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함이 죄일까?

예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썼던 것 같기도 한데…

어떤 무능한 리더가 있다고 하자.

당연히 그 리더쉽 아래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그 리더의 무능함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음…

무능한 리더쉽이라고 하니까, 사고력부족하고, 판단력 딸리고, 우유부단하고, 게으르고… 뭐 그런것만 생각하기 쉬운데… 

자신의 무능함을 감추기 위해, 철권통치를 하는 독재자 역시 무능한 리더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을 포용하고, encourage하면서 끌고 나가지 못하기 때문에,

hard-drive 하는, 폭력적 리더가 되어버리는 경우도 사실 꽤 많이 본다.

그런 리더 밑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생각할때,

그 리더의 무능함은 죄일까?

어떤 사람(A)이, 사랑에의 깊은 목마름을 가지고 있다고 하자.

자신을 지지해주고 격려해주는 그런 따뜻한 친구/동반자가 절실히 필요한 상태이다.

그런데, 이 사람의 가장 친한 친구(B)는 이 사람에게 그런 따뜻함을 제공해줄만한 여건이 되질 못한다.

감성적으로 insensitive 해서 그럴수도 있고, 어떻게 따뜻하게 대해야 하는지 잘 몰라서 그럴수도 있고…

좀 더 극단적인 경우를 생각해보면 자기(B)가 심한 병에 걸려서 친구(A)를 행해 따뜻함을 베풀어 줄 수 있는 여건이 안될 수도 있다. 어쨌든, 이 친구(B)는 사랑을 주는 친구라는 역할을 놓고 보면, 무능한 것이다.

사실 인간 관계 속에서 이런 무능함은 참 자주 목격한다.

무능한 남편, 무능한 아내, 무능한 부모, 무능한 자녀, 무능한 스승, 무능한 친구…

그렇다면,

A라는 사람이 그렇게도 갈망하는 사랑을 제공해주지 못하는 무능한 B는, 과연 죄를 짓고 있는 걸까?

B의 무능함은 죄일까?

나는,

내 무능함은 죄가 아닌 것으로,

다른 이의 무능함은 죄로,

그렇게 자주 여기고 정죄하는 것 같다.

뭔가 바뀌어야 할 것 같은데…

번영신학 vs. (진보적) 하나님 나라 신학

소위 하나님 나라 신학을 표방하는 이들이 가장 경멸하는 것은,

번영신학의 입장이 아닐까 싶다.

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은 ‘하나님 나라 신학’에 거의 목숨을 걸다시피 하는 반면,

번영신학은 혼합주의, 바알주의라고 심하게 비판한다.

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의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나로서는,

번영신학을 바라보는 그들의 관점에 깊이 공감한다.

그런데…

지난 1년여동안 계속 나를 붙들고 있는 소위 ‘초월적 세계관’의 입장에서 보면,

사실 번영신학과 (진보적) 하나님 나라 신학은 모두 비슷한 부류로 분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 두 입장 모두 결국,

‘이 땅’에서 뭔가를 이루어내보자는 접근인 것이다.

번영신학은, 이땅에서, 개인적인 번영을 추구하는 입장이고,

진보적 하나님 나라 신학은, 이 땅에서, 함께 잘사는 가치가 구현되는 것을 꿈꾸는 입장이 아닐까.

나는 물론 번영신학을 몹시, 정말 몹시, 싫어하지만,

또 한편… 진보적 하나님 나라 신학의 입장이, 지나치게 ‘이땅’의 것에 집착하는 것 같아… 좀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 땅’의 것이 물론 매우 중요하지만,

‘저 하늘’의 것 역시 포기되어서는 안될 중요한 부분인데 말이다.


(늘 내가 해오던 이야기와 너무 다른 이야기인 것 같이 느껴져 놀라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텐데….)

‘잘믿던’ 사람의 배교/타락

히브리서 6:4-6

한번 빛을 받아서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을 나누어 받고, 또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장차 올 세상의 권능을 맛본 사람들이 타락하면, 그들을 새롭게 해서 회개에 이르게 할 수 없습니다.

이건,

신학적으로 논란이 많은 구절이라고 알고 있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냐 아니냐 하는 주제를 다룰때 등장하는 key verse 가운데 하나이고.

