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follow-up을 하면서 (3)

지극히 신앙이 개인적이다.

20-30세대가 공정에 관심이 많다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사회 정의에 관심이 많다고 하기도 하는데,
이게 신앙에 관한 discussion에 들어가면 결국은 다 그래서 ‘나’에 대한 질문들로 귀결된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잘 알 수 있는가
내가 기쁨을 유지할 수 있는가
내가 어떻게 더 성장할 수 있는가… 등등.

하나님 나라는 내가 들어가는 것이라기 보다는,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라는 이야기를 설명하는데 더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아야 한다.

이게 신앙에 열심이 있는 사람들의 특징인지, 아니면 일반적으로 20-30세대의 특징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내 생각엔 일반적인 특징인 것 같다.)
결국 그렇게 사회정의나 공정에 대한 관심도,
그 사회 속에서 어떻게 하면 내가 살아남느냐 하는 것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비롯된것 같기도 하다.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는 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라를 것

하나님 나라 follow-up을 하면서 (2)

또한 이런 신앙의 열심이 있는 사람들이 이 내용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지식의 연역적 접근을 선호한다.

이것은 결국 어제 이야기한 신앙을 교리적으로 접근한다는 것과도 연관되어 있을 수 있는데…

가령 성경의 이야기로부터 어떤 내용을 귀납적으로 끄집어 내는 것을 대개는 불편해하거나 익숙하지 않게 생각한다.
오히려 이미 알고 있는 신앙의 지식을 이용해서 성경 text를 해석하는 것에 훨씬 더 익숙하다.

그런데 그렇게 알고 있는 신앙의 지식들이 살짝 좀 이상한 것들이 있다. ^^
그러니 성경을 읽어보면 성경 본문이 이상하게 해석이 되는 것이다.

가령 구약의 본문에서 무리하게 예수님을 찾으려고 하는 시도를 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러면 구약의 제사법에도 예수님이 드러나 있고,
시편의 어느 구절에도 예수님이 드러나 있고…이런 식으로 보는 거다.
음… 뭐 그렇게 볼수도 있다고 보는데, (내가 선호하는 성경읽기 방식은 아니지만.)
이게 좀 도를 넘어서, 다소 무리하게 그렇게 성경을 읽어내는 것들을 보기도 한다.

요즘 많은 교회에서 ‘교리’ 수준으로 설교와 성경공부 세팅에서 강조되는 것들중
워낙 이상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보니…
그런 교회 세팅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의 생각이 그렇게 오염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하나님 나라 follow-up을 하면서 (1)

요즘 KOSTA follow-up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세션을 계속하고 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여러 질문들을 받기도 하고,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아무래도 몇주동안 이렇게 ‘하나님 나라’라는 주제로 더 공부해보겠다고 하는 사람이면 어쨌든 조금 더 ‘열심’이 있는 사람들일테고,
나름대로 기독교신앙에 대한 기본내용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일것이다.

적어도 내가 접한 바, ‘기독교에 조금 더 열심있는’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들, 그 사람들의 생각들을 몇가지 적어보고자 한다.

우선,
이들의 생각이 대단히 ‘교리중심적’이다.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는 결국 성경 전체의 ‘스토리'(내러티브)에 대한 것이므로,
진리가 내러티브의 성격을 띤다는 것을 이해해야 하는데,
기독교를 ‘교리’로 배운 사람들에게 내러티브라는 것은 좀 생경하게 느끼져는 것 같다.

한참 네러티브를 설명하고, 이야기를 쭉~ 하고나서..
결국 나오는 질문은, 그래서 교리에서 이러이러한 부분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요…
그런 부류다.

그런데, 그건 사실 그렇게 놀랍지 않다.
처음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을 이해하려고 했던 나 역시, 이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내러티브로 이해하기 보다는 교리의 일부로서 채워넣으려 했으니.

대안적 희망 (22)

희망을 갖게되는 것은 어떤 과정으로 이루어질까?

