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박사를 비교적 ‘전통적인’ 쪽에서 했다. – 반도체 소자를 만드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 더 정확하게는 plasma processing이라는 분야다.
말하자면 아주 시대를 잘 타는 분야라기 보다는, 그 분야가 만들어진지도 좀 오래 되었고, 그래서 그쪽의 산업도 비교적 많이 성숙해진 쪽이다.
내가 대학교때 이쪽을 하겠다고 했을때엔 이게 매우 ‘hot’한 분야였다. 그런데 내가 박사를 마칠때쯤에는 그렇게 ‘hot’한 분야는 더 이상 아니었다.
박사라면 그래도 뭔가 나름대로의 ‘이론’같은거 하나쯤은 새롭게 만들어내는 일을 해야한다는 나름대로의 고집이랄까 그런게 있었고, 그래서 나는 박사과정이 오래걸리긴 했지만 막판에 그걸 정리해서 논문으로 쓸때는 매우 재미있었다. 혼자 수식을 풀고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그걸 실험결과와 맞추어보면서 무릎을 치고 좋아했다.
그렇게 어떻게 보면 살짝 ‘시대에 뒤떨어지는’ 분야의 박사를 하게 되었는데, 대개는 그런 사람들이 우리 실험실에 많았다.
그래서 얼마전 나와 함께 실험실에서 시간을 보냈던 사람들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찾아보았다. 모두 다 찾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꽤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역시 제일 많은 쪽은 반도체 회사다. 모두 다 미국에 있는 회사에서 일하고 있고, 지금은 그래도 조금씩 높은 사람들이 되어있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졸업을 하고 한번도 회사를 옮기지 않고 그렇게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대단…)
그리고 일부 연구직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 학교 교수가 되었거나 미국 내의 연구소에서 일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어쨌든 학생때도 논문의 질이 좋았던 사람들이다.
또, 내가 졸업할때 전후로, 컴퓨터 시물레이션같은 것을 써봤던 사람들중 일부는 Wall street으로 갔다. 혹은 컨설팅 회사로 갔다. 그 후에 골드만삭스 부사장이 된 사람도 있고, 요즘도 가끔 반도체 관련 주식 해설을 하는 사람으로 TV에 나오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wall street이나 컨설팅을 거쳐서 중국에 가서 사업을 하고 있는 중국출신 친구들도 있다. 이 사람들은 학생때부터 빠릿빠릿하게 뭔가 챙겨먹을거 잘 챙겨먹고, 흐름 분석 잘하고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이 분야에 남는것 보다 아예 돈 왕창버는 쪽에 가는게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마 이 사람들이 돈은 제일 많이 벌고 있는 듯 하다)
많지는 않지만 정부쪽에가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도 하나 있고, 작은 사업을 하고 있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나처럼 졸업후 그 분야와 크게 관계없이 이곳 실리콘밸리에서 이렇게 일하고 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ㅠㅠ 그러니 우리 실험실출신들과 나는 졸업후에 다시 만나는 일도 별로 없게 되었고,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도 거의 없다. 내가 그렇게 재미있게 공부했던 분야도 이제 지금은 그 후 더 많이 발전했을테고, 내 지식은 예전 지식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회사에서 내가 전공하지 않은 일들을 한지 이제 벌써 15년쯤 되었다.
그러면서 그쪽 전공하고, 그쪽 일을 오래 한 사람들과 계속 일을 하고 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이 재미있느냐….
박사과정때 했던 그 일들이 내겐 더 재미있었다. 그리고 나름대로 그쪽분야에서는 plasma processing이라는걸 제대로 공부하고 연구한 그렇게 많지 않은 사람들중 하나였다. 어디가도 나만큼 이쪽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고, 아마 그것은 거의 사실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내가 전문가가 아닌데 사람들이 나를 전문가라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일을 하고 있다.
가끔은 나는 전문가가 아닌데 전문가인척 해야하는 상황도 있다.
그렇게 drifted away해서 여기까지 와 있다.
“야곱이 바로에게 대답하였다. “이 세상을 떠돌아다닌 햇수가 백 년 하고도 삼십 년입니다. 저의 조상들이 세상을 떠돌던 햇수에 비하면, 제가 누린 햇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창세기 47:9)
야곱은 자신의 삶을 ‘떠돌았던’ 삶이라고 이야기했고, 그 세월이 험악했다고 회고했다.
떠돌아 살았다는 표현을 NASB에서는 living abroad라고 번역했다. 히브리어로는 ‘마구르’라고 하는 단어인데 sojourning place라고 번역하는 명사다.
올해 여름, 나는 미국에 온지 30년이 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그렇게 drifted 해가며, 그렇게 sojourning 해가며 살았구나 싶다. 그냥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