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적 manipulation (2)

나 역시,
한편으로는 감정적 manipulation을 하는 리더로서,
한편으로는 감정적 manipulation을 누리는 대중의 일원으로서,
그 악순환 아래 있는 사람중 하나이다.

이러한 감정적 manipulation은 많은 악영향이 있지만,
그중 몇가지를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진정한, 성령에 의한 감동을 잃어버리게 된다.
감정적 manipulation에 의한 감정적 동요가 에너지드링크 같은 것이라면,
성령에 의한 진정한 감동은 잘 달여놓은 인삼 녹용 보약과도 같다.
보약은 급격한 몸의 변화를 가져오지 않지만, 중장기적으로 그 몸에 건강한 변화를 일으킨다.
그러나 에너지드링크에 의존해서 ‘순간화력’을 발휘하는 것에만 익숙해지고 나면,
몸 전체를 건강하게 만들어서 궁극적으로 더 튼튼한 사람이되는 것에는 점점 관심을 잃어버리게 된다.
좀더 즉각적인 효과만을 추구하게 되기 때문이다.

2. 소비주의적, 피동적 대중을 만들어 낸다.
감정적 manipulation은 결국은 service provider인 리더와, consumer인 대중 사이에 일종의 암묵적 합의가 이루어진 상태에서 이루어 진다.
그리고 이 구조는, 계속해서 대중이 리더에 의해 선동당하고 끌려가는 것을 고착시키고,
대중은 소비주의적, 피동적이 되어버린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중이 능동성을 회복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나는 이것이 지금 한국교회에서 아주 적나라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3. 사람과 사역에 대한 건강한 분별력을 잃게 된다.
감정적 manipulation에 의해 눈물을 흘리거나 흥분 하는 것을 신앙의 척도로 삼거나,
그런 감정적 manipulation을 얼마나 잘 하느냐 하는 것을 리더 평가의 기준으로 삼게 되면,
정말 하나님 안에서의 진정한 신앙을 추구하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을 건강하게 분별해내는 일이 대단히 어려워진다.

그래서 잘못된 리더들이 양산되고, (가령 감정적 manipulation에는 능하지만 신앙적 integrity가 없는)
건강하게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나고 있지 못한 사람에 대한 지혜로운 인도가 불가능해진다.

회심의 경험이 없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경계가 모호하게 되고, 그저 감정적으로 부화뇌동하는 ‘대중’만 남게 된다.

 

 

일본 출장 중에…

지금은 일본 출장 중이다.
출장을 오면, 늘 무지하게 바쁘게 지내곤 했는데,
이번에는 좀 많이 한가한 출장을 보내고 있다.
(사실 일본 내에서 이동하는 일이 많아서, 기차타는 시간이 많고… 그래서 일 자체는 더 적은 편이다.)

주일 아침,
SFO에서 일본 간사이 공항으로 가는 787 Dreamliner를 탔다.
비행기가 아주 많이 비어서, 매우 여유있게 편하게 왔다.

이 dreamliner는, 전반적으로 비행기 안이 매우 쾌적하다.
실제로 기내 기압도 살짝 더 높게 했다고 하고, 자리도 편하고, 각종 entertainment도 좋고, power로 모든 자리에 다 있으니 아주 좋았다.

월요일 오후에 간사이 공항에 도착했다.
간사이 공항은, 내가 벌써 한 10번쯤은 온것 같다.
이제는 웬만한 미국내 공항보다 간사이 공항이 더 편하다.

거기서 Haruka 기차를 타고 교토로 향했다.

교토에서는 Crowne Plaza hotel에서 묵었다.
교토에 올때마다 Crowne Plaza에서 묵고 있는데, 여기는 니조 라는 이름의 성이 바로 옆에 붙어 있다.
(아직 나는 한번도 못가봤다. -.-; 바로 길만 건너면 있는데…)

교토는, 정말 ‘전통적인’ 도시이다.
길가에도 일본 전통의상을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막 있다.
각종 유적지가 무쟈게 많다. (음… 역시… 하나도 못가봤다.)

언젠간 꼭, 그중에 몇개는 가봐야지 하고 결심만 해본다.