한편 논리적인 설득을 통해서,
한편 상황의 정확한 관찰을 통해서,
한편 감정적 동요를 일으켜서…

이런 과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모두 가능하지만,
나는 희망을 갖게되는 것도 역시 일종의 ‘종합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설명할수도 있을 것 같다.

희망을 분명하게 확보하려면 위에 언급한 여러가지가 모두 잘 조화를 이루어 존재해야하지만,
희망을 잃어버리는데에는 희망을 구성하는 요소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심각하게 결어되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 ‘믿음’을 어떻게 갖을 수 있느냐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믿음을 갖는데에는 논리, 객관적 사실, 감정 등 모두가 조화를 이루어야히지만,
이중 하나라도 무너지면 믿음이 무너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희망을 갖는 것은 쉽지 않다.
희망은 늘 up-hill battle 이다

대안적 희망 (21)

가령 예를 들어서,
Rodney Stark의 The Rise of Christianity를 보면 2세기 로마에 닥친 역병을 기독교가 어떻게 다루었는지 잘 나와있다.
역병이 무서워서 사람들이 병자와 도시를 버리고 도망갔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그 속에 들어가서 병자를 간호하고, 버려진 사람들을 돌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생존률이 비그리스도인들의 생존률보다 더 높게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그러면서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이건 초대교회 이야기를 보면 꽤 일관되게 나오는 theme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순교를 했던 사람들도 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선교를 했던 사람들도 있다.
죽어도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산다고 했던 사도바울도 있고.

그런데,
현대에는 그런 신앙이 어디에 있을까?

신학적 우파쪽에서는 신앙이 개인화되어버려서 그냥 내가 죽어서 천당간다는게 다인 모습이고,
신학적 좌파쪽에서는 현세에서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강조가 너무 커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theme 자체가 그 신학 체계내에 존재하기 어렵다.

이렇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도 역시,
신앙의 초월성의 영역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대안적 희망 (20)

내가 생각하기에 대안적 희망으로 또 한가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초월성’이다.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극도의 어려움에 있을때마다 이들에게서 나왔던 것은 묵시문학이었다.

궁극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초월적 미래,
지금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어떤 새로운 세상,
이런 것들이 희망이 되는 것이다.

나는 어떤 의미에서,
이런 초월적 희망이 현대 기독교에서 사실상 거의 자취를 감추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초월적 희망이란 사실 보수적 신학을 가진 사람들이 더 바랄만한 내용인데,
보수 신학진영이 전체적으로 세속화되면서 초월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초월성이라고 하는게,
랄랄라 따따따 방언하는거나,
기도가 용한 사람에게서 기도를 받아 살림살이 나아지는것 같은 수준이니, 그게 무슨 희망이 될 수 있을까…

몰트만이 희망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낙관주의란 현재의 상태로부터 생각해낼 수 있는 밝은 미래에 대한 전망이다.
낙관주의는 논리적이고 연속적이다.
낙관주의의 미래는 현재로부터 탄생한다.

그러나 희망은 현재의 상태로부터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희망은 현재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것이다.

나는 이것이 희망의 초월성을 아주 잘 이야기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대안적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건강한 초월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희망을 잃어버린것이 아닌가…

대안적 희망 (19)

나는 하나님의 통리라고 설명되는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매우 좋아한다.
내가 세상과 내 삶을 해석해내는 가장 근본적 기본이 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하는 어떤 사람들이 하는것 같이,
‘초월성’이 배제된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하는 것은 잘 공감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초월성의 배제한 하나님나라가 우리에게서 희망을 빼앗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초월성이 배제되어버리면 결국은 하나님나라의 이야기도 우리의 ‘의지력’과 ‘행동력’이 얼마나 강한가에 의해 좌우되는 이야기가 되어버리고 만다.
더 정확하고 논리적으로 사람들을 설득해서 그렇게 설득된 사람들이 강한 의지를 가지고 제대로 execution 해내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결국 초월성이 배제된 하나님나라 운동은 엘리트 운동이 되어버린다.
논리적 구조를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강한 의지, 실행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함께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안적 희망 (18)

영적 침체에대하여 내게 아주 큰 도움을 주었던 책은 마틴 로이드-존스의 ‘영적침체'(spiritual depression)이라는 책이다.

