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협과 신앙

하나님과 다른 것을 겸하여 섬기는 것을 타협하는 것은 죽음으로 이르는 길이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것이 평생의 고뇌가 될 것이다.
그 안에 여전히 남아있는 죄의 본성과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협을 정당화하는 것은 신앙의 변질이 아니라 불신앙이다.

옛 습관을 따라 아직 남아 있는 타협을 많이 가슴아파하는 일은 여전히 계속 되겠지만,
나는 그냥 여기까지만 할래 라고 하는 것은 신앙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신앙이 없는 것이다.

결혼을 한 신랑이 계속 다른 여자와 데이트를 하면서 나는 내 아내를 사랑하지만 몸과 마음이 여전히 다른 여자들에게 끌려… 라고 이야기한다면 얼마나 역겨운가!

유진 피터슨

나는 facebook을 열심히 들어가서 보지 않는다.
내 전화에는 facebook app 자체가 아예 없고, 아주 가끔 한번씩 컴퓨터를 이용해서 들어가보는 정도.

유진 피터슨이 세상을 떠났다는 뉴스를 다른 경로를 통해서 듣고 나서,
facebook에 들어가보니 생각보다 유진 피터슨에 대한 애도나 추도가 잠잠하다.
좀 속상했다.

그런데 또 다른 의미로, 어쩌면 더 속상했던 것은,
유진 피터슨에 대해서 그렇게 추도나 애도를 할만한 사람이 아닌 사람들이 유진 피터슨에 대해 한마디씩 쓴 글들이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유진 피터슨이 생전에 이야기했던 사상/신앙 등을 제대로 살아가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사람인데…

적어도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유진 피터슨의 책을 많이 읽긴 했지만 유진 피터슨이 그 사람을 안다면 엥? 네가 왜 나를 추도해? 라고 이야기할만한데…

나는 유진 피터슨의 ‘광팬’은 아니었다. ^^ 아마도 그분의 사상을 내가 다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수도 있겠다. 혹은 그분의 컬러와 내 컬러사이에 뭔가 팍~ 맞아떨어지는 chemistry가 있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유진 피터슨이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많이 마음이 휑~하니 아쉬웠고,
그분의 죽음에 한 숫가락 얹으려는 사람들을 보며 더 많이 속상했다.

Why???

내가 참 잘 못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사랑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는 것이다.
나는 참을성이 없는 편이고, 공감능력이 부족하고, 정죄 잘하는 못된 성격을 가졌다.
그러니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격려해준다거나 도움을 주는것은 내 성격과 잘 맞지 않는다.

그런데…

1.
이 블로그를 통해서, 개인적으로 소개를 받아, 기존에 알던 사람들이 필요가 생겨서…
이래 저래 사람들의 job search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꽤 있어 왔고, 지금 현재는 3~4명 정도 된다.
이게 그냥 좀 도와주는게 아니고, 가끔 전화도 하고, 이메일도 주고 받고, resume도 봐주고, job search 전략을 짜거나 linkedin profile 만드는 것도 도와준다.
이게 별거 아닌것 같은데 꽤 내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든다.

그 job seeker가 크리스찬인 경우에는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격려를 해주면서, job seeker가 크리스찬이 아닌경우에는 힘을 잃지 않도록 말로 격려를 해준다.
내가 job을 잃었을때의 경험도 이야기해주고, 길고 힘든 기간 동안에 견디어낼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나는 이런거 잘 하는 사람도 아니고, 이런거 꼭 많이 하고 싶은 사람도 아닌데…

2.
예전에 알고 있었으나 이제는 떨어져 있는 사람들중에서, 이 블로그를 통해서 만난 사람들 중에서, 이래저래 이메일이나 전화등으로 연락을 하면서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늘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냥 신앙의 방향을 잃고 힘들어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진로’를 놓고 고민하기도 한다. 예전의 뜨거운 신앙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사람도 있고, 개인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 허덕이는 사람도 있고,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한밤중에 뜬금없는 카카오톡이나 전화를 받기도 한다.
아니, 어떻게 나랑 그렇게 엮이게 되었는지는 정말 모르겠는데… 이상하게 그런 사람들이 나 같이 사랑없는 사람과 연결이 되어 내게 도움을 요청한다. 지금도 그런 사람들 2~3명 정도 있다.

