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위적 부양책

공동체를 섬기면서,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혹은 어떤 clear한 message를 전달하기 위해서,
인위적인 강조를 사용한다거나… 인위적인 boost-up을 사용하면,
반드시 그것에는 그것에 따른 부작용/반작용이 따르는 것 같다.
인위적 경제부양책이 단기적으로는 경기를 부양시키는 것 같아도 결국 그 경제 자체를 취약하게 만들수 있는 것 같이 말이다.
인간적인 열정은 반짝 빛을 보는듯 해 보일 수 있으나,
궁극적으로 열매를 여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다.

은사(gift)에 대하여

은사 = 그 사람의 장기(개인기) = 특기 일까?

최근에 베드로전서를 공부하면서,
이 은사(gift)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볼 기회가 있었다.

은사라는 것을 마치 자신의 역량을 극대화시키기위한 자신의 role로 인식하고 있는 풍조 속에서…
그래서 숨겨져 있는 자신의 재능/은사를 발견해야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 풍조 속에서…
그것에 딴지를 걸고 싶은 생각이 많이 들었다.

우리가 이땅에 사는 목적은,
내 존재가치를 극대화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현 세대의 기본 가정에 동의하지 않는 나로서는…
은사를 그렇게 이해하려는 시도를 매우 불편하게 여기는 것이다.

내 생각에,
은사는 공동체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개념이다.
따라서 은사는 어떤 사람이 잘 하는 장점도 아니고,
숨겨져 있는 것을 발견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은사는 공동체 적인 것이고,
그리고, 매우 상황적인 것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가령,
노래를 그다지 잘하지 못하는 사람도,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성가대를 하게 될수도 있고,
그렇다면 그 상황에서 그 사람에게 주어진 선물(gift)은 노래를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 사람이 음악에 재능이 있다면 좋지만,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 공동체를 위해 자신에게 이 일을 담당시키셨음을 인정하고 따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단순히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을 ‘자신은 그 일에 은사가 없다’는 식으로 대하는 이기적 개인주의는,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극복해야할 항목이 아닌가 싶다.

교회 찾기

우리 가족이 reunion 한 후에,

계속 함께 속할 지역교회를 찾고 있다.
매주 다른 교회를 다니면서 교회 분위기도 익히고 설교 말씀도 들어보고 사람들도 만난다.
늘 우리가 가족으로 속할 교회를 찾는 일이 힘들다.
우리가 우리의 수준에 비해 너무 교만해서… 쉽게 판단하려하는 것에도 문제가 많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그렇게만 단정할 수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게다가 어떤 분들은,
나와 우리 가족을 너무 over-estimate 하셔서… 부적절한 부담을 안게되는 경우도 있다. -.-;
정말 함께 가족이 되어, 
마음과 사랑과 정성과 물질을 나누고,
하나님 나라를 함께 순수하게 소망하는… 그런 공동체를 향한 갈망이…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동기와 열정이 없는 사람 vs. 동기와 열정이 잘못된 사람

동기와 열정이 없는 사람과 동기와 열정이 잘못된 사람…
이 두 부류의 사람중 어떤 부류가 더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할까?

만일 그 사람을 쉽게 쳐낼 수 있는 회사라던가… 사회 조직의 경우에는 잘못된 동기와 열정을 가진 사람의 해악이 더 크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그 사람을 잘라낸다 하더라도 그 ‘열정’에 악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므로.

그러나…
그 사람을 포기할 수 없는 공동체라면,
그리고 사랑과 신뢰에 기반을 둔 공동체라면…
동기와 열정이 없는 사람을 보고 있는것이 훨씬 더 힘든 일인 것 같다.

그냥 요즘 내 머리를 채우는 생각중에… 한조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