행정의 영역에서만 보는건 아니다.

교회도 그렇다.

좋은 아이디어를 목소리 높여 이야기하고, 자신과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소위 개혁적인 사람들에게서 자주 그런 아쉬움을 느끼곤 한다.

나도 그 얘기 다 공감하고 동의하는데…
그렇게 원칙만 이야기하지 말고 뭔가 한발작 더 나가는 이야기를 좀 해보면 좋지 않겠나… 싶은 거다.

재미있는 공부

어제 오랜만에 졸업한 학교의 website에 들어가서 뒤져보았더니 박사논문을 다운로드 받을 수 있게 되어있었다.
종이로 프린트 한것을 아마 학교 도서관에서 스캔해서 올려놓은 것 같았다.
(나때만 해도 박사논문을 종이로 프린트해서 내도록 되어 있었다. ^^)

내가 박사논문을 쓴건 반도체 소자를 만드는데 사용되는 플라즈마와 고체 표면사이에 일어나는 현상을 수학적 모델로 설명하고 그 수학적 모델을 실험을 통해서 다시 확인하는 내용이었다.

내가 실험을 한 경우도 있었고, 이미 발표된 다른 논문에서 얻을 수 있었던 실험결과들도 있었는데…
수학적 모델을 세워놓고 그걸 컴퓨터를 이용해서 풀어서 실험결과와 잘 맞아들어가는 것을 보았을때의 그 짜릿함이란!!!

박사학위를 받은지 이제는 아주 긴 시간이 지났고,
지금 내가 하는 일은 그때 그렇게 열심히 했던 것과는 아주 다른 종류의 일을 하고 있다.

나는 박사공부를 할때 꽤 고집스럽게 hot한 것을 해서 뻔지르르한 뭔가를 만들어내는 종류의 일 보다는, 뭔가 일어나는 현상을 과학적으로 잘 설명해내는 종류의 내용으로 논문을 쓰고 싶었다. 그리고 결국 고지식하게 그렇게 했다.

그런데 요즘은…
박사를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 적어도 공학분야에선 그렇다.
공학분야에서 좋은 박사논문은 보기에 아주 hot한 혹은 sexy한 것을 해내는 것들이다.

내가 hot하거나 sexy한 것을 하는 것보다는 조금 더 근본적인 원리에대해 더 해보고 싶어서 그렇게 고집스럽게 했던 것은 어쩌면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현명한 선택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컬하게도 지금 나는 말하자면 비교적 hot하거나 sexy한 것들을 하면서 밥먹고 살고 있다.
그렇게 고집스럽게 근본적인 원리를 파고 싶었던 내 박사과정때의 고집은… 그냥 그걸로 끝이었다. 나는 그 후로 다시 또 그런 종류의 연구를 하지도 못했고, 심지어 내가 아카데미아로 갔더라도 그런 연구를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요즘 그런 연구에 누가 돈을 대주겠는가…

같은 실험실에 있었던 사람들 몇명을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더니,
그렇게 똑똑하게 아주 재미있는 논문들을 썼던 친구들이 지금은 다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고지식하게 그렇게 공부하고 원리들을 탐구하는 일을 좋아하는 내게,
그나마 박사과정때라도 그걸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이 지금 생각하면 감사한 일인거다.

여러개의 비선형 미분방정식을 컴퓨터로 풀어가며 계산을 했었지만…
지금 나는 간단한 미적분도 어떻게 했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 하다. ㅋㅋ

나이가 많이 들어서 배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중고등학교 검정고시를 보고, 대학을 다니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예전에 보면서 잘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이젠 그런 마음이 이해가 잘 된다.
주말엔 가끔씩 내가 더 공부해보고 싶었던 양자역학 같은거라도 조금씩 공부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The Wall of Shame

예전에 박사과정을 할때,
우리 office 한쪽 벽에는 The Wall of Shame이라는 벽이 있었고, 그곳에는 여러가지로 장식이 되어 있었다.

서로 잘 들어맞지않게 잘못 디자인된 실험장치,
실험이 거의 끝나갈때쯤 실수로 깨뜨려버린 실리콘 웨이퍼,
냉각수 켜는 것을 깜빡한 바람에 태워벅은 실험장비의 사진 등등.

우리끼리 우리의 실수를 희화화하면서 즐거워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때 가끔은 그걸 보면서 아…내가 저렇게 바보같은 실수를 했구나… 하는 것을 되새기며 뭔가 겸손해지는 느낌이 들때도 있었다.

당연히 그 wall of shame에는 내 실수들도 전시되어 있었으니.

내가 나를 과대평가하고 싶을때,
내 인생에도 그런 the wall of shame이 있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내 실수와 실패와 부끄러움을 모으는 일은 어쩌면 내 삶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

그러니,
현재를 살아가면서 의도적으로…the wall of shame을 장식할만한 내 부끄러움에 의도적으로 주목하며 살아가는 것이 참 의미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 삶의 부끄럽고, 어둡고, 당황스러운 순간들…
그런 순간들에 오히려 그 순간을 잘 마음에 새기고 담아내는 일들을 더 의도적으로 해야하겠다는 생각

날씨

보스턴에서 공부할때,
나보다 2년 먼저 졸업한 친구가 이곳 bay area에 직장을 잡았었다.