첫날 무지하게 일하고, 일본의 그 회사 사람들이 데려간 완전 전통 일본 음식점에 가서 완전 전통 일본 음식을 먹었다. 메뉴 이런거 완전히 다 일본어로만 되어 있고, 교토식 전통 요리라고…

수요일 저녁 까지 일하고 늦게 신칸센을 타고 토쿄로 향했다.
교토에서 토쿄는 신간센으로 두시간 반이면 온다.

토쿄에서는, 신주쿠에 있는 Hyatt에 묵었는데,
18층에 있는 방에서, 밖을 보니 후지산이 보인다!

 그리고는 아침 목요일 일찍 신주쿠 역에서 기차를 타고 니라사키라는 작은 도시로 갔다. 두시간 정도 기차를 타고 갔는데, 이 도시는 그야말로 후지산 바로 옆쪽에 있다.
그래서 그 공장에서 보니, 다시 후지산이 크게 보였다.

 

 목요일 저녁은, Intercontinental hotel, Tokyo Bay 에서 묵었다.
오늘(금요일) 아침에 이 근처에서 미팅이 있어서, 근처의 호텔을 뒤지다가 나름 싼거를 잡은게 이거였다.

정말 호텔이 장난 아니다.
이 호텔 15층에서 본 야경이 아주 예쁘다.

 

 

이제 오늘,
이곳 토쿄의 레인보우 다리라는 곳 옆에 있는 곳에서 미팅을 하고,
나리타 공항으로 향하게 된다.

어제…
사실은 시간이 좀 남았다.
생각보다 일이 일찍 끝나서 호텔 체크인을 하고 나니 5시 정도였다.
허억… 이렇게 시간이 남았는데 뭘 하나…
하다가 정말 토쿄 관광을 해볼까?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쳤다.
수 없이 출장을 왔지만, 온김에 관광을 해보겠다는 거창한(!) 생각을 한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하고 싶지가 않았다.
뭐 가서 그래도 밤 9시 정도까지 나름대로 구경도 해볼수는 있었겠으나,
에이 그거 하면 뭐해? 뭐 그런 생각만 들었다.

그래서,
그냥 가까운 앞쪽에 잠깐 나가서 한 한시간 걷다가 다시 들어왔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는 이렇게 출장을 와서,
사람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그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하는 생각들, 그 사람들의 세계관 등을 들어보는 일을 제일 많이 즐기는 것 같다.

밤 늦게까지 실험실에서 일하다가,
잠깐 쉬면서, 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아이 키우는 이야기, 장래에 대한 불안, 자기 정부에 대한 비판 뭐 그런 등등의 이야기를 들으면, 참 많이 것을 배우게 된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 블로그에서도 한번 더 써볼까 생각중인데..

이렇게 여러나라 출장을 다니면서, 여러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을 만나는 가장 큰 장점은,
그 다양한 사람들, 다양한 문화를 정말 접하면서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다는 것 같다.

사실 괜히 소위 ‘유명한 곳’에 가서,
괜히 셀카나 한번 찍고…
그런건 정말 재미도 없고, 관심도 안간다.

위에서 후지산 사진을 찍어서 올렸지만,

사실 그 후지산을 보면서 사진을 찍는 것보다 더 재미 있었던 것은,
후지산 옆 마을에 있는 공장에 가서, 그 사람들이 후지산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다.

어쩌다 출장지에서 주말을 보내야 할때,
그래서 내가 제일 많이 하는 것은, 그 지역의 작은 시장에 가서 사람들을 보는 일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것을 보는 일이다.
그리고 혹시 가능하면 그 사람들이 먹는 음식을 사먹으며 그 사람들과 말을 해보는 일이다.
(쉽지는 않다. ㅎㅎ 일본에서 괜히 어설프게 사람들에게 말을 걸면, 쓰미마센 하면서 도망가 버린다. -.-;)

출장을 다니면서,
그래도 좀 그 지역 유명한 것도 가서 좀 구경하고 하겠다고 결심을 며칠전에 했었는데…

이번에도 그거 잘 못지키는 나를 보면서,
나는 정말 그런것에 관심이 없는 거구나…
뭐 그런 생각을 했다.

