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록수

내가 대학생일때에는, 상록수가 금지곡은 아니었으나, 사실상 데모가였다.
대학생들이 술마시면 함께 떼창으로 부르는 노래이기도 했다.
끝내 이기리라고 이야기했던 대상은 당연히 독재정권이었다.

그 후 97년 금융위기때 이 노래가 박세리가 등장한 공익광고에 쓰였다고 하는데 (나는 기억이 없지만… 미국에 있었을 때여서) 그때는 대통령이 김대중이었다.

그후 2002년 노무현 대선광고중 하나는 노무현이 기타를 치면서 상록수를 부르는 것이었다.

20016-17 촛불집회때에도 이 노래가 많이 불리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노래에 참여한 가수들중 다수는 보수정권때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노래, 참 잘 만들었다. 이 정도면 정치적 입장이나 그런걸 떠나 다들 보면서 감동받을만하다.

내가 이 youtube clip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 몇가지
– 한편 참 감동적이다! (약간의 국뽕과 함께)
– 아, 이제 한국의 수구보수는 정말 marginalize되었고, 한국의 liberal들이 진짜 제대로 헤게모니를 잡은 거구나…. 보수쪽에서 시대착오적으로 탄압했던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이런 contents를 보면
– 영어로 번역되어서 나온 youtube clip은 내가 아는 다른나라 사람들에게도 한번 보여주고 어떻게 느끼는지 한번 물어봐야 겠다.

416

세월호는 생각할때마다 정말 가슴이 꽉 막힌 것 같은 답답함과 찌릿~한 아픔이 몰려온다.
그러다가 울컥 눈물이 나기도 하고,
결국 그러다가는 심한 쌍욕을 하면서 기도를 하게 된다.

하나님 이런 ㅆㅂㄴ들은 절대로 용서하지 말아주십시오.
하나님 이 ㄱㅅㄲ들은 끝까지 그 인생이 불안하도록 해주십시오.
하나님 저런 놈들에게 절대로 평안을 허락하지 말아주십시오

에이…. ㅆㅂ…

나는 욕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평생 욕을 하는걸 본 사람은 아마 다 해서 5명도 안되지 않을까.
그렇지만 오늘 만큼은 내가 할 수 있는한 가장 심한 욕을 하면서 저주의 기도를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그래야만 내가 좀 살 수 있을 것 같다.

블로그를 못 쓴 이유가

어제 초저녁에 조금 자고,
저녁먹고 한 두어시간 비몽사몽 하다가 결국은 출구조사를 보고야 말았다. (그때가 이곳 시간 2am)

그러고나서 개표상황을 보다보니 5시 가까이 되었고, 개표방송을 들으며 비몽사몽하다가 결국 아침 6시 알람에 잠이 깨었다.

나는 정말 아주 간절하게 응원했다. 기도했다.
그러느라 블로그를 못 썼다.

나는 어느 한쪽이 정의의 편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어느 한쪽이 정말 불의의 편에 가깝다고 보았기 때문에 마음에 간절했다.

사실 나름대로 며칠전부터 각 정당이 몇석씩 얻을까 계산해가며 나름대로 노트에 정리도 했었는데, 내 바람보다는 살짝 조금 덜 미쳤고, 내 예상보다는 살짝 조금 더 좋게 나왔다.
내 바람은 지역구 165-81-1 내 예상은 지역구 155-95-1

이거가지고 하나님의 뜻이 어쩌고 할만큼 강한 확신이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정말 정치적 이익을 위해 옳은 뜻을 희생하는 사람들에대한 심판은 이루어졌으면 하는 마음에…

오늘 하루 피곤해서 죽어나겠다. -.-;

It was supposed to be great

제가 사는 캘리포니아는 지금 날씨가 기가 막힙니다.
햇빛이 환하게 비치고, 꽃이 사방에 펴 있고, 아침저녁으로는 적당히 선선합니다.
지금 Shelter-in-place 중에도 저는 매일 밖에서 30분~1시간 정도는 걷거나 뛰는데요, 나갈때마다 정말 아름다움에 경탄을 합니다.

2020년 4월은 이렇게 아름다운 시즌입니다…. 아니 아름다운 시즌이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COVID-19 때문에 정말 현실적이지 않은 상황을 접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뿐 아니라 지역에서 들려오는 확진자 소식, 사망자 소식.
여기 미국에서는 화장실 휴지를 하나 사려면 쇼를 해야합니다. 주말이면 가족과 함께 가서 한주에 한끼정도 비싸지 않은 외식하는 것도 이젠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집에만 있다보니 우울해져서 힘들다는 이야기도 듣습니다.
경제적 약자들은 더욱 힘들어지고, 앞으로 펼쳐질 경제적 불확실성때문에 지금 꽤 괜찮은 사람들도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2020년 4월은, 이러지 않았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시즌이었어야 합니다. It’s supposed to be great in April in California.

