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부르기

새해에 내가 열심히 노력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약간 뜬금없지만 노래부르기다.

나는 사실 어릴때부터 노래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고등학교때 기타를 배우고나서는 (혼자서 책보고 팅가팅가 치면서 배우게 되었다.)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게 참 좋았다.

그후 예수님을 만나고 교회에 열심히 다니면서,
친구들과 함께 여러가지 기독교 노래들을 많이 불렀다.

고등학교때는 중창도 했었고,
대학교때는 성가대도 했었다.

노래방가서 노래하는 것도 좋아했다.

그런데,
미국에와서 결혼하고 아이낳고…
점점 노래를 덜 부르게 되었다.

이제는 내가 생각해도 내가 노래를 잘 못 부른다.
음도 잘 안맞기도 하고, 음역의 폭도 매우 좁다.

그래도,
새해엔 교회가면 찬양 큰 소리로 따라부르고,
출퇴근할때 차 안에서 혼자 노래를 꽤 많이 부르는 편이다.

왜 노래를 부르냐하면…
말로도 못하겠고, 기도도 잘 되지 않을때 그렇게 여러 노래로 나 자신과, 하나님과 이야기를 해보고 싶은 것이 아닐까 싶다.

책읽기

금년엔 새해 결심 그런거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런거 할 정서적 여유가 없었다.
그냥 여러가지 생각에 마음이 눌려서 새로운 결심 그런것도 못하고 새해를 맞았다.

딱 하나 결심한게 있는데, 책 열심히 읽기였다.
무슨 책이든 책을 잘 읽어보자는 것이었다.
소설, 학술서적, 신학서적, 역사책 무엇이 되었건 간에.

대충 1년동안 15~20권 정도 읽을 것을 목표로 삼았는데 그렇게 한 것은,
보통 1년에 12권정도 읽는 것을 목표로 많이 잡았었는데,
금년에는 조금더 힘을 내어서 책을 읽겠다는 생각이었다.

비행기를 탈때도 웬만하면 영화를 보지않고 책을 읽었고,
하루에 몇십페이지라도 밤에 책을 읽으려 노력하고 있다.

이제 1월이 거의 끝나간다.
1월 한달동안 세권읽었으니 아직까지는 새해 결심을 어느정도 지키고 있는 중.

아, 그리고 새해엔 멕체인식 성경읽기 순서로 성경을 읽어보려하는데,
그건 살짝 나하고는 잘 안 맞는 것 같다.
뭔가 성경을 읽는 흐름이 딱딱 끊기는 듯한 느낌이다.
그래서 그냥 이번주부터는 그냥 쭈욱~ 읽기로 바꾸었다.

설빔

설빔은 설날 입게되는 예쁜 새옷을 말한다.
60년대 말에 태어난 나도, 설빔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설빔을 실제 입어본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어릴때만 하더라도, 새해라고 특별히 옷을 하나 더 사입는 것이 특별한 시절은 아니었던 거다.

나는 비싼 옷을 입는 사람은 아니고 (그런 옷이 어울리지도 않고)
옷 입는 것에 크게 신경을 많이 쓰는 사람도 아닌데다,
옷이 그렇게 많지도 않다.

오히려 무슨 옷을 입을까 신경쓰는게 귀찮아서,
가능하면 단순하게 똑같은 옷을 많이 입는 편이다.

그렇지만,
설을 그냥 지나쳐버리기 쉬운 오늘 같은 날,
미국에 살고 있긴 하지만,
그냥 어떤 사람들에게는 예쁜 옷 한벌 사주고 싶어진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비싸지 않더라도 그냥 싸구려 티셔츠라도 하나 사주고 싶다.

이런 설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에게 설빔을 입혀보고 싶어하신다는 것을 좀 이야기해주고 싶다.
(그러나, 내가 사주면 안된다. 나는 옷을 잘 모르기 때문에 잘못 사주면 욕만 먹게 되어버려서… ㅠㅠ)

일하는 가치

실리콘 밸리는 연봉을 많이 주는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일단, 1st tier 회사들과 2nd tier 회사들 사이에 차이가 꽤 있다.
현금으로 주는 것에는 큰 차이가 없지만, 대개 주식 때문에 차이가 많이 난다.