이상,
별로 관광 못하는 출장을 하고 있는 변명 끝! ㅎㅎ

감정적 manipulation (1)

Christian ministry에 있어서,
감정적으로 대중을 manipulate 하는 것은 독주를 마시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리더의 입장에서는 (설교자, 찬양인도자, 기도인도자, 성경공부 리더 등등)
감정적 manipulation을 하면 쉽게 무언가 자신의 사역의 결과가 나타나는 것과 같은 착각을 갖게 된다.
그리고 점점 그런 감정적 manipulation에 집착하게 되고, 그것에 길들여진 대중은, 감정적으로 manipulate 되는 것이 진정한 종교적 체험이라고 착각을 하게 된다.

이런 cycle이 반복되면,
리더는 대중을 manipulate하고, 대중은 리더에 의해 manipulate 되는 것에 서로 익숙해지고,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어렵게 된다.

나는,
지금의 한국교회는 이런 함정에 깊이 빠져있다고 생각한다.
(아, 물론 한국교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미국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그런 경향이 더 심하다.)

적어도 현재로서는,
이 잘못된 manipulation의 악순환이 어떻게 끊어질 수 있을지… 해결의 단초가 보이질 않는다.

 

하나님께서 쓰실때만 주셔

1.
이번에 볼티모어에서는,
참 오랜만에 P 형을 만났다.
그 형의 roomate(ㅎㅎ)인, K 누나도 만날 수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싶어 아쉬웠지만,
오랜만에 만나서 이야기하는게 참 반가웠다.

말씀을 읽다가, 
한 구절에서 다가오는 깊이와 무게가 너무 커서… 그저 몇 시간씩 다음 구절로 넘어가지 못하고 그 무게에 압도당하는 경험,
기도를 하다가,
그 기도 속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임재가 대단해서,
그저 그 앞에 엎드려 한마디도 꺼낼 수 없게 되는 것과 같은 경험.

그 형과 나는 그런 경험을 꽤 많이 공유하고 있다.

P 형에게 물었다.
요즘도 그런 경험이 자주 있느냐고.

그 형이 대답했다.
하나님께서 필요 있을때만 주셔…

그 형의 말로는,

성경공부를 준비하는데 그 말씀이 학생들에게 꼭 필요한 경우와 같이…
그 깊은 하나님과의 만남의 경험이, 그 말씀을 다른이들에게 나누는데 도움이 될때만 주신다는 것이었다.

정말…. 나도 요즘 그런데…

4.
역시 볼티모어에서,
우리 동네에서 간 동생 한명이,
내가 예전에 썼던 글 하나를 감명깊게 읽었다는 얘기를 해 주었다.

나는 사실 그 글의 내용이 무었이었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 글을 찾아서 읽어 보았다.

음….
뭐 글 솜씨가 좋은 글은 분명히 아니었지만,
그 글의 내용이 살아 있었다.

그 글을 쓸 때,
하나님께서 특별히 무언가를 주셨던게 분명하다.

5.
그 후,
가만히 내가 예전에 썼던 글들을 다시 몇개 읽어 보았다.
물론 아주 아주 많이 허접한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ㅎㅎ
가끔은, 지금 내가 읽어도, 내가 썼다고 믿어지기 어려운 내용이 담긴 글이 있었다.

그 글을 썼을때,
하나님께서는 꽤 간절하게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셨던 것이었구나…

6.
한동안,
나는 정말 열심히 뛸때, 하나님께서 특별히 내게 여러가지 힘을 주시는 부류의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살았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하나님께서는 왜 나만을 위해서는 그 깊은 감동을 잘 주시지 않는 거지?
권오승이라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냥 도구로만 사용하시는 건가?

그냥,
나만을 위한 깊은 말씀 한구절,
아주 shallow 하게 이야기하는 마와다식의 구절이 아니라…
정말 그 한 구절에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담기는 그런 한 구절…
그런것을 나만을 위해서는 왜 잘 주시지 않는 거지?

예전에는 그런 경험들이 훨씬 자주 있었는데,
왜 요즘은 그런 경험이 많이 뜸한걸까?