그런데 한편, 그건 우리가 사는 세상도 마찬가지 입니다.
세상이 이러면 안됩니다.
N번방 사건 같은 걸로 피해를 보는 아이들이 있어선 안되는 겁니다.
착하게 살아온 사람이 억울하게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해서 평생 장애인이 되는 일은 없어야 하는 겁니다.
회사에서 거짓말하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이 괜한 모함으로 궁지에 몰리는 일은 없어야 하는 겁니다.
거짓말하지 않고 정직한 정치인은 외면받고, 자기이익을 챙기며 공익을 외면하는 정치인이 주목받는 일은 없어야 하는 겁니다.
COVID-19같이 정말 이런 황당한 바이러스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이런 일은, 없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렇습니다. 선한 사람들이 피해를 보기도 하고, 정의가 불의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 같기도 하고, 강자가 약자를 착취하는 일들은 그칠줄 모르는 것 같고, COVID-19은 전 세계에 위세를 떨치며 절대자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렇게 그러면 안되는데… 그게 아니고 정말 이래야하는건데… 하는 그 탄식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 어그러진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깨어짐과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께 갈 길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시는 사건입니다.
지금 당장 위세를 떨치고 있는 것 같은 못된 것들이, 마침내 심판에 처해지고 하나님의 선한 통치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는 약속입니다.

April in California is supposed to be great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It will be great, the greatness already has begun이라고 하시는 선언입니다.

만일, 그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세상이 해석해낼 수 없는 이런 상황 속에서 세상이 갖지 못하는 다른 소망을 갖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그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다른 사람들이 두려움과 침체에 빠져있을때 그 사람들을 향해 과감하게 우리를 던져 소망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그래서 그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의 Lord가 되신다면,
우리는 과감하게 세상이 던져주는 소망, 그리고 그것이 멈추어버린 상황에서 갖는 절망을 과감하게 거부할 수 있습니다.

Christ is Risen, He is Risen indeed!

@ 어제 오후에 내 스스로에게 뭔가 부활의 이야기를 더 해주고 싶어서 내가 내 스스로에게 한 설교문 요약본. 아마 이걸 full로 풀면 거의 한시간짜리는 되지 않을까.

부활은 진짜 믿기 어려운 사건

오늘아침 마가복음 16장을 보면,
이 사람들 진짜 잘 못 믿는다!
죽은 사람이 부활하다니. 이건 정말 그렇게 쉽게 믿을만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갖는 significance를 생각할때 믿을만하지 못한게 당연하다.

역설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너무 쉽게 믿는 것은 그 significance를 충분히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예수님의 부활이 가능했다는 것도 정말 믿을만한것이 아니지만, 예수님의 부활이 정말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면 그것도 역시 정말 믿을만한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버려졌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너희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말씀.

죽음이라는 장벽 앞에서 그저 무기력할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에게, 이제는 그 죽음을 조롱할 수 있다는 말씀.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그 세상을 그분의 선한 통치아래로 가지고 오신다는 선언.

이제는 그렇게도 우리를 붙들어 매고 있었던 죄로부터 마침내 자유로와지게 되었다는 말씀.

세상과 죄의 노예가 아닌 하나님 자녀,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 수 있는 세상이 열렸다는 말씀.

이게 이렇게도 엄청난 선언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정도의 쇼킹한 사건은 되어야 격이 들어맞는 것일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
새로운 세상이다.

일요일을 기다리는 토요일

(작년 부할절을 지내면서 내 스스로에게 내가 했던 설교. 나 혼자 이야기했고, 나 혼자 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금요일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영광스러운 부활을 일요일 새벽에 하셨다.
금요일은 절망의 날이었다.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예수님과 함께 꾸던 꿈도 사라졌고, 삶을 걸었던 열정도 꺼졌다.
치열한 노력도 그저 수포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후에 진이 빠지는 슬픔의 토요일이 왔다.
토요일에 제자들은 무엇을 했을까?
그저 정말 진이 빠져 있었을 거다. 슬픔과 탈진과 두려움과 실망등이 섞여 있었겠지.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그 모든 것을 송두리째 뒤바꾸었다.
아직 절망의 통곡으로 인한 탈진이 다 끝나지 않았는데, 그것을 완전히 뒤집을 뉴스가 나온것이다.
제자들은 그 새로운 엄청난 소식을 어떻게 handle 해야할지도 잘 몰랐을 거다.

