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도 쓰긴 했지만,
아는 몇몇 사람들의 고통을 보면서,
그리고 쉽게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상황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시는지 좀 볼멘 소리를 많이 하고 싶어진다.
지난 주일 설교 시간에,
주님께서 정말 선하신 분이신가, trustworthy한 분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설교하시는 들었는데,
나는 이렇게 좀 항변하고 싶었다.
네,
그 논리로는 알겠는데요,
당장 이렇게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어려움 속에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하고 계신건가요.
그 하나님이 ‘객관적으로’ 선하시고 trustworthy하다는 것은 알겠는데요,
그 하나님이 어떤 개인에게 ‘실존적으로’ 선하시고 trustworthy하게 보이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당장 저도,
요즘은 그 하나님이 그렇게 선하게 느껴지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이 답답하고 무겁고 힘듭니다.
….
같은 설교자께서,
지난 9월에, 하셨던 설교 내용 하나가 생각났다.
라브리에 하나님을 믿을 수 없어 고민하는 한 젊은이가 찾아왔다.
그는 프란시스 쉐퍼와 오랜 대화를 나누었다.
아마도 프란시스 쉐퍼의 여러 논리가 매우 convincing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그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쉐퍼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네가 그렇게 하나님을 믿기 어렵다면, 그 하나님을 믿는 내 믿음에라도 좀 의지해라.”
그 설교자는 그 예화를 드시면서,
때로 믿음의 여정에서 다른 이에게 의지하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디모데전서 설교하시면서…
….
그래,
그런 사람들이…
그래서 함께 모여야 하는 거구나.
서로의 믿음에 때로는 의지해가며,
이 땅을 resident alien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수퍼크리스찬으로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공동체의 일원으로 부르시는 것이라…
라브리 예화에서 좀더 정확하게는 쉐퍼의 논리에 설득력있는 부분이 느껴져서 그 곳을 찾아 온 것이 아니라 그냥 감정적으로 너무 힘들고 좌절되어서(아마도 우울증 등등 복합적인 것이었겠죠?) 라브리란 곳에 가면 받아 준다니까 찾아온 젊은 여학생이었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온 쉐퍼 입장에서는 차라리 논리를 가지고 신앙을 입증하려는 사람이었으면 피곤하니 내일 아침에 이야기하자라고 했겠지만 그 여학생은 당장이라도 오늘밤에 자살이라고 할 기세여서 여행의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밤새 위로하고 상담하는 와중에 위의 대화를 했다고 전해집니다.
정말로 선하시고 trustworthy하시냐? 정말로 그러하냐 라는 질문을 누군가 한다면 그 우리의 고통가운데 함께 계셨던 십자가상의 예수 그리스도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을 것 같습니다.
결국 십자가의 예수가, 신뢰의 궁극적 근거이다…
저는 혹시… 뭔가 여기에 missing link가 있는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좀 많이 해보고 있습니다.
도무지 예수를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친구들에게,
그 십자가의 예수가 궁극적 신뢰의 근거라는 이야기는 자칫 너무 먼 것 같이 느껴질 것 같아서 말입니다.
도대체 그럼…
내가 예수를 궁극적 신뢰의 근거로 두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니, 내가 예수를 궁극적 신뢰의 근거로 두고 있기는 한걸까…
뭐 하여간,
지난 주일 설교 듣고,
제 마음과 머리 속이 많이 많이 복잡합니다요. ^^
그래도…
그렇게 제 마음과 생각을 헤집어 놓아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