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 사람들만 보면 그렇게 눈물이 나는지…

얼마전에 우리 동네 사는 어떤 분이 내게,

왜 당신은 K 간사들만 보면 그렇게 우냐고 물었다. ^^

K 간사들을 위해 기도할때마다 그렇게 우냐고…

나는 그때, 

아마도 내가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 그 가치에 헌신한 모습을 보면서 감격이 되어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어떤 소망을 생각하며 벅차서 운다고 대답을 했던 것 같다.

글쎄… 그런걸까?

이번 주말에는,

K 간사들이 이 동네에 온다.

매년 하는 간사 수양회이다. 

벌써 10년도 훨씬 지난 옛~날… (더 지났나? ㅎㅎ 시간 관념이… ㅋㅋ)

몇명 안되는 간사들이… 간사 수양회라고 모여서… 워싱턴 지구촌교회 지하 베다니룸에서 밤을 새며 삶과 사역과 하나님 나라와 복음과 학생에 관해 이야기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렇게 밤을 새우고 다시 집으로 와서는 며칠동안 가슴이 뛰어서 지냈던 기억도 난다.

나는,

내 20대 후반, 30대 전체, 그리고 40대 초반을 코스타와 함께 보냈다.

그리고 이제는… 이제 내가 더 이상 player가 아님을 자각하며 참 여러가지 생각을 많이 한다.

이번 주말,

여기에 모이는 이 사람들을 보며,

또 다시 눈물을 흘리게 될까?

이 사람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한다.

===

간사 수양회가 끝난 바로 다음날,

저는 비행기를 타고 ‘아시아’ 출장을 떠납니다. 아마 두주정도 가게 될 것 같은데… 그동안 블로그 글을 거의 못쓰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별일 없으면, 아시아에서 돌아와서 다시 뵙겠습니다. ^^

내가 불편해하는 여러 표현들

나는 좀 속도 좁고, 너그럽지도 못해서…

어떤 언어 표현이 많이 귀에 거슬리곤 한다.

그런 표현 몇개를 골라보자면 대충 다음과 같다.

“I knew it” (or “I know that”)… 

어떤 사건, 인과관계, 방향 등에 대한 확신을 표현할때 영어에서 이렇게 쓰는데, 

(가령, 내가 처음 무슨 일을 시작했을때, 나는 이 일이 내 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런 식의 표현…)

나는 이 표현이 참 불편하다.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무얼 그렇게 잘 안다는 것인가.

자신의 안에 있는 강한 선호 (지극히 주관적 내용)를, 객관적 진리(지식)으로 만들어 버리는 표현인데…

적절하지 못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I deserve it”

내가 그걸 받을 가치가 있다… 뭐 그런 식의 표현인데,

You can get the money you deserve 라는 식의 표현을 하는 lawyer들의 광고,

You should take a great vacation that you deserve 라는 식의 표현을 하는 여행사 광고 등등을 보다보면,

정말 culture entitlement의 전형을 보는 것 같다.

은혜, 인간의 본질, 깨어짐, 하나님의 영광 이런 개념들과 도무지 양립하기 어려운 표현이 아닐까 생각한다.

“I need to find myself”

나는, ‘자아(self)’란 찾아지는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기독교 복음이 이야기하는 자아는, 내가 찾는 존재가 아니라…

망가진 나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찾아오셔서 구원해내시고 나면… 아… 내가 그런 존재였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그런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밖으로부터 오는 (Extra nos) 은혜, 계시가 소망의 근거이지, 

내면의 빛과 같은 개념으로부터 소망을 찾으려는… 여러 시도들이 불편하다.

심지어는, 기독교 내에도 이런 시도들은 편만해 있다.

이 외에도 더 많은데…

너무 까칠한 사람으로 비추어 질까봐… 오늘은 이만큼만. .ㅋㅋ

학연, 학벌, 경력…

나는, 내 능력보다 학벌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음…

솔직히 말하면, 나랑 비슷한 수준의 학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사람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능력에 비해 학벌이 더 좋다는 것이 솔직한 자평이다.

사실 이게 살아가다보면 솔직히 도움이 될때가 있다.

일종의 후광효과 같은걸 경험하기도 하고, 

professionally 만나는 사람들이 나는 기억할때, 아… 그 어느학교 출신… 뭐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면서 괜히 더 중요하게 취급하는 경우를 만나기도 한다.

지난주,

M 학교를 졸업한, 일단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함께 통하는 이야기도 많고, 특유의 문화적 공통점 때문에 대화가 즐거웠다.

그렇지만… 내가 이 불공정한 상황을 영유하려고 하는 듯한 자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스스로 보여서, 

못내 불편하고 마음이 쓰렸다.

이제 박사를 마친지 10년이 지나가는 마당에,

아직도 어느학교 출신이라는 것 가지고 먹고 살려고 한다면,

참 비겁한 일일 뿐 아니라, 공정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박사를 마치고 나름대로 참 열심히 일하면서 지내긴 했지만,

이제는 내가 학벌에 비해 실력이 더 좋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음….

