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k to 에베소서

대학교 3학년에서 4학년으로 올라가는 겨울방학.
왜 그랬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나는 그때 사람들이 거의 없는 기숙사에 남아 있었다.
비교적 시간이 좀 나기도 해서, 혼자서 성경을 읽었다.
그때 읽었던 성경책이 에베소서였다.

내 기억으로는,
내가 한 자리에 앉아서 그렇게 제대로 성경책을 꼬박꼬박 읽었던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왜 에베소서를 읽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그때 읽었던 에베소서는 정말 내게 충격이었다.
아니… 이런게 기독교란 말이야?
그렇다면 내가 알고 있던 기독교는 뭐지?

기독교가 그려주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vision이 담겨져 있는 책 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에 나는 흠뻑 빠졌다.

대충 대학교 3~4학년때…
나는 거의 6개월~1년 동안 거의 매일 울다시피 하면서 진하게 하나님을 만났다.
그리고 그 속에서 에베소서를 그렇게 일었던 사건은 그 기간중 벌어진 아주 핵심 사건이었다.

그 에베소서를 다시 읽는데…
아… 정말 그렇구나.
스무살 막 넘은 내가 그렇게 정신없이 이 에베소서를 읽으며 감탄했을 만 하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더 철도 들었지만…
이런 말씀의 살아있는 생명력은 내가 나이들었다고 생각하지 못하게 나를 가로 막는다.
스무살때보다 더 강하게 이 말씀이 나를 만난다.

매일 말씀 묵상이 신기하다

말씀 묵상을 매일하는 것은 얼핏 생각해보면 매우 지루한 일일 것 같다.
그런데 사실 매일 말씀 묵상은 참 신기하게도 지루하지 않다.

한동안 어떤 문제에 천착해 있다가도,
말씀묵상을 통해서 전혀 다른 문제를 고민하게 되기도 하고,
오랫동안 씨름하고 있던 문제들의 해답을 짧은 말씀묵상 속에서 발견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중 어떤 것들은,
예전에 말씀 묵상을 통해서 깊은 고민을 했는데 한동안 잊고 있다가,
다시 그 말씀을 접하고 아, 진짜 그렇지… 하고 다시 refresh 되는 것들이다.

내가 궁금한 것은…
이렇게 말씀 묵상이 매우 자주 새로운 것은…
내가 충분히 머리가 좋지 않기 때문일까?

만일 내가 지금의 나보다 훨씬 더 기억력도 좋고 빨리빨리 생각할 능력도 된다면,
지금처럼 말씀묵상이 날마다 새로운 것은 없어질게 될까?

내가 하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해!

자기가 하는 일을 사랑하고, 그것에 열심을 다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렇지만 자기가 하는 일에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그것을 중심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

직장인은 자신이 다니는 직장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느냐며 그것이 쉽지 않지만 나는 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아이를 키우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반복해서 이야기하면서 자신은 그래도 그걸 하고 있다고 이야기 한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경제활동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선생님은 교육의 중요성을,
예술가는 인간이 창조적으로 만들어졌음을 강조한다.
정치가는 정치가 삶을 바꾼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런 자뻑이 꽤 심한 분들중에는…
목사님들이 계신다. ㅠㅠ

나는 목사님들이,
에베소서를 들어서 이야기하면서,
이게 교회론에 대한 책이고, 얼마나 교회가 중요한가를 강조하는 이야기를 참 많이 들어왔다.
최근에 내가 에베소서 강해를 교회에서 끝냈는데, 교회가 중요하다는것을 새롭게 깨닫고 나부터 감동을 했다… 는 식의.

나는 목사님들이 교회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참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읽기에는….
에베소서는 그런 교회론에 대한 책은 정말 아니다. ㅠㅠ

그렇게까지 교회가 전부다…라는 생각을 조금만 내려놓고 에베소서를 읽으면 그게 좀 보일만도 한데…

그럼에도,
에베소서는 참 멋진 책이다.
이번 말씀묵상 본문이되어 다시 보면서… 다시한번 그렇게 느낀다.

에베소서가 바울의 저작이 아니라면?

에베소서는 많은 학자들이 바울이 쓴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물론 잘 모르긴 하지만…
그게 학자들 사이에서는 대세인듯 하다.

그런데 에베소서를 읽어보면 참 바울스러운 개념이 많이 나온다.
선택과 은혜와 부르심과 같은. 그리고 율법이 옛것이라는 주장도.

에베소서가 바울의 저작이 아니라는 주장에 대해 완전 패닉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는데…
그러나 이번에 에베소서를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만일 바울이 쓰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바울스럽게 쓰여졌다면 그것 역시 참 감탄할 일이다…
바울이 이야기했던 것은 바울 혼자만의 주장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있었던 내용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물론 에베소서에 나와있는 것들중 교회 system에 관련된 이야기등은 많은 학자들이 이것이 바울의 저작이 아닐것이라고 생각하는 큰 이유가 되는 것 같다. – 그리고 나는 어느정도 그것에 수긍하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Pauline 이라고 부르는데는 부족하지 않아 보인다.

그런 교회가 있을까?

지난 며칠 이곳 Bay area가 많이 더웠다.
섭씨 40도에 육박하는 기온이었다.

낮에 한참 더운데…
전화로 긴급문자가 왔다.