그 책에 나와있는 여러 아야기 가운데 가장 내 마음에 깊게 남아있는 말은 이것이다.

“Don’t listen to yourself, Have yourself listen to you”

네 마음의 소리에 귀기울이지 말아라. 너 자신으로하여금 너의 말을 듣게 하라.

이게 영어로는 조금 더 말이 되는데, 한국말로 번역을 하고 아니까 조금 이상하긴 하다.

그러니까, 마틴 로이드-존스가 이야기하는 것은 이것이다.
영적 침체에 빠져있을 때 해야하는 아주 중요한 일은, 나 자신에게 설교하는 것이라는 거다.
네 영혼아 너는 어찌하여 낙망하느냐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이 시편에 나와있는 것 같이, 나 자신에게 호통을 쳐서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도록 하는 것을 배워야한다는 것이다.

이게 당연히 쉽지 않다.
나도 역시 영적침체를 여러번 겪어본 사람으로서 이게 쉽지 않다는 것은 정말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만큼 powerful한 조언도 내겐 별로 없었다!

희망을 잃어버린채 영적 침체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고통스러운 조언이긴 하지만 더 깊은 차원에서의 희망을 주는 조언이 아닌가 싶다.

“Don’t listen to yourself, Have yourself listen to you”

대안적 희망 (17)

예수님을 주로삼고 산다는 것은 늘 그렇게 다루기 쉬운 주제는 아니었다.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도 이 문제로 평생을 씨름하였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세대는 그 차원이 정말 다른 것 같다.

최소한 자기 보다 더 큰 가치기준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세대는,
어렵지만, 자기보다 더 큰 가치기준이 있음을 발견했을때 적어도 그 가치기준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 당위라는 것은 인정했었다.
그래서 그것을 위해 더 치열하게 싸우는 것을 덕으로 여겼다.

그러나,
자기보다 더 큰 가지기준이 존재하는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좋은 가치를 제공해준다고 하더라도…
그게 좋긴 한데, 내가 왜 그것에 헌신해야하느냐는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이런 사람들에게 진정한 희망을 이야기해주기 위해서는,
자기보다 더 큰 가치기준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왜 disaster인가, 왜 더 큰 가치기준에 헌신하는 것이 궁극적 희망을 제공해주는가 하는 길고 지루한 설득과 설명이 필요한 듯 하다.

대안적 희망 (16)

절망의 상태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또 다른 key는 자기중심성으로부터의 탈피가 아닐까 싶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가치판단의 중심을 ‘나’로 만들어버렸다.
그래서 내가 좋은 것, 내게 맞는것, 내게 최고의 것이 최선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내 꿈을 이루는것, 내 자아를 성취하는것, 나를 위하는 것이 삶의 의미가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은 내 꿈을 이루며살지 못한다. 어설픈 자기만족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래서 내가 소중하다고 지정해 놓은 것들, 내 관계, 내 소위, 내 지위, 내 성취 등에 내가 다다르지 못하거나 그것들을 잃어버릴때 사람들은 삶의 의미 자체를 잃어버린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나’를 중심에 두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의 가치’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기독교가 해 줄 수 있는 최상의 메시지는 자기중심성으로부터의 탈피이다.

나라는 존재가 나에 의해 정의될만큼 가볍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나를 나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정말 필요한 것이다.

나는 정말 이것을 가능하게하는 기독교적 가치가 ‘Lodship'(주되심)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의미를 상실하고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자기중심성으로부터 벗어나 예수를 주로 삼으라는 메시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의미와 희망을 제공해 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