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전투적인가

깨어진 세상 속에서,

그 깨어진 세상과 다른 가치관으로 살아가다보면,

삶의 전투적이 될 수 밖에 없다.

뭐 이런 생각을 늘 가지고 살았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런데,

그런 frame 속에서… 문득…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는 주님의 말씀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음이 깨달아졌다.

믿음은 전투적이어야 하는가?

믿음은 liberating 한 것이어서, 자유와 기쁨과 평안을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과 전투적 삶은 어떻게 조화로울 수 있을까?

이번주 초,

Lake Tahoe로 이틀짜리 짧은 휴가를 다녀왔는데,

그 휴가 기간, 사랑스러운 아내와 아이의 웃음을 보며…

믿음생활 3개월차에나 했을 고민을,

문득 다시 깊이 해본다.

여전히 또 다시 헌신 vs. 일상의 대결 구도인가.

성경통독을 하며 느낀점

참 오랜만에,

성경 통독을 끝냈다.

예전엔, 하루에 열장이고 스무장이고, 앉은 자리에서 많이도 읽었었는데,

너무 그렇게 쭉~ 읽어내려가는 practice를 하지 않았다는 반성에서, 금년 새해 시작하면서 통독을 결심했었다.

금년에 두번 통독이 목표였는데, 8월 상반기에 겨우 한번 끝냈으니, 두번 통독은 쉽지 않을 것 같다.

금년 나머지 시간동안 신약 한번 더 읽는 쪽으로 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이번 성경통독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새로운 발견, 느낌 등이 있었다.

1. 성경의 ‘배치’가 절묘하게 느껴졌다.

구약도 그렇지만, 특히 신약 서신서들의 배열되어 있는 순서가… 마치 흐름을 타듯 배치된 것 같이 느껴졌다.

2. 내가 가슴뛰던 성경본문에서 별로 가슴이 뛰지 않았다.

에레미야, 느헤미야, 호세아, 에스라… 이런 본문들은, 

내가 읽으며 가슴을 뜯기도 했고, 눈물을 펑펑 쏟기도 했었고, 읽다가 가슴이 뛰어 성경을 덮고 좀 숨고르기를 해야하는 경험도 있었던 본문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본문들이 그냥 밋밋하게 느껴졌다.

내가 뭔가 병들어 있는 걸까?


3. 예전에 별로 감흥이 없는 성경본문에 마음이 오래 머물렀다.

시편, 욥기, 요한복음 등등.. 예전에는 그냥… 그야말로 성경 내에 끼어 들어가 있는 것 같이 느껴지던 본문들이 입체적으로 튀어나와 보였다!

예전에 가슴뛰던 본문들이 나를 정신없이 흔들어 놓는 것들이었다면, 이 새롭게 다가온 본문들은… 내 마음에 좀… 싸아~ 하게 남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4. 성경 내의 다양성이 특별히 더 많이 두드러지게 보였다.

구약성경은 떼고 얘기하더라도,

신약성경 내에서도…

아마 조각조각 띄어내어서 다시 재조합을 하면, 전혀 다른 가르침의 종교를 3-4개는 만들 수 있겠다…. 라고 생각이 들만큼, 

성경 본문이 다루고 있는 scope도 넓고, spectrum도 넓고, 내용도 다양헸다.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이 같은 예수를 그리고 있는 것 같다 보이지 않았다.

바울의 초기 서신과 바울의 후기 서신은 거의 다른 가르침인 것 같이 느껴졌다.

바울서신과 비-바울서신 역시 매우 달랐다!

서신서와 복음서도 완전히 다른 내용같이 느껴졌다.


성경의 이 다양함과 dynamic함을 신앙과 신학에 담으려 할때,

reductionistic하게 접근하면 정말 안되겠다… 그런 생각을 다시 많이 하게 되었다.

지난 목요일 아땅님이 던지신 질문에 대한 답 ^^

헌신에 대한 글에 아땅님이,

종합적인 질문을 던지셨기에,

여기 한번 답을 올려봅니다. ^^

 질문

‘원래’ 내 대답 (5년쯤 전의 대답)

 ‘요즘’ 내 대답

 헌신그룹 – 일상그룹은 continuum 상에 있는 양 극단인가? incompible 한 가치인가? 두개가 함께 추구될 수는 없는 건가? (theoretically, practically)

컨티뉴엄 상의 양 극단이 아니라, 흑-백과 같은 개념에 가깝다. 따라서 대단히 incompatible 하다. 

그렇지만 사람이 성숙해가는 과정 속에서는 점차 일상으로부터 헌신의 과정으로 옮겨 갈 수 있으므로, 그렇게 보면 컨티뉴엄 상에 있다고 볼수도 있겠다. 

 컨티뉴엄상에 있는 양 극단이다.