그런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열 사람이 열 걸음을, 백 사람이 한 걸음을

지난번에 한국에 출장을 갔을때,
오랫동안 K 운동을 함께 섬겼던 친구이자 동료인 C를 만났다.
미국에 있을때, 우리는 죽도 잘 맞았고, 서로 구박도 많이 했었는데… ㅎㅎ

그런데,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자기가 K 간사를 처음 하던 시절에 내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우리는,
열 사람이 열 걸음 앞으로 전진하는 것보다는,
백 사람이 한 걸음 앞으로 전진하는 것을 더 추구한다.

백 사람이 한 걸음 가는 것은,
혼자서 열 걸음, 백 걸음 앞으로 가는 것이 불가능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열 사람이 열 걸음 가는 것은, 백 사람이 한 걸음 가는 것보다 쉽다.
한 사람이 백 걸음 앞으로 가는 것은 그것 보다 더 쉽다.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잘 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걸 듣고 보니,
내가 K 운동을 하면서는 늘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선명한 아젠다를 많이 진행시키는 것보다는,
그것으로 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한 사람이 그 방향으로 트는 것을 많이 기뻐했던 것 같다.

열 사람이 열 걸음을 가는 것은,
그냥 좀 서로 열심히 노력하면 되는데…
백 사람이 한 걸음을 가는 것은,
정말 뭔가 특별한 모멘텀이 생기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어쩌면 그 모멘텀은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일수도 있겠다.

늘,
우리가 이룰 수 없는,
정말 하나님께서 하시지 않으면 불가능 한 것에 대한 꿈을 꾸었고,
그러나 그것을 위해 몸을 던져 섬겼었다.

그렇게 되지 않는 것에 발을 동동 구르며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고,
한 사람이 변화되는 것을 보며 벅찬 감격에 휩싸였었다.

늘 잘 되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 하시지 않으면 안될 영역을 열어놓으려고 노력했고,
정말 너무나도 자주,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넘치게 채워주셨다.

지난번 간사 수양회에서,
문득 생각이 나서,
후배 몇 사람과 이 이야기를 다시 나누었다.

후배들이 새롭게 열어나가는 길에서,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들이 많이 나타나길 간절히… 정말 간절히… 바란다.

건강한 신학이 신앙을 설명할 수 없을 때

나는 매우 자주,
‘건강한 신학’을 가진 분들과 이야기를 할 때, 답답함 혹은 안타까움을 느끼곤 한다.

그분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입장에 대부분 동의하기도 하고,
그분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에도 공감하는데…
그분이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 어떤 신앙의 개념들을 나누는 단계에 가면,
더 이상 대화가 쉽지 않음을 느끼곤 한다.

그러면,
그런 분들과 할 수 있는 이야기는… 그저 신학적 공감에 대한 것 뿐이다.

그런데,
어떤 분과는, 심지어는 구체적인 신학적 입장에 모두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깊이 있는 신앙의 대화가 가능하다.
그분이 경험하고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
은혜, 죄, 하나님 나라, 사랑, 세상 등등에 대하여 정말 가슴과 가슴을 오가는 대화를 나누는 경우가 있다.

그런의미에서 나는,
신학이 신앙을 설명해 내는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정말 너무 자주…
신앙인들과, 동역자들과, 신학적 대화만을 하곤 한다….

 

가끔은… 내 설교를 듣는다.

지난 주말,
DC에 가면서 동네 동생 한명과 함께 공항에 갔다.
가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그중 하나는… “나는 내 설교를 반복해서 자주 듣는다”는 얘기였다.

음… 좀 뭐랄까… 말하기 좀 머시기 하긴 하지만,
사실 그렇다.

나는 뭐 어차피 전문 설교가가 아니므로,
어쩌다 설교나 아니면 기독교 강의 같은걸 하는 기회가 아주 많지는 않다.
일년에 그저 몇번 정도.
그리고 그중 일부는 녹음이 되어서 내가 설교를 다시 들어볼 수 있는데…

나는 내 설교/강의를 적어도 3-4번 이상 반복해서 다시 듣는다.

우선은, 내가 뭘 잘했고 뭐 못했고 하는 것을 모니터 하면서, 잘못된 것을 improve하기 위한 의도가 크지만,
때로는… 그저 그 이야기를 다시 듣고 싶어서 그렇게 한다.

