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ul and the Gift (3)

그 다음에 저자는 소위 “Perfection”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오는데…
한국말로는 이걸 ‘극대화’라고 번역을 한 듯 하다.

Perfection 이라는 말은…. 음… 그러니까… 좀 쉽게 설명하자면 (그래서 부정확하게 설명하자면)
‘은혜/선물’에는 여러가지 다른 특성/측면들이 있는데, 각각의 측면이 강조하는 모습들쯤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1. Superabundance (초충만성)
    은혜는 대단한 것. 엄청난 선물
  2. Singularity (단일성)
    선물을 주는 사람이 순전한 선의를 가지고 주는 선물. (일종의 unversality를 함의할수도)
  3. Priority (우선성)
    선물을 받는 사람이 무엇을 하기 전에 선물을 주는 사람이 먼저 주는 것.
  4. Incongruity (비상응성)
    선물을 받는 사람이 그것을 받을 자격이 없는데 주는 것
  5. Efficacy (효과성)
    선물이 목표한 바를 이루는 것. 선물을 줌으로써 받는 사람에게서 그 의도한 효과/변화/결과가 나타나는 것
  6. Non-circularity (비순환성)
    선물을 주고 그 댓가를 전혀 바라지 않는 것.

저자는 이 여섯가지의 perfection을 바탕으로 역사적으로 어거스틴, 루터, 캘빈, 칼 바르트, E P 샌더스 (New perspective) 등의 관점들이 각각 어떻게 다르게 은혜를 이해했는지를 설명한다.

여기서 특별히 흥미로운 것은
소위 Old Perspective와 New Perspective가 모두 다 Priority와 Incongruity를 강조하는데,
New Perspective에서는 Ethinc Incongruity를 강조하고, Old Perspective에서는 Moral Incongruity를 강조한다.

Paul and the Gift (2)

저자는 이 책에서 ‘Grace’ / 은혜라는 단어를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연구해서 바라보았다.
실제로 바울 당시에 은혜라는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여러가지 그 당시 문헌등을 사용해서 연구해보았다.

실제로 저자는 ‘선물’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그 당시에 이해되었는가를 찾아보면서 은혜의 개념을 정리했다.
우리는 흔히 선물이라고하면 특별히 댓가 없이 주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바울 당시에 그리고 고대시대에 선물은 선물을 주고 받는 두 당사자가 관계를 맺는 다는 것을 의미했다고 한다.
그러니 선물을 줄때는 아무에게나 주는 것도 아니고, 선물을 받는 것도 그냥 받고 감사합니다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에 쉽게 선물받고 ‘생까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은 사회였다. 특히 저자는 바울 당시의 그래코-로만 사회에서 여러가지 예를 들면서 선물이 ‘관계’를 형성하였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벌써 여기까지만 들어도, 음… 은혜가 그러니까 일종의 댓가를 요구하는 거라고?? 하는 생각이 확~ 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소위 값싼 은혜 cheap grace를 아주 학문적으로 자근자근 밟아버린다고 할 수도 있겠다.

Paul and the Gift (1)

요즘 ‘Paul and the Gift’라는 John Barclay 책을 공부하고 있다.
음… 정말 ‘공부하고’ 있다는 말이 딱 맞다.
빡쎈 공부다. ㅠㅠ

이게 대중적으로 쓰여진 책이 아니고, 그야말로 학술서적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완전 빡빡하게 이해하기 어렵고, 게다가 양도 많아서…

이 책에 대한 평가는 정말 화려하다. 20세기 이후 성서신학 분야 최고의 책이라는 평가도 있고, 이 책으로 New Perspective가 끝났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SBL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 성서학회)에서 John Barclay와 N T Wright이 공개적으로 토론이 붙었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참석했던 사람들에 따르면 토론은 Baclay가 사실상 이긴 분위기 였다고 ㅋㅋ)

이제 대충… 아주 대충… Baclay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살짝 이해가 될 듯 하다.
살짝… 신박하다! ㅎㅎ

좀 새로운 개념을 접했으니 당분간 Barclay가 이야기하는 개념을 염두에두고 성경을 읽게되지 않을까 싶다. ^^

현재 계획으로는,
연말까지 Barclay가 이야기하는 갈라디아서를 이해하는데까지 이해해보려고 한다.
그리고 혹시 내가 어느정도 이해했다고 판단이 되면, 내년 봄에는 갈라디아서 성경공부를 한번 해보면 어떨까 싶다.
그러면서 아마 자연스럽게 이곳 블로그에서도 내가 공부한 것들도 조금씩 적게 되지 않을까.