나 역시 이런 구절에 대해 내 입장이 몇번 변해 왔었다. ^^

그런데,

최근에는 약간 다른관점에서 이 구절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한번 정말 제대로(?) 찐하게(?) 믿었던 사람이,

혹시 교만하게 된다거나,

자신을 과신하게 된다거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잊어버린다거나,

아니면 잘못된 가르침을 active하게 따르는 일을 한다거나 하면…

이런 사람은,

신앙 형식으로서의 성숙은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로 그 내용이 변질되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앙 형식이라는 뼈대가, 이 사람의 잘못된 신앙의 내용을 지탱해주는 역할을 하게 되어,

이런 사람은 다시 돌이키는 것이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에 가깝도록 어렵다는 것이다.

음…

이게 논리적으로나 이성적으로 이렇게 설명을 하는 것이 얼마나 잘 먹히는 것일지 하는 것에는 사실 딱 자신은 없는데,

주변을 보면, 이건 정말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정말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과 은혜가 아니라면,

타락한(?) 혹은 진리에서 떠난, 아니면 진리에서 약간 어긋난 지도자들/목회자들은… 다시 바로잡히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본다. 

나 자신을 돌이켜보면,

내가 정말 한 순간 이라도 주님을 ‘잘 믿었던’ 적이 있었다 하는 것에 딱 자신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을 나는 ‘잘 믿는 사람’으로 많이 봐 주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속에서 나도 내 스스로를 그렇게 보기도 했던 것 같고.

그런 차원에서…. 나도 위에서 언급한 부류의 이런 risk가 대단히 큰 그룹의 일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가끔은…

아… 내가 신앙 연륜이 좀 짧았더라면,

내가 주님과 함께 동행한 스토리가 좀 더 적었더라면,

내 이 잚못된 attitude를 고치는 것이 더 쉬울텐데…

뭐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

내 신앙의 이력은, 그런 의미에서,

자랑할 것이라기 보다는,

그것으로 인해 오히려 두려워할 것이 아닌가 싶다.

무지개를 찾아 다니시나요

코스타 온라인 스토어가 열려서,

나도 이제 비로소 지난 코스타 설교/강의들을 듣고 있다.

하루에 하나씩 듣는 것이 목표인데,

영 쉽지는 않다.

그중,

시카고 화요일 구원초청 전에 했던 ‘무지개를 찾아 다니시나요’ 노래가 유난히 내게 많이 마음에 남는다.

음…

솔직히 말하면,

이게 80년대 생들에게 먹힐 노래는 아니다. -.-;

그런 의미에서, 강사가 선곡을 잘 못 하신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 노래는, 내가 예수를 믿고 얼마되지 않아서 배웠던 노래였다.

그리고 그때 이 노래를 혼자서 부르고 부르고 또 부르고… 기타를 치며 부르고, 친구들과 만나면 함께 기타치면서 또 부르고… 흥얼 거리고, 휘파람 불고, ‘워크맨’에 테잎을 끼워서 반복해가며 또 듣고… 뭐 하여간 그랬던 노래다.

깨진 꿈, 상한 맘, 지친 몸을 모두 주님께 드리면 슬픈 마음 기쁨으로 변한다는 단순한 가사가 그때는 정말 내게 그렇게 살아있는 고백이 되었었는데,

어느새 시간이 지나면서, 내 그 순수한 고백의 열정이 점점 약해지고, 내 깨진 꿈, 상한 맘, 지친 몸을 드리고 있지 않게 되어버린 내 모습을 다시 보게 되었다.

설교를 들으며,

그리고 이 노래를 혼자서 따라하며,

울었다…

드려요, 모두다, 주님께 드려요… 

이런건 좀 들어봐야 함

지난 주말에,

윤환철 국장이 청어람에서 세미나 한 내용을 정말 정신없이 열심히 들었다.

내가 알기로,

이분 나랑 동갑이실텐데… 

아… 참… 대단하다.

이런분이 통일부장관 같은 직책 맡으시고 일좀 제대로 하면 좋을 텐데…

몇가지 든 곁가지 생각.

1. 한국 복음주의권에서, 이렇게 실력있는 전문가가 나올 수 있는건 그래도 소망인걸까.

2. 내가 알기로, 이분을 비롯해서, 한국의 실력있는 복음주의권 전문가중에서… 정말 엄청난 자기 희생을 해가며 치열하게 살고 계신 분들이 꽤 계신데…  그분들 다… 한국 교회에서 받는 support 거의 없이, 아니 솔직히 말하면 한국 교회에서 갖은 핍박을 당해가며 그 일들 하고 계신다. 

아… 그런 한국교회의 일부인 것이 부끄럽다.

3. 나 자신이 부끄럽다. 

이분 블로그가,

http://virtue.tistory.com/

이고,

혹시 facebook 친구 아니신 분들은 친구라도 맺어서 이분 글들 좀 읽어보시길 강추한다.