100% 언제나 그런것은 아니지만
대개 설교를 준비할때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영감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내가 흔히 생각할 수 없는 것을 깨닫게 되기도 하고,
내가 기존에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어려운 개념을 쉽게 풀어낼 수 있게 되기도 한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가끔은..
도무지 내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설교나 강의에 ‘마음’이 담길 때가 있다.

그러면 대개 그 설교를 준비하면서 많이 울게 된다.
때로는 감격해서, 때로는 비장함에, 때로는 안타깝고 마음이 아파서…

그래서 가끔은,
그렇게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깨닫게 해 주셨던 그것을 다시 듣고 싶어서,
민망하지만 내 설교를 다시 듣는다.

내 설교나 강의를 듣는 사람들이 그렇게 내 마음에 가득한 그 무엇을 받게 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별로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ㅎㅎ)

적어도 나는 그 설교를 다시 들으며, 다시 한번 내 마음에 하나님의 마음을 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게 Narcissism으로 흐르면 안되는데… 싶어 뜨끔 하다가도,
하나님께서 늘 내게 말씀과 깨달음의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니므로…
그렇게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경험한 것을 다시 곱씹어 보고 싶은 것이다.

아마도 마이너리티가 될 듯…

지난 주말,
볼티모어에서 열린 K 간사 모임에 다녀왔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이 참 반가웠다.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고,
많은 생각들을 했는데…
결국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제 나는… K 간사들 전반의 생각과는 좀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이 되었구나”

아마도,
나는 K에서 마이너리티가 될 듯 하다.

참 오랫동안 내 마음과 정성과 눈물과 땀을 쏟았던 K 운동에서…
이제는 정말 이제와는 다른 role을 가져야 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한편 마음이 살짝 무거웠지만,
한편 어깨가 가벼워졌다. ^^

또 한번 출장 가야 하는데….

아무래도 조만간 또 한번 출장을 가게 될 것 같다.

원래는 일본을 거쳐, 한국, 홍콩, 심지어는 태국까지 들렸다 와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잠깐 휩싸였었으나… 

다행히도 아시아쪽 2개국, 5-6개 도시를 두주 남짓한 기간동안 찍고 오는 일정이 될 것 같다.

이번 주말에 DC쪽에 며칠 다녀와야 하고,

화요일에 돌아와서 며칠 있다가 비행기를 타야한다.

내 매니저는 토요일날 함께 떠나자고 조르고 있고, 나는 그럴 수 없다고 최소한 주말은 보내고 가야 한다고 버티고 있는 중이다. 

뭐 아마도 잘 하면 주일 아침에 출발하는 것으로 합의보게 될 것 같은데…

그중 두번은,

일본에서 밤기차를 타고 이동을 해야하는 상황인데…

한번도 가보지 못한 일본의 도시들를, 자정이 넘어서까지 움직여가며 다녀야 한다.

나는 일본말도 못하는데… -.-; (Thanks God for Google Translator!)

그나마 나는 좀 낫다.

내 매니저는, 두주동안 5개국을 다녀야 할 것 같다. 그중 나와는 두개의 도시에서 서로 만나게 된다. 

불쌍한… -.-;

작년에는 7만5천마일 정도 다니는 수준에서 선방을 했는데…

아무래도 금년에는 10만마일이 넘을지도 모르겠다는 불길한…

그래서 새해에 출장과 관련해서는 다음의 몇가지 결심을 했다.

1. 출장이 한 회사에 3일 이상 될 경우, 적어도 하루는 7시 이전에 퇴근해서 주변을 좀 둘러보겠다.

2. 최소한 두번 이상 같은 도시에 가는 경우, 그 도시에서 유명하다고 알려진 관광명소 한군데는 가보겠다.

3. 비행기를 타고 가는 동안은 정말 아주 다급한 경우가 아니면 일하지 않겠다.

4. 호텔방에 돌아와서는 일하는 시간을 2시간 이하로 제한하겠다.  혹시 시간이 남으면 호텔 앞쪽에 나가서 동네 산책을 한다거나 구경을 차라리 하겠다.(as far as it’s safe. ^^)

이것도 역시,

좀 일을 덜 열심히 하겠다는 내 결심의 일환이다.

