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고민

요즘 성경공부를 하면서 느끼는건,
내 설명이 너무 많아지고 길어진다는 거다. ㅠㅠ

예전에 성경공부를 할때엔 나는 거의 사회만 보고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주로 내용으로 해서 성경공부를 인도했던 경험들이 많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 내가 하는 성경공부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내가 뭔가 질문을 하면 사람들이 잠잠하고… 나는 그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설명을 길~게 풀어내는 일들이 많다.

왜 그럴까?

우선, 요즘 하는 성경공부는 내가 10년쯤 전에 했던 성경공부보다 더 내용이 어렵다.
요즘은 꽤 깊이있는 신학적 내용들을 다루어내려고 노력하고 있고, 흔히 ‘교회생활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보는 방식으로 본문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참여하는 사람들로부터 대답이 잘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 한편으로는 내가 말을 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전에는 성경공부를 어떻게 인도할 것인가에 대한 준비를 많이 했다면 요즘은 성경공부의 내용에 대한 준비를 더 많이 하고 있다.
예전에는 이런 질문을 하면 어떤 대답이 나올지를 미리 머리 속에서 시뮬레이션을 해보고 좋은 질문들을 치밀하게 준비하는 과정이 길었었다.
그런데 요즘은 조금 더 깊이있는 신학적,성서학적 내용을 다루려고 노력하다보니 나도 내용을 공부하는 것만으로도 빡빡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 성경공부 인도 자체에 대한 준비 보다는 내용 준비, 어쩌면 나 스스로 공부하는데 시간이 많이 들고 있다.

또,
예전보다 순발력이 더 떨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면서 예전처럼 빠릿빠릿하게 눈치를 채고 적절한 상황에서 적절한 코멘트나 질문을 던지는 능력이 떨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보니 자꾸 내가 그냥 설명으로 채워버리는…

마지막으로,
어쩌면 가장 걱정이 되는 것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내용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확신이 지나치게 커져서 다양한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을 가치있게 생각하기보다는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꼭 다루어야 한다는 조바심이 더 커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3월

나는 3월이 참 좋다.
아주 어릴때부터 3월이 좋았다.

새학기가 시작되고 새 학년으로 올라가는게 늘 좋았다.
새학년에 대한 기대감이 좋았다.

추위가 지나고 두꺼운 옷을 벗을 수 있다는 해방감도 어릴때 부터 참 좋았던 것 같다.

나는 어릴때부터 개나리를 참 좋아했다.
그리고 노란색을 좋아했다.
그 노란색 개나리가 피는 것이 좋았다.

이제는 3월에 대한 기대도 별로 없고,
내가 사는 곳에서는 3월 이전에 이미 꽃이 피기 시작하고,
개나리를 찾아보기도 힘들다.
당연히 새학년을 올라가는 일도 더 이상 없다.

그러니…
이렇게 생각해보면 3월에 갖는 희망과 기대는 그 시절에 누릴 수 있었던 특권이었던 셈이다.

3월의 희망이라는 특권이,
어떤 소수의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면 참 좋겠다.
3월의 희망을 누려야하는데 그것을 빼앗긴 사람들에게도,
3월의 희망을 예전에 누리다 더 이상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3월이 되었는데도 아직 마음의 한기를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모두 모두 희망이 새롭게 드러나면 참 좋겠다.

사순절에 생각해보면 희망…

누가복음 공부

이번학기에는 누가복음 본문을 공부하고 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직전까지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싶긴 한데, 그렇게까지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내가 지난 몇년 복음서 공부를 하면서 이렇게 재미있었던 적이 언제였던가 싶을 만큼 재미있다!
전에 보지못했던 것들을 참 많이 보고 있다.
직접 내게 깊게 impact가 있는 말씀들도 많고.

함께 하는 사람들은 약간 힘들어하는 것 같기도 하다. ㅠㅠ
자꾸만 내가 말을 너무 말을 많이 하게되는 것 같아 좀 고민이기도 하고.

특별히 ‘제자도’와 관련해서 많은 고민을 할만한 본문들이 계속 나오고 있어 이번 코스타를 마음과 생각으로 준비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지난번 야고보서를 공부할때부터 조금 보긴 했지만,
Eedmans Commentary on Bible 시리즈 누가복음 주석이 참 도움이 된다.
너무 어렵지도 않고, 너무 길지도 않고, 생각할만한 것들을 틱틱 던져 주어서 나 정도의 레벨에 적당한 것 같다.

내가 성경을 읽으며 얻어지는 유익 이상으로…
함께 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누릴 수 있으면 참 좋겠다.
정말 그러면 좋겠다.

더 깊이 그분의 사랑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당연히 있다.
그러나… 그렇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내가 사랑한다는 것, 또 그들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끝없이 되새기고 또 되새기며 살게되지는 않는 것 같다.
물론 그럴때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내 아내를, 아이를, 부모님을, 내 형제 자매를 사랑한다는 것이 더 마음에 담길때가 분명히 있기는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 –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과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조금 다른 것 같다.