나는 이런거 잘 하는 사람도 아니고, 이런거 꼭 많이 하고 싶은 사람도 아닌데…

3.
그리고 꽤 심심치 않게…
아주 뜬금없이 ‘소개’를 받아서 커리어관련 코칭을 부탁받거나 기타 다른 도움을 주도록 부탁받기도 한다.
얼마전에는 내가 한번도 만난적이 없는 한국에 있는 한 목사님께서 어떻게 내 카카오톡 contact을 구해서 내게 이곳에 있는 자기 아들을 한번 만나봐달라고 부탁을 해오셨다. 그리고 크리스천으로서 어떻게 직장생활을 해야하는지 도움을 주라도 부탁을 해 오셨다.
그래서 그 아들을 만나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솔직히 말하면… 내 코도 석자인데…
나는 이런거 잘 하는 사람도 아니고, 이런거 꼭 많이 하고 싶은 사람도 아닌데…

4.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도 그렇게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지금은 교회에서 그렇게 사람을 만나는 것은 완전히 팍~ 줄이긴 했지만…

5.
나는 그냥 일반적으로 사람을 만나는데 스트레스를 꽤 많이 받는 편이다.
그게 이메일로 만나는 것이나 전화로 만나는 것도 그렇다.

내 적성에도 잘 맞지 않고, 내가 꼭 하고 싶지도 않고, 내가 잘하지도 않는데…
이렇게 자꾸만 이렇게 저렇게 전혀 낮선 사람들 (+이미 알고 있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내 의사와 관계없이 자꾸만 그렇게 된다.

이 블로그가 그렇게 되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그것 말고도…
솔직히 말하면 내가 편하게 감당할수 있는 것보다 더 많다.

6.
이렇게 이렇게 저렇게 사람들을 만나게된 것이 한 4~5년 된 것 같다.
내가 전혀 바라지 않았는데 그렇게 되었다.
왜 하나님께서는 자꾸만 내게 이런 사람들을 만나게 하시는 걸까?
이런건 내가 잘 하지도 못하고, 나는 막상 이러면서 stress 많이 받고,
힘든 이야기 많이 들으면 나도 힘들기도 하고 그런데 말이다.

7.
그런데 흥미로운건 이렇게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가 덜 ‘종교적’이 되었다.
실제로 살아가는 현장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에대해 더 많이 고민하고 생각하고 기도하고 묵상하게 되었다.
종교적이지 않은 언어로 표현되는 삶 속에서의 기독교는 어떤 모습일까를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8.
최근엔…
그냥 내가 많이 힘들어서 그런 만남을 많이 줄였다.
그리고 예전같으면 내가 조금 더 찾아가서 follow-up도 하고 지금은 괜찮느냐고 묻기도 했을텐데…
요즘은 그렇게도 많이 못하고 있다.
내 적성에 안맞는 다니까!

9.
그런데 또 한가지 배우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은 때로 적성/취향/재능과 무관하게 그분께서 펼쳐놓으시는 어떤 상황 속에서 순종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이다.
나는 그런거 잘 못해요… 나는 그거랑 잘 안 맞아요… 나는 그냥 여기까지예요… 라는 말은 따지고 보면 참 이기적이고 비겁한 말이라는 것이다.

10.
누군가가 내게 와서 내 이야기도 좀 들어주고, 내게도 좀 기운을 북돋아 주었으면…
괜히 가을을 타는 건가. ㅋㅋ

보수가 문제야, 보수가…

1.
나는 정치적으로 ‘보수’로 분류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고 대단히 진보적인 사람도 아닌 것 같다.

그런데,
한국이나 미국의 정치적 상황을 보면, 정말 보수는 못할 것 같다.
이게… 내 입장이 보수를 반대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 입장을 대표하는 정치집단의 행태가 너무 안습이어서 그렇다.
manipulative하고, 부패하고, 완고하고, 무정하고, 이기적이고, 게다가 무능하기까지 하다…

나는 한국이나 미국의 정치가 정말 제대로 살아나려면, 제대로된 보수가 서야한다고 생각한다.
이게 전모 변호사가 이야기하는 것 같이 보수가 사상-이념적으로 무장을 더 해야한다는 뜻이 아니고…
아니 도대체 왜 정치를 하는건가 라는 원래 질문에 충실하게 생각해서 그에 맞도록 좀 움직이면 좋겠다는 거다.

보수가 정말 강조해야하는 제대로된 보수의 가치들. 자유, 정의, 도덕, 전통 등등이 더 이상 보수에서 건강하게 이야기되지 않는다.