제자들이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고, 그 의미를 제대로 깨닫게 된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걸렸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아직 토요일을 살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옳다고 생각하는 꿈들이 꺾이는 절망을 경험하고,
우리의 노력이 한계에 다다라서 이제는 침체만이 남았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그저 자기연민과 의욕없음에 사로잡혀 축 늘어져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활의 일요일이 온다.
부활의 일요일은 그 침체의 절망과 의욕없음이 멋쩍어지는 날이다.
예전에 꾸었던 꿈이 그저 헛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면서도, 하나님께서 그분의 방식으로 그 꿈을 차원이 다르게 이루신다는 것을 보는 날이다.

아직 우리는 토요일에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의 일요일이 어떤 모습인지를 아는 토요일을 살고 있다.

그런의미에서 우리가 이 땅에서 맞는 부활절은 늘 부조리하다.
이 어정쩡한 상태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미래의 기쁨을 드높이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그것이 믿음이다.
이 어정쩡한 토요일에, 영광의 부활의 일요일을 보는 것이 믿음이다.

우리는 아직 토요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요일을 아는 사람들이다.

아직은 토요일이다. 그러나 일요일이 온다. 아니 일요일이 왔다.
부활이다.

예수님의 친구

여태까지는 잘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육체적 고통보다는 예수님께서 조롱당하셨다는 것을 더 많이 주목해서 쓰고 있는 것 같다.

이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이렇게까지 조롱해야만했을까.
여러가지 설명이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엔 예수님을 ‘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로마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권위에 대드는 반란의 두목 정도로,
유대종교지도자 입장에서는 종교질서를 흔드는 이단의 괴수로,
일반 지나가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한때 정치적 해방이라는 소망을 준듯 했으나 그것을 실망시킨 사기꾼정도로…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의 몸으로 감당할 수 없는 육체적 고통을 겪으시면서도 정말 말로 다 할 수 없이 외로우셨다. 아무도 그가 십자가에서  온 몸으로 보여주고있는 사랑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가장 치욕스럽게, 가장 고통스럽게, 가장 외롭게…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맞이하고 계신다. 나의 치욕, 나의 고통, 나의 외로움을 대신해서.

내가 예수님을 그저 superhero로 생각했을때는, 그렇게 고통당하시는 예수님에게 내가 가서 친구가 되어들줄 알았는데,
예수님이 내 구주라는 것을 깨닫고나니, 나는 예수님을 조롱하는 사람이었고, 예수님은 바로 나 같이 그렇게 예수님을 조롱하는 사람을 위해 그 모든 고통과 외로움을 견디신 거였다!

예수님은 외로우셨지만, 나는 예수님의 친구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

예수님은, 정말 작정하고 십자가로 그냥 뚜벅뚜벅 걸어가시는 것 같다.
사람들이 아니 너 왜 이래? 그렇게 이상하게 생각하시는데도 아주 작정하고 아무말 없이 십자가를 향해서 가고 계신다.
빌라도도 이상하게 여겼다고 쓰고 있지만 정말 독자들이 보기에도 이건 정말 이상하다. 

바라바가 강도라고 여기에는 쓰여 있지만 아마도 열심당원이었을 것이다. 폭력으로 이스라엘을 쟁취하려는 집단. 어떻게 말하면 독립운동을 하는 의병같은 것이라고 볼수도 있고, 어떻게 말하면 하마스같은 집단이라고 볼수도 있고, 어떻게 보면 그냥 테러리스트라고 볼수도 있는…

마가복음 앞부분에서, 특히 성전청결 본문 전후로 예수님께서 아주 clear하게 말씀하셨지만 예수님은 그런 폭력적 방법은 옳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십자가의 희생이 정말 사람들을 자유롭게 한다는 믿음으로 뚜벅 뚜벅 그냥 그 십자가를 향해서 걸어가고 계신 것이다.

정말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때문에 풀림을 받은 사람이 열심당원이라는 거다. 폭력으로 자유를 얻을 수 없다는 강력한 message를, 폭력을 주장하는 사람 대신에 죽으심으로서 오히려 더 강력하게 던지시는 거다!

세상의 방식으로 승리하겠다고 바둥바둥하는 사람들, 예수님은 그 사람들이 가장 경멸하는 방식으로 죽으심으로써, 그 사람들을 자유케하시는 거다.

정말 십자가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고, 유대인에게는 stumbling block인거다.
아니, 그런 바보같은 방법이 어디있어?
예수님은 자신이 가장 반대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대신해서, the WAY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계시다.

지극히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이타적인 모습으로 죽으심으로써 그들을 살리시고,
자신의 만족과 행복과 쾌락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죽으심으로써 그들을 살리시고,
폭력과 완력으로 자신의 뜻은 관철하려는 사람들에게, 가장 비폭력적인 모습으로 죽으심으로써 그들을 살리시고 계시는 거다.

정말 예수께서 그렇게 죽으셨다면,
그리고 내가 정말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그 십자가의 가치를 조금 흉내라도 내보아야하는게 아닐까.

