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과 같은?

예전에 대학생때,
선배중 약간 ‘도사’삘이 좀 나는 형이 있었다.

그 형은 말하는 투도 정말 도사 같았고,
하고 다니는 모습도 좀 그랬다.

같은 교회에 다녔는데, 기도를 할때도 뭐랄까.. 하여간 좀 뭔가 좀 초월적이랄까 그런 분위기였다.
이게 막 큰소리로 기도하고 방언하고 그런 부류라기 보다는 조용히 낮은 소리로 기도하고나서는 와서, ‘오승아, 오늘은 북한 교회에 대해 한번 얘기해보자’ 완전 맥락없이 뜬금없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형이었다.

그 형이 내게 했던 말 가운데 하나가 나는 ‘요한’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음… 형 그게 무슨말이예요?
그랬더니 그냥 내가 성경의 요한과 같은 방식으로 신앙을 이해하고, 성경의 요한 같은 방식으로 사람을 대한다는 거다.

나는 뭐 그때 성경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고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나름대로 성경공부를 하면 할수록 나는..
그때 그 형이 틀렸지. 나는 아무래도 요한복음 보다는 공관복음쪽이 훨씬 더 좋은데…
싶었다.

그런데 요즘 요한복음 말씀 묵상을 하면서 문득 느끼는 것.
아… 공관복음이 근육을 키우기위한 닭가슴살 같은 그런거라면,
요한복음은 뭐랄까 잘 끓인 죽같은 느낌이 드는거다.

공관복음에는 영양분도 가득하고 그래서 그거 잘 요리해서 먹으면 건강해지는데,
요한복음은 그냥 당장 먹으면 속도 편하고 먹기도 더 좋다.

기능하기보다 존재하겠다고 생각했던 내 새해 결심에 따르면,
말씀을 잘 숙지하기 보다는 말씀을 양식으로 섭취하자는 것이 들어가 있는데…
요한복음은,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하기 참 좋은 말씀인 것 같다.

그때 그 형이 맞았던 걸까.
그나저나 이제는 연락도 끊긴 그 형이 보고싶다.

포기하기 vs 인정하기

내가 닥친 상황이나 상태를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과,
내가 닥친 상황이나 상태 속에서 그냥 포기하고 주저앉아버리는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우선,
그 차이를 분간해 내는 것이 쉽지는 않은 것 같다.
정말 fine line이어서 애매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때로는 그 차이가 매우 분명한데도 잘못된 상황판단,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내가 세계적인 축구선수가 되겠다고 어릴때부터 생각을 했다면,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나는 절대로 그런 재주가 없다. ㅠㅠ
그러니 그건 내 상태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운동을 해서 10 파운드를 빼겠다고 생각을 한다면,
그건 당연히 해볼 수 있는 거다.
며칠 해보고 나서…에이 안되는 거구나… 이건 포기하는 거다.

나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물론 나를 포함해서, 아니, 누구보다도 나에게서)
포기해서는 안되는 것을 너무 쉽게 포기하는 것을 본다.

신앙이 가지는 독특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때로는 그것이 단기간에 심지어는 내 생에에 완성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옳은 것이고 하나님의 약속이라면 포기하지않고 주저앉지 않는 정말 많은 영역이 있다는 것이다.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이 온 세상에 가득하리라…
이건 안되는 거라고?
아니, 되는 거다. 내가 그걸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죽기전에 그것을 보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건 되는거다.
그러니 그런 기준을 포기한채 주저앉아 버리는 것은 현명한 인정이 아니라 치사하고 비겁한 도피이자 포기인거다.

그분의 부르심에 따라서 날로 그분 안에서 성숙해가며 성령의 열매를 맺고 사는 것.
그거 잘 안되는 거라고?
당연히 잘 안된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는 거다.
내가 타고난 기질이 어떠하던지 간에, 내 배경이 어떠하던지 간에, 잘 안되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거다.
내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분명 필요하지만, 내 한계를 인정한다는 핑게로 주저앉아버리는 포기를 선택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New Year’s Resolution(6)

기능하면서 살기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해야하는 것이 많다고 느끼는 삶을 manage하기 위해 내가 사용하는 방법은
regularity (규칙성)과 focus(집중)이다.

거의 집착이다 싶을 정도로 시간을 쪼개서 쓴다. 잠깐 집 앞에 쓰레기 버리는 일도 계획한 시간에 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어떤 특정한 일을 할 때에는 다른 일로 방해받지 않기위해 노력한다.
일할때는 일하는데 집중하고 성경공부할때는 성경공부 하는데 집중한다.