솔직히 좀 생각 제대로 박힌 사람이 보수를 하고 싶어도 쪽팔려서 보수라고 하기가 어렵다. 정말 쪽팔려서…

2.
나는 신학적으로 ‘보수’로 분류할 수 있는 사람이다.
정말 완전 보수적인 분들이 보기엔 완전 막나간다고 물론 보이겠지만…. ^^
나는 성경의 신적권위를 믿고, 십자가를 신앙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개인적 회심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게다가 그것을 바탕으로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니… David Bebbington이 기술한 복음주의의 전형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적어도 한국이나 미국의 상황에서 나는 정말 스스로를 보수적 신앙과 신학을 가졌다고 이야기하기가 쪽팔린다.
보수는 manipulative하고, 부패하고, 완고하고, 무정하고, 이기적이고, 게다가 무능하기까지하다.

나는 한국이나 미국의 기독교가 정말 제대로 살아나려면, 제대로된 보수가 서야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목사들이 이야기하는 것 같이 보수 기독교가 사상-이념적으로 무장을 더 해야한다는 뜻이 아니고…
아니 도대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성경은 어떤 책인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하는 원래 질문에 충실하게 생각해서 그에 맞도록 좀 움직이면 좋겠다는 거다.

보수가 정말 강조해야하는 제대로된 보수의 가치들. 은혜, 보혈, 죄, 개인 회심, 성화, 하나님의 절대성, Lordship 등등이 더 이상 보수에서 건강하게 이야기되지 않는다.

솔직히 좀 생각 제대로 박힌 사람이 보수 신앙인임을 표방하고 싶어도 쪽팔려서 보수라고 하기가 어렵다. 정말 쪽팔려서…

사랑과 용기

1.
예를 들어서,
내가 사랑하는 내 아이에 대해서는, 늘 더 많이 염려하게 된다.
사랑하기 때문에 용기가 없어지는 것이다.

사랑하는 대상과 그 대상에 대한 위험감수는 함께 하기 어렵다.

2.
그러나…
사랑은 용기를 불러일으킨다.
내 사랑하는 아이를 위해서라면 나는 내가 평소에 하지 않던 용기를 내게 된다.
낮선이에게 말걸기를 힘들어하는 숫기 없는 아빠라 하더라도, 아픈 어린아이를 등에 업고 고함을 쳐가며 택시를 부르는 용기는 순식간에 나온다.

사랑하는 대상과 그 대상을 위한 위험감수는 함께 하게 된다.

3.
화이팅! 힘내라! 세상을 힘차게 살아라! 도전해라!
그런데 문제는 그럴 용기가 없다.
그 용기는 그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자기애(self-love)? 자기를 사랑한다면, 스스로 어떤 위험에 호기롭게 대할 수 없다.

그럼 그럴 용기는 어디에서 나올까?
나는 그 용기의 근원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한 사랑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기독교인들이 이야기하는대로, 사명에 따라 더 용기를 내어 살아라 라는 구호는 일부 더 용기가 많은 사람들에게만 공명을 줄 뿐, 용기 없는 대부분의 보통사람에게는 그냥 좌절만을 가져다준다.

정말 힘 없는 약자, 더 용기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 사람들을 사랑하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그리고 그 하나님이 사랑하는 세상이 있다는 것을 가슴으로 받아들여 살도록 격려해주어야 한다.

더 쎈 믿음으로 더 헌신하라는 식의 동원은…
주눅들어있고 힘들어하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저 패배감만을 키워줄 뿐이다.

4.
그런 의미에서 나는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는…
믿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사랑과 관계를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만 하는 사람인지, 정말 그런 경험이 있는 것인지…

이런 저런 회사에서 일을 해보면서 한가지 배우게 된 것은,
어떤 사람과 좀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잠깐이라도 함께 일을 해보면…
그 사람이 정말 경험과 insight를 가지고 어떤 말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어디서 주워들은 말을 그냥 뱉어내고 있는 것인지를 알아차리는 기술이다.

사실 정말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척 하고,
경험이 없으면서도 다 경험한 듯 이야기하고,
제한된 지식으로 자기 영역 밖의 내용들을 재단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직장동료로 만나면 참 어렵다. -.-;

그나마 그래도 직장은, 그 직장이 제대로된 직장이라면, 그렇게 말만하는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도태되게 된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다 알게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기독교 써클에서는 그런 일들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아 보인다.

조금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경험도, 지식도, insight도 없는데…
그냥 내가 읽은 책과 비슷한 부류의 책 몇권을 읽었다고 해서 그 사람을 확~ 높게 평가해버리는 일들이 참 흔하게 나타난다.
참 두려운 것은, 기독교 써클에서는 이런 가짜들이 쉽게 도태되지를 않는다.
자정능력이 없는 것이라고나 할까.

