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rd Bless You

주님께서 당신들에게 복을 주시고, 당신들을 지켜 주시며,
주님께서 당신들을 밝은 얼굴로 대하시고, 당신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님께서 당신들을 고이 보시어서, 당신들에게 평화를 주시기를 빕니다.

The Lord bless you and keep you;
the Lord make his face to shine upon you and be gracious to you;
the Lord lift up his countenance upon you and give you peace.

민수기 6:24-26

챔피언

챔피언이라는 단어는, 보통 어떤 경기나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을 칭한다.
그러나 원래 챔피언의 기원은 당사자 대신 싸워주는 전사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을 대신해서 그 사람을 대표해서 싸우는 사람인것.

그래서 영어에서는 여전히 그런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어떤 가치나 명예등을 대표해서 지키는 사람을 챔피언이라고 한다.
또 챔피언을 동사로 쓰기도 하는데, 이때도 어떤 가치등을 지키고 고양한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그런의미에서 보면,
한국사람의 입장에서 한국의 국가대표 선수들은 챔피언인 셈이다. 한국을 대표해서 대신 싸우는 사람인것이다.
또 어떤 경우에는 어떤 연구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루고 있는 사람은 그 분야의 챔피언이다. 그 연구분야의 가치를 높이고 사람들에게 알리는 역할을 하게되기 때문이다.

예전에 차범근이 독일에서 활약하던 시절,
파독광부로 독일에 가게된 사람들에게 차범근은 챔피언이었다.
차범근이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며 그 외국생활의 서러움을 겪던 사람들은 큰 위로를 얻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박지성, 박찬호, 류현진에게 열광했고, 손흥민을 응원해왔다.

최근 손흥민에 대한 뉴스가 나왔고, 관심있게 보다보니 내 youtube feed에 손흥민 관련된 영상들이 엄청 많이 뜬다. 손흥민을 칭찬하고 응원하는 것들이 압도적이다.

내가 살아오면서,
내 삶의 영역에서… 내가 챔피언으로 삼아왔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은 존경하고 내가 그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저 그 사람들이 잘되는 것이 내게 희망이 되었고 그분들을 응원했던.

내가 그렇게 챔피언으로 삼고 있던 분들중 어떤 분들은 내가 직접 그분들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거나 심지어는 가르침을 받을 기회가 있기도 했다.

그래서 였을까…
나는 꽤 오랜시간동안 내가 사랑하고 헌신해서 살아가는 가치들 안에서,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챔피언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냥 내가 어떤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소망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내가 그런 챔피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제발 아무도 나를 그런 챔피언으로 여기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내가 챔피언이 될만큼, 내가 그들이 따르는 가치와 희망을 대표할만큼 잘 서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태어나길 큰아들로 태어난걸….

내가 삼형제중 첫째이긴 하지만, 그걸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예수님께서 탕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을때의 상황은 이렇다.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는데,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비판했다.
그러자 잃은 양의 비유, 잃어버린 동전 비유, 잃어버린 아들 비유… 세가지를 말씀하신 것으로 나와 있다. (누가복음 15장)

그런데, 이때 예수님께서는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3절)

그러니 이 이야기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인 것이다.

그렇다면…
탕자의 비유에서 큰 아들은 바로 이 비유를 이야기하는 대상인 것이고,
돌아온 작은 아들보다는 큰 아들에 대해 더 중점을 두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그 큰아들같기 때문에 더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그냥 규칙 잘 기키고, 시키는 일 잘 하고, 공부 잘하고, 성실하고…
나는 그냥 딱 큰 아들이다.
게다가 삐딱한 작은 아들을 비판하는 모습까지도 매우 닮았다.
나는 규칙을 잘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매우 쉽게 비판한다.
아니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 자꾸 되뇌이면서 노력하지 않으면 그냥 자연스럽게 비판하고 있다….

내가 첫째로 태어난것과 무관하게,
나는 그냥 태어나기를 탕자의 비유의 첫째 아들과 같은 성품으로 태어났다.

그러니…
은혜를 이해하는게 정말 내겐 어렵다.
조금만 내가 집중하지 않으면 나는 전혀 은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살아간다.
내게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너무 쉽게 잊고 한다.

아니, 태어나길 이렇게 태어난걸 어쩌라고… ㅠㅠ

하나님의 열심

지난 금요일,
반나절 휴가를 내고 ‘피정’을 했다.

어디 가거나 그런건 아니고, 그냥 집에서 책을 읽었다.
거의 30년전에 읽은 책인데, 박영선 목사님의 ‘하나님의 열심’을 금요일부터 주말을 지나며 거의 다 읽었다.

최근 교회에서 듣고 있는 설교들,
내가 말씀 묵상을 하면서 생각하고 있는 것들,
요즘 공부하고 있는 요한복음,
그리고 이번에 읽은 하나님의 열심까지.

게다가 내가 여기 자세히 쓰고 있지는 않지만,
내 삶에서 하고 있는 몇가지 경험들과 함께…
어쩌면 한 5~15년에 한번씩 오는 내 신앙의 방향바꾸기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있다.

