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derdog을 응원하는 재미

Boston Red Sox가 86년만에 World series를 우승했을때 나는 Boston에 있었다.
그야말로 온 도시가 잔치였다.
매년 Yankees에 막혀서 기를 펴지 못하다가, 2004년에는 마침내 우승을 한번 한것이다.

교수들도 8-9월이 되면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꼭 Red Sox 이야기를 했고,
교회 설교에서도 Red Sox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Boston에서는 #1 Radio station이 Sports talk 채널이었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그만큼 온 도시가 열정적이었다.

그런 큰 이유가운데 하나는,
Red Sox가 underdog이었기 때문이다.
아, 물론 아주 저 예산 팀에 비하면 그래도 돈을 많이 쓰는 팀이긴 했지만,
그야말로 매년 돈을 팍팍 써가며 최고의 선수를 사 모으던 Yankees에 비하면 사실 늘 underdog인게 사실이었다.

나는 그렇게 underdog을 응원하는게 좋았다.

그런데,
금년에 Red Sox가 무지하게 잘한다. mlb 전체에서 power ranking으로 계속 부동의 1위이다. 승률도 제일 좋고.
선수들이 진짜로 빵빵하다.
그도 그럴 것이 Red Sox가 mlb에서 payroll이 1위다! link

얼마전,
캐나다 사는 조카가 Red Sox와 자신이 응원하는 Blue Jays 경기를 보았는데 Red Sox가 이겼다고 슬퍼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큰아빠는 좋겠다. 라고 했다고…

더 이상 underdog이 아닌 Red Sox를 응원하는건 사실 재미가 덜하다.
돈으로 승리를 사는게 뭐가 재미 있겠나.

그래서, 마음 속으로 나는 요즘 Blue Jays를 응원해보려 하고 있다. 우리 조카가 좋아하는 underdog 이니까. ㅋㅋ

외로움, 생각이 다른 사람들, 미숙함

1.
내가 이 블로그에서 내 ‘영적 외로움’에 대해 아주 여러번 썼다.
사실 내 영적 외로움을 아주 많은 각도에서의 외로움인데, 그 외로움을 다 이 블로그에서 썼던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냥 많이 외롭다는 이야기를 꽤 많이 썼다.

이건 친구가 없다던가, 말 상대가 없다던가, 뭐 그런 종류의 외로움과는 매우 다른 종류이다.
나는 내게 말 걸어오는 사람들도 많고, (솔직히 어떤땐 너무 많고)
말 상대도 많다. (역시 어떤땐 너무 많다.)
그렇게 사람들이 많음에도 풀리지 않는 영적 외로움이 있다.

2.
그런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내가 하는 시도 가운데 하나는,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을 향해서 나와 함께 하자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건 생각해보면 아주 바보같은 짓이다.
생각이 다른데 어떻게 함께 할 수 있겠는가.

3.
내가 가진 아주 고질적인 잘못된 습관은,
사람들이 모두 나와 같은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내가 가진 좋은 점과 나쁜 점 모두를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때가 정말 많다.)
이만큼 살면서 그토록 많이 그것 때문에 실수도 하고 좌절도 겪었다면… 이제는 다른 사람들은 나와 같지 않다는 것을 좀 알아야 하는데…. 나는 여전히 그걸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다.
내가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 나와 함께 하자고 자꾸 이야기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 사람들이 나와 같을 것이라고 너무 쉽게 assume하기 때문이다.

4.
때로는 꽤 오랫동안 저 친구는 나와 생각이 같으려니… 하고 여겼다가 어떤 순간 그 친구가 나와 아주 결정적이고 핵심적인 부분에서 생각이 다름을 알았을때,
그 친구와 내가 생각이 같다고 생각했던 건… 내가 늘 하는 그런 잘못된 버릇에서 비롯된 실수라는 것을 알았을때,
그래서 어떤 소중한 것을 그 친구와 공유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때가 있다.

5.
그런 순간에 나는 그 친구와 함께 그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그림을 접어야 하고,
그 친구와 함께 함께 싸울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싸움에서 물러나야 하고,
그 친구와 함께 뛸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경주에 기권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순간, 영적 외로움을 피크를 찍는다.

6.
생각해보면 내 영적 외로움은 내 영적 미숙함의 열매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정말 내가 어떤 마음으로 일하는지 안다면…

최근에 알게된건데 한국의 리크루터중 어떤 분들은 내 블로그까지 들어오는 것 같다. -.-;
그렇게 들어오시는 분들이 정말 내 글을 어느정도 읽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내가 이직을 고민하는지 하는 것 정도는 아는 것 같다.
(최근에 어떤 분이 내가 이직을 고민한글을 읽었다며 이야기를 해주었다.)

