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정교, 신비주의, 그리고…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다 쓰려면 너무 길지만…
최근 몇달동안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
그리고 나름대로 그 초월적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어떤 것일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

그러던중 동방정교 혹은 동방교회라고 불리는 기독교 종파에 대한 관심을 조금 더 갖게 되었다.
동방정교는 서방교회와는 꽤 다른 모습의 기독교인 것 같다.
그럼에도 동방정교의 주장에 따르면 그 사람들은 초대교회의 원래 모습과 전통을 잘 보존 유지하려고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고, 그래서 초대교회 신앙의 원형을 더 많이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동방정교는 서방교회보다 훨씬 더 신비에 대한 강조가 많은 것 같다.
예수님에 대한 이해도 분석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신비적인 것이 더 많은 것 같다.
실제 그분들의 예배등의 형식에도 그 신비를 많이 담아내려고 노력하는 것 같고,
실제로 ‘exorcism’이 꽤 더 일상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적어도 동방교회의 어떤 분들에게는)
그런데 그게 막 과격하고 전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정말 ‘신비로운’ 모습으로 계속 남아있다.

그러면서 요즘 많이 생각해본다.
그 동방교회의 신앙전통에 내게 조금 더 익숙하다면…
지금 내가하고 있는 생각과 기도는 어떻게 다를까.
나는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다르게 해석하고 생각하게 될까.

뭐 나름대로의 생각이 조금 있긴 한데…
그거 그냥 여기 막 썼다간 살짝 이단같다고 느끼는 분들이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나도 그 생각에 자신이 없어,
그냥 지금은 계속 생각을 하고 있다는 수준에서 disclose만 해본다.

귀하신 주여 날 붙드사

살면서 주와 더 가까워지는 것이 가능한걸까,
가능하다면 어느정도 가능한걸까.

만일 주님과 더 가까워지는 것이 가능하다면,
사람들끼리도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주님과 가깝다고 이야기도 할 수 있다는 의미일까.

나는…
날마다 주님께 더 가까이 가고 있는 것일까.

(1)귀하신 주여 날 붙드사 
주께로 날마다 더 가까이
저 하늘나라 나 올라가
구주의 품안에 늘 안기어
영생의 복받기 원합니다

(2)붕헌할 물건 나 없어도
날마다 주께로 더 가까이
내 죄를 주께 다 고하니
주님의 보혈로 날 씻으사
눈보다 더 희게 하옵소서

(3)간약한 마귀 날 꾀어도
주예수 앞으로 더 가까이 
이 세상 속한 그 허영심
또 추한 생각을 다 버리니
정결한 맘 내게 늘 주소서

(4)이 세상 내가 살동안에
주께로 날마다 더 가까이 
저 뵈는 천국 나 들어가
한없는 볼락을 다 얻도록
풍성한 은혜를 주옵소서 

타고난 천재가 성공하는가?

정말 천재란 있다.
나는 그런 천재들을 보기도 했고, 그런 천재들과 경쟁을 하기도 했었다.

그런 천재가 그렇다면 꼭 성공에 이르게 되는가?
그렇지 않다.

내가 경험했던 말로 다 할 수 없는 수준의 천재들이 있었는데,
그중 어떤 사람은 성공을 하기도 했지만, 의외로 많은 천재들이 그저그런 정도의 성공 수준에 머무르게 된다.

왜냐하면,
성공이라는 것이 그저 뛰어난 재능만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삶에서도 그 삶을 유난히 잘 파악하고 해석해내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 사람들은 삶을 살아가는데 천재적인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의 삶이 반드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삶보다 더 풍요롭거나 가치있게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나는…
그것을 ‘은혜’라고 생각한다.

Marilynne Robinson

매릴린 로빈슨은 대놓고 기독교인티를 내는 작가이다.
그리고, 매릴린 로빈슨은 비기독교인들에게 매우 매력있는 작가로 인정받고 있다.

그리고 로빈슨은 ‘믿음’이라는 것이 현대에 매우 매력적으로 보이게 한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런데 로빈슨이 믿음을 다루는 방식은,
믿음에 대한 변증을 하거나 기독교를 변호하는 방식이거나,
진리를 선포하거나 전하는 방식이 아니다.

오히려,
욥이 하나님과 씨름하거나,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과 같은 믿음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아… 그렇구나.
믿음이라는 것이 정말 믿음같아 보일때는,
그렇게 하나님께 질문하고 하나님과 씨름할때인거구나…

잘하는게 공부밖에는…

잘하는게 공부밖에 없다고 이야기하는게 약간 재수없는 겸손으로 생각되곤 했었다.
그리고… 사실 많은 상황에서 그렇다.

그런데,
정말 살다보면,
잘하는게 공부밖에 없다는 말은 참 부끄러운 말이다.

아니,
공부를 그렇게 잘하면 뭐해. 사는게 엉망인데.

어려서부터,
공부 잘 하는 것이 최고의 미덕인양 학교에서 교육받으며 자랐다.
그리고 사실 학교다닐때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되었었다.

그러나….
정말 지금은…
잘하는게 공부밖에 없다는 말이 결코 칭찬이나 자랑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깊이 이해한다.

잘하는게 공부밖에 없도록 학교에서 교육받으며 자란 나는,
잘하는게 공부밖에 없었던 내 모습이 정말 부끄럽다.