아마 조금더 생각을 가다듬으면,
여기에서도 정리를 조금 해 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전반적으로 나는,
거의 30년전 내 신앙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 같다.

Abundance Mindset

내가 거의 매일 듣는 podcast / youtube video가 있다.
John Ortberg가 매일 10분정도 되는 길이의 짧은 video를 올리는 Become New 라는 채널이다.

주로 spiritual formation에 대한 내용을 올리고 있는데,
어제 들은 내용에 나는 거의 충격에 가까운 자극을 받았다.

가난한 어느 나라의 작은 마을에 사는 어떤 소년이 ‘십일조’에 대해서 배웠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 아이가 언젠가 하루는 물고기 한마리를 가지고 와서 이게 십일조라고 이야기했다고.
그래서 목사님이 물었다. 그래, 그럼 나머지 아홉마리는 어디있니?
그러니 그 아이가 대답했다. 아직 강 속에서 헤엄치고 있어요.

Ortberg목사님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사는 마음 자세를 이야기했다.

아…
정말 지금 내게 꼭 필요한 말씀

여기 그 video

아, 스가랴…

나는 말씀묵상 순서를 매일 성경을 따라서 하는데,
다만 매일성경을 매일 보면서 하지는 않는다.
매일성경의 본문이 어디인지를 본 후에 혼자 성경을 읽어나가는데…
어제까지 분명 스바냐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다시 보니 스가랴다!

아, 민망…
어쩐지… 본문이 좀 이상한데서 끊어진다 했다. ㅠㅠ

대신 괜히 흥분해서, 스바냐서가 짧기도 하고,
스바냐서 전체를 어제까지 한 4~5번 반복해서 읽었던 것 같다.
그리곤 오늘 다시 스가랴 시작… -.-;

매일성경

요한계시록 다음에 스바냐를 본문으로 한 매일성경의 탁월한 선택에 박수를 보낸다.
이렇게 읽다보니, 요한계시록과 스바냐를 쌍으로 읽으면 아주 좋은 것 같다.

적어도 내겐 매우 그렇게 읽힌다.

하나님 나라는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다.
그런데 사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나라를 그릴때, 내가 살기 좋은 나라, 내가 편한 나라, 내가 즐거운 나라를 머리에 떠올린다.

그런 시각을 깨는데는 스바냐같은 본문이 딱이다!

피정

Retreat이라고 하는 말을 한국 개신교에서는 수양회라고 번역하곤 한다.
그런데 retreat의 문자적 번역은 후퇴다.
일상으로부터 물러서는 것이다.

내겐 휴식이나 휴가나 여행이 필요하지는 않다.
그러나 내겐 피정(retreat)이 필요한 것 같다.

사실 긴 시간 피정을 위한 시간을 확보하는 것은 그리 쉽지는 않다.
그렇지만 나는 내 시간 관리를 스스로 할 수 있는 여유가 비교적
그러니, 어떻게든 묵상과 기도에 더 집중하는 시간을 내는 것은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조만간 어떻게든 한 반나절이라도 시간을 내어볼 생각이다.
내 영혼이 말라죽어가는 듯 하다.

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은 거대한 판타지 서사를 읽는 것과 같다.

고난 당하는 하나님의 백성,
그 백성을 괴롭히는 악,
결국 악을 물리치고 세상의 그분의 아름다운 통치를 이루시는 하나님.

그러면서 드는 생각.

요엘서를 보면, 주의 날 (The day of the LORD)에 메뚜기떼가 온다.
주의 날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자신들의 억울함이 해결되고 자신을 괴롭히는 악한 이방민족들이 심판받는 날이다.
그런데 요엘서에서는 그 메뚜기떼가 이스라엘 땅을 치신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기습공격이었을 것.

예수님 당시에도 역시 히브리민족중 일부(혹은 다수)는 메시아가 와서 회복을 선언하실때 자신들의 민족적 주권이 회복되는 것을 바라셨고 이스라엘의 회복이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예수님께서는 그 기대를 깨시며 그것보다 더 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 역시…
그때만 되면 우리가 다 구원받아 천국가고 그때부터는 고생끝… 뭐 그렇게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너희의 그 기대가 잘못되었다.
자기최면과 같은 자기 확신을 믿음이라고 착각하는 너희들에게 끝없는 파라다이스를 제공해주는 것이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어쩌면 너희들은 그 나라가 올때 정말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그렇게 우리에게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나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큰 소망의 책이지만, 그러나 역시 겸손하게 읽어야 하는 책.

부상자가 속출하는 전투

어떤 느낌이냐 하면….
힘겹게 전투를 하고 있는데,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꾸 여기 저기서 큰 부상을 당한다.

바로 옆에서, 뒤에서, 앞에서,
포탄에 맞아, 총에 맞아 쓰러져서 신음하고 있다.

전투가 힘들지 않았던 적은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부상자가 속출하는 전투는… 정말 힘들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만…
여기서 하나님을 찬양하기는 참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