우아, 대단하다…

그런데,
그러다가 문득 든 생각은…

정말 내 블로그를 제대로 읽는다면, 내가 어떤 마음으로 일하는가 하는 것도 어느정도 알 수 있을텐데,
그래서 내가 회사에 최대의 이익이 되도록 일하지 않을때도 많다는 것도 알 수도 있을텐데…
그래도 나 같은 사람을 뽑고 싶을까?

그냥 resume를 모아서 인터뷰까지 연결시키는 사람들이야, 그냥 profile 좋은 사람들 많이 모아오면 그걸로 좋겠지만…
정말 진지하게 나 라는 사람을 뽑을까 말까 고민하는 어떤 회사의 높은 사람이, 내 블로그 글들을 정말 읽는다면…
나 같은 사람을 뽑고 싶을까?

이렇게 시작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정말 내가 일하는 자세를 어떻게 가져야하는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들었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소중하게 생각하는가,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무엇을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가, 무엇이 가장 가슴아픈가, 무엇에 가장 크게 기뻐하는가 등등.

그래서 정리되는 생각들.

1. 일반적인 통념으로 보았을때, 회사에서 다루기 쉽지 않은, 그래서 어찌보면 그걸 안다면 뽑고 싶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돈이나 승진 등으로 control이 불가능하다면 그런 사람은 결국 ‘가치’를 가지고 승부해야하는 건데, 솔직히 그건 윗 사람 입장에서 보아 다루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2. 정말 나는 그런 사람일까?

3. 이 블로그를 닫거나 옮겨야 할까? ^^

비행기표를 사려고 하는데…

9월에 갈 출장일정을 또 짜고 있다.
대충 2주 정도 갈 것 같은데, 또 워낙 많은 회사들을 거쳐야하다보니 여러 회사들과 이야기하면서 일정을 맞추는게 늘 쉽지 않다.
게다가 출장 일정이 한국이나 일본의 휴일과 겹치지 않게 하려다보니 그것도 또 제약이 되고.

그런데,
회사에서 출장갈때 사용하는 여행사 website에서 다음과 같은 일정을 ‘추천’해준다. 이게 싸다고 -.-;
인천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와서, 덴버로 갔다가, 다시 산호세로 오는… 허걱.

그리고 또 다음과 같은 일정도 나온다.
샌프란스시코에서 일본에 가는데, 몬트리올에서 갈아타는 것. 후아… 진짜 완전 후덜덜 돌아가네.
(이걸 확~ 끊어서 몬트리올 공항에서 후다닥 내려서 동생네 찍고, 30분 얼굴보고 다시 공항 돌아오는건 어떨까 그런 생각도 살짝 해보았다. ㅋㅋ)

나는 보통 round-trip 비행기표를 끊지 않고, 여러 곳을 거쳐서 가는 multi-leg으로 비행기표를 끊는데,
이런 것들이 꽤 자주 나온다.

비행기표 가격이 어떻게 정해지는지는 정말 모르겠다…

많이 울 수 있으면 좋겠다

하나님 앞에 서서
감사의 눈물,
서러움의 눈물,
감격의 눈물이 없다면 내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것이다.

사람들을 만나면서
감사의 눈물,
안타까움의 눈물,
아픔의 눈물,
감격이 눈물이 없다면 내가 사람들을 만나지 못한 것이다.

많이 울 수 있으면 좋겠다.

‘영감’에 의존하는 두려움

나는 일반적으로 ‘준비’를 꽤 열심히 하는 편이다.
미리 미리 하는걸 좋아한다. 그건 내가 일반적으로 두려움이 많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가령 회사에서 일을 할때는 몇년후에 일어날수 있는 일들을 미리 예상해서 그것에 대한 대비책을 미리 세워놓는 일들을 할때도 많다.
이걸 de-risking이라고 하는데, 이런 de-risking을 나는 좀 많이 하는 편이다. 그래서 회사에서 일이 많은지도 모르겠다. -.-;

그런데 Christian ministry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그게 잘 안되거나, 그게 불가능한 경우가 있다.
심지어 나는 ‘설교’도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내용을 준비해 가지만, 실제로 듣는 사람들의 표정과 반응을 보기 전 까지는 어떤 내용을 어떻게 이야기해야하는지 하는 것이 정해지기 어렵다.

기도모임을 인도하는 것도 비슷하다. 때로 기도모임을 하다보면 사람들의 기도요청이 그야말로 럭비공 튀듯이 튈때가 있다.
그건 그 현장에서만 다루어 낼 수 있는 일이다.

