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혁의 방법을 취할 경우,
다분히 ‘타협’을 불가피하게 해야할 경우가 있다.
몇년전 코스타 저녁집회에서 어떤 강사가 하셨던 설교중, 엘리야와 오바댜라는 설교가 있었다.
엘리야는, 우리가 다 잘 알듯 아합-이세벨 체제내에서 ‘광야에서 외쳤던’ 선지자였다. 바알 선지자와 대결해서 승리하기도 했던.
반면, 많은 사람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오바댜라는, ‘궁내 대신’이었다.
사실 악한 왕이었던 아합왕 체제에서 궁내 대신이었으니, 그리고 바알숭배를 자행했던 시대의 고위 관직지였으니…
이 사람은 그 자리에 있기 위해서는 많은 타협을 해야만 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오바댜는, 그 시대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살려내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체제 자체를 거부하지 않고, 그 체제에 남아 있으면서 그 체제를 변혁시키는 일은 이렇게 타협을 요구할 경우가 많다.
그런 사람들은 변절자일까?
과연 어느 선까지 타협하는 것이 적절한 것일까?
그렇게 타협해가다가 결국은 세상의 ‘시대정신’에 정복당해버리지는 않을까?
변혁자들이 고민할수밖에 없는 문제들이다.
그리고 또…
사실 변혁자로서의 삶을 살려고 할때, ‘작은 것’에 의미를 두고 꾸준히 그리고 오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할 수 있다.
당장 전체 체제를 바꿀 수 없더라도, 조금씩 조금씩 그 악한 system에 조금씩 crack을 만들어 가고 변화를 이루어가는 일에는 정말 오랜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
변혁자의 가장 위대한 예로 이야기되는 윌리엄 윌버포스가 그러지 않았던가.
젊은 시절 회심 이후 노예제도 폐지에 평생 자신의 정치 일생을 걸고 살았고 결국 자신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그 법이 통과되는 것을 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흔히, 작은 것에 의미를 두고 살아가는 변혁자들을 밖에서 보면서는…
저게 무슨 의미가 있어… 라고 이야기할수도 있지만,
사실 깨어진 체제 속에 들어가 있다보면, 큰 체제를 당장 변화시키지는 못하더라도 그 안에서 조금씩 고통받는 사람들을 돌보며 살아갈 일들이 참 많이 있다.
정말 작은 일들에 의미가 있는 것들이 참 많다.
변혁자들이 또한 생각해야할 또 다른 면은,
세상의 어그러짐을 바로잡으려 할때에는, 그 바로잡는 그 노력으로 인해, 매우 자주, 다른 왜곡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가령 예를 들어…
대기업이 남미의 어느 나라에 공장을 지어 어린이 노동착취를 하고 있다고 하자.
의로운 그리스도인들이 그 대기업에게 그 노동착취를 해소하라고 탄원도 하고 시위도 하는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결과로 그 악덕 대기업은 어린이 노동착취를 개선하기 보다는 그 공장 자체를 닫아버리는 결정을 할 수도 있다.
어린이 노동착취라는 문제는 해결(?)했다고 볼 수 있으나… 그 가난한 나라에서 그나마도 있던 일자리 자체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변혁자는 그런의미에서, 이상주의자로 남아있기 대단히 어렵다는게 내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