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 전문가 흉내

지난 주말에,

한 친구가, 애플과 삼성 중 어느 회사에 투자를 하는 것이 더 좋겠느냐는 질문을 했다.

뭐 나는 주식투자 이런거랑은 거리도 멀고… (ㅎㅎ)

해서 그냥 내가 알고 있는 대로 기술적인 관점에서 몇가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사실 이건 좀 민망한 사실(?)인데, 내가 박사과정때 소위 ‘부전공’을 business school에 가서 했다. 그래서 finance, investment 이런쪽 과목 몇개랑, technical innovation 뭐 그런 쪽 과목 몇개를 sloan school에서 들어애 했었다.) 


1. 

iPhone 6가 잘 팔리긴 하지만, 그건 안드로이드를 쓰던 사람이 애플로 넘어와서 그런거라기 보다는 오래된 iPhone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한꺼번에 upgrade를 해서 그런 것 같아 보인다.

내가 그런 부류의 분석 article들을 몇개 읽은 것이 있었는데, 당장 찾아보니 다음 것 하나 찾을 수 있었다.

http://www.cnet.com/news/only-5-percent-of-android-users-will-switch-to-iphone-6-says-survey/

사실 iOS와 Android 사이에는 이미 꽤 견고한 진영이 형성된 것 같아 보인다. 그리고 사람들이 웬만해선 서로 넘어가지 않는 것 같다.

사실 미국에서 살다보면, 4-5년된 iPhone 4을 계속 쓰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한국처럼 2년후에는 무조건 바꿔야 하는 것 같이 인식되지 않는다. 적어도 많은 사람들에게는…

2. 

그런의미에서, 삼성의 경쟁상대는 애플이라기보다는 레노보, 샤오미, 화웨이, LG 등등이다.

삼성이 최근 고전하는 것은 애플이 잘나가서가 아니라, 중국 회사들이 치고 올라왔기 때문이다.

3.

애플은 계속 premium brand로 남을 것 같다.

적어도 내가 경험한 대로라면 그렇다. ^^

애플에서는, 전체 소비자의 5%가 발견해 낼 수 있는 작은 흠결(?) 하나를 잡기 위해서, 엄청난 resource를 사용한다. 사용하는 부품이나 재료도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말도 안되게 비싼걸 쓰기도 한다.

따라서 완성도도 높고, 내구성도 좋지만, 가격은 비싸다.

high margin을 유지하는 premium brand로 계속 갈거다.

그런 의미애서, 애플이 점유율 50%를 달성하기 위해서 어떤 작전을 편다던가 하는 것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게 하는 순간 premium brand라는 자리를 내어놓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iPhone 5c로 그런 일을 좀 해보려고 했는데, 사실 실패였지…)

4.

그렇다면… 핸드폰은 대충 그렇게 진영이 형성되어 있고, 

애플은 애플 대로, 안드로이드는 안드로이드 대로 가는데, 다만 안드로이드 내에서 치열한 경쟁이 이루어지는 구조인 것이다.

삼성은 과연 레노보, 화웨이, 샤오미 등등의 도전을 이겨낼 수 있을까? 

그건 사실 아직은 잘 모른다. 좀 더 두고봐야…

5.

핸드폰은 그렇다 치고,

그럼 그런 회사들이 경쟁하는 다음의 battle field는 어디일까?

한때 tablet이라고 생각했는데… 뭐 별로 그런것 같지 않다. (enterprise tablet으로 가면 좀 치열해지려나… apple하고 ibm하고 손잡고 하는 것 같은…)

어떤 사람들은 wearable 이라고 이야기를 하기도 하지만…

내가 보기에 wearable이 제대로 작동하고 팔리려면, 결국 internet of things의 일부로 편입되어야 한다.

겨우 시계랑 전화 두개만 연결하는 것으로는 big hit를 기대하기 어렵다.

가령, 시계로 전화도 걸고, 필요하면 self-driving car도 parking lot에서 불러내고 (최근 BMW가 CES에 그런 거 하나 보인 것으로 아는데..), 집 security도 control 하고 (집에 열쇠 없이 들어가는거지..), 등등… 뭐 그런게 종합적으로 되면 훨씬 더 모양새가 잡히는 것 같다.

(그리고 당연한 거지만 wearable이 반드시 시계일 필요는 없다. ㅎㅎ)

google이 NEST도 사고….. 뭐 꽤 적극적으로 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내가 보기에 internet of things의 처음 흐름은 iOS쪽에서 많이 나올 것 같다.