정복주의적 사고방식에 젖어 있을 때,

기계적 하나님 나라 – 그리스도의 주권 이라는 개념에 젖어 있을 때,

혹은 반대쪽 극단인, 피상적, passive, 평화주의의 아류의 생각에 끌렸을때에는,

내 학벌, 실력, 세상 에 대한 꽤 단순한 도식이 가능했는데,

이제 그 어느것도 ‘내것’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워진 지금은,

도대체 내게 주어진 이것이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

어떻게 활용되어야 하는지,

활용되는 것이 가능하긴 한건지…

여러 복잡한 생각들만 가득하다. ^^

무엇을 향해 우는가 (updated)

지난주 금요일 “무엇을 향해 우는가” 라는 글에서 약간 더 update된 version이다.

1.상실의 울음

어떤 이들은,자신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속상해서, 혹은 자신의 아픔이나 상실로 인해서 운다.

2. 정의의 울음

어떤 이들은, 깨어진 세상을 보며, 다른 이들의 아픔을 보며, 불의와 악을 보며, 안타까움으로 운다.

3. Coram Deo의 울음

어떤 이들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자신의 본질을 이해하고 깨닫고… 자신을 바라보며 운다.

여기서 각각,

건강한 형태의 울음과 건강하지 못한 형태의 울음이 더 있을 것 같아 세분해본다.

1-1 건강하지 못한 상실의 울음

내가 이루고 싶은 아주 이기적인 욕심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에 대한 상실감. 번영신학, 기복신학은 인간의 이 부분을 충족시켜주기 위한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울음은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1-2 건강한 상실의 울음

사랑하는 대상이나 가치등을 잃었을때 우는 울음

(사랑하는 이가 세상을 떠났을때 우는 울음 등과 같은… 이것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많이 발견된다.)

2-1 건강하지 못한 정의의 울음

이 울음이, 공정하지 못한 분노로 연결되어 고착화 되면, 나와 남이 모두 함께 망아지는 것을 경험한다.

그런 의미에서, 울음의 근거가 건강하다고 해서, 반드시 그 울음 자체가 건강한 것은 아니다.

좋은 생각을 하는 나쁜 사람은 참 많다. (홍정길 목사님의 표현)

히틀러도 그 생각을 찬찬히 보면 참 좋은 생각을 많이 했었다.

2-2 건강한 정의의 울음

그런 의미에서, 울음을 통해 다다르게 되는 곳이, 하나님을 향한 소망, 하나님의 주권, 악의 심판에 대한 약속을 믿음 등등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며 건강한 울음을 울어야 하는데, 그러면서 또한 정의의 눈물을 흘리는 과정 중에 계속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어야 자신이 망가지지 않는 것 같다.

3-1 건강하지 못한 Coram Deo의 눈물

사실 Coram Deo를 제대로 하고 있다면 건강하지 못한 눈물이 있을 수 없다.

Coram Deo 없이, 자신의 모습에 절망하고 있기 때문에 왜곡이 생기는 것일 것이다.

자기 연민, 절망, 자포자기 등등의 모습이 이 부류에 해당할 수 있을 것 같다.

3-2 건강한 Coram Deo의 눈물

하나님 앞에 서기 때문에, 자신의 무익함을 겸손하게, 절신하게 깨닫고,

도무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소망이 없음을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여전히 그 은혜 안에 있으면서도 이토록 하나님께 무익한 모습이라는 것 때문에 끊임없이 아파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로인해, 오히려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도무지 소망이 없음을 더 인정하게 되는 과정을 겪게 될 것이다.

무엇을 향해 우는가

1.

어떤 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속상해서, 혹은 자신의 아픔이나 상실로 인해서 운다.

2. 

어떤 이들은,

깨어진 세상을 보며, 다른 이들의 아픔을 보며, 불의와 악을 보며, 안타까움으로 운다.

3.

어떤 이들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자신의 본질을 이해하고 깨닫고… 자신을 바라보며 운다.

기독교는,

1, 2, 3 세가지 눈물을 모두 이야기한다.

그러나,

1,2는 하나님 없는 다른 사상이나 종교에서도 가능한 것이지만,

3은, 하나님과의 대면 (Coram Deo)가 이루어져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를 진정으로 기독교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 자신을 향한 눈물이 아닐까.

나는, 신앙운동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신앙을 운동으로 치환/환원/축소 시키고자 하는 시도가…

그런 의미에서 너무 shallow하다고 생각한다.

신앙을 운동으로 이해하는 관점에는, 너무 자주, 1과 2의 눈물만 있고… 3의 눈물이 없다…

한때 나는,

내 자신을 보며 참 많이 울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보잘것 없는 나를 보며…

그런데 언제 부터인가,

3의 눈물이 내게서 사라지고, 1과 2의 눈물만 남게 된 것 같다.

다시….

나 자신을 보며 울기 시작해야 할 때인 것 같다.

가슴을 치며, 가슴에 멍이 들도록 가슴을 치며… 그렇게 흘리는 눈물…

Red Sox in SF

지난 3일동안,

Red Sox가 SF Giant 구장에 와서 경기를 하였다.