이게 어떤건 그냥 ‘순발력’이라는 개인기로 해결하는 경우가 있지만,
정말 어떤땐 하나님께서 도와주신다는 느낌을 받는 경우도 있다.

그 순간을 지나서 돌이켜보면, ‘아니 그때는 내가 그런 얘기를 다 했었네’ ‘그때는 이런 글을 썼구나’ ‘그때는 어떻게 그렇게 기도할 수 있었을까’ 등의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그게 그 순간뿐 아니라, 가령 어떤 설교를 준비할때에도, 어떤때는 그야말로 생각과 말씀이 쏟아져들어올때가 있다. 그러면 대부분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 쏟아져 들어온 생각들을 설교라는 세팅에서 다 풀어내지 못하곤 한다.

아, 물론 늘 그런건 아니다. 그럴때가 있다는 거다.

Christian ministry를 하면서 나는 그렇게 ‘순발력’이라고 표현할수도 있고, 또는 ‘영감’이라고 표현할수도 있는 것에 의존하여 일하는 것을 그렇게 즐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불안하기 때문이다.
만일 상황에 닥쳤는데 그 영감이 떠오르지 않으면 어떻게 하라고?
그래서 나는 대개 과하게 준비를 할때가 많다. 그런데 그렇게 과하게 준비를 하더라도 늘 ‘승부수’는 순발력/영감으로 부터 비롯되는 경험을 하곤 한다.
열심히 치밀하게 준비한 것을 다 쏟아 부어도, 아… 이건 뭐 그냥 내가 열심히 한거구나… 그렇게 생각될때가 있고,
어떤땐 그냥 그야말로 ‘튀어나온’ 어떤 말이나 생각이 듣는 사람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일들을 경험하기도 한다.

내 성품으로 보면 나는 순발력/영감에 의존하여 일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나님보다는 나를 더 신뢰한다.
그렇지만 결국 어떤 상황에 닥치면 내가 열심히 하는 것보다는 하나님께서 해주셔야한다는 생각을 많이 많이 하게 된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이기 때문이다.

KOSTA를 준비하면서 스스로에게 많이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싸워야 하는 대상을 잘 못 골랐어

싸워야 하는 대상을 잘 못 골랐다고 이야기하는건 무슨 조폭영화에서 나올만한 말인 것 같다.
너, 나 잘 못 건드렸어…

뭐 그럴수도 있겠는데…

살다보면 내가 꼭 다루어야만하는 어떤 문제를 만나기도 한다. 일하다가 해결되지 않으면 일이 한발자국도 더 나가지 않게되는 이슈를 만나기도 하고.
그럴때는 정말 꼭 그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그런데 그 핵심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이 때로는 두려울 수도 있고, 귀찮을 수도 있고, 엄두가 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면 괜히 다른 것이 문제라고 여기고 그것을 공격하거나 해결하려고 들때도 있다.
아니면 지금은 그것을 다루지 않아도 된다고 자기최면을 하면서 넘어가고 싶어할수도 있다.

그러나
싸워야하는 대상이 있다면 맞서야 한다.
그래야 문제가 해결되는 거다.

그런데 그게 쉽나. 그게 안되니 그 상황에서 panic하고, 날카로와지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주저 앉아서 멍때리기도 하고…

예전에는 내 기도가 이랬다.
하나님 내가 싸워야하는 싸움을 잘 싸우게 해 주십시오.

그런데 요즘은 내 기도는 이렇다.
하나님 내가 싸우지 못할것 같은 싸움을 만났을때, 당신을 기억하게 해주십시오.

정말 큰 문제가, 마치 등에 큰 용 문신을 한 ‘형님’과 같은 모습으로 떡 하니 지켜 서 있을때,
잘 싸워야지 하고 달려들기 보다는 그 앞에서 하나님을 기억하는 거지.

나는 정말 이런 이야기를 지금의 20대, 30대에게 해주고 싶다.
아니, 내가 잘 해줄수 없더라도 그렇게 누군가가 좀 가서 얘기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KOSTA에서의 은혜를 갈망한다.

협상

요즘 회사에서 하는 일의 거의 70~80 % 는 협상이다.
여러 회사들과 여러 형태의 합의서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 합의서에 들어가는 아주 작은 문구들을 가지고 양쪽의 변호사들이 잔뜩 redline과 edit을 넣어서 서로에게 보낸다.
어떤 것은 수천만불짜리의 합의서도 있고, 어떤 것은 앞으로 수천만개의 제품을 만들것과 관련된 합의서도 있다.
어제도 이곳 캘리포니아 시간으로 저녁 늦게까지 아시아의 어떤 회사와 conference call을 하면서 그 협상을 열심히 했다.

