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와 관용

돌이켜보면 내가 정말 20대 ‘복음의 열정’에 불타올랐을때, 내게 관용은 매우 부족했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면,
기본적으로 내가 생각하는 방식이, 내가 이해가 되지 않으면 받아들이기 매우 어려워하기 때문이기도 했고,
또, 또 내가 배웠던 복음은 늘 ‘타협함이 없어야’한다는 것을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20대, 내 신앙의 영웅은 Francis Schaeffer였다. 그분은 로잔언약마저도 성경의 무오성을 지켜내지 못한 것이라고 비판했던 사람이었다.

그 불관용의 복음을 그야말로 밤낮으로 묵상하고 지냈으니, 내게 관용이라는 것이 자리잡기 매우 어려웠을 것.

그런데….
만일 내가 그때 타협함이 없는 복음에 대한 강조를 묵상하지 않고,
사랑과 포용과 은혜의 복음에 대한 강조를 묵상했다면…
아마 내 20대 이후 지금까지의 삶이 많이 달라졌을 것 같다.

물론 내 기질적으로, 논리적인 계층구조가 다 해결되지 않았는데 포용하는 것은 여전히 힘들었을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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