그렇지만 대단히 incompatible하다고 본다. 

이론적으로는 어떤 형태로든 양립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실제로 그것이 어떻게 양립가능할지 잘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예수님은 어느 그룹에 속했을까?

당연히 헌신그룹 ^^ 

 아마 어떤 그룹도 아니셨을 것 같다. ^^

 제자들은 어느 그룹에 속했을까?

당연히 헌신그룹 ^^ 

 헌신그룹에 가까웠을 것 같다. 특별히 그 당시 복음이 가지고 있었던 역사성, 정치성에 비추어 보아, 헌신그룹에 속하지 않았다면 복음에 헌신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바리새인들은 어느 그룹의 인물들이었을까?

바리새인들은 당시 거룩운동을 통해서 

헌신그룹! 

결국 새로운 종교적 시도를 통해 시대적 breakthrough를 만들고자 했던 사람들이었다.

 헌신그룹… 

옆의 대답과 비슷 ^^

 가장 이상적인 헌신그룹 멤버의 삶을 그려낸다면 어떨까? / worst한 헌신그룹 멤버의 모습은?

 자신의 보든 것을 던져 하나님 나라 가치에 헌신한 모습

많은 개인적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내면적 기쁨이 넘치는 모습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나쁜 모습은, 타인을 향해 judgmental 하고, 사려깊지 못하고, 가치에 비해 사람을 가볍게 여기는 모습

옆의 대답과 같음 

이상적인 / 나쁜 일상그룹의 삶의 모습은?

 이상적인 일상그룹이란 존재하지 않음. ^^

 이상적인 일상그룹이 존재하는지 하는 것에 대해 자신은 없지만, 일단 그럴 가능성에 대해 열어놓고 있는 중. ^^

아마 따뜻한 마음으로,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많이 배려하는 모습이 아닐까.

 가장 이상적인 헌신그룹의 삶의 모습과 가장 이상적인 일상그룹의 삶의 모습은 상당히 닮아있지는 않을까?

이상적인 일상그룹이란 존재하지 않음. ^^ 

여전히 많이 다르지 않을까…

헌신그룹은 가치에 열정적으로 헌신한 것이라면,

일상그룹은, 좀 더 관계에 잔잔하게 머무는 스타일이라고나 할까?

 두 그룹의 나쁜 모습은 웬지 안 닮아 있을 것 같은데, 그 모습은 어떨까?

헌신그룹: 폭력적이고, judgmental하고, 잔인하고 따뜻하지 않은…?

일상그룹: 게으르고 이기적이고,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이 좁음?

옆의 대답과 같음

하나님을 믿는가,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믿음과 사랑함. 

어떤 것이 먼저일까?

나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분을 사랑하는 걸까,

혹은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믿는 것일까?

나는 꽤 오랫동안,

그분을 믿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으로  assume 했었다.

그런데 요즘 가만 생각해보면,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믿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것이 건강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 하는 논의를 접어두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이 두가지 다른 path 가운데 어떤 쪽을 택하느냐 하는 것에 따라 그 사람의 ‘신앙의 컬러’가 많이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헌신(!)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세상은 이렇다.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지로부터 벗어난 피조세계는 심하게 뒤틀려져 있다.

많은 이들이 그것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속에서, 당신의 사람들을 부르시고 세우셔서 그 어그러진 세계 속에 살도록 하신다.

그런 사람들에게 주어진 선택은 단순하다.

어그러진 세상 속에서, 그 세상에 순응하고 살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살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나는 절대적 헌신,  radical discipleship 이외에 다른 어떤 대안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이 생각에의 헛점은 무엇일까?

(혹시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중 좋은 comment 주실 수 있는 분들 부탁드립니다. 꾸벅~)

번영신학을 옹호함?

어린아이에게 복음을 이야기하고자 할때,

하나님의 통치라는 개념에 근거한 하나님 나라, 

악의 문제와 하나님의 주권,

성경본문의 역사성과 초월성…

뭐 이런것들을 다 풀어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복음을 제대로 설명하려면,

위의 개념 이외에도 더 많은 복잡한 개념들을 잘 설명해 주어야 하지만,

아직 지적 인지능력과 사고능력, 그리고 경험이 짧은 어린아이에게는…

그저 하나님께서 너를 사랑하신다… 예수님께서 너를 위해서 돌아가셔서, 너는 이제 구원을 받는다. (구원이 뭐라는거 또 썰 풀기 시작하면 한이 없지만… -.-;)

뭐 이렇게 단순하게 얘기해줘야 할것이다.