그런데,
그 회사쪽에서 유난히 특허와 관련된 어떤 문구를 지나치게 고집하는거다.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물어보니까, 실리콘밸리의 어떤 회사와 예전에 비슷한 형태의 계약을 맺은 적이 있었는데,
그 회사가 자신의 기술을 쪽쪽 다 뽑아가서 자기것으로 삼아버리더니 결국 그 기술을 자신의 경쟁회사에 주더란다.
그런 일들을 몇번 겪고 나서는 자기 회사와 기술을 지키기위해서 어쩔수 없이 이렇게 하는 거라고…

그런 짓을 한것으로 알려진 그 실리콘밸리의 회사는 그런 갑질을 많이 하는 것으로 아주 유명하다. ^^
그러나 그 회사가 워낙 수퍼 갑이기 때문에 부품 공급업체들을 그렇게 어쩔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불평등 계약을 하게 되는데, 결국은 그게 다 자신의 발등을 찍는 것이 결국 되더란다.

아… 그래서 나는 이 협상을 하는데 죽을 맛이다.
우리회사쪽 변호사와 저쪽 회사 변호사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 어떻게든 합의점을 찾아보려고 하고 있다.
그 수퍼갑 회사가 퍼질러 놓은 똥을 치우는 것 같은 기분이다. 진짜 그것 때문에 협상이 많이 어렵다.

어떤이의 탐욕은, 그 탐욕의 직접적 피해자 뿐 아니라, 간접적 피해자들도 만든다.

‘나’ 중심의 질문, ‘너’ 중심의 질문

사랑이 많은 부모라면,
자신이 사랑스러운 자신의 아이에게 충분히 잘 하지 못한다는 안타까움을 갖게 된다.
때로는 그 안타까움이 건강하지 못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지나치게 자신을 자책한다던가, 아니면 왜곡된 자기 보호 기재로 인해 비뚤어진 감정표출을 하게 된다던가.
그러나 그 ‘안타까움’이 아예 없다면 그것 역시 대단히 이상한 모습이다.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대상에 대해 많은 애정을 가지고,
그 사람을 위해서 더 많은 것을 해주지 못하는 안타까움은 사랑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런 사랑의 모습에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묻기 보다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묻는 모습이 더 많이 나타난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의 중심에는 ‘나’가 있는 반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의 중심에는 ‘너’가 있기 때문이다.

‘나’ 중심의 질문이 아니라 ‘너’중심의 질문을 하는 것이 사랑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닐까.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가지 일을 하면서,
부모로서 살면서,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사역자로서,
선생이 되어 가르치면서,
많은 사람들을 섬기는 public servant로서,

‘나’ 중심의 질문이 아니라 ‘너’ 중심의 질문을 하는 사람들을 더 많이 보고 싶다.

‘너’ 중심의 질문을 많이 한다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에 집중하기 보다는 내가 무엇을 해야하느냐에 집중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해야하는 일을 잘 해낼 수 없는 내 모습에 많이 안타까워하며 아파할 것이다.
능력이 제한된 인간으로서 그런 안타까움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어떤 리더가 정말 진실된 리더인가를 평가할때,
그 사람에게 그런 안타까움이 있는가 하는 것이 참 좋은 판단기준이 된다고 생각한다.

Sloth

Dorothy Sayers는 The other six deadly sin 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The sixth deadly sin is named by the church acedia or sloth. In the world it calls itself tolerance; but in hell it is called despair. It is the accomplice of the other sins and their worst punishment. It is the sin that believes in nothing, cares for nothing, seeks to know nothing, interferes with nothing, enjoys nothing, loves nothing, hates nothing, finds purpose in nothing, lives for nothing, and remains alive only because there is nothing it would die for. We have known it far too well for many years. The only thing perhaps that we have not known about it is that it is a mortal sin…. But theseareall disguisesfor theempty heart and theempty
brain and theempty soul of Acedia

흔히 ‘게으름’이라고 번역하는 Sloth는 사실 의미없이 열정없이 사는 삶을 이야기한다.

뭔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에대해 그저 둔감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하나님께서 일하시지 않는 것에 대해 둔감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등은 다 Sloth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Dorothy Sayers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It is one of the favorite tricks of this sin to dissemble itself under cover of whiffling activity of body. We think that if we are busily rushing about and doing things, we cannot be suffering from sloth.”

바쁘게 사는 것은 때로 sloth의 죄를 짓고 있다는 방증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저 열심히 부지런히 살면서 의미 없이 사는 것은 sloth 인 것이다.

정말 가만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 두가지 사이에 위치한다.

의미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의미없이 바쁘게 살거나.

정말 은혜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