가능하면 밤 9시 까지는 전기 사용을 줄여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군데군데 정전사태가 있을 거라고…

그 전날에는 그렇게 않아도 이 동네 여기 저기에서 정전이 있었던 것 같다.
이 지역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정도로 더운 날씨여서 사람들이 에어컨을 다들 엄청 틀어댄 모양이다.

그 문자를 받으며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혹시 이곳 Bay area어느 교회에선가는….
상황이 이러니 우리 교회 다니는 사람들 만이라도 많이 덥고 힘들지만 에어콘 저녁 9시까지 참거나 확~ 줄여봅시다….
이런 안내가 나갔을까?

꼭 필요하고 급한 사람들이 당장 이 상황을 잘 버텨낼 수 있도록 우리가 조금 불편함을 감수해보자고.

….

아마 그런 교회는 없었을 것 같다.
적어도 이곳 bay area에는 없었을 것 같다. ㅠㅠ

끝없는 목마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신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여러분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믿는 사람들인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여러분이 알기 바랍니다.
에베소서 1:17-19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은,
끊임없는 목마름 속에 사는 것이다.

부르심, 소망, 하나님의 영광, 풍성함, 하나님의 능력…
이것들을 이해함이 날로 깊어져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

어쩌면…
어떤 사람이 정말 그리스도 안에 있는냐 하는 것은 분간하는 중요한 기준 가운데 하나는,
그 사람에게 그런 목마름이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닐까.

부르심과 mission

적어도 Pauline 문서들을 보면,
부르심과 mission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의 mission은 ‘해외선교’를 직접적으로 의미하지는 않는다.
물론 해외선교등을 포함하긴 하겠지만.

당연히 그 부르심은 그 백성이 ‘제대로 잘 사는 것’을 위해서라고 할 수 있겠다.
하나님께서 원래 온 세상을 지으실때 원하셨던 그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지혜로운 인간의 모습들로 살아가는 것.

이리저리 곱씹어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가지고 계신 기대는 대단한것 같다.
그리고 그 기대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반복해서 실패하는 인간들을 보면 웬만하면 그만 포기하실만도 한데… 포기가 없으신거다.

그러므로….
그 mission으로의 부르심을 언급하지 않는 선택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복음을 왜곡하는 것일 수 밖에 없다.

에베소서에 들어가면서 해본 생각.

절제

나는 현대 기독교에서 ‘절제’라는 것이 사실상 실종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할때가 있다.
적어도 내가 접하는 개신교 서클에서는 분명 그렇다.

내가 바라는 것, 내가 하고 싶은것,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참아내고…
오히려 그런 것들을 멀리해가며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살아가는 것을 보기란 참 쉽지 않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그렇게 하지 않기 위해서 절제하는 것은 그냥 미련하게 보일때도 많다.

내가 생각하기에,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절제를 상실한 것들을 몇가지 정리해본다.

  • 자신의 ‘꿈’
  • 음식
  • 여행
  • 취미활동
  • 패션
  • 남들의 시선
  • 짧은 만족감

선한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말고,
나의 욕망에 충실하게 살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충실하게 사는 것은 때로,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유행이 지난 음악과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성경을 읽으면서는 정말 그렇지 않다는 것을 다시 또 다시 발견하게 된다.

흔들리지 않음

바울이 하는 말을 들으면서 살짝 좀 힘들게 느껴질때는…
이분이 가지는 확신이 너무 크다는 것을 발견할때다.

이분은 뭔가 자기가 믿는 것에 흔들리지 않는 정도가 좀 많이 심한것 같다. ㅎㅎ

아니, 이분이 생각이 별로 없이 그냥 믿는 분도 아니고,
나름대로 여러가지 생각도 많은 분인데…
어쩌면 그렇게 흔들리지 않는걸까.

그리고 그렇게 흔들리지 말라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야기를 하는 걸까.

반면 나는 참 많이 흔들리곤 한다.
여러가지 생각이 많아서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내가 믿고 있는 것에 대한 회의도 많고,
걱정도 많고, 갈등도 많고…

예전에는 바울의 흔들리지 않는 것을 따라보려고 노력했으나,
요즘은… 내가 바울을 닮을수는 없다는 것을 나름대로 ‘확신’하고 있는 중. ㅎㅎ

어쩌면 나 같은 사람은,
때로는 흔들리면서, 때로 실수하면서, 그렇게 그 안에서 자라도록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내세지향적 신앙은 현실을 무시하게 만드는가

내세를 자꾸 강조하다보니,
이생에서의 삶, 현실에서의 삶을 도외시하게되었다는 비판을 참 많이 들었다.
그리고 한때 그렇게 나도 동의도 했다.

그렇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내세에대한 강조때문에 현실을 무시하게되었거나,
내세에대한 강조때문에 이원론적 사고체계에 빠져버리게 된 것은 아닌 것 같다.

과거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그 내세에 대한 소망 때문에 정말 현실을 열심히 살았다.
그분들은 이생이 영원한 삶과 연관되어있고 연결되어있다는 생각 때문에 오히려 이생을 더 가치있게 살아갈 수 있었다.

현실을 무시하게 만드는 것은,
내세에대한 강조가 아니라,
내세에 대한 오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데살로니가 후서 1장을 보면서 하게된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