참고로,
아주 아주 쉽게 설명한 한국어 강의
아주 아주 쉽게 설명한 영어 책 요약 <– 참고로 이 사람의 youtube channel은 구독추천!

다니엘서

다니엘서 성경공부를 9월 초부터 시작했다.
금요일 저녁 한 그룹, 토요일 저녁 한 그룹을 했는데,
토요일 저녁 그룹이 조금 더 진도가 빨라서 지난주 토요일에 다니엘서를 마쳤다.

다니엘서 만큼 “세상속의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는 성경본문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압도적 제국 속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기.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땅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기.
세속 사회 속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기.

다니엘서 1~6장에 나오는 다니엘의 영웅적 이야기들을 하게 만들었던 근원 가운데 하나는,
다니엘서 7~12장에 나오는 그 환상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니엘은 자신이 box 안에 가둘 수 없는 거대한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보았고,
그래서 다니엘은 제국이 box안에 가둘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거의 지난 10년동안 다니엘서를 많이 사랑하면서 살아왔다.
읽고 읽고 또 읽어도 감탄이 나올만한 책이다.

이번에도 다니엘서를 공부하면서 진한 깨달음과 감동이 있다.

당분간 대림절(Advent) 묵상

당분간 블로그를 덜 열심히 update 할 예정입니다.

이번주부터 대림절 (Advent)가 시작되었습니다.
Advent는 성탄 4주 전부터 성탄을 기대하며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교회에서 대림절 묵상을 매일 짧은 성경구절을 가지고 하기로 했는데,
저도 적극적으로 참여해보려고 합니다.

적극적으로 하기 위해서,
매일 3~5분정도의 짧은 clip을 녹화해서 올리고 있습니다.
대림절 기간동안 그 묵상에 조금 더 시간을 들여보려고 합니다.

(아, 물론 지금 하고 있는 다니엘서 성경공부도 한 class는 9장, 다른 class를 11장을 나가고 있으니 그것도 조금 더 열심히 해서 잘 마무리 해야 하겠고요.

하나님의 신실하심

소위 New Perspective가 가지는 큰 장점 중 하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특히 언약적 신실하심에 대한 강조가 잘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 신실하심으로,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고,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신 것은 그 신실하심이 제대로 드러난 사건인 것이다.

하나님은 신뢰할만한 분이다.
그분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다.

결국 예수님을 보았던 시므온의 기도가 그런 것이었겠다.

아, 그래…
하나님은 이렇게 신실하게 그분의 약속을 지키고야 마시는 거구나.

성탄의 메시지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다.


God with Us

내 생각에,
크리스마스 스피릿의 핵심은 God with Us (임마누엘)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신실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성탄이 희망이 되는 것이다.

대강절(Advent) 기간이 시작되었다.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도 다 함께 하는 묵상 챌린지랄까 그런걸 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그 구절들을 나도 조금 더 의미있게 묵상하고 그 생각을 정리해볼 수 있을지 고민이 많이 된다.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
그 백성 가운데 거하신다는 것.
그래서 희망이 된다는 것.

그것을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고 싶다.
너무 내 생각이 가벼워서 견딜수 없다. ㅠㅠ

Omicron variant – 바람

Omicron variant가 떴다고… ㅠㅠ
아직은 이 variant가 더 잘 퍼지는지, 그렇다면 delta variant에 비해서 얼마나 더 잘 퍼지는지,
증상은 어떤지, 등등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다.

그런데,
바람은 이렇다.

  1. Delta나 기타 다른 어떤 variant보다 훨씬 더 전파력이 빠르면 좋겠다.
  2. 그리고, 증상이 엄청 약하면 좋겠다. 사망률 0.1% 이하

만일 이렇게 되면,
결국 COVID-19이 endemic(풍토병)으로 바뀌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것이다.

사람들이 대부분 백신을 통해서, 그리고 covid-19에 감염이 되어서 면역을 갖게될 것이고,

결국 바이러스가 살아남으려면,
– 적절한 치명률 (너무 숙주가 빨리 많이 죽어버리면 자신이 살아남지 못하므로)
– 빠른 전파율
이 전제되어야 한다.