이게… 기능하는 사람으로서는 좋은데, 존재하는 사람으로서는 아주 꽝이다.
열심히 일하다가도 날씨가 좋은 창밖을 보면서 날씨를 음미한다던지,
내가 집중하다가도 다른 누가 내게 도움을 요청하면 기꺼이 그 규칙성을 깨뜨린다던지 하는 것이 내겐 더 필요하지 않나 생각한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할 수 있는지는 정말 잘 모르겠다.
내가 해야하는 일을 조금더 효율적으로 함으로써 삶에 ‘여유시간’을 확보하는 것, 그리고 내가 해야하는 일을 줄이는 것…이 두가지를 아마 다 해야하지 않을까 싶긴 하다.
새해엔 이걸 조금 더 고민하고 시도해봐야 할 것 같다.

New Year’s Resolution (5)

내가 존재하지 않고 기능하고 있기 때문에 내게 일어난 현상은,
말씀을 양식으로 먹지 않고 도구로 활용하고 있게 되었다.

나는 말씀을 도구로 활용하는 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말씀을 양식으로 섭취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내 성장과 성숙이 이루어졌던 시기들을 돌이켜보면 그 기간의 대부분은 말씀이 꿀처럼 달게 느껴지는 경험으로 가득찼던 시간이었다.

요즘 내게 말씀은…
달기보다는 재미있다.

그런데 이건,
내가 예전에 양자역학을 공부할때와 딱 비슷하다.
그때 양자역학을 공부했던것이 달콤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정말 재미는 있었다.

그렇다면 말씀을 양식으로 먹어야겠다고 내가 결심을 하면 뭔가 내게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글쎄… 잘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말씀이 달기보다는 재미있는 것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내가 존재하지않고 기능하고 있는 내 현상태에의해 만들어진 결과인지,
아니면 내 현상태의 원인인지 잘 모르겠다.

음… 굳이 현재로서의 내 생각을 정리해보자면,
내 생각엔 말씀이 달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내가 기능자(functional unit)으로 작동하고 있는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말씀을 꿀처럼 더 달게 묵상하고 노력해야지…. 이런 방식으로 고쳐지지 않는 다는 말이다.

New Year’s Resolution (4)

그래서 나는 내게 하도록 주어진 것을 무작정 다 하려고 하기보다 정말 내가 부르심을 입었다고 생각하는 방향에 맞추어서 살기로 결심을 했다.

그것을 위해서는, 그 부르심과 잘 align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no 하는 일들이 더 많아야 할 것 같다.
가령, 나는 더 훌륭한 커리어를 만들기위해서 살지 않기로 예전부터 결심해왔다. 그러므로 성실함이나 책임의 수준을 넘어서는 방식으로 오버해서 일하지 않아야 할 것 같다.
일을 열심히 하고, 계속 더 많이 배우려고 노력하면서 성실하게 해야 하겠지만, 그 목적이 소위 ‘커리어 관리’나 ‘커리어 growth’는 아닌 것이다.

나는 하나님 백성으로서 성실함과 열심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고,
그 속에서 하는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깊게 만나고 발견하는 것이 훨씬 더 소중한 것이다.
그것이 내겐 훨씬 더 소중한 경험이다.

참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내게 여러가지로 많은 것들을 공급해 주셨다.
그것을 감사할줄 알고, 그 주신 것들이 나 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살아야 하는 것이다.

New Year’s Resolution (3)

내가 존재하지 않고 기능하는 사람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내게 문제가 생긴 것이라고 진단을 했다면,
내 존재보다 기능을 더 우선하면서 살게된 원인을 찾아야 하겠다.

그건 아마도,
내가 너무 많은 기능을 하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정말 내 ‘부르심’에 합당하게 내 삶의 영역들을 잘 정렬(align)하여 살아가는 것이 중요할텐데,
때로는 꼭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는 것에 에너지를 소진해버리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도대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는 것에 정말 많은 고민을 하며 20대를 보냈었다.
예수님을 믿고나서 공부를 하는게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하는 것을 찾지 못해 많이 힘들었다.

학교 공부보다 성경공부가 재미있어서 이러다 신학교를 가야하는 걸까 하는 고민을 한적도 많았다.
그냥 열심히 하면 어느정도 할 수 있으니 대학때 뭣 모르고 선택한 전공으로 계속 공부를 하기는 했으나…
내게 제일 딱 맞는 전공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뭘 하면서 살아야 할까 하는 고민을 많이 하다가 내가 나름대로 생각한 것은,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이 되자는 것이었다.

세상 속에서 열심히 살면서, 그 속에서만 unique하게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여러가지로 묵상도 하고 생각도 하고,
또 성경이나 신학등 여러가지로 공부도 해 가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만이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발견해 가자는 것이었다.

그러니,
나름대로 열심히 성경공부도 하고, 열심히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
이미 해답을 가지고 그 해답을 적용해가는 사람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그 해답을 찾는 사람으로 살겠다는 것있다.

