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ifted away, Sojourner

나는 박사를 비교적 ‘전통적인’ 쪽에서 했다. – 반도체 소자를 만드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 더 정확하게는 plasma processing이라는 분야다.
말하자면 아주 시대를 잘 타는 분야라기 보다는, 그 분야가 만들어진지도 좀 오래 되었고, 그래서 그쪽의 산업도 비교적 많이 성숙해진 쪽이다.

내가 대학교때 이쪽을 하겠다고 했을때엔 이게 매우 ‘hot’한 분야였다. 그런데 내가 박사를 마칠때쯤에는 그렇게 ‘hot’한 분야는 더 이상 아니었다.

박사라면 그래도 뭔가 나름대로의 ‘이론’같은거 하나쯤은 새롭게 만들어내는 일을 해야한다는 나름대로의 고집이랄까 그런게 있었고, 그래서 나는 박사과정이 오래걸리긴 했지만 막판에 그걸 정리해서 논문으로 쓸때는 매우 재미있었다. 혼자 수식을 풀고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그걸 실험결과와 맞추어보면서 무릎을 치고 좋아했다.

그렇게 어떻게 보면 살짝 ‘시대에 뒤떨어지는’ 분야의 박사를 하게 되었는데, 대개는 그런 사람들이 우리 실험실에 많았다.

그래서 얼마전 나와 함께 실험실에서 시간을 보냈던 사람들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찾아보았다. 모두 다 찾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꽤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역시 제일 많은 쪽은 반도체 회사다. 모두 다 미국에 있는 회사에서 일하고 있고, 지금은 그래도 조금씩 높은 사람들이 되어있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졸업을 하고 한번도 회사를 옮기지 않고 그렇게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대단…)

그리고 일부 연구직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 학교 교수가 되었거나 미국 내의 연구소에서 일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어쨌든 학생때도 논문의 질이 좋았던 사람들이다.

또, 내가 졸업할때 전후로, 컴퓨터 시물레이션같은 것을 써봤던 사람들중 일부는 Wall street으로 갔다. 혹은 컨설팅 회사로 갔다. 그 후에 골드만삭스 부사장이 된 사람도 있고, 요즘도 가끔 반도체 관련 주식 해설을 하는 사람으로 TV에 나오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wall street이나 컨설팅을 거쳐서 중국에 가서 사업을 하고 있는 중국출신 친구들도 있다. 이 사람들은 학생때부터 빠릿빠릿하게 뭔가 챙겨먹을거 잘 챙겨먹고, 흐름 분석 잘하고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이 분야에 남는것 보다 아예 돈 왕창버는 쪽에 가는게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마 이 사람들이 돈은 제일 많이 벌고 있는 듯 하다)

많지는 않지만 정부쪽에가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도 하나 있고, 작은 사업을 하고 있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나처럼 졸업후 그 분야와 크게 관계없이 이곳 실리콘밸리에서 이렇게 일하고 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ㅠㅠ 그러니 우리 실험실출신들과 나는 졸업후에 다시 만나는 일도 별로 없게 되었고,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도 거의 없다. 내가 그렇게 재미있게 공부했던 분야도 이제 지금은 그 후 더 많이 발전했을테고, 내 지식은 예전 지식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회사에서 내가 전공하지 않은 일들을 한지 이제 벌써 15년쯤 되었다.
그러면서 그쪽 전공하고, 그쪽 일을 오래 한 사람들과 계속 일을 하고 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이 재미있느냐….
박사과정때 했던 그 일들이 내겐 더 재미있었다. 그리고 나름대로 그쪽분야에서는 plasma processing이라는걸 제대로 공부하고 연구한 그렇게 많지 않은 사람들중 하나였다. 어디가도 나만큼 이쪽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고, 아마 그것은 거의 사실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내가 전문가가 아닌데 사람들이 나를 전문가라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일을 하고 있다.
가끔은 나는 전문가가 아닌데 전문가인척 해야하는 상황도 있다.
그렇게 drifted away해서 여기까지 와 있다.

“야곱이 바로에게 대답하였다. “이 세상을 떠돌아다닌 햇수가 백 년 하고도 삼십 년입니다. 저의 조상들이 세상을 떠돌던 햇수에 비하면, 제가 누린 햇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창세기 47:9)

야곱은 자신의 삶을 ‘떠돌았던’ 삶이라고 이야기했고, 그 세월이 험악했다고 회고했다.
떠돌아 살았다는 표현을 NASB에서는 living abroad라고 번역했다. 히브리어로는 ‘마구르’라고 하는 단어인데 sojourning place라고 번역하는 명사다.