세상이 교회보다 훨씬 더 낫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여러가지 가운데 한가지 예.

불사이자사(不思以自思)

不思以自思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스스로 생각이 난다.
김교신 선생이,
예수님을 마음에 품고 살고자 했으나, 무의식 중에서도 끊임없이 그분을 묵상하는 것이 되지 않음을 한탄하던 중,

어느날, 자신도 모르게 꿈에서 예수님을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는,
그날의 일기에, 기쁨이 넘쳐서
不思以自思 라 쓰고 그 기쁨을 마음에 새겼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저절로 예수님을 생각하게 되는 것…

꿈 속에라도 예수님을 만나기를 기대하며 잠들고,
아침에 깨서 첫 생각이 예수님이기를 바라며…

한 시대에 여러 시대를 접하기

10여년전, KOSTA를 섬기던 한 선배와 이야기를 하다보면 꼭 대화가 “이원론과 세속화 중에서 무엇이 더 문제인가”로 계속 귀결되던 때가 있었다.

나는 과거에는 이원론이 더 문제였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세속화가 더 문제라고 주장을 했고,
그 선배님은 여전히 이원론이 더 문제라고 이야기를 했었다.

80년대의 한국에서는 확실히 이원론이 더 문제였다.
그리고 2010년대의 실리콘 밸리에서는 세속화가 더 문제이다.

그렇다면 그 사이를 살고 있었던 그 당시에는 무엇이 더 문제였을까?
그리고 어쩌면 그 중간의 어디를 살고 있을 사람들이 맞닥드리는 더 큰 문제는 무엇일까?

나 개인적으로는…
이제는 정말 KOSTA가 섬기는 대상의 대부분에게 있어 이원론보다는 세속화가 더 문제인 시대로 넘어갔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이원론도 다루어야 하는 이슈이기도 하다.

사실 이원론과 세속화의 문제는 때로 강조점이 서로 부딛힌다.
이원론의 문제를 다루다보면 세속화의 함정에 빠지기 쉽고,
세속화의 문제를 다루다보면 이원론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우리가 사는 시대에 이와 같이 이원론과 세속화를 모두 다 다루어야하는 이유는…
우리가 사는 이 시간대에 여러 시대가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떤 사람들은 확실히 포스트모던 시대에 살고 있고,
어떤 사람들은 확실히 모더니즘의 시대에 살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후기자본주의를 살고 있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아직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조차도 이해하거나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머리로 많은 생각을 해서 앞서나가면 자칫, 이 시간에 여러 시대가 공존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시대의 문제를 단순화 시키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

내세에 대한 소망과 현세에 대한 긍정

두주전에 교회 소그룹에서 어떤 형제가
결국 우리가 믿는 것은 내세의 구원을 위한 것이아니냐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다.

생각같아서는 정말 당장, ‘그거 아니다’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었지만 기회를 얻지 못하고 그 소그룹 모임이 끝났다.

정말 아니다.
내세에 대한 소망이 분명이 있다. 나도 그 소망이 참 크다.
그렇지만, 현세에서도 복음을 믿고 살아야 잘 살게 되는 거다.

그런의미에서 죽기전에 회심을 하는 사람은 ‘lucky’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평생을 복음을 가지고 사는 것을 경험하지 못한채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안타까운 것이다!

기독교는 내세의 소망을 이야기하지만, 현세에 대한 큰 긍정을 하는 종교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제대로 풀어내지 못하는 기독교가 때로 많이 답답하다.

복음은 약이 아니라 밥이다

밥은 하루세끼 꾸준히 제때 잘 먹어야 사람이 산다.
밥을 안먹으면 몸에 문제가 생긴다.
밥을 계속 안먹으면 결국 죽는다.

약은 늘 먹지 않는다.
약은 아플때만 먹는 거다.
그렇지만 멀쩡할때는 약의 존재는 잊고 산다.

복음은 우리가 살아가도록 해준다.
복음은 우리가 살 영양분을 공급해준다.
복음이 없으면 우리는 죽는다.
그리고 그 복음은 꾸준히 그렇게 계속 섭취해야 한다.
복음을 가지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

복음은 우리에게 문제가 생겼을때만 찾는게 아니다.
문제가 생겼을때 기도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문제가 생기지 않을 때에도 복음은 우리를 지탱해 주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복음을 약으로 생각한다.
문제가 있을때만 그 복음을 찾는다.

그러나,
복음은 약이 아니라 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