가령,

지난번에,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전문을 읽고 쓴… 관전평 글 5개인가 6개짜리 글은,

그것을 잘 읽는 것 만으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것이었다.

지난 설교를 들으며 든 반항심

며칠 전에도 쓰긴 했지만,

나는 사실 요즈음…

하나님께 좀 못마땅한 점들이 많다.

아는 몇몇 사람들의 고통을 보면서,

그리고 쉽게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상황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시는지 좀 볼멘 소리를 많이 하고 싶어진다.

지난 주일 설교 시간에,

주님께서 정말 선하신 분이신가,  trustworthy한 분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설교하시는 들었는데,

나는 이렇게 좀 항변하고 싶었다.

네,

그 논리로는 알겠는데요,

당장 이렇게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어려움 속에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하고 계신건가요.

그 하나님이 ‘객관적으로’ 선하시고 trustworthy하다는 것은 알겠는데요,

그 하나님이 어떤 개인에게 ‘실존적으로’ 선하시고 trustworthy하게 보이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당장 저도,

요즘은 그 하나님이 그렇게 선하게 느껴지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이 답답하고 무겁고 힘듭니다.

….

같은 설교자께서,

지난 9월에, 하셨던 설교 내용 하나가 생각났다.

라브리에 하나님을 믿을 수 없어 고민하는 한 젊은이가 찾아왔다.

그는 프란시스 쉐퍼와 오랜 대화를 나누었다.

아마도 프란시스 쉐퍼의 여러 논리가 매우 convincing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그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쉐퍼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네가 그렇게 하나님을 믿기 어렵다면, 그 하나님을 믿는 내 믿음에라도 좀 의지해라.” 

그 설교자는 그 예화를 드시면서,

때로 믿음의 여정에서 다른 이에게 의지하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디모데전서 설교하시면서…

….

그래,

그런 사람들이…

그래서 함께 모여야 하는 거구나.

서로의 믿음에 때로는 의지해가며,

이 땅을 resident alien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수퍼크리스찬으로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공동체의 일원으로 부르시는 것이라…

하나의 씨앗 교회

어제,

‘하나의 씨앗교회’가 ‘가정집’에서 드리는 예배를 벗어나서,

첫 정식(?) 예배를 드렸다.

예배시간을 여는 찬양을 하면서,

그리고 찬양 중간에 잠시 기도하면서,

그리고 말씀을 듣고 다시 잠깐 기도하면서…

나는 하나님께 물었다.

주님,

세상은 이렇게나 많이 망가져 있는데,

도무지 이게 어떻게 제대로 고쳐질 수 있을 것 같은 소망이 이렇게도 없는데,

그리고 그 깨어진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이토록 절박하게 신음하고 있는데…

아니 이 작은 교회가 하나 서는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주님은,

내게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나는 주님 제 이 기도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시는군요…

그렇게 기도를 마무리 했다.

예배를 마치고,

설교를 마무리 하신 목사님의 낡은 성경책과 설교 원고 프린트아웃을 보며…

그리고, 정말 적은 수의 사람들이 기대와 걱정과 두려움과 감사가 섞인 모습으로 첫 공식 예배를 마무리 하는 모습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그래,

내 그런 삐딱한 질문에,

한번에 답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이런 공동체 자체가 필요 없는 것이겠지.

그 해답을 함께 찾아가는 과정을 함께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바로 교회인 것이겠지.

Resident alien 으로 이 땅을,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그게 교회인거지.

목사님도 그리고 참 별나시다.

새 교회를 시작하면서, 

사도행전의 강한 비전, 확 세상을 뒤집는 성령의 능력…

아니면

에베소서가 보여주는 교회의 영광,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가 그려내는 짜릿함…

뭐 그런걸 설교하시는게 아니라,

나그네된, 흩어진, 고난받는… 성도들에게 주어주신 베드로전서를 가지고 설교하신다.

이 교회, 감이 좋다! (이동원 목사님이 이렇게 늘 말씀하신다지… ㅎㅎ)


관심 있으신 분들은, 주일 10시.


Cubberley Community Center,
Room A-3
4000 Middlefield Rd. Palo Alto, CA 94306


사랑의 소중함

사랑은,

의지할 대상이 아니라, 소중하게 간직하고, 귀하게 여기고, 존중하고, 마치 소중한 화초와 같이 잘 가꾸어야 하는 것 같다.