올해 여름, 나는 미국에 온지 30년이 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그렇게 drifted 해가며, 그렇게 sojourning 해가며 살았구나 싶다. 그냥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려니…

좋은 사람

아무아무개가 참 선한 사람인데 고집이 좀 세서 다른 사람 말을 잘 듣지 않는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다.

그리고 내가 보더라도 그 아무아무개가 참 착하고 좋은 사람이다.
신중하고, 사려깊고, 노력도 하고, 또 똑똑하기도 하고…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아니 다른 사람이 해주는 좋은 충고를 왜 잘 듣지 않는걸까. 그렇게 좋은 사람이.

그건,
결국 그 ‘좋은 사람’을 규정하는 여러가지 요소 중에서,
그 사람에게 결여된 것이 겸손함이 빠져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 생각보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 옳을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자기 고집을 부리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착한 자세’로 그냥 그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참 좋은 사람일수는 있지만, 충분히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 될수도 있겠다.

그냥 한가지 예 이지만,
매우 자주 내 삶에서 내 한계를 규정짓는 것은 결국 내 약점이다.
내가 다른 것을 다 잘 하더라도, 한가지가 심하게 부족하면 그것 때문에 늘 나는 더 이상 충분히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자기 이야기

대화를 하다가 금방 대화가 죽어버리게 되는 일이 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말을 많이 하는 한 사람이 자기 이야기만 계속 하게되는 경우다.

내가 사랑이 없고 공감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일수도 있지만,
만났을때 내내 자기 이야기만 하는 사람과는 그렇게 오래 대화하고 싶지 않다.
별것 아닌 것 가지고 엄청 과장을 한다거나, 어떤 주제가 나와도 별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길게 자기 썰을 풀어내는 사람과의 대화는 대개 피곤하다.

이게 함께 일하는 사람과 며칠 오래 출장을 가보면 잘 드러난다.
회사에서는 함께 하는 일이 있으니 만나서 늘 일 이야기를 하지만,
함께 출장을 가서 한동안 공항에서 함께 기다려야 한다거나, 운전을 하고 가면서 대화를 하거나, 저녁시간에 식사를 할때는 어쨌든 여러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그럴때 그 사람이 조금 더 많이 드러나게 된다.

나는 이렇게 자기이야기를 하는 극단이 소셜미디어인것 같다.
별것도 아닌 자기 근황 엄청 뽀샵해서 올리는거… 음… 뭐 난 그렇게 별로 관심도 없고, 솔직히 멋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이 블로그는?

리더, 구성원, 조직

여러 회사에 그래도 꽤 다닌 시간이 있으므로 나름대로 내가 관찰하고 경험한 것들이 있다.
내가 갖게된 생각 몇가지는 다음과 같다.

  1. 리더가 엉망이면 구성원이 아무리 좋아도 그 조직은 안된다.
  2. 리더가 좋으면 구성원이 아주 엉망이 아니면 조직은 어느정도는 된다.
  3. 리더가 좋더라도 구성원 전체가 엉망이면 그 조직은 잘 안된다.
    다만 좋은 중간리더가 있는 일부의 하부조직이 전체를 먹여살리게 되거나,
    결국 병들어있는 다른 조직들을 제거해야 전체가 살아나게 된다.

자, 요즘 교회를 생각해보자.
만일 목회자를 리더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지금 교회라는 조직은 대부분 거의 희망이 없다고 본다.
한국교회라는 큰 조직(?)을 섬기고 이끄는 소위 리더들을 보면, 앞이 깜깜하다.

그 속에서 조금 더 잘 믿으며 살아보겠다고 버둥거리는 좋은 구성원들이 있지만, 그 사람들만 힘들 뿐이다.

만일 목회자를 구성원이라고 생각한다면…
여전히 그 리더인 예수님은 좋은 분이다!
다만 좋은 중간리더를 찾는 것이 매우 어렵다.
좋은 목사님들이 없지 않다. 존경할만한 분들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훨씬 더 많은 목회자들은 수준/자격미달이거나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그 전체가 살게되는 일은,
결국 그중 좀 건강하게 서 있는 일부 ‘조직’이 전체를 먹여살리게 되거나,
아니면 건강하지 못한 ‘조직’들이 제거되어야만 가능하다.

나는,이제는 적은 수의 건강한 그리스도인과 건강한 목회자들이 전체를 살릴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제 그 병들어 있는 이들과 결별하는 것만이 그나마 살아 있는 조직을 살려내고 구해낼 수 있는 길이 아닐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된다.