Goodness of God

지난 주일예배시간에 이 찬양을 부르며 울컥했다.
아…이것도 가사가 참 좋네…

I love You, Lord
For Your mercy never fails me
All my days, I’ve been held in Your hands
From the moment that I wake up
Until I lay my head
Oh, I will sing of the goodness of God

And all my life You have been faithful
And all my life You have been so, so good
With every breath that I am able
Oh, I will sing of the goodness of God

I love Your voice
You have led me through the fire
In the darkest night
You are close like no other
I’ve known You as a Father
I’ve known You as a Friend
And I have lived in the goodness of God (yeah)

And all my life You have been faithful (oh)
And all my life You have been so, so good
With every breath that I am able
Oh, I will sing of the goodness of God (yeah)

‘Cause Your goodness is running after
It’s running after me
Your goodness is running after
It’s running after me
With my life laid down
I’m surrendered now
I give You everything
‘Cause Your goodness is running after
It’s running after me (oh-oh)

‘Cause Your goodness is running after
It’s running after me
Your goodness is running after
It’s running after me
With my life laid down
I’m surrendered now
I give You everything
‘Cause Your goodness is running after
It keeps running after me

And all my life You have been faithful
And all my life You have been so, so good
With every breath that I am able
Oh, I’m gonna sing of the goodness of God
(I’m gonna sing, I’m gonna sing)

‘Cause all my life You have been faithful
And all my life You have been so, so good
With every breath that I am able
Oh, I’m gonna sing of the goodness of God
Oh, I’m gonna sing of the goodness of God

만일 내가 치매에 걸린다면…

나는 치매에 걸린 사람들을 많이 보지 못했지만,
때로 치매에 걸린 사람들이,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어떤 것을 끝까지 기억하고 그것을 되뇌이는 것 같다.

그렇게 그 사람이 자꾸만 되뇌이는 그 삶의 기억은 그 사람에게 있어서 하이라이트 같은 것이겠다.

어떤 이에게는 그것이 대학 합격, 돈을 많이 번 일, 큰 상을 탄 일과 같은 성공의 기억일테고,
어떤 이에게는 그것이 가난, 전쟁, 상실과 같은 고통과 아픔의 기억일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낸 시간일수도 있을 것이고,
어떤 이에게는 그것이 평생 열정적으로 했던 일에 대한 회상일수도 있겠다.

정말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혹시 내가 치매에 걸리게 된다면…
나는 내가 끝까지 붙들고 되뇌이게 되는 그 기억과 생각이…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나의 서사이길 바란다.

다른 것은 몰라도,
예수님을 이야기하면 그저 눈에서 눈물이 주룩 흘러내리며 그분에 대한 감사가 내 마지막 인지능력에 남아있으면 좋겠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내게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이 내게 마지막으로 남는 가장 소중한 지식이자 기억이 되면 좋겠다.

꿈 속에서 주님 한번 만나기

내가 꽤 자주 되뇌어보는 바람이 있다.
그런 잘때 꿈 속에서 주님 한번 만나는 것.

음…
우선, 나는 꿈을 거의 꾸지 않는다. 그러니 이런 바람이 이루어지기 대단히 어렵고,
어쩌다 꿈을 꾸더라도 그 꿈을 깨어서까지 제대로 기억하는 일도 거의 없다.

그리고 그나마 어쩌다가 꿈을 꾼다 하더라도 내가 꾸고 싶은 내용을 막 생각해서 꿈을 꾸어본적도 한번도 없다.

그러니…
나이가 들어가면서 꿈 속에서 주님 한번 만나기와 같은 바람은 내게는 일어나지 않을 것 이라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데….
나 같이 꿈도 잘 안꾸고,
꾸더라도 꿈 기억도 잘 못하고,
꿈을 기억하더라도 꿈의 내용이 주로 시덥지 않은 것들인 그런 사람에게,

정말 꿈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거야 말로 진짜가 아닐까?
하는 다소 황당한 생각을 최근 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주님, 제 꿈속에는 나타나지 않아도 좋으니,
고통받는 사람들, 정말 주님께서 얼굴을 비추어주셔야 할만큼 절박하거나 절실한 사람들…
그런 이들의 꿈 속에는 꼭 좀 나타난 주십시오.

요즘 내가 하는 기도다.

초월성

하나님께서 초월적이라는 것을 잊고 살면서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나도 그렇다.

하나님께서 내가 살고 있는 세상과는 다른 차원(dimension)에 계시다는 사실은,
내가 하나님과 엮여지기 시작하면 내 삶에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채워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나쁜 것도 아니고, 의미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그 신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다보면,
내가 추구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와 열매와 종착점에 도달하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는 그 모든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고백을 하게 된다.

나는…
아직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의 10%도 이해하지 못하고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욥기 9:33

“우리 둘 사이를 중재할 사람이 없고, 하나님과 나 사이를 판결해 줄 이가 없구나!”

어제 욥기 9장에 나와있는 이 구절이 정말 팍~ 마음에 박혔다.

욥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그 억울함과 답답함을 쏟아내고 있다.
억울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한데…
하나님과 맞장떠서 대화를 해보기라고 하면 좋겠다 싶은데,
그것도 불가능해보이니 정말 속이 터지는 거다.

그러다가…
아니, 하나님 말고 다른 누가 좀 객관적으로 지금 이 상황을 잘 판단해서 나와 하나님 중 누가 잘못했는지를 가려주기라고 하면 좋을텐데…
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

욥이 정말 하나님 말고 다른 중재자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욥의 이런 외침은 정말…
무엇이 믿음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