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예배

미국 교회의 부활절 예배를 참석하면서 느끼는 안타까움(?)은,
(적어도 내가 다녔던 비교적 건강한 미국 교회들의 예를 들자면)
대부분 부활절은 일종의 ‘전도 집회’이다.

부활절이라고 어쩌다 한번 교회 나오는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을 대비해서 아예 부활절 메시지는 그야말로 전도 메시지를 한다.
또 부활절 다음주부터 혹시라도 그 중 어떤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주제로 시리즈 설교를 준비한다.

지난 주일에도 아주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그 사람들을 위한 설교라는 것을 명확하게 밟히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처음부터 다음주 부터는 이런 주제로 하니, 관심가지고 더 나와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고.

교회, 종교, 기독교에대하여 가지고 있을 부정적 감정들을 언급하고, 그것들에 공감하면서 하는 설교가 인상적이었다. 당신들을 설득하려고 하는게 아니다. 다만 present를 해보려고 한다고 이야기하면서 전도 메시지를 풀어나갔다.

그 전도 메시지가 충분했을까…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어떻게든 부활절에 나온 cultural christian들을 조금 더 붙들어 보려는 노력은 참 감사했다.

예전 같으면 그리스도인으로서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누지 못하는 것이 좀 안타깝고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그건 뭐 다른 기회에 따로 하면 되지 뭐.

그렇게 부활절과 성탄 예배를 매년 하는데, 그 효과가 잘 나타나고 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그런 노력을 진심으로, 온 마음을 담아 응원했다.

가족

토요일에 동네 목사님 사모님의 장례 예배에 다녀왔다.
오랜만에 한동안 보지 못했던 많은 분들도 오셔서 볼 수 있었다.

한가지 참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 교회 교인들이 참 헌신적으로 함께 해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모님을 진심으로 그리워하고 안타까워 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 교회의 목사님, 사모님, 그리고 교인들의 특성 상, 목사님을 엄청난 어른으로 생각하고 그 목사님을 섬긴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가족의 한 사람이 당한 상에 다른 사람들이 함께 그렇게 돕고 함께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한편, 그 사모님이 참 좋은 분이었구나.. .하는 건 다시 한번 볼 수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교회는 참 좋은 교회구나 하는 것도 볼 수 있었다.
물론 그 목사님도 참 좋은 목사님이고.

그 목사님과 사모님이 함께 시간을 보낸 많은 사람들이 멀리서부터 와서 함께 울어주었고,
그중 어떤 그룹은 시끌벅적하게 그 목사님과 함께 그 그룹이 다함께 단체사진도 찍기도 했다.
뭐랄까 장례 예배와는 어찌보면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보였지만,
오히려 그 모습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나도 손수건을 가지고 가서 혼자 앉아서 울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부활절을 맞이하는 주말,
다른 소망을 마음에 가지게 되기도 했다.

부활절

“죽음을 삼키고서, 승리를 얻었다.”
“죽음아,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감사를 드립니다. 

(고린도전서 15:54,55,57)

Christ is Risen, He is Risen indeed!

고난주간 묵상 – Evil

악(Evil)의 존재에 대해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할 만큼 잘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naive한 생각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사람들 안에 있는 악 – 특히 악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냥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발견하는, 그리고 내게서 발견하는 악은 너무나도 명백하다.

그리고 또 그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악,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속에 존재하는 여러가지 형태의 악도 분명한듯 하다.

그런 여러가지 악에 사람은, 적어도 나는 너무나도 아무런 힘이 없다.
나는 인간이, 인류가 그 악에 붙들려 있(었)다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 악에 대한 승리가 이루어졌다.

십자가에서 모든 악이 나름대로 최고로 힘을 모아서 모든 공격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그 모든 악의 공격을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다 받아내셨다.
그 모든 악에게 처절하게 살해당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그 악에대한 승리를 이루셨다.


응답받지 못한 기도

응답받지 못한 기도는 없다고 배웠다.
No 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도 응답이라고.

그런데,
그건 아닌것 같다.
어떤 기도는 응답받지 못한 것이다.
요청하고 기도했는데도 하나님께서 그것에 응답하지 않으신 것이다.

왜 그러시는지는 잘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는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만 하는 그런 세상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다.

응답받지 못한 기도 끝에 울고 있는 사람에게 그렇다면 할 수 있는건…
사실 거의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그저 그와 함께 우는 것 외에는.

말은 참 값싸다

말이나 글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무게가 있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 친구의 아픔 등은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다.

글도, 말도, 심지어는 나 같은 별것 없는 사람의 기도도,
그냥 다 너무 값싸다.

그러니 말이나 글로 무어라 표현하지 않고,
그저 나도 침묵하며 기도한다.

그냥 우는 사람과 함께 멀리서 울기로 한다.

보고싶은 드라마

나는 TV 드라마, netflix 드라마 등을 거의 보지 않는다.
주로 내가 TV 드라마를 보는건 비행기를 탈때다. 열몇시간 좁은 공간을 견디기 위해 시리즈 드라마를 보기도 한다. 요즘은 항공사에서도 드라마 시리즈의 꽤 많은 것을 올려놓기도 한다.

그중, 언젠가 한번은 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기회가 없기도하고… 또 그걸 보려면 돈을 내고 봐야해서 보지 못한 드라마 시리즈가 있다.

The Newsroom이라는 드라마이다.

다음의 장면은 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장면인듯 하다.