사실 Home Depot 같은데 가서 전화로 집을 잠그는 security system같은걸 보더라도, iOS는 지원되는데 Android는 지원되지 않는 것들도 있다.  가령 KEVO 같은 
http://www.kwikset.com/Kevo/Default.aspx

그리고 apple에서 apple TV (그냥 스트리밍 디바이스가 아니고, 진짜 TV)를 내놓으면서 좀더 inter-connectivity를 높인다면 그런 trend를 더 주도할 가능성도 있다. 

사실 TV가 internet of things의 hub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그렇지만 apple에서 TV를 낸다 하더라도, 역시 high-end의 premium product일 것이다.

그래서 internet of things가 좀더 보편화 되면서는 Android가 iOS를 catch up 하는 형식이 될 것 같다.

6.

그런데 문제는 이 internet of things는, 

그냥 cell phone만 열심히 만들어서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일종의 eco-system을 만드는데 contribute 하거나 lead해야 하는데…

나는 중국의 회사들이 그걸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레노보는 약간 예외 – 그건 내가 다니는 회사여서가 아니라… 사실 레노보는 중국회사라고 보기에는 너무 international 하다. IBM의 legacy도 가지고 있고, 최근에는 motorola도 사고……  샤오미나 화웨이와는 달리… 양질의 computer를 만드는 회사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internet of things trend로 넘어가면, 삼성이나 심지어는 LG가 중국 회사의 추격을 조금 더 뿌리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다.

삼성의 높은 분이 최근 internet of things가 중요하다는 얘기를 했다고… 뭐 당연히 그분들은 그런 쪽으로 drive 하려고 할거다.

나는,

삼성이나 LG 같은 회사가 apple이나 google 같이 정말 innovative하지는 않지만,

여러가지 기본 역량에서 중국에서 복제폰 만들어 파는 회사들보다는 더 낫다고 생각한다.

7.

그래서 결론은,

순전히 이런 기술적인 차원에서 보면,

여러가지 변수가 있긴 하지만…

단기적으로는 삼성보다는 애플이 좀 더 치고 나갈 가능성이 있고,

그렇지만 삼성의 중장기 positioning 아주 나쁘지만은 않다…

뭐 그렇게 정리해볼 수 있겠다.

뭐 이런 얘기를 그 친구에게 해 주었다.

이상 어설픈 전문가 코스프레 끝 ㅎㅎ

교회에서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어요….

지난 금요일에,
교회의 한 자매가 나누어 주었던 말이 계속 머리 속에 남아서 맴돌고 있다.

예전 교회에 다닐때,
교회가 답답해서 숨이 막혀 견딜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모든 내용을 내가 다 알 수는 없지만,
지나치게 종교적이고 교조적인 모습과 환경과 분위기를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나 같은 사람은,
대단히 종교적인 사람이어서,
사실 살아있는 신앙보다는 종교를 훨씬 더 편하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종교는 그저 반복되는 행위를 반복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것에 관심을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해진 규칙을 잘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라고 define 되어 있는 것이 사실 훨씬 편하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나는 생명력있는 신앙으로부터 자꾸만 drift away 해서 종교적 생활로 빠져버리는 잘못을 너무 자주 범하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예수님 잘 믿는게 체질은 아닌 듯 하다. ^^

그렇지만,
금요일의 그 자매와 같이,
딱딱한 종교의 억압이 불편한 사람의 경우에는,
적어도 나 같은 사람이 다다르기 대단히 어려운 하나님과의 관계의 친밀함을 누릴 가능성이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어떤 공동체의 생명력을 가늠하는 잣대 가운데 하나는,
종교적 억압과 폭력을 피해온 사람들이 얼마나 자유롭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느냐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죄악된 본성과 싸움 vs. 성령님의 작은 음성에 귀 기울임

때로는,
내가 매우 건강한 동기를 가지고 꼭 하고 싶은 일 조차도 하나님께서 막으시는 경우가 있다.

상황이 잘 진행되지 않아서 막히는 경우도 물론 있지만,
때로는 그야말로 성령님께서 gentle nudge를 해가며 그것을 막으시는 경우도 있다.

상황이 막히는 경우가 아니라,
성령님께서 마음의 이끌림으로 막으시는 경우,
내가 그걸 그냥 무대뽀로 진행시키면, 물론, 일이 진행이 되어버린다.
하나님께서 내 무대뽀 고집에 양보를 해주시는 것이다.

무엇을 꼭 해야겠다고 마음도 먹었고, 그게 옳다고 생각도 되는데,
막상 계속 마음 속에서 질질 끌면서 나로 하여금 그렇게 가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있을 때…

정말 대부분의 경우,
나는 그것을 내 ‘악한 게으름’이라고 생각하고,
그 ‘질질끄는’ 성향과 싸우려고 달려들었다.