나는,

어른중에서도, 심지어는 고등교육을 많이 받고, 경험과 나이가 충분한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아주 단순한 유년주일학교식 복음을 넘어서는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한참 설명을 해 주고,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도… 잠시 후에 얘기를 들어보면… 복창이 터지는…

번영신학에 근거한 기복신앙은,

그것이 신앙이 종착점이라면 참으로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아주 유치한 수준의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공급자가 되신다는 것을 이야기해주는 몽학선생으로서 번영신학을 이해해볼수는 없을까?

하나님에 대해,

복음에 대해,

초월적 가치에 대해…

도무지 깨닫지 못하는 이 천박한 세대를 향해서,

그래도 그들이 들을 수 있는 언어로 풀어서 번역해 낸 (그러나 오역이 참으로 많은…) 그런 복음이라고 이해해 볼수는 없을까.

40대 아저씨들의 이야기

지난 주말,

이 동네에서, K 간사 리더쉽 모임이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소중한 사람들과 여러 이야기를 하고, 토론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참 복되었다.

그리고,

주일 밤…

뭐 그냥 저녁 먹고 E-S 간사 집에 다들 삼삼오오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I 선교단체 대표로 섬기시다가 그만두시고 미국에 오셔서 이제 다시 우리 K 간사로 오랜만에 복귀하신 K 목사님,

K 간사로 10년 섬기시다가, 하나의 씨앗교회 개척 담임 목사님이 되신 A 목사님,

그리고 나…

이렇게 세사람의 40대 중반 아저씨들이 삶과 하나님 나라와 헌신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K 목사님은,

자신이 I 단체 대표로 있을때, 한 6개월 동안은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울 만큼…

급격한 ‘갱년기’ 증상을 겪었다고 이야기해주셨다. 홀몬 변화도 크고… 삶에 대한 불안, 자신에 대한 회의,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불만 뭐 그런 것 까지 포함해서…

A 목사님도,

이제는 40대 중반이 되어 자신이 덜 날카로와 지셨다고 이야기해 주셨고,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해 더 편해지셨다고 하셨다.

나는…

뭐 내가 요즘 이 블로그에 쓰는 여러가지 고민들, 생각들 이런걸 또 나누었고,

그런데 나는 뭐 홀몬의 변화 그런런 못느끼겠다고…

눈물이 나온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고, 여전히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생각하며 가슴이 뛰는 건 마찬가지라고 말씀을 드렸다.

30대 중반의, JL, HK, EK 간사들은(그리고 잠시 후에 join한 JK간사도) 이 40대 중반 아저씨들의 이야기를, 옆에서 정말 열심히 들었다.

그리고 30대로서 자신의 고민들도 좀 이야기해 주었다.

다소 즉흥적으로 시작된 이야기였는데,

나름대로 K, A 목사님의 스토리를 듣는 것이 아주 흥미로우면서도 도움이 많이 되었고,

30대 중반의 간사들이 나름대로 하고 있는, 인생과 하나님나라에 대한 고민과 생각도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음…

이런 얘기…

이렇게 마음 잘 맞는 사람들과 더 자주 할 수 있으면 좋겠다.

QT 안하기

20년 넘게,  

QT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들어주는 가장 중요한 기둥과 같은 것이었다.

삶에서 중요한 순간을 지날때 마다, QT는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 되어 주었다.

그런데 금년들어, 아니… 작년 후반 즈음부터…

나는 그 QT를 안하고 있다.

대신 말씀을 통독을 하고, 조금 깊이 기도를 하고…

하나님과 세상과 신앙과 나에 대해 깊이 이리저리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렇게 하기 시작한 이유는 다음의 몇가지이다.

1. QT를 하면서… 너무 자주 나는 자의적으로 말씀을 풀어 그것에서 위안을 얻는다. 파편적으로 말씀을 보나보니 문맥에 벗어난 해석과 적용을 하는 일이 너무 많아, 과연 그런 해석과 적용이 제대로 된 것이었나 하는 것에 의구심이 많이 들었다.

2. 교회 전통 속에서, 성경 반장 정도를 가지고 그날의 적용점을 찾아내는 일은… 사실 없었던 것이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성경을 통독을 하거나, 렉티오 디비나 식의 말씀 읽기를 하거나, 기독교 고전을 읽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예 말씀을 연구하는 일을 했지…. 

말씀 조금을 떼어나가  3P (personal, practical, possible) 식의 적용점을 찾아 그날의 양식으로 삼는 일은… 정말 아주 최근 사람들이 고안해낸 방법이라는 생각을 했다.

3. QT식으로 적용점을 찾아내는 식의 묵상보다는, 통독을 통해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만나는 일을 좀 더 하고 싶었다.

이제 그렇게 하기 시작한지 반년이 훨씬 더 지나 1년 가까이 되어 가고 있으니,

뭔가 중간평가를 해볼 때가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한데…

음….

아직은 QT가 그립다. ㅎㅎ

금년말 까지는 그래도 이렇게 좀 더 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