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일차적 적은 하나님

Stanley Hauerwas가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 물론 정확한 wording을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내용은 기억한다.

우리의 fist enemy (첫번째 적, 일차적 적)은 하나님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물을 받으면 대개는 그 선물을 갚으려 한다. 왜냐하면 인간관계에서 선물은 결국 권력관계를 형성하기 마련이고, 그 권력관계를 공평하기 만들기위해 우리는 선물을 받으면 그것에 상응하는 것을 주려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선물이다. 은혜이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을 미워하는/싫어하는 (hate)반응을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스도인이되는 것의 핵심은,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Giving up control

하나님을 깊게 마주하며 기도하는 것에 대하여…

Control을 포기하는 것이, 하나님을 마주하는 것의 전제 조건일까?
아니면 하나님을 마주하게될때 나타나는 열매일까?

잘 알수는 없지만,
한편으로 하나님을 더 깊게 마주하기 위해서는 내 영혼을 잠잠하게 재우는 것이 중요한 것 같고,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마주하는 일이 없다면 정말 내가 내 control을 포기할 수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지금 내 기도는,
하나님을 더 깊게 만나기 위해,
내 빈손을 완전히 드러내고,
그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있는 중이다.

Contemplative Prayer

최근 계속해서 contempative prayer를 하려고노력하고 있다.
처음 contemplative prayer를 경험했던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내가 새벽기도를 다니면서 큰 소리로 방언기도를 하던 때였다.

당연히 큰소리로 방언기도를 하는 것과 contemplative prayer사이에는 너무 큰 간극이 있다고 생각이 되지만…

때로,
내 목소리가 너무 커서 다른 사람들이 기도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이 되어서,
나는 교회의 작은 지하방에 들어가서 기도할때가 있었다.

그러면 혼자서 정말 마음껏 소리를 지르며 한 30분~1시간 기도하다가…
그냥 지쳐서 가만히 앉아있게되는 때가 있었다.

그런데…
그때, 그냥 나는 가만히 앉아있는데…
뭐랄까… 내가 하나님을 마주하고 앉아있다고 해야할까…
내가 막 말을 하고 있지 않는데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느낌이랄까…
그런 것을 경험하곤 했다.

매일 그랬던 것은 아니고, 가끔, 아주 가끔 그런 경험이 있었다.

몇년 후, 나는 contemplative prayer라는 것을 처음 소개받았을때,
아… 그때 내가 새벽기도때 고래고래 소리지르다가 지쳐서 앉아있던 그 상태가 어쩌면 contemplation의 상태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했다.

뭐랄까…
나는 contemplation이라는 영적상태랄까 그런게 참 다른 사람들보다 더 어려운 것 같다.
그래서 contemplation을 통해서 더 깊이있는 기도를 해보려고 하는데 참 잘 안된다.

그런데…
요즘은 내가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도들을 그렇게 해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저 그렇게 하나님과 대면하려고 씨름하고 있는 중이다.

고통과 두려움

고통은 현재에 집중하게 하지만
두려움은 미래에 집중하게 한다.

미래는 인간에게 아직 허락되지 않은 하나님의 영역이다.

과거에 매이지도 않고, 과하게 미래에 집중하지도 않고,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 건강한 믿음이라면…

피할 수 없는 고통은 오히려 현재에 집중하게하는 disguised blessing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두려움은 내가 control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것이므로,
blessing일수는 없는 것 같다.

고통은, 그 속에서 하나님을 더 바라보며 그 고통 안에 하나님의 초청하는 것이 필요할테고,
두려움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두려움과 싸우고 두려움을 떨처버려야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믿음과 현재

믿음을 가지고 사는 데 큰 방해가 되는 것은,
자꾸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과거를 후회하거나, 과거를 그리워하거나, 과거의 어떤 영광속에 빠져사는 등의 모습은,
현재 정말 바라보아야 할 것을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또 믿음을 가지고 사는데 큰 방해가 되는 것은,
자꾸 미래에 생각이 머무는 것이다.
현재가 그거 미래로 가는 과정이자 원인이라고만 생각해서,
미래의 걱정, 미래에 대한 기대, 미래의 소망등만을 생각해서 현재를 도외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니…어떤 의미에서 믿음을 가지고 사는 아주 중요한 모습은,
내가 과거의 그늘과 영광속에 살지도 않고,
내가 미래의 걱정이나 기대속에 살지도 않고,
지금 현재를 사는 것이 아닐까 싶다.

흔히 mindfulness라고 하는 것이 그런 믿음의 요소일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