내 경험상, 어떤 새로운 변화가 내 삶 속에서 제대로 일어나려면, 

최소한 3-4번의 new year’s resolution이 필요한 것 같다. ㅎㅎ

다시 말하면, 3-4년동안 계속 같은 new year’s resolution으로 밀어 붙여야 겨우 실제 내 삶 속에서 효과가 나타난다는 말이다.

출장과 관련한 새해 결심 역시,

새해에 바로 지키게 될 것 같지는 않지만…. ㅎㅎ

좀 더 마음이 너그러운 사람이 되기위해 약간 enforce 해야 할 것 같다.

새로운 생태계? 쉽지 않을 것 같다…

복음주의 운동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많이 이야기되는 소위 ’87년형 복음주의’.

그건, 4인방 복음주의 목회자들, 학생 선교단체, 해외 선교단체, 기독교 사회운동, 게다가 기독교 기업까지… 

그렇게 여러 body가 함께 어울어져 만들어낸, 한국의 복음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으로서 볼때,

그 시대는 정말 대단했다.

회심자는 늘어났고, 교회는 성장했고, 복음의 가치는 세상을 정복하는 것 같아 보였다.

그 복음주의의 산물로 생겨난 여러 사람들이 각종 사회운동, 통일운동 등등에 헌신하는 것도 보았고,

복음의 가치로 견고해 보이던 세상의 악한 고리를 끊어내는 성과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생태계가 시효를 다했고, 새로운 생태계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일고 있다.

나는 그 진단에는 깊이 공감하고 동의한다.

그런데,

그건 그렇게 쉽지는 않을 것 같다.

내 생각에,

87년형 복음주의 생태계와, 어쩌면 지금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생태계가 처한 상황은 대단히 다르다.

80년대에는,

소위 ‘복음적 가치’라고 여겨졌던 정의, 정직, 윤리 등등의 가치가 세상에서 환영을 받았다.

뭐랄까…. 세상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지금 우리는 정직하지 못한 세상에서 살고 있어. 나도 그 일부로 살 수 밖에 없고. 그러나 이건 아니야. 이건 잘못이야. 누가 이 고리를 좀 끊어야 하는데 말이야.

그때 등장한 한국판 신복음주의는,

사람들의 그런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결국 그 신복음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내용은, 세상에서 환영받을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복음이 맞닥드리고 있는 세상에서는…

복음이 이야기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환영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내 생각에,

지금 세상에서 가장 심하게 어그러져 있는 것은…

결국은 물신주의, 성공주의, 쾌락주의 등등이다.

그리고 복음은 그런 의미에서 그것을 극복해내는 voice를 내어야 하고, 그것을 극복해 내는 대안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데,

세상은…

물신주의, 성공주의 등을 그렇게 쉽게 포기하거나 그것에 대해 충분히 회의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만일 복음이 세상을 향해,

돈이 주인 되는 세상,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세상은 잘못된 세상이다 라고 외쳤을때,

충분히 호응을 얻을 수 없을 것 같아 보이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물신주의, 성공주의등의 폐혜가 더 드러나고,

그 상처가 더 많이 깊어지면,

결국 세상도, 세상의 대중도 그것을 뒤늦게(?) 깨달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적어도 단기적으로 그런 새로운 흐름이 생길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또한,

80년대, 정의, 정직, 윤리 등의 개념은, 사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공감하고 동의하는 개념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과연 기독교인들이, 소위 복음주의 진영에서, 물신주의, 성공주의, 자기 중심주의 등등을 그렇게 적극적으로 ‘적'(enemy)로 identify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적으로 identify할 능력이 없어 보이기까지 하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

조금더 suffering 하는 시대를 거쳐서…

세상도, 교회도, 더 성찰하고 꺠달은 후에 모멘텀이 생길 수 있을 수도 있겠으나…

적어도 최소한, 지금은 아직 그런 흐름이 크게 형성되기엔 어려운 토양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새로운 생태계를 생각한다면,

macro eco-system이 아니라, micro eco-system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적어도 지금은 말이다.

새로운 생태계를 생각할때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한편 생태계를 만드는 일도 중요하지만,

생태계가 만들어지기를 기다리는 일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결국 흐름을 만드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