이걸 보고는 이 드라마를 정말 보고싶다고 생각한지…. 한 10년 되었다. ^^
그러니 생각만 하고 보지 않았다는 이야기인데, 지난주에 다음의 clip을 또 보게 되었다.

이 장면을 보고서는,
진짜 언젠가 한번은 이 드라마 시리즈를 보고 싶어졌다!
정말 멋지다.

어머니의 손편지

내가 15살에 처음으로 집을 떠나 기숙사에 살게 되었을때 어머니는 내게 거의 매주 손으로 편지를 써서 주셨다.

어린 아들이 떨어져 사는 것이 걱정이 되셨을 수도 있을 거고, 다른 환경 속에서 힘들어 할까봐 격려하고 싶으실수도 있었겠다 싶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사실 그 편지 내용이 모두 기억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옛날 ‘편지지’라고 불리는 종이에 볼펜으로 써서 주신 그 글씨는 기억하고 있다.

그 편지들을 좀 잘 모아두었더라면 좋았으련만, 지금은 그 편지들을 내가 어떻게 했었는지 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어머니에게 손편지를 써본적이 있었던가?

그리고,
나는 내 딸에게 손편지를 써준적이 있었던가?

왜 갑자기 어머니의 편지가 기억났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아래의 그림과 같은 편지지가 갑자기 생각이 났고, 그렇게 어머니의 편지들이 생각이 났다.

사랑은 그 모든 detail이 비워지더라도 중요한것은 남게되는 신비를 가진 것 같다.

어떤 성공의 눈물은 아름답지 않다

1.
한 연예인이 엄청 뜨고 싶었는데, 그렇게 되지 못했다.
그런데 어쩌다가 좋은 기회가 생겨서 연예인으로서는 늦은 나이에 대박을 터뜨리게 되었고, 많은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그 인터뷰를 할때 당연히 성공하지 못했던 어린시절 그 과정을 어떻게 견디어었느냐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고, 그럴때마다 그 연예인은 울먹거리며 그때부터 계속 꿈을 잃지 않았고 결국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청중들은 박수를 쳤고, 그 연예인은 꿈을 잃지 않고 꾸준히 노력해서 꿈을 이룬 사람으로 각종 기사에 나오게 되었다.


2.
이런류의 이야기들은 여기저기에서 꽤 많이 본다.
그런데,
사실 그런 이야기는 그렇게 아름답지 않다.

잘은 모르지만, 아마도 어린 시절을 꿈을 계속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성공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러니, 그 뜨게된 연예인이 흘리는 성공의 눈물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절망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꿈을 잃지 말고 노력해서 성공한 사람들의 눈물은 그렇게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는다.

3.
생각해보면 사람을 성숙시키는 눈물은 성공의 눈물이 아니다.
그것은 좌절과 절망 속에서 두려움에 흘렸던 눈물이다.

나는…
신앙인들이 그런 눈물의 이야기를 더 많이 하면 좋겠다.

이 사순절에 조금 더 곱씹어서 해볼만한 생각이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

한때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으라는 이야기가 교회에서 많이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그 내용은 조상의 죄나 행동이 대를 이어서 불행한 영향력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회개하고 예수의 이름을 선포하고 그것과 결별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그 내용 전반에 당연히 동의하지 않는다.
가계에 흐르는 어떤 ‘영적인’ 저주가 있다고 당연히 믿지 않고,
그것에 대해 예수의 이름으로 무슨 선포를 한다고 그게 단절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건 기독교 믿음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주술적 믿음인것 같다.

그러나,
어떤 가정이든 그 가정이 가지는 한계와 단점이 있기 마련이다.
가령 어떤 가정은 지나치게 성공과 출세를 중요하게 생각해왔을 수 있다.
늘 자기의 몇대할아버지가 높은 벼슬을 지냈고, 누가 어디 장관을 했고, 어떤 사람이 대기업 사장을 했다는 식의 내러티브가 넘쳐나고, 각 개인도 그렇게 출세를 해서 가문을 영광스럽게 해야한다는 데까지 이야기가 나아가기도 한다.

또 어떤 가정은 지나치게 돈에 집착할 수 있다.
어려서부터 돈을 버는 것에 대한 가르침에 집중하고, 사람을 판단하는 가치기준이 그 사람이 얼마나 돈을 가졌는가 하는 것이고, 돈을 벌기위해 다른 integrity를 희생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가정의 분위기가 있을 것이다.

내가 자라온 가정 환경은, 그래도 비교적 건강한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나는 그것에 대해 내 부모님께 감사하고 있다. 그렇지만 당연히 어떤 가정도 완벽하지 않고, 내가 자라온 환경 속에서도 그런 한계가 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내 가정 환경에서는 그것이 ‘공부 잘하는 것’이었다.
내 부모님이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 하셨고,
우리 삼남매가 다 그래도 공부를 꽤 잘하는 편이었고,
결국 그렇게 공부하는 것으로 내 두 동생은 먹고 살고 있다. 나도 공부를 꽤 열심히 오래 많이 했던 편이고.

공부를 잘하는 것 자체가 악은 아니지만,
그것이 다른 모든 가치를 희생시킬만한 것은 아니고,
게다가 모든 사람을 그 사람이 얼마나 공부를 잘했느냐로 평가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아마 나도 우리 아이를 키우면서 그렇게 공부 잘하는 것에 대한 강조를 많이 하지 않았나 싶고, 돌이켜보면 우리 민우에게 많이 미안하다.
공부를 잘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면서 가르쳐주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우리 민우가 더 나이가 들면서는 점점 나의 그런 그늘에서부터 자유로워지게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