그 친구와 그때 이메일을 하면서 Sunny California에 사는게 어떠냐, 여기는 오늘도 3ft 눈이 왔다… 해가면서 이야기를 하곤 했었다.
이야기를 그렇게 하긴 했지만, 사실 나는 보스턴 날씨에 그렇게 큰 불만이 없었다.
보스턴 날씨가 좋아서 그런것이라기 보다는, 나는 날씨에 좀 둔감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여태껏 내가 산 지역을 쭉 따져보니, 이곳 bay area에서 산 기간이 제일 길다.
날씨에 둔감한 사람이기도 하고, 이곳에 오래 살고 있기도 해서…
이곳의 날씨를 많이 appreciate하면서 살고 있지 못하는 것 같다.

요 며칠 날씨가 꽤 좋다.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고.

미국 다른 지역에서는 이상한 날씨 때문에 난리가 났는데,
둔감해서 날씨 좋은 것을 감사할줄 모르는 것도 일종의 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희망에 대한 이야기

최근에 Yale의 Center for Faith and Culture에서 하는 podcast를 발견했다.
주로 Miraslav Volf가 이야기를 많이 하는 podcast인데, 그중에 나온 이야기중 몇개를 여기에 옮긴다

미라슬라브볼프는 몰트만을 인용하면서 희망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희망과 낙관론은 다른 것이다.
낙관론은 현재의 상황으로부터 외삽해서(extrapolate)해서 예측할 수 있는 미래에대한 예측이다. 낙관론은 그런 의미에서 논리적이다.
그러나 희망은 현재의 상황으로부터 논리적 사고를 통해서 도달할 수 없는 상태를 바라보는 것이다. 희망은 현재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new thing)이다.

희망은 우리가 그렇게 희망을 가질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지 않을때 갖는 것이다. 희망은 논리에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신뢰(trust)에 근거한다.

희망은 논리적인 흐름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갖게되는 것이다.

휴가

매년 내게 주어진 휴가를 다 쓰지 못하고 한해를 보내곤한다.
그게 지난 몇년간 누적되어서 쓰지 못한 휴가가 꽤 많이 모여 있었다.

게다가 작년엔 그나마 별로 쓰지 않던 휴가도 더 쓰지 못하고 지나는 바람에 휴가가 너무 많이 쌓이게 되었다. ㅠㅠ

회사 방침에 따르면 300시간 (37.5일) 이상 쌓여진 휴가는 더 이상 쌓이지 않고 그냥 버려지게 된다고 이메일이 왔다. 어.. 그 피같은 휴가가…

그 아까운 피 같은 휴가를 그래서 뜬금없이 하루씩 써야하게 생겼다.
민우도 없고, 아내도 매일 일하는데다 심지어는 토요일에도 일을 하니…
휴가를 쓰더라도 나 혼자 보내야 하는데…

사실 그렇게 조금 시간이 나면 내가 참 좋아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우리 집에서 차로 40분 정도 거리에 있는 ‘금식 기도원’에 가는 것이었다.
이 전 회사에서 layoff 당해서 시간이 남을 때에도 나는 아침에 휙~ 하고 운전해서 거기 가서 기도하다가 오후에 돌아올때가 많았다.
그런데 이젠 그것도 못하는 상황이니…

오늘 하루 휴가다.

날씨가 허락된다면 혼자서 가까운 산길을 걸으며 여러가지 생각을 좀 해보려 한다.
비가 오지 않으면 좋겠다.

능력자

저 사람 누구야? 라고 물으면 그 사람의 직업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ex. 저 사람 무슨무슨학교 수학선생님이야) 그 사람이 누구누구와 어떤 관계에 있는 사람인지를 (ex. 저 사람 아무개 아빠잖아) 기술하곤 한다.

그런데 이곳 실리콘밸리에서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이야기하는데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표현이 그 사람의 직장과 하는 일이다. (ex. 그 사람 애플에서 아이폰 배터리쪽 일하는 사람이야)

지난 주말, 페퍼톤스라는 그룹의 노래를 좀 많이 들었다.
페퍼톤스는 KAIST를 졸업한 두 사람이 하는 그룹이다.
이 사람들의 노래를 몇곡 들어보니 참 매력있었다.
youtube에서 노래를 찾아들었으니, 당연히 이 사람들이 여러 프로그램에서 인터뷰하고 이야기하는 것도 많이 나오는데, KAIST 졸업했다는게 여전히 이 사람들에게 아주 특징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정말 이 사람들은 아주 열심히 음악을 만들고 연주를 하는 사람들이고, KAIST 졸업한건 그렇게 이 사람들에게 중요하지 않은 것인 삶을 살고 있다.
한때는 다들 그렇게 공부잘해서 그렇게 좋은학교 가고 그렇게 공부한걸텐데… 자신의 비전공분야에 몰입해서 이제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있는 것을 보면서… 아, 참 여러분야에 능력이 많은 사람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전문적으로 전혀 다른 직업을 선택해서 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전문분야 외에 비전문분야에서 대단히 놀랄만한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요리이기도 하고, 음악이기도 하고, 운동이나, 혹은 다른 손재주가 되기도 한다.