그냥 언제 날잡아서 하루종일 그분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만 하루 종을 듣고 싶을때가 자주 있다.
그 은혜가 어떤 것인지 내 마음 벅차도록 담아보고 싶을때가 자주 있다.
또한, 그분을 향한 내 사랑을 더 깊이 표현해보고 싶기도 하고, 더 그분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답답할때가 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도 알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기도 하지만…
정말 언제 하루 종일, 아니 한주 내내, 아니 한달 내내면 더 좋고…
그분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이야기만 계속 듣고 또 곱씹으며 시간을 보낼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을 때가 있다.

모른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예전에 회사에서 어떤 사람에게 무슨 개념을 설명해주려고 한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자기가 그걸 안다는 거다.
내가 보기엔 그 사람이 분명히 모르고 있는데….

자기는 학교다닐때 그거 관련된 과목도 들었고, 그 후 직장들에게 그것과 관련된 일들도 해왔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고. 내가 애써서 설명해줄 필요가 없단다.

나중에 막상 그쪽 전문가와 함께 미팅을 할 일이 있었는데, 이 사람… 완전히 모르는 거다.

그러면서 나중에 하는 말이,
자기는 그게 그런 건지 몰랐단다.
자기는 자기가 알고 있는게 전부인줄 알았단다.

때로는 어떤 사람에게,
너는 그걸 안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너는 그걸 몰라…
네가 알고 있는건 지금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게 아니야…
이걸 설득하는것이 그 사람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는데 가장 큰 걸림돌인 것 같다.

아, 겸손하자.

분포의 오류?

내가 알기로 IQ는 100이 딱 평균이되도록 맞추어진 수치이다.
그리고 대충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IQ의 표준편차가 대충 16정도라고 한다.
그러니 표준편차의 세배가 되는 수치인 IQ 148이상이 되는 사람들은 전체의 0.15% 정도가 되어야 한다. 그러니 100명중에 0.15명이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음…
그런데,
나는 그냥 아주 보통의 중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중학교에서 대충 IQ 145넘는 사람들이 한두명씩은 대충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우리때는 중학교 1반에 70명씩이긴 했지만, 내가 이해하는대로 다소 비과학적인 경험적 수치로 따지면 IQ 145넘는 사람들이 2~3%정도나 된다는 이야기.

애들이 자기 IQ 높다고 뻥치고 다녔던 거라고 이야기해볼수도 있었겠지만,
당시 선생님들의 총애를 많이 받던 반장이었던 나는 반 아이들의 생활기록부를 정리하는 일을 할 때가 꽤 있었고 그럴때 대충 보면 그런 데이터를 수집해 볼 수 있었다. (지금 기준으로보면 당연히 학생에게 그런 일을 시키면 안되는 것이지만, 그때는 그랬다)

심지어는,
내가 고등학교때에는 우리 학년의 2/3가 넘는 아이들의 IQ가 155가 넘었다.
음… 그게 말이 되나?
아, 물론 내가 약간 특수 고등학교를 다니긴 했지만, 우리때는 과학고등학교가 그렇게 유명했던 때도 아니고, 경쟁률이 엄청 세지도 않았다.

게다가,
IQ 145를 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면,
표준편차 곡선의 반대편에서 IQ 52이하의 사람들이 IQ 148이상 되는 사람들과 비슷한 수가 되어야 한다.
역시 IQ 132이상 되는 사람들과 IQ 68이하되는 사람들의 수가 비슷해야 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그런가?

그러니…
현재 IQ 테스트라고 사람들이 하고 있는 것들이 대충 다 엉터리여서 모두들 실제 보다 한 20정도씩은 더 나오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기도

최근까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매년 2월 마지막 목요일은 Collegiate Day of Prayer라고 한다. 금년이 200주년 되는 해였다고.
게다가 금년에는 그 기도회를 Asbury University에서 한다고 광고가 떴다. Asbury에서 하는 집회도 이걸 마지막으로 끝낸다고 했다.

Collegiate Day of Prayer 웹사이트에서 자기가 마음에 두고 기도할 대학교들을 선택하라고 해서, 나는 나와 내 아내가 다녔던 학교, 민우가 다녔던 학교, 이 근처 학교등 몇개를 선택했다.
어제는 정말 오랜만에 금식을 하면서 기도를 했다.

그리고 서부시간으로 저녁 5시부터 7시까지 온라인에서 중계하는 기도모임에도 참석해서 기도했다.

정말 너무나도 많은 생각들이 쏟아져 들어왔고, 지나갔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나도 많이 울면서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정말 무언가를 해주시도록… 하나님께서 정말 이 젊은 사람들을 깨워주시도록… 그렇게 기도했다.
내가 기도를 게을리 한 것을 회개했고, 내 마음에 있는 냉소를 고쳐주시도록 기도하기도 했다.

하나님께 그분의 영광을 온 세상이 알게 해 달라고 그렇게 정말 기도했다.
이 아이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기쁨에 충만해서 살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했다.