정말 내 삶의 방식과 세계관은 계속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고 있으면서,
나는 그저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 예수님. 끌려가기만 한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는 예수님…

아, 마음이 한편 찢어지듯 아프고, 한편 많이 벅차고, 한편 울컥하고, 한편 미칠듯 답답하고…
이걸 어떻게 표현해낼 방법이 없는데…
뭔가 예전에 내가 참 많이 들었던 하덕규씨의 노래가 그래도 이걸 꽤 가깝게 표현하는 듯…
(여기 나오는 영상은 오히려 이 복잡한 마음가 감정을 제한하는 것 같지만, 이 노래는 내가 참 좋아한다.

배신자를 위한 희생

오늘 아침에는 마가복음 14:53-72.
예수님께서 종교지도자들에게 모욕을 당하시고, 억울한 판결을 받으시는 장면. 그리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번 모른다고 부인하는 장면.

여기서 또, 성경은 집요하게 베드로, 제자의 대표인 베드로의 뻘짓을 그리고 있다.
왜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뻘짓을 하는 제자를 그리고 있을까.
이 마가복음을 읽었을 fist hand reader들이 보기엔 그 제자들이 따라야할 모범이었을텐데.

초대교회 지도자들에게는 아마 이것이 늘 사람들에게 해주는 주된 레파토리였을 것 같다.

그때 내가 우리 주님을 배신했었어. 그때 예수님을 버리고 떠났고, 그때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고, 그때 비겁하게 숨었어. 그렇지만 주님은 그런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지. 부활하셨고, 승리하셨고.
나 같은 사람은 정말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인데…

이런 스토리텔링은, 제자들 뿐 아니라 그 스토리를 들었던 초대교회 교인들, 그리고 그 스토리를 읽고있는 우리들에게도… 우리가 바로 베드로이고, 우리가 바로 그렇게 배신했던 제자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자연인인 나는, 예수님을 잘 따르는 사람이 아닌데, 오히려 예수님을 이용하려하고, 예수님을 배신하는 사람인건데… 그걸 다 아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묵묵하게 그 배신을 다 몸으로 받으시며 치욕과 고난을 받으시는 거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했기 때문에 사랑하시는게 아니고, 그분이 그런 분이시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거다.

아, 현대기독교는… 얼마나 자기자랑으로 가득 차 있는지!
그리고 그 속에 있는 나도, 얼마나 자기자랑으로 가득 차 있는지!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인걸 다 아시면서, 어쩌면 내가 뒤에서 배신하고 도망가는 소리를 한편 다 들으시면서 묵묵히 ‘내가 그다’라고 하시면서 그 치욕을 다 받으시는 거다.

정말 이 본문은, 베드로뿐 아니라, 나를 그 배신자의 자리에 데려다 놓는다.

그리고 내가 배신자의 자리에 있다는 것을 보아야만 예수님의 고난이 제대로 보인다.

예수님을 배반한 제자들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나는 모습은 복음서에 정말 찌질의 극치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오늘 아침 묵상 본문에서도 아주 가관이다.
예수님에게 가증스러운 입맞춤을 하는 유다는 말할 것도 없고,
뜬금없이 폭력적으로 상황을 대처하는 베드로 (베드로라고 오늘 본문에 나와있지는 않지만)도 그렇고, 벌거벗은 몸으로 도망치는 제자도 그렇고…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아주 형편없게 그려지고 있지만, 사실 복음서를 쭉 둘어보면 제자들이 참 별볼일 없는 사람들로 그려지고 있는건 매우 일관되다.

그런데, 실제로 이 성경이 쓰여졌을 당시에, 이렇게 형편없이 그려지고있는 제자들은 그 교회의 존경받는 리더들이었다. 그런데 성경은 바로 그런 리더들을 끌어내려버리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다.

성경을 쓴 사람들은 그렇게 한결같이 자신과 자신이 속한 사람들을 낮춘다.
그건 서로 겸손하게 대하는 좋은 세상을 만들어보기 위한 윤리적 행동이 아니다.
예수님 이외에 다른 누구도 높여지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자신들이 낮아지는 것이다.

예수님이외에는 정말 아무도 높아질수 없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가장 낮아지신 분이신데, 그것이 그분을 가장 존귀하고 소중한 분으로 만들어놓았다.

기독교가 가지는 역설이다.

나를 높이고, 나를 자랑하는 것이 그저 천박한 말장난이되어버리고,
예수님 앞에서 나를 끝없이 낮추고 그분 앞에 엎드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되는 것.

높아지려고하는 것이 로마시대의 문화였다고는 하나,
2020년 실리콘밸리만 했을까…

이곳에서 나는, 정말 예수님만을 높이며 살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