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1)

소위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논의가, 나는 그렇게 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그 이름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엄밀한 의미에서 ‘세계관’이라고 하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이야기여야 한다.
그런데, 흔히 ‘기독교 세계관’이라고 이야기를 할때에는, 세상과 복음의 관계에 대한 논의에 그것을 한정시킨다.

그런의미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담론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기독교 셰계관’의 아주 일부분을 다루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기독교 세계관의 전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좀더 넓은 의미로 기독교 셰계관을 다루려면,
사물의 본질, 궁극적 실재 등등이 다루어져야 하고,
당연히 신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 계시의 본질, 고통의 문제… 뭐 정말 다양한 이야기들이 다 함께 다루어져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존에 창조-타락-구속으로 정리되는 세계관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식의 논의는,
기독교 세계관 논쟁이라기 보다는, 복음과 세상이 interact 하는 방식에 대한 논의라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혹은 리차드 니버가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접근한 것처럼, 이것은 기독교 윤리에 대한 discussion이지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discussion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 시리즈의 글을 생각하면서,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title을 쓰지 않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이다.

앞으로 몇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이 기독교 윤리에 대한 지금 현재로서의 내 생각을 좀 정리해볼 생각이다.

최근에, 동부의 어느 교회에서 강의를 하나 하도록 부탁받고 그것을 준비하면서,
아…. 이거 90분짜리 4-5시간에 나누어서 강의할 기회가 한번 주어진다면, 나름대로 내가 생각하는 것은 좀 더 잘 정리해서 풀어볼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을 한적이 있었다.

뭐 나는 사실 기독교 윤리, 기독교 세계관 이런 것에 전문가가 전혀 아니므로…
나 같은 사람이 풀어낼 수 있는 것에 무슨 새로운 것이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나는 세상 속에서 사는 사람이므로,
신학자, 철학자들이 하는 이론적 사변적 고민보다는 더 application oriented된 이야기는 풀어내볼 수 있지 않을까 뭐 그런 희망적 생각을 좀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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