그리고, 직종별로 차이가 있다.
요즘 대부분의 실리콘밸리 엔지니어들은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이다.
이 사람들은 여러 기회도 많고, 게다가 연봉도 더 많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외에도 다른 행정을 하는 사람들, 프로그램 매니저들, 등등 다양한 직종이 있는데,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만큼 많이 받지는 못한다.
게다가 요즘같은 AI 광풍이 풀어닥칠땐, 그 특정 분야 사람들에게 여러 회사들이 몰빵을 하기 때문에 그쪽에는 더 많은 연봉을 준다.

그런데,
이쪽에는 워낙 생활비가 많이 들어서 원만큼 돈을 받아서는 살기가 어렵다.
어느 뉴스에서는 실리콘 밸리에서 정착해서 살 수 있는 최소 연봉이 25만불 정도라고 계산하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에는 그나마 그렇게 일해서 돈을 받는 것에 대한 가치조차 떨어지고 있는 듯 하다.

몇년전 테슬라, 요즘 엔비디아 같은 곳의 주가가 순식간에 워낙 올랐고,
일부 스타트업이 성공을 하면서 주식으로 돈을 번 사람들이 생기면서,
일해서 돈을 벌어가지고는 돈을 모을 수 없다는 생각이 실리콘 밸리에 팽배해있는 것 같다.

실제 연봉을 수십만불 받는 사람이,
엔비디아 주가가 오르는 것을 보면서 자신은 그렇게 대박을 내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하고 심지어는 좌절하는 것까지 보았다.

나는 이런 흐름이 계속될경우,
결국 실리콘 밸리의 일하는 문화에 매우 나쁜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라고 본다. (이미 그렇게 작동하고 있기도 하고.)

일해서 받는 보상보다 대박을 바라는 사람이 대부분이 되어버리면,
아무리 돈을 많이 받아도 많은 사람들이 일할 의욕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

나는 AI쪽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도 아니고, 대박이 나는 그런 회사에 다니고 있지도 않으니,
그렇게 일확천금을 얻게되는 일과는 거리가 있고…
그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주변에서 들리는 많은 소음들이 한편 나를 불편하게, 한편 불안하게 만들기도 한다.

춥다

1.
어제, 오늘,
우리 동네도 밤에는 거의 섭씨 영도에 가깝게 떨어진다고 한다.
일기예보 상으로는 섭씨 2도정도 되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 freeze warning이 전화기에서 떠서 나온다.

2.
우리집에서 밤에 잘때 집안 온도를 대충 65도 (섭씨 18도)정도로 맞추어 놓고 잔다.
그러면 꽤 쌀쌀하다.
아침에 샤워를 하기 위해 옷을 벗으면 한기가 확~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은 (그리고 이 동네 많은 집들이 그렇지만) 벽과 창문등에 단열이 잘 되어 있지 않아서, 밖이 추울때 집 안에 있으면 그 추운 기운이 벽을 뚫고 다 들어오기도 한다.

3.
그런데, 보스턴에서 살때 물론 겨울에 훨씬 더 춥긴 했지만,
생각해보면 추위가 그렇게 고통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그러려니 했고,
그 동네는 집에 단열이 그래도 잘 되어 있어서,
히팅을 켜면 집이 꽤 따뜻했다.
사람들이 겨울이면 살짝 덥다고 느껴질만큼 실내를 따뜻하게 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고.
그래서 밤에 오히려 더 따뜻하게 잘때가 많았다.

4.
예전에 한국에서 내가 국민학교 다니던 시절,
70년대는 여전히 한국이 가난했었고,
교실 중간에 있는 조개탄 난로를 웬만해선 때지 않았다.
나는 키가 큰 편이어서 늘 뒤쪽에 앉았는데 그 조개탄 난로를 때더라도 나 있는 곳까지는 그렇게 별로 따뜻해지지 않기도 했다.
그때 난로를 때는 기준은 낮 최고 기온이 영하 5도 아래도 내려가는 것이었다.
그러니 돌이켜보면 그땐 정말 한국이 더 추웠던 거다.
지금처럼 따뜻한 겨울옷들이 많이 나오지도 않았을 때이고,
나는 겨울이면 때가 꼬질꼬질한 내복을 입었던 기억도 난다.

물론 어려서 까불며 놀던때이니,
춥더라도 애들하고 뛰어놀고 하면 열이 좀 나서 그런 것일수도 있었겠지만,
그 추위 속에서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나름 잘 지냈다.
내가 추위를 좀 덜타는 체질이어서 그랬었겠지만.