나는 그냥 어릴때부터 늘 해오던거 말고는 별로 잘하는 것도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꽤 다른 많은 것들에 나는 흥미를 잠깐씩 보였던것 같다.
함께 노래부르는것을 좋아했었고, 중창단같은 것도 했고,
연극을 엄청나게 열심히 하면서 그거 열심히 공부도 했던 적도 있었다. 연기도 했었고, 연출도 했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것들을 내가 누릴 기회를 점점 잃어갔고,
나는 예전에 그렇게 관심을 가졌던 그런 분야들에 대해서도 전혀 뭐 별다른 지식도 관심도 더 이상 가지고 있지 못하다.
나는 점점 재미없는 사람이 더 되어버린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요즘 거의 유일하게 내 전문분야 말고 열심히 하는건…
그냥 이것저것 공부하는거다.
성경공부 꽤 열심히 계속하고 있고,
신학책들 읽으며 그것도 공부하고,
youtube 등에서 다소 뜬금없는 과목들을 혼자서 독학하기도 한다. (유명 대학의 심리학과 과목이라던가, 내 전공과는 다른 전자회로에 관련된 과목같은 것들)

요즘은 인터넷에 워낙 여러종류의 능력자들이 많아서, 그렇게 많은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꽤 괜찮은 지식을 아주 정리가 잘 된 버전으로 아주 효율적으로 공부할 수 있다.

내가 능력자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지는 못한데…
나는 이렇게 많은 능력자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성탄의 의미를 잃어버린…

성탄에는 정말 생각해볼것이 많다.
성육신에대해서도 생각해볼 것이 정말 많고,
평화에 대한 것도 그렇고,
낮아짐에 대한 것도 그렇고,
upside-down kingdom에 대한 것도 그렇고,
세상 권력과 하나님 나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가 그리고 있는 세상의 깨어짐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

그리고 실천해볼 수 있는 것도 정말 많다.
묵상, 기도, 나눔, 봉사, 예배, 함께함 등등….

정말 답답한건,
교회들에서 이런 모든 것들이 말라버린채, 프로그램들만 풍성하게 남아버렸다는 거다.
성탄의 의미를 생각해보지도 않는 목회자의 설교를 성탄의 의미에 관심이 없는 신도들이 들으며, 성탄의 의미와는 관계없는 프로그램 속에서, 성탄의 의미와 관계없이 즐기고 있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Cancel culture

Cancel culture라는 말이 있다.
Wikipedia의 정의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Cancel culture (or call-out culture) is a modern form of ostracism in which someone is thrust out of social or professional circles – either online on social media, in the real world, or both. Those who are subject to this ostracism are said to be “canceled.”

말하자면,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어떤 대상이 나타났을때 주로 온라인에서 집단으로 달려들어 그 대상을 비난하고 모멸감을 주고 따돌리는 문화를 이야기한다.
특히 공적인 자리에 있는 사람이나, 유명인들에대해 이렇게 많이 한다.
주로 이것이 밀레니얼의 문화라고 이야기하는데…. 어떤 경우엔 단순히 밀레니얼에만 한정되어있는것 같지는 않다.

글쎄, 나이가 들어 밀레니엘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비판받을만하기도 하지만…
나는 이런 cancel culture는 결국은 정의를 가장한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은 관용(tolerance)를 관계의 원칙으로 정해놓은 일종의 한계라고 생각한다. (이 문장에대해서는 조금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할줄 아는데… 오늘의 글에서는 이 정도만 언급하고 다음에 언제 기회가 되면 조금 더 풀어내보겠다.)

가령, 유명한 유튜버가 자기의 영상에서 뭐 하나 잘못을 했다 하면…
정말 벌떼와 같이 달려들어서 그 유투브 채널을 폐허를 만들어버린다.
어떤 연예인이 한가지 말 실수를 하면….
그 연예인이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도록 매장을 시켜버린다.
어떤 정치인에게 무슨 흠결이 드러나면, 그 흠결의 맥락은 덮어버린채, 그 정치인과 가족을 완전히 처참한 지경으로 만들어버린다.

생각이 다른 관점에 대해 조금더 참아줄줄 알고,
타인의 약점에대해 조금 더 너그러운 마음을 갖고 어떤 사람의 실수나 잘못이나 약점에대해 좀 여유를 가지고 바라봐주는 시각이 참 그립다.

이런 Cancel culture는 옛 공산독재국가에서 했던 인민재판이나 중국 공산당이 했던 홍위병들의 모습과 너무 비슷한 모습이 많아 보인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기독교는 이런 것에대해 꽤 분명하게 낼 수 있는 목소리가 있다.
다만, 현대의 기독교는 그런 목소리를 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