원래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은,
백신을 빨리 맞고 전파율을 낮춰서 COVID-19이 사그러지게 하겠다는 것이었는데…

그 사이 변이가 일어나서 전파율은 높아졌고, 그 와중에 과학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이 백신을 거부하기도 했고..
또 가난한 나라에는 백신이 공급되는 일이 늦어졌고…
그래서 전파율을 낮춤으로써 COVID-19을 잡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대략적인 계산

COVID-19의 Delta variant는 R0이 6~7정도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R0은 한 사람이 감염시키는 사람의 평균 숫자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보통 독감의 R0이 1~2 정도이고,
Delta variant가 아닌 COVID-19의 R0은 1.4~2.4 정도였던 것을 감안하면 delta variant는 전파력이 어마어마한거다.

그러면,
1사람이 6사람을 감염시킨다고 보고, (R0=6)
6사람중 5사람 이상이 COVID-19에 완전 면역이 되어 있으면 COVID-19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소멸하게 된다.
그러니, 83%의 사람에게 면역이 있으면 소위 ‘집단면역’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COVID-19 백신들의 효과가 100%가 아니므로…
대략 COVID-19 백신의 효과를 80% 정도라고 보았을때,
사실상 거의 100%의 사람들이 백신을 맞아야 집단면역이 이루어진다.

이는 물론 어린아이까지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의미한다.

지금 미국같이 접종률 60%도 안되는 수준에서는 집단면역은 택도 없는 이야기다.
심지어는 한국같이 세계 최고의 접종률을 자랑하는 곳이라 하더라도 집단면역이 이루어질수는 없다. ㅠㅠ

참고로,
홍역의 R0은 자그마치 12~18 수준이다.
그럼에도 그야말로 모든 사람이 다 백신을 맞는 것으로 인류는 홍역을 잡았다.
분명히 가능하다.

그러나…
적어도 당분간…
과학을 신뢰하고, 백신을 맞은 부류의 사람들은 백신에 의해 대부분 방어가 되고,
과학을 신뢰하지 않고 백신을 맞지 않은 부류의 사람들은 그냥 COVID-19에 걸려서 면역이 형성되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 보인다.

COVID-19때문에 앞으로도 사람들은 정말 많이 목숨을 더 잃을 것 같다.
어쨌든 과학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계속 백신 부지런히 맞고 (booster도 맞고),
마스크 쓰면서 자신을 잘 보호하는 수 밖에는 별 방법이 없는 것 같다.

Do Not Say “I told you so”

지금 만들고 있는 것중 하나에 꽤 심각한 문제들이 있다.
그중 하나는, 어느 한 공급업체로부터 제때 부품을 받고 있지 못한 것이다.
원래 이달 초에 도착했어야 하는데, 지금 말로는… 내일 (thanksgiving 전날) 공급을 해줄 수 있다는 거다.

몇 달전 그 부품을 그 회사에서 하지 말아야 한다고 내가 강력하게 주장을 했었다.
최소한 그 회사와 다른 회사를 병행해서 사용하자고 제안도 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미적미적 하다가 결정을 잘 못해서 지금 이 회사와 일하게 되었고,
다들 이 고생을 하고 있다.

이럴때, 그러게, 내가 그랬잖아. I told you so 라고 말하고 싶은 욕구가…. ㅠㅠ

….

내 생각이 물론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내 생각이 틀렸던 경험도 당연히 대단히 많이 있다.

하지만, 내가 어떤 특정 문제에 대해 조금 더 깊은 고민을 해 보았고,
그렇기 때문에 그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의 통찰을 가지고 이야기하는데,
사람들이 내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잘 듣지 않을 때가 있다.

그렇게 하면 그건 정말 위험한데…
그렇게 하면 목표에 도달할 수 없는데…
그렇게 하면 그건 결국 무너지는데…

결국 그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이나,
그 ownership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내가 하는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
나는 그냥 결국 옆에서 그 consequence를 다 보아야만 한다.

몇달전 나는,
조금 더 강력하게 이야기했어야 했던 걸까?

….

내 어떤 상황은,
몇달전 그 회사일과 같은 상황에 처해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나는, 조금 더 강력하게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