5.
영하로 떨어지는 일이 거의 없는 이곳 캘리포니아서,
영상의 기온을 별로 맛보지 못하는 보스턴이나 예전 한국의 한겨울보더 더 추위를 경험하기도 한다.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들으면 뭐라고 하겠지만,
뭐 추운건 추운거지.

6.
어떤 이들에게는 겨울이 더 춥다.
어떤 이들에게는 같은 환경이라도 더 고통스러울수도 있다.
어떤 이들에게는 삶이 더 힘들다.
어떤 이들에게는 세상이 지우는 무게가 더 무겁다.

7.
하나님이 은혜의 하나님이라는 것이 한편 감사하지만,
하나님의 그 은혜가 더 많은 이들에게 따뜻했으면 하는 바람도 간절하다.


Nerd, 진지충, 공감능력 없는 사람

나는, 말하자면 덕후끼가 좀 있다.
뭐가 하나 꽃히면 그거 정신없이 파고든다.
심지어 꽤 오랫동안 그 대상이 공부였다. ㅠㅠ
그리고 지금도 역시 그렇다. 여러가지 공부를 하는게 재미있다.

게다가 나는 늘 진지하다.
농담을 전혀 하지 못하거나 분위기를 싹 죽여버릴만큼 진지함만을 이야기하는 푼수는 아니라 하더라도,
내 마음 속에서는 늘 그렇게 진지한 생각들이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실없는 농담을 하는 분위기에서, 겉으로는 웃지만 속으로는 늘 진지하게 되는 편이다.

게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나는 더 nerd가 되었다.
그래도 한때는 옷 잆는 것도 좀 챙겨서 입고 했는데,
이젠 정말 무조건 제일 싼 옷, 편한 옷만 입으면서 내가 좋아하는 것에만 열중하는 편이다.

나는 내 이런 모습에 크게 불만이 있는 건 아니다.
뭐 이렇게 생겨먹은 대로 사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다.

그런데,
이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는 것에는 영 문제가 많다.
사랑많은 사람, 너그러운 사람, 자신을 버리는 사람, 섬기는 사람….

그래서 내가 하는 위로는,
그래도 나 같은 사람이 예수님 믿으면서,
나같은 부류의 사람도 믿을 수 있는게 기독교라는 일종의 내러티브를 쓰고 있다…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효율 낮은 삶

1.
나는 그래도 나름대로 예수님을 따르며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내 기질이나 성품의 한계로 충분히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꽤 의도를 가지고 그렇게 살려고 한다.

2.
기독교인이라면 많이 하는 말이지만,
나도 역시, 내 삶의 모든 것을 주님께 드려 살겠다고 결심도 했고,
그렇게 나름 해보려고 한다.
역시 당연히 완벽하지 않지만 내 나름대로는 그렇게 살고 있다.

3.
그런데,
내가 살아가는 이 삶의 형태와 모습의 열매는 너무나도 더디다.
아니, 너무 자주…. 내 삶의 열매가 전혀 없다고 느껴지기도 하고,
심지어는 나라는 존재가 세상에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을 막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4.
사람의 존재를 효율로 계산하는 것은 참 우스운 일이고,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야 하겠지만…
내가 세상에 살면서 먹고 쓰고 살아가는데 들어가는 에너지가 어마어마 할것이다.
말하자면 크게 도움되지 않는 삶을 살면서 하루 세끼 꼬박꼬박 먹고,
나름 열심히 밤 늦게까지 이렇게 저렇게 일하고 공부하고 생각하고 연구한다.
말하자면 많은 에너지를 들여서 나라는 사람을 돌리고 있다.

5.
들어가는 에너지가 많은데, 나오는 결과가 없는 것은 효율이 낮은 것이다.
나는 대단히 효율 낮은 삶을 살고 있다.
아니, 어떤 때는 내 효율이 마이너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정말, 언젠가는, 그나마 희미하게라도 어떤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 될까?
그저 열심히 하는 것을 넘어서, 열매를 보게되는 일이 있을까?

6.
이 명령의 목적은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몇몇 사람은 이러한 목적에서 벗어나서 쓸데없는 토론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율법교사가 되려고 하지만, 사실은 자기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또는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디모데전서 1:6-7)

기독교가 대안이어야 할까?