가령, 화초에 물을 주고, 분무기로 물을 뿌리고, 햇빛을 잘 받도록 하고… 하는 등의 일이,

때로는 tedious하게 생각될수도 있지만, 

그리고 아이 뭐 그따위 맨날 하는거… 뭐가 그렇게 대단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화초가 말라버린다.

사랑도 그렇다.

당연하게 여길만한 것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사랑을 assume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내 아내를 사랑하는 것도, 내 아이를 사랑하는 것도,

내 가족, 내 친구… 등등을 사랑하는 것 모두,

작은 것들을 꾸준히, 열심히, 그리고 즐기면서… 하는 것이 사랑을 잘 가꾸어내는 중요한 key가 아닐까 싶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그런걸까?

그리고, 하나님도 나를 향해 그런 사랑을 하고 계시는 걸까?

음… 그부분은 아직 잘 모르겠다.

글로 정리하고 싶은 주제들

다음의 주제들은, 내가 좀 더 시간을 내어서 정리하고 써보고 싶은 것들이다.

그런데 영.. 생각을 가다듬어 글로 써내려갈 여유가 안나는군… -.-;
– 자의식과 죄와의 관계
자의식 자체가 인간의 죄성으로 부터 비롯된 것일까?
아니면 최소한 자의식의 일부는 죄성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일까?
자의식 자체는 원래 괜찮은 것인데, 죄성으로 얼룩지게 된 것일까?
자신을 표현한다든지, 자아를 실현하는 것등은 과연 기독교적으로 얼마나 지지받을 수 있는 개념일까?
– 하나님의 선하심, 침묵, 기다리심, 인간의 깨어짐
어떤 인간의 고통을 보면서는 하나님께서 선하시다고 느껴지지 않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여전히 선하시고, 그분이 여전히 다스리고 계신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Open theism과 같은 관점으로 이것을 풀어내는 일에는 어떤 위험과 유익이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선하시고 전지전능 하시지만, 인간의 깨어짐이 모든 것을 mess-up하고 있다는 관점은 위험한 것일까?
– 내 start-up company 실패기
오랫동안, 꽤 열정적으로 했던 start-up company가 실패로 돌아갔다.
사실은, 나는 아직도 그것을 이야기하는데 마음이 쓰리고 힘이 든다.
그렇지만, 여러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에, 내가 그 과정 속에서 배운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 나라 관점에서 이 실패를 어떻게 해석해야하는지, 무엇이 실패의 원인이었는지… 등등을 정리해보고 싶다.
– 진보적 복음주의자들과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이 가지는 모순들
대부분의 경우, 보수주의자들은 context보다 text를 강조하고,
진보주의자들은 text보다 context를 강조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텐데…
요즘 한국과 미국의 진보적,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을 보면 그것이 뒤집힌 것 같아 보일때가 있다.
text를 강조하다가 오히려 지나친 강조 때문에 text를 잃어버린 보수주의자들,
context를 강조하다가 오히려 지나친 강조 때문에 context를 잃어버린 진보주의자들.
– Christian Mysticism
요즘 Christian Mysticism이라고나 할까… 그런 쪽에 관심이 많다.
‘교리’로서 자신을 define 하는 복음주의는, 그 경계를 긋는 방법론의 한계 때문에 자신의 바운더리 밖의 문제를 제대로 address 못하는 것 같이 느껴진다. 그래서 복음주의가 답답할때가 많다.
그 복음주의의 대안으로서 소개되는 ‘젊은 복음주의자’들… 혹은 복음주의와 그 밖의 영역을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면서 걷고 있는 사람들… 이 사람들 역시 많은 경우 복음주의가 바운더리를 만드는 방법론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질때가 있다. 그래서 이들 역시 (old) 복음주의를 비판하지만, 그  (old)복음주의가 빠지는 함정에 쉽게 빠져버리고 마는 것 같이 느껴진다.
좀 위험한 접근 같이 생각될수도 있지만, 소위 ‘mystic’들이 가졌던 관심에 조금 주목을 해보면, 그 대안을 일부 찾을 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좀 많이 해보고 있다.
예전에 ‘초월적 세계관’이라는 내용으로 일부 그것을 좀 풀어보기도 했는데…
이 외에도 3-4개 정도 더 주제들이 있는데…
아… 정말 시간이 없다… 쩝.
주님께서 내게 에너지를 주셔서 이 와중에 이것들을 글로 좀 정리할 수 있게 해주시거나,
그렇지 않으면 내가 의지적으로 이를 악물고 한번 해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좀 여유가 어떻게든 생기거나…
그래야 되지 않을까 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