얼마전 돌아가신 Tony Campolo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복음주의적’ 믿음을 복음주의(evangelical)라고 불리는 것을 거부했다. 복음주의라는 표현이 이제는 정치적 표현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속한 신앙 그룹을 red letter Christian이라고 불렀다.
영어 성경중 많은 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빨간 글씨로 써서 강조하고 있는데, 그렇게 빨간 글씨로 쓰여진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로 이야기한 것이다.

정말 아무리 고민하고 또 고민해도,
뉴스에서 보여지는 한국과 미국의 어떤 그리스도인들과는 같은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이야기하기 정말 어렵게 느껴진다.

나는 망해가는 회사 속에서 일해본 경험이 있다.
지금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이 마치 그렇게 느껴진다.

죽음이라는 contents

비 기독교인이 세상을 떠났을 때,
기독교인들이 거기에서 하나님의 은혜라든지, 하나님의 사랑이라든지, 그런 이야기 별로 하지 않는다.
그건 아마도 인간의 죽음과 기독교의 배타적 구원에 대한 연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예수님 믿지 않고 세상을 떠난 사람에게 기독교인들이 별로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인이 세상을 떠났을때,
비기독교인들은 거기에서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표현을 한다.
명복이라는것은 불교언어이고, 사후세계 명부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심판을 받지 말고 복을 받으라는 표현이다.
그러니 가만 생각해보면 기독교인이 세상을 떠났을때 거기에서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말은 별로 어울리는 말은 아니다.

비기독교인 입장에서,
자신의 종교적 신념도 있고 하니…
거기에서 하나님, 은혜 그런 말을 쓰기는 뭐할 수는 있더라도,
최소한 그냥 가족들에게 위로를 전한다거나, 가족들 마음의 평안을 빈다던가 하는 등의 이야기는 비종교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표현을 그냥 늘 하는 것은 왜 그럴까

그건,
그 사람들의 문화 속에서
‘죽음’이라는 것을 제대로 소화해낼 contents 자체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죽음이라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게되는 그 event에대해 그저 의미없는 말 말고는 따로 할 말이 없는 것.

나라고 다를까?
죽음에 대해 비기독교인들과는 매우 radical하게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나는,
정말 다를까?

과학적 사고방식의 한계

최근 혼자서 궁금하게 생각했던 것이 있다.
나는 샤워를 하면서 침을 뱉는 버릇이 있다. 뭔가 비누물이 입에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때가 있어서 그런 것 같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샤워를 하면서 침을 뱉거나, 코를 푸는건 괜찮은건데…
그리고 아주 땀을 많이 흘리고나서 그 땀을 샤워하면서 씻어내는 것은 괜찮은 건데,
혹시 샤워하면서 소변을 보는건 어떨까?

예전에 공중목욕탕에서 샤워하면서 소변을 보는 것을 막 욕했던 것이 기억나기도 했고,
그건 정말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1.
성인의 한번 소변 양이 350 ml정도 된다고 한다.
보통 샤워헤드에서 나오는 물의 양이 1분이 8리터, 그러니까 8,000 ml가 되는 것인데,
나는 샤워를 5분정도에 하니까, 한번 샤워하는데 40리터 = 40,000 ml의 물을 쓰게 된다.

대충 어립잡아서 100:1의 비율로 소변이 희석되는 것이다. 물론 10분정도 샤워를 한다면 그 비율은 200:1이 된다.

2.
이를 닦을때, 침과 함께 뱉어내는 양을 따져보면 50 ml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그 후에 물로 입을 헹구어내는 것과 그 후에 물을 부어서 세면대를 닦아내는데 쓰이는 물이 많이 잡아도 500 ml ~ 1,000 ml정도 된다고 생각해보면,
이를 닦을때 입에서나오는 침(분비물)이 희석되는 비율은 10:1~20:1 정도가 된다.
샤워할때 소변을 보는 것에 비해서는 1/10 수준으로 적은 양의 물로 희석/세척해 내는 것이다.

3.
그래서,
샤워할때 소변을 보는 것이 크게 위생상 문제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게다가 샤워 후에 변기 물을 내리는데 한번에 10 리터 = 10,000 ml의 물을 쓰게되니, 10리더의 물도 함께 절약하게 되는 것.

내 생각엔 이런 일련의 생각들은 꽤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것 같다.

4.
그렇다고 내가 샤워할때 소변을 보느냐…
음… 그건 좀…
과학적 사고방식의 한계인것

삶과 죽음과 부활과 소망

나는 facebook이나 instagram을 거의 보지 않는다.
그런데 최근에 중고로 무슨 물건을 살 일이 있어서 facebook에 들어가서 뭘 좀 보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아는 어떤분의 부인께서 삶의 마지막을 보내시는 facebook 포스팅을 보게 되었다.
몇주동안, 부인의 상태를 자주 facebook에 포스팅해가며 결국 사랑하는 아내는 보내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의 매일 facebook에 써 주셨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아내를 지켜가며 그분의 육체의 소망이 점점 사그러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여러가지 생각과 기도를 나누어주셨다.