깨어진 세상 속에서 살면서,
기독교가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한다.
나도 20-30대에 그렇게 믿으며 살았다.

그런데,
이젠 정말 그런지 모르겠다.

가령,
사람들이 소외되는 경제체제 속에서 기독교는 어떤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까?

그래서 ‘성경대로’ 희년을 해보자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면 ‘성경대로’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그 의견들이 모두 생각해볼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보지만,
적어도 그런 주장을 하는 분들의 상태 그대로는 현실 세계에서 적용할 수 없는 설익은 (그리고 어쩌면 영원히 익을 수 없는) 생각인것 같다.

오히려 기독교의 역할은,
establishment (기득권)에대한 비판(심지어는 그것이 대안 없는 비판이라 하더라도) 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떻게 해야할지는 모르겠는데, 이건 아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큰 사회 속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가치와 그 가치의 실현을,
개인의 영역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인 공동체라는 작은 영역에서 보여주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가령,
희년의 가치를 국가적 경체체제에 도입하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르나,
그 희년의 정신을 가지고 개인이 살아가는 것은 여러 형태로 해 볼 수 있다.
그 희년의 정신을 작은 기독교인 공동체에서 시도해보는 것은 할 수 있다.

그런의미에서,
기독교인의 공동체가 대안 공동체(alternative community)라는 주장보다는 대조 공동체 (contrast community) 혹은 저항공동체(countercultural community)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뒤틀려진 기독교

기독교인은,
하나님 이외에 세상에 다른 왕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닌 다른 그 누구든, 그 무엇이든 왕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것에 대항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적절한 자세일 것이다.

그것이 정치적 권력이든, 사회적 권력이든, 문화적 권력이든, 사상적 권력이든, 경제적 권력이든 말이다.

스스로 왕이라고 착각한 어떤 사람이 한국에서 대통령을 했다.
그리고 왕처럼 행동하려 하다가 큰 어려움에 부딛혔고, 아마도 그 사람은 그에 따른 벌을 받게 될 것이다.

미국에서는,
아슬아슬하게 경계에서 권력을 남용하는 사람이 다시 대통령이 되었다.
기독교인이라면 당연히 그런 시도에 대해 불편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기독교가 ‘야당’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야당의 권력에 대해서도 역시 기독교는 도전적이어야 한다.

하나님 이외에는 다른 왕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본질은 세상을 뒤집어 엎는 것이다. 그러나 실천에서 오히려 세상이 기독교를 뒤집었다. 기독교는 하나님 외에 어떤 신성함도 파괴하는 운동이다. 그러나 교회는 스스로 규범과 의식과 금기사항을 만들고 기독교라는 이름 이래 우상화에 앞장서고 있다.”

“기독교는 세상을 뒤집는 힘이나. 그러나 오늘날의 기독교는 민중의 아편이 되어버렸다.”

뒤틀려진 기독교 by 자크 엘룰

분노하지 않는 어리석음

화를 내야할 것에 화를 내지 않고,
화를 낼 필요가 없는 것에 짜증을 내는 것은 어리석음의 징표라고 할 수 있겠다.

세월호 아이들이 그렇게 죽어갈때,
대통령이라는 작자가 자신의 국정을 그냥 자기가 아는 사람에게 위탁한채 횡설수설했던 것에대해,
그렇게 분노했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태원에서 젊은이들이 죽고,
무고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자기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절제없는 폭력을 허용하는 리더에게,
술 쳐먹고 아침에 출근도 제때 하지 않는 리더에게,
심하게 분노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어리석은 것이겠다.

한국에서 대통령을 체포한 것에 대한 뉴스가 넘쳐나고 있다.

그런데 인터넷의 한 구석에서는,
그렇게 체포를 한 행위를 ‘멧돼지 사냥’이라고 표현을 하는 것도 보았다.
사람을 그렇게 심하게 표현하며 몰아세우는 것이 정당하냐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대상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분노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리석음이다.

지난 몇달, 조금 더 길게는 지난 3년,
마음속으로 얼마나 쌍시옷 들어가는 단어의 욕을 했는지 모른다.
아직도 그냥 내 마음속으로는 충분히 욕하지 않았다는 찜찜함이 남아 있다.
나는 그렇게 아직 어리석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