내가 몇달전 이 schedule을 확인하고,

민우에게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민우가 흥분하면서, 꼭 보러갔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었다.

나는, 민우가 학교를 시작하는 시점이 9월이나 될줄 생각하고는,

꼭 민우와 함께 Red Sox 경기를 SF에서 구경하도록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었다.

그런데,

민우가 학교 개학 이후에 경기가 있다는 것을 알고, 많이 실망을 했다. 그렇게 흥분하면서 기대하고 좋아했었는데…

내년 Red Sox 경기가 SF에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최소한 Oakland 경기는 있을 테니, 거기라도 민우 손 잡고 꼭 한번 가면 좋겠다.

Am I religious?

민우와 ‘종교적'(religious)한 것에 대한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민우야, 민우는 아빠가 religious하다고 생각하니? 라고 물었더니,

한참 생각을 해보더니,

Sometimes…라고 이야기했다.

언제 아빠가 religious한 것 같아? 라고 불었더니,

그 hiking 좋아하는 목사님(^^)하고, 귀여운 커플 아저씨(JW를 의미함 ㅋㅋ), 야후 아저씨 (이 아저씨는 yahoo 떠난지가 언젠다 아직도 yahoo 아저씨다. ㅎㅎ) 같은 사람들하고 이야기할때는 아빠가 좀 religious해보여.

아빠는 그렇게 이야기할때는 많은 input이 있는 것 같아 보여, (할말이 많아보인다는 영어식 표현 ㅎㅎ) 

민우의 이야기를 내 말로 풀어 정리하자면 이렇다.

1. 내가 크리스천 동지들과 이야기할때는, 내 일상의 모습과는 달리 종교적인 것 같이 느껴진다. 

2. 그럴땐 나는 좀 말이 많은 편이다.

이원론적인 삶의 모습을 탈피하고, 말을 줄여야 겠다. ^^

자신의 패를 까라!

스탠리 하우어워즈가, 심한 조울증이 있는 아내와 살면서 고통을 겪어야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때,

그분의 신학이 더 따뜻하게 느껴지며, 더 깊이 이해가 되었다.

늘 깊이있는 설교를 하시는 A 목사님이,

평생 깊은 우울증에 시달려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때,

그분의 설교의 더 깊은 곳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 저런 이야기가 저렇게 쉽게 나올까 하며 설교를 듣게되는 B 목사님이,

우울증에 시달리는, 게다가 그 B 목사님의 깊은 신학적 깊이에 한참 이르지 못하는 사모님을 두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때,

그분이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하실 수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늘 자신의 한계를 잘 열어서 드러내놓는 C 장로님이,

어릴때부터 깊은 열등감에 시달리며 자라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때,

그분의 삶이 더 많이 이해되었다.

….

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최소한… 그리스도인 리더들은,

자신이 왜 그런 생각과 사상과 믿음을 가지게 되었는지…

자신의 ‘패를 까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그 사람의 이야기가, 오해 없이 훨씬 더 잘 이해가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나온 깨달음, 경험, 사색 등을 이야기함에 있어,

그 경험의 부분을 떼어놓고, 일반화 해서 풀어내려 하면,

자주 과잉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게도 되고,

심하면 그것이 폭력적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뭐 포커 이런거 전혀 칠줄 모느는 사람이지만, 이련 표현 한번 써봤다. ㅎㅎ)

This is what happens…

This is what happens when you have a daughter who doesn’t throw away anything. 🙂

우리 딸내미는, 정말 절.대.로. 아무것도 안버리려고 한다.

이번에 이사하면서, 내가 15년도 넘게 입은 샤워 가운을 버렸다.

그런데… 며칠 전 우리 딸내미의 옷장을 보니 그게 있었다!

물어보니, 추억이 있는걸 그렇게 버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거기를 뒤져보니, 내 아내가 입다가 낡아서 버린 티셔츠, 오래전에 버렸다고 생각했던 수건 등등이 나왔다!

우리가 그런걸 버릴때 마다,

요것이, 쓰레기통에서 그걸 구원해내어, 자기의 아지트에 숨겨놓았던 것이었다.

어제,

이사 온지 한달이 훨씬 더 지나서,

드디어 민우방이 어느정도 정리가 되었다.

그러면서,

여기 저기 있던 인형들을 다 모아서 한꺼번에 진열해보니, 위의 사진과 같은 배열이 되었다.

그 와중에, 특별히 간택된 인형들은, 민우 침대 위에 있고, 이놈들은 최소한 사진을 찍은 어제는 간택되지 못한 놈들이다. -.-;

아빠와 장난치기 좋아하고,

인형 좋아하고,

여전히 하루에도 몇번씩 아빠 엄마에게 뽀뽀도 해주고,

아빠 엄마로부터 사랑한다는 이야기 듣고 듣고 또 듣는것 좋아하고…

그런 우리 민우가,

이제 오늘부터는 고등학생이다.

하나님께서 민우의 고등학교 시절을 잘 지켜주시도록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