New Year’s Resolution (2)

왜 내 성장/성숙이 멈추어졌을까?

내 결론은, 내가 ‘존재’하지 않고 ‘기능’하며 지내왔기 때문인 것 같다. ㅠㅠ

나름대로 꽤 치열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많이들 하는 여러가지 social media도 하나도 하지 않고, 다들 많이 보는 TV 드라마나 netflix 드라마도 뭐 하나 제대로 본게 없다. 내가 TV 시리즈를 제대로 본건 3년전엔가 응답하라 1988이 가장 최근것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사는 이유는…
정말 시간이 없다. ㅠㅠ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해야할 것들이 1.5배쯤 많다고 늘 느끼면서 살다보니,
난 그냥 살면서 늘 쫓긴다.

그렇게 해야하는 일에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좋은 그리스도인 되기’도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부지런히 성경공부도 하고, 주말에 조금 이라도 시간 나면 TV 드라마 보는대신 책읽으며 공부하고… 그러는 거다.

그런데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을, 그것을 이루기위해 하는 일들로 쪼개어서 생각하고 행동하다보니,
나는 계속해서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 사람이 되어 있는 것 같다.

New Year’s Resolution (1)

매년 새해들어 내 새해 결심을 정리해서 이곳에 적어보았었는데,
금년에는 이제야 키보드 앞에서 새해 결심 정리를 하게 되었다.

내 새해 결심은,
“Grow up” 이다.

보통 다른 사람에게,
Grow up! 이렇게 이야기하면…
제발 좀 철좀 들어라. 혹은 나이갚 좀 해라. 그런 뜻으로 사용된다.

나는 복음을 이해해가는 깊이가 깊어지면서 나름대로 꽤 많이 성숙/성장하는 과정을 거렸었다.
매일, 매주 단위로 내 성숙과 성장이 그치지 않았다고 이야기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1년 혹은 2~3년 단위로 끊어서 생각해보면 그래도 어떤 면에서라도 조금씩
‘아, 그래도 내가 이건 좀 성숙/성장 했구나’ 싶은 면들이 있었던 것 같다.

지난 3년여의 기간을 돌이켜보면 그런 성장이 매우 더디어졌거나 거의 멈춰버린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3년전 내 모습을 기억해서 떠올려보면 지금의 내 모습이 그때보다 더 성장/성숙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음… 이건 분명히 심각한 문제다!

그래서 새해 내 결심은 “Grow up”이다.

Paul and the Gift (5)

그리고 나서 실제로 이 책의 거의 절반 정도는 이렇게 설명한 은혜에 대한 내용을 가지고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를 어떻게 읽을 수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어떤 사람은 앞의 내용보다도 이 뒤의 내용때문에 이 책을 살 가치가 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지금 갈라디아서부분을 어떻게든 이해해보려고 하고 있는데… 음…
어렵다. ㅠㅠ

하루에 한시간 남짓 겨우 시간내어서 공부하는 것으로는 이게 영 진도도 잘 나가지 않고, 이해도 어렵다.
그래도 어쨌든 연말까지는 적어도 갈라디아서부분만이라도 이해를 해보려고 노력중이다.

그리고 또한,
아직 정확하게 이 책이 어떻게 New Perspective를 박살내고(?) 있는지 정확하게 파악을 하지 못했다.

전반적으로는,
New Perspective에서 유대교도 은혜의 종교로 보았기 때문에 바울이 경계한 것이 유대교 자체가 아니라 유대교의 율법주의적/자민족중심주의적 경향이라고 해석했는데,
그건 ‘은혜’라는 개념을 너무 획일적으로 하나도 보았기 때문에 오해가 생긴 것이라고 주장한다는 것 정도 대충 이해를 했는데,
뭔가 착~ 달라붙게 이해가 덜 되고 있다.

갈라디아서 본문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실제로 보면 조금 더 이해가 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 이런 것도 누가 좀 잘 이해하고 공부한 사람이 나 같은 비전문가에게 쭈욱~ 설명해주면 참 좋겠다는 생각만 간절하다. ㅠㅠ

Paul and the Gift (4)

그리고나서 저자는 아주 긴~ 부분을 할애해서,
2차 성전기의 주요 문서들에서 선물/은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알아본다.

The Wisdom of Solomon (솔로몬의 지혜서)
Philo of Alexandria (필론)
The Qumran Hodayot (쿰란 호다요트)
Liber Antiquitatum Biblicarum (성서고대사)
4 Ezra (에스라 4서)

음.. 이건 워낙 분량도 많고, 읽어도 잘 모르겠는 것도 많고…
뭐 그래도 내가 생각하기엔 앞에서 설명한 선물/은혜의 개념을 2차성전기 문서들에 적용하면서 읽어보는 일종의 ‘연습문제’쯤 되는 것 같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