그런데,
혹시…
내가 그렇게 하는 와중에,
성령님께서 ‘gentle’하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 방법을 잃어버리게 되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한동안은,
내 안에서 조용히 내게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말씀을 열심히 들으려고 노력도 하고,
그것을 따르는 것을 참 즐기기도 했었는데…

문득,
그렇게 했던 것이 언제였던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내 마음의 상태, 내 감정의 이끌림, 내 선호 등등을 거의 신뢰하지 않는다.
내가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sinful nature가 대단히 tenacious 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사실 내가 강한 선호를 가지게 될때, 일단 그 선호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그런 성향과 싸우려는 시도를 더 많이 한다.

그러나,
그러는 와중에 성령님의 작은 음성을 듣는 일을 함께 잊고 산것은 아닌가…

일을 덜하기

새해에 내가 결심한것 가운데 하나는,

일을 덜하기 이다. (음…. 가능할까? ㅎㅎ)

내가 지금의 나를 assess 해보면 이렇다.
내가 일을 많이 하는 가장 큰 이유는 …. 하고 있는 일을 잘하기 위해서이다.

뭐 열심히 일을 잘하는 것은 중요한데…

그런데 일을 정말 많이 잘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일을 잘하려고 노력하고 있는가?

성실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순종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뭐 그런 이야기를 해볼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그런 이유로 열심히 일하는 것이 일정부분 사실이기도 하지만…

나를 drive 하는 아주 큰 것 가운데 하나는…

그렇게 해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사람들이 이야… 쟤 대단하다… 뭐 그런 얘기를 하도록 만들고 싶어하는 마음이다.

소위 ‘갑’의 위치에 있다보니…

‘갑질’을 하도록 요구받는 일이 정말 많은데…

나는, 적어도 내가 관장하고 있는 영역에서는, 함께 일하는 회사들과 사람들이 ‘페어’한 대접/취급을 받도록 노력하고 있다.  때로는 우리 manager의 뜻을 거스르면서…

그런데 그렇게 하는 동인 가운데 매우 큰 부분은, 그렇게 해서 내가 그 함께 일하는 다른 회사 사람들로부터 ‘저사람 괜찮다’라는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나 스스로…

그래도 내가 괜찮은 사람이야…

이렇게 나를 칭찬해줄 수 있게 되고 싶은 거다.

지난 연말에 좀 쉬면서,

도대체 내가 왜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을 반복해서 하다가, 결국 나는 이런 생각을 정리하게 되었다.

내가 지금 열심히 일하는 동기는,

그렇게 건강하지 않다!

그렇다고 당장 산더미 같은 일을 내팽겨치고 날라리가 될 수는 없는 마당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위해 필요이상(?)의 일을 하는 것은 좀 줄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래서,

출근 시간도 조금 늦추고, 가능하면 퇴근 시간을 좀 일찍 하려고 노력중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남은 시간과 에너지를 사랑하는데 쓰고,

나 역시도 내게 남아 있는 ‘people pleaser’의 독소를 빼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현재까지는 그리 성공적이지는 못하다. -.-;

긴~ 미팅

지난 이틀동안, 회사에서 아주 긴~ 미팅을 했다.

현재 하고 있는 project의 여러 document를 함께 모으는 작업이었는데,

미국 서부 출근시간부터, 중국 베이징의 퇴근시간까지 이어지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긴 미팅이 이틀 연속 있었다.

conference call line을 열어놓고, computer 화면을 함께 보면서, 미팅을 했다.

다행히도, 나는 저녁 7~8시 정도에는 퇴근을 할 수 있었지만, 

집에 온 이후에도 우리 시간으로 자정 정도까지는 계속 이메일이 오갔다.

뭐 이런 하루를 보내는 것이 어제 오늘만의 일은 아니므로… 뭐 그러려니… 했는데.

어제 저녁쯤 되니, 다들 피곤해하기도 하고… 지치기도 했다.

그때 우리 그룹의 한 사람이 다음의 video를 보여주어서 함께 크게 웃었다. ^^

휴가와 출장의 차이

출장을 가면,

뭐 그래도 아주 싸구려 호텔에는 잘 묵지 않는다.

대충 힐튼, 웨스틴, 하야트 수준에 묵게 된다. 별네개 정도.

그리고,

식사도 시간이 부족해서 호텔에서 먹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한끼에 40-50불짜리 저녁을 먹는 일도 허다하다. 

(소위 ‘호텔부페’를 혼자 가서 먹는…)

뭐 식사라기 보다는 그저 정신없이 입에 쳐 넣고는 나와서 일을 하는… 그런…

그렇게 출장을 가면,

정신적 여유가 없어서 밤 늦게까지 일만하다가 오게 되고,

주변의 경치라던가 뭐 그런건 아예 볼 생각도 못할 때가 많다.