정말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이 마치 바짝 마른 들에 불이 번져가듯 죽어있는 영혼들에게 번져가길 기도했다.

post-COVID-19

이제 전 세계적으로 COVID-19은 endemic이 되어버린 듯 하다.
중국이 마지막으로 위태위태 했는데, 중국도 이제는 그냥 이럭저럭 soft-landing을 하고 있는 것 같다. (hard landing인건가?)

글쎄,
어디에선가는 이런 논의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이제는 정말 인류가 COVID-19에 잘 대처했는가 하는 것에 대한 review를 해야할때가 아닌가 싶다.
무엇을 잘했고, 무엇을 잘 못했었는지.

이게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일 수 있으니, 어떻게든 과학적인 data를 근거로 review가 이루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COVID-19은 세계를 아주 크게 바꾸어 놓았다고 생각한다.
심지어는 어떻게 바뀌었는지 하는 것 조차 제대로 아직 파악하지 못한 것들이 많을 것 같다.

내가 얻은 교훈들은
– 과학적 사고가 매우 중요하다
– 현재의 기독교는 이런 사태 속에서 아무런 일도, 말도, 생각도 하지 못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 정도가 아닐까 싶다.

내 사순절 계획

오늘부터 시작되는 사순절.

다음과 같은 계획을 세웠다.

우선, 월터 브루그만의 사순절 묵상 A Way other than Our Own: Devotions for Lent
를 매일 보기로 했다.
나는 정말 웬만하면 성경말씀이 아니라 누가 이렇게 쓴 묵상집을 매일 보는 것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편인데, 요즘의 내겐 존경할만한 신앙의 선배가 이끌어주는 그 무엇이 필요한 것 같다.

그리고,
내 전화에 있는 모든 게임을 지웠다!
나는 아주 게임을 많이 하는 사람은 아닌데, 최근들어 내가 조금만 쉬는 시간이 생기면 그 전화에 있는 게임을 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중 어떤 것은 내가 정기적으로 가서 해야 진전이 있는 종류의 게임이어서 심지어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 게임부터 하게되는 때도 많았다.
지난 주일부터 일단 그렇게 시작했는데…
우아, 생각보다 내가 그 게임에 시간을 들이는 것이 많았음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없던 시간이 생긴다!약간 시간이 애매하게 남을때나 조금 심심할때 그냥 잠깐씩 그렇게 하는 게임에 꽤 시간을 쓰고 있었던 것.
게임을 할만한 시간동안 대신 ‘묵상’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하나님께서 내게도 긍휼을 베푸셔서 이 기간동안 조금 더 내 마음이 새롭게 되길

수학

나는 수학을 아주 잘하는 사람이 아니다.
중학교 정도까지는 뭐 그래도 수학 잘하는 아이라고 평가를 받았지만 고등학교때 부터는 수학을 잘 따라가기가 힘들었던 것 같다.
개념을 이해하고 쉬운 문제를 푸는 것은 잘 했는데, 조금 더 어려운 문제들에 맞닥드리면 그걸 푸는데는 시간이 오래걸렸다.

대학에 가서도 수학과목이 대개 학점이 나빴다.
대학교 2학년때 배웠던 engineering mathenatics의 후반부에 가서는 정말 허덕거리면서 수업을 따라갔다.

그렇지만 나는 늘 수학을 재미있어 했다.
끙끙거리며 수학문제를 푸는 것은 재미있었다.
오죽해야 내가 대학교 2학년때 학기중에 과목을 다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워서 겨울방학때 혼자서 그 수학책을 다시 공부해가며 문제를 풀고 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냥 수학이 재미있었다.

사실 석-박사 과정을 하면서 수학을 많이 쓰는 쪽의 일을 하지 않았고, 수학을 쓰는 일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러다가 박사과정 거의 끝난 즈음에 내가 해내려고 하는 어떤 문제가 꽤 복잡한 nonlinear partial differential equation (비선형 편미분방정식)들을 풀어야 하는 것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부랴부라 그때 그런 수학 문제를 푸는 것을 해야 했고, 나름대로 꽤 복잡한 system의 equation들을 그 당시 옆 실험실에서 개발해놓은 software를 이용해서 풀어내었다.

아마 그렇게 박사논문을 썼던 것이 내 일생에 마지막으로, 가장 intense하게 수학을 다루었던 시기였던 것 같다.

그후에도 나는 혼자서 시간이 나면 집에서 대학때 배웠던 미분방정식 교재를 가져다가 혼자서 연습문제를 푸는 이상한 ‘취미 생활’을 즐기기도 했었다.

나는 수학을 잘하지는 않지만 재미있어 하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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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을 잘 하는 사람인것 같지는 않다.
나는 태생적으로 겁이 많고, 자아가 강해서… 신앙의 아주 중요한 부분은 자기부인, 믿음의 도약 그런 것들을 참 잘 하지 못한다.

그래서 매우 critical한 순간에 제대로 올바른 결정이나 생각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때가 많았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을 재미있어 하는 것 같긴 하다.
더 배우고 싶고, 더 예수님을 사랑하고 싶고, 더 그분의 발자취를 뒤따라가며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