그 간사님과 가족에게 이것이 어떤 과정이었을지 내가 감히 다 상상해볼 수 없지만,
그분이 그렇게 써주시는 모든 글들에 나도 함께 긴장하고, 기도하고, 안타까워했다.

그 사모님은 너무 일찍 건강이 좋지 않아서 세상을 떠나게 되시긴 했지만,
(대충 나와 비슷한 나이또래이시다.)
아마 내가 앞으로 살아가는 시간동안 나도 이렇게 많은 이별을 하게될 것 이다.
내가 사랑하는 분들중 어떤 분들은 나보다 먼저 떠나실 것이고,
또 내가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보다 내가 먼저 떠나게되기도 할 것이다.

힘드시지만 그렇게 거의 매일 써주시는 글들과 기도요청들을 써주신 그 간사님께, 그리고 그 가족들께 참 감사하다. (이게 이렇게 이야기해도 되는 것인지 잘 모르겠는데…)

삶과 죽음을 넘어서는 부활과 소망을 가지고 계신 분이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지내시는 모습을 간접적으로나마 볼 수 있었고,
고통과 죽음, 그리고 삶과 부활에 대해 새롭게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깊이있고 지혜롭고 균형잡힌 그리스도인이 죽음을 대하는 모습을 간접적으로나마 볼 수 있었다. 그 사모님께도 나중에 뵈면 그땐 참 감사했었다고 꼭 말씀드리고 싶다.

그 간사님과 그 가족에게 하나님의 넘치는 위로를 기도한다.

Efficiency

아무래도 내가 회사에서 하는 많은 일들은 극도의 효율성을 추구하게 된다.
사실 어떤 일이 하루 delay가 되면 그건 그냥 시간이 조금 늦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회비용을 잃어버리는 것이기도 하고, 현실적으로는 하루만큼의 팀 전체 임금을 그냥 날려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프로젝트를 관리하려는 입장에서는 늘 시간과 싸우게 된다.

그런데,
함께 일하는 사람들중 어떤 사람이 (우리 회사 사람일수도 있고, 우리와 함께 일하는 다른 회사 사람일수도 있고) 그렇게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것에 잘 따라와주지 않는다면, 그건 프로젝트 전체에 부담이 된다.
특히, 그렇게 일하는 사람이 하는 일 전체에 중요한 사람일 경우에 큰 문제가 되곤 한다.

최근 몇주동안 하고 있는 일에 비상이 떨어졌는데,
가장 큰 이유는, 함께 일하고 있는 회사가 그렇게 빠릿빠릿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그 회사까지 날라가서 거의 micromanage해가면서 일이 되게 하기도 했는데,
여전히 그쪽은 우리가 원하는 만큼 충분이 효율적이지 못하다.

그것은 아주 빠릿빠릿하지 못한 그쪽의 ‘문화’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실리콘밸리 밖의 회사와 일을 하다보면 많이 느낀다.
실리콘 밸리 회사에서는 저녁 7시에 이메일을 보내서 뭘 해달라고 부탁하면 다음날 아침까지는 일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미국이나 유럽의 다른 회사들을 그게 몇주씩 걸리기도 한다.

또, 아무래도 우리 회사에는 소위 ‘the best and the brightest’ 가장 똑똑하고 최고인 사람들을 뽑아서 일을 하는 경향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빠릿빠릿하게 일을 잘 하는데 반해, 그렇지 않은 회사 사람들과 일을 하다보면 그쪽 사람들은 그렇게 일을 잘 해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렇게 높은 효율성을 추구하게되는 일에서는,
능력이 안되는 것이 전체에 큰 문제와 부담을 가져오게된다.
그리고 실제로 회사에서 그렇게 일하는 사람이나 회사들을 비난하는 것을 많이 보게 되기도 한다.

그런데….
똑똑하지 못하다는 것,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것, 일을 잘 못한다는 것은 죄일까?
그 사람들이 그렇게 비난받아야 하는 일일까?
적어도 일하는 상황에서는 ‘죄’라고 비난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거의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비난하게 되기는 하는 것 같다.

가령,
우리 회사 사람들은 밤 늦게까지 문제 해결을 위해서 일하고 있는데,
정작 문제를 일으킨 저쪽 회사 사람들은 오후 5시에 다 퇴근을 해버리는 거다.
음… 진짜 열받는거지. 자기들이 문제를 일으켜놓고 문제 해결은 우리가 해야하니.