이번 연초에,

짧게 시간을 내어서 집에서 약간 떨어진 캘리포니아 해안의 작은 마을에 가서 쉬다 왔다.

우리 세 여인 (아내, 딸, 그리고 하이디까지.. ㅎㅎ)과 함께 정말 쉬다 왔다.

이렇게 가 보니,

드디어 경치가 눈에 들어왔다.

그저 오가는 길에 사먹은 subway 샌드위치의 맛이 느껴졌다.

그저 저렴한 가격의 pet-friendly inn에서 자면서도, 침대의 편안함이 느껴졌다.

사랑

1.
사랑을 더 잘 하는 성품의 사람은 분명히 있는 것 같다.
어떤 사람에게는 사랑이 더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흘러나온다.
그렇지만 분명, 나는 그런 사람은 아니다. -.-;

2.
젊은 사람들의 ‘알콩달콩’ 식 사랑은 참 예쁘다.
그렇지만, 사랑을 그런 ‘알콩달콩’으로 이해하고 한정하는 가벼움은 정말 참을 수 없다.
내가 그런 알콩당콩한 사람이 아니어서 그런거라고?
뭐 그런지도… 그러나, 사랑이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라는 내 주장으로부터는 후퇴할 수 없다.

3.
연민은, 대상이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하지만,
사랑은, 대상이 나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래서 사랑은 연민에 비해 더 어렵다.
나는 참 오랫동안 연민을 사랑이라고 착각했었다.
지금도 연민은 훨씬 더 잘 이해가 되고 공감이 되는데, 사랑은 잘 이해도 안되고 공감도 안된다.

4.
연민은, 대상을 나와 같은 모습으로 이끄는 행위에 가깝다면,
사랑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행위에 가깝다.
대상이 변화할것을 전제로 하는 사랑은, 기본적으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5.
사랑에는 희생이 동반되지만, 희생이 곧 사랑은 아니다.
때로 희생은, 사랑의 대치품으로, 혹은 사랑을 피하는 방법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희생과 집착은 함께 갈 수 있지만, 사랑과 집착은 함께 갈 수 없다.

6.
Contract의 기본 정신은, “I will be loyal as long as you are loyal”  이다.
Covenant의 기본 정신은, “I will be loyal even when you are not” 이다.
결혼은 Covenant일까, Contract 일까?
결혼이 완전한 covenant이라는 것에 선뜻 한표를 던지기에는 약간 주저하게 되는 측면이 있지만…
그러나 인간 세상에서 가장 covenant에 가까운 것은 부부관계가 아닐까 싶다.

7.
결혼 17주년,
아직 사랑을 배워나가고 있는 부족한 사람의 사랑에 대한 짧은 중간 요약이다.

내가 경험한 하나님은 과연 누구신건가?

하나님께 여쭙고 싶은 것이 늘 많다.
그런데, 요즘은 특별히 더 많이 여쭙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내가 경험한 하나님’이 어떤분이시냐 하는 질문이다.

음…
질문이 너무 추상적인 것 같은데…
조금 더 풀어서 쓰자면 이렇다.

태어나서 20년동안 ‘모태출석교인’으로 살았지만, 하나님과의 encounter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그후 25년동안, 하는 하나님을 아주 깊게, 진하게 만나왔다.

소위 ‘회심’의 경험을 하면서 내 모든 세상이 뒤집히는 경험을 했고,
그 후에도 때로는 점진적으로, 그러나 더 중요하게는 대단히 disruptive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나를 만나주셨다.

그런데,
내가 경험했던 그 하나님의 경험이 너무나 커서,
(그리고 어쩌면 지금도 여전히 그 경험의 과정 중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내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그렇게 내가 ‘만난’ 하나님의 모습에 근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러가지 공부도 하고, 나름대로 연구도 하면서…
그 ‘내가 만난 하나님’을 객관화하고 그 설명을 체계화하는 과정을 겪어 왔지만….
여전히, 내가 만난 하나님은, 그렇게 쉽게 설명될 수 있는 분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내 경험이, 보편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즉, 모든 사람이 내가 하나님을 경험한 것 같이 하나님을 경험하지는 않는 것 같다는 것이다.)

이것은,
뭐 소위 ‘성령체험’을 한다거나, ‘신비체험’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내가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 속에서 일종의 ‘신비체험’같은 것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대단히 부분적이다.

나의, 하나님에대한 실존적 경험…
그렇게 내가 만난 그 하나님은 과연 누구신걸까?
왜 내 encounter의 경험은,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으로 취하는 사람들에게서도, 보편적이지 않은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