이런 것은,
회사 일을 하면서도 겪기도 하지만,
기독교 미니스트리를 하면서 겪는 일이기도 하다.

그냥 순전히 능력이 부족해서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순전히 능력이 부족해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그것이 정말 도덕적 문제인것 처럼 이야기하게 되는 일들이 많이 있다.

효율성이 강조되는 문화나 상황에서는,
이렇게 판단이 애매해지는 일들이 생기는 것 같다.

나는… 그래서… 이럴때….
그냥 죽어라고 일을 할 뿐이다. 어떻게든 문제는 해결되어야 하니까.

판단

나는 87학번이다.
나는 대학교 전반부에는 예수님을 열심히 믿지 않았지만,
후에 예수님을 제대로 믿기 시작하면서 전두환 정권 하에서 기독교인 학생들이 했던 고민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권력에 복종하라는 성경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영원구원을 위해서 전도하는 것이 정말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시위에 참여하는 것 보다는 기도를 하는 것이 더 기독교적인 행동이다…

등등의 이야기들이었다.

그렇게 불의한 권력에 복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생각했던 부류의 사람들, 영원구원을 위해서 쓸 시간에 사회의 이슈에 뛰어드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라고 했던 부류의 사람들, 행동보다는 기도가 더 신앙인의 모습이라고 했던 부류의 사람들…
이 사람들이 잘못된 것이었다는 것이 명확하게 정리되는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로인해,
소위 ‘영원구원’과 ‘사회참여’가 함께 가는 것이라는 입장들도 90년대 이후 한국의 소위 ‘신복음주의’계통에서 많이 이야기가 되기도 했다.
80년대 불의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던 모습에 대한 반성도 (일부) 이루어지기도 했다.

나는,
지금 한국의 상황에 대해서 무엇이 옳고 그른가 하는 것에 대한 판단이 확실하게 정리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게되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불의에 협조한 어떤 그룹은 타격을 입게될 가능성이 높고,
불의에 저항하거나 목소리를 내 어떤 그룹이 더 새로운 힘을 얻게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다만 한가지 걱정스러운것은,
90년대 한국의 ‘신복음주의’계열에는 80년대를 비판적으로 반성할 능력과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 그런 사람들이 있을까.

90년대 신복음주의가 만들어낸
학복협, 복음과 상황, 선교한국, KOSTA, 기윤실 등등은 그래도 그 당시 건강한 그룹이었다.
(이중 어떤 그룹은 건강함을 잃어버리기도 했고, 어떤 그룹은 건강함은 어느정도 지키지만 그만큼의 역량을 더 이상 갖고 있지 못하기도 하다.)

부끄럽지 않은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 고민하지만,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부끄러운 시대에 살고 있다.

400개

2020년 여름, COVID-19이 한참이던 시절,
방에만 박혀서 있을 수 없어서 시작한 온라인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다.
처음엔 KOSTA 온라인 컨퍼런스 후에 온라인으로 follow-up 프로그램을 했던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follow-up 프로그램 4주짜리를 하고 나니,
그냥 이렇게 끝내지 말아달라고 요청하는 사람들이 몇명 있었고,
그냥 그 몇 사람을 위해서 온라인으로 성경공부를 더 하겠다고 결심을 하고 시작했다.

이렇게 저렇게… 그로부터 4년반 정도가 지났다.

나는 보통 온라인에서 성경공부를 하면,
그날 한 내용을 녹화를 해서 참석한 사람들에게만 보여주는 용도로 나누곤 한다.
온라인에서 밤에 하는 것이니만큼 모든 사람이 매주 참석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을 감안해서, 빠진 사람들이 나중에 혹시 영상을 보면서 따라잡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 처음 의도였다.

지금도 그렇게 하는 성경공부 영상은 성경공부를 한 사람들끼리만 나누고 있다.
그러니 한편에 많아야 10번정도 view 숫자가 나오곤 한다.

그래도 참석한 사람들을 위해서 녹화를 하고 올리는 것은 그렇게 큰 노력이 드는 일이 아니므로, 계속 그렇게 하고 있다.

어제밤,
문득 그렇게 올라간 영상의 숫자를 세어보니 400개정도가 되었다.
지난 4년 반동안 400개 정도의 영상이 올라갔으니, 1년에 90개 정도씩은 올린 셈이다.

영상 500개가 쌓이는 날에는,
나 혼자서 그래도 수고했다고 내게 맛있는거 한번 대접할 생각이다.
아마 올해말 즈음에는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