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놀라운 사람의 능력

사람마다 특기와 능력의 차이가 있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봐도 신기한 능력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어떻게 사람 목에서 저런 소리가 날까 싶게 노래를 하는 가수나,
손가락이 보이지 않게 피아노를 치는 피아니스트,
42.195km를 2시간 조금 넘는 시간에 들어오는 마라톤 선수,
오케스트라 전체 모든 악기가 다 들어있는 악보를 읽어가며 지휘를 하는 지휘자,
공중에서 여러바퀴를 돌고나서 마치 자석이 철판에 붙은 것 같이 척 하고 내려서 착지하는 체조선수 등등은 그냥 사람이 열심히 하면 저렇게 할 수 있으려니… 하는 생각이 잘 들지 않는 사람들이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그건 아마도 내가 그런 쪽에 재능이 없으므로 내가 노력해서 그렇게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반면,
내가 하는 일은,
그저 사람들이 조금 더 공부하고, 조금 더 훈련하고, 조금 더 경험을 쌓고, 조금 더 머리를 쓰면 내 생각엔 많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내가 하는 일을 보면 대단히 놀랍지도 않고, 그저 그냥… 저건 사람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는 생각이 드는 일들이다.

나는 일반 사람들이 보기에 매우 놀라운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 않고,
매우 놀라운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내 분야에서 내 일을 그냥 열심히 성실하게 잘 해내는 정도의 능력이 있는 것 같다.
그러니 내 일상은 그렇게 놀랍지도 않고, 대단하지도 않다.

20대라면, 내가 그렇게 특출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실망스러웠을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그렇게 특출나지 않다는 사실이 참 위로가 된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으로서는 그렇다.

한국 기독교 세계관 Reader

웬만하면 한국어 책을 종이책을 사지 않고 있긴 한데,
지난달에 나름 결심을 하고 자그마치 1200페이지가 넘는 엄청 두꺼운 한국어 책을 하나 샀다.

한국 기독교 세계관 Reader

전성민 교수님이 자료를 모으고 그 내용들에 해설을 달아놓은 자료집+비평이라고 할 수 있다.

일단, 이 엄청난 분량의 자료를 모아서 편집하고 그것들에 꼼꼼하게 comment를 한 전성민 교수님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면 적어도 한국 기독교 세팅에서 기독교 세계관 논의의 주도권을 전성민 교수님과 VIEW가 가지고 오게 되었다고 평가할만하지 않을까 싶다.
전성민 교수님은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용어를 극우 기독교쪽에서 자꾸 쓰고 있어서 그 단어를 좀 다시 빼앗아 오고 싶다고 말씀을 하시곤 했는데, 그렇게 하는데 큰 기여를 한 책이 된다고 본다.

그리고,
또 다른 감동은…
그 모여있는 자료들을 쓴 사람들, 그 사람들이 헌신했던 운동들, 그 사람들이 그 당시에 했던 고민들 등등이 그 책에 담겨있다는 것이다.
대충 80년대 후반부터 한국에서 기독교세계관 논의들이 많이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그때는 내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였다. 게다가 그 기독교 세계관 논의를 주도했던 사람들과 그룹중 일부와는 이렇게 저렇게 내가 연결되어 있기도 했기 때문에 이 책에 있는 자료들이 그냥 자료로만 보여지지 않는 것이다.

이 책에 있는 많은 자료들은 내가 대학생때 이후 직접 읽거나 접했던 것들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때 했던 고민들과 생각들은 내 20,30,40대의 고민들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이런 글들을 읽으며,
때론 이런 글들을 쓴 사람들로부터 배우기도 하고, 그분들과 대화하기도 하면서,
그리고 이런 글들의 담고 있는 생각과 고민의 운동들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되면서,
나는 내 20대 이후를 보내게 되었던 것 같다.

신선한 아가서

최근 말씀 묵상 본문이 아가서였다.
아가서는 적어도 내가 읽기에는 꽤 messy하고, 지루하기도 하고, 의미도 잘 이해가 안되기도 한 본문이었다.

그러던중,
민춘살롱에서 흥미로운 관점을 배우게 되었다.

그것은,
아가서는 삼각관계를 그린 이야기라는 것.

술람미 여인과 시골 목동의 사랑이 그려져 있고, 거기에 솔로몬이 권력으로 그 여인을 차지하려고 하는 그림이라는 것.

그러니까 술람미 여인이 꿈속에서 그리는 남자는 시골 목동이고,
솔로몬은 그런 술람미 여인을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서 차지해버리는 것이다.

적어도 그렇게 읽으면 사소한 부분에서 삐걱거리게 느껴지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가서가 훨씬 더 일관성있고 입체적으로 보이게 되는 것 같다.

전성민 교수님의 지도교수이신 Ian Provan은 이 내용으로 NIV application commentary도 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복음을 이해함

1.
피타고라스 정리를 배우고 그것을 이해하는것은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배웠던 수준의 수학에서는)
피타고라스 정리를 배우고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리 복잡하지 않은 공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피타고라스 정리는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간단하게 둘로 나누어 질 수 있는 것 같다.

2.
그런데, 미분-적분에 오면 좀 달라진다.
간단하게 sin x를 미분하는 공식을 알고 그것을 미분할 줄 아는 ‘얕은 이해’를 가진 사람이 있었고,
미분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그 의미까지도 이해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냥 공식을 외워서 미분-적분을 하는 사람들은 심지어 그것으로 시험문제를 조금 풀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볼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미적분은 그 이해의 수준에 차이가 있는 것 같다.

3.
복음은…
이게 또 다른 차원인 것 같다.
어떤 사람은 몇년, 몇십년을 보고 지내더라도…
말할때는 대충 ‘정답’을 말하곤 하는데, 막상 그 사람이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을 가만히 보면 그 사람이 복음을 알고 있다는 생각을 못하게 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복음의 어떤 면들을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만, 다른 차원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해보이기도 한다.

참 안타깝고도 답답한 것은,
복음을 이해하는 것이 피타고라스정리를 이해하는 것 처럼 단순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혹은 자신이 이해한 복음이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귀를 닫아버리는 것이다.

나름 오랫동안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왔던 사람들을 만나보았고,
교회에서 여러 형태의 리더로 살아온 사람들을 만나보기도 했는데,
몇년, 몇십년이 지나도록 자신의 한계에 딱 막혀 있어서 복음을 더 이상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다.

4.
어쩌면…
나도 그런 상태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High Spending

집에서 회사까지 거리가 대충 30마일쯤 된다. 그런데 조금 덜 막히는 길로 가면 40마일이다.
어쨌든 회사를 다녀오면 70마일 (112 km) 쯤 운전을 하게 된다.
하루 출퇴근만으로 매일 70마일을 쓰는 거다.
나는 화수목 3일을 office에 가지만 일이 생기면 월요일이나 금요일에도 office에 가기도 한다.
그리고 기타 장보러 가는 일, 주말에 교회 가는 일 등등 하면 한주에 300~350마일 정도 차를 쓰는게 일반적이다.
내차의 평균 연비가 30 mile/gallon이 되지는 않지만 대충 그정도 잡고,
그러면 한주에 10갤론정도의 기름을 쓰는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대충 1갤론에 5불 가까이 하니까, 한주에 내차 연료로만 50불정도를 쓰는거다.
한달이면 기름 값으로만 200~250불 정도가 나간다.

한가지 예를 들었지만 살면서 돈 쓰는게 다 그렇다.
내가 사는 콘도에서는 HOA만 600불을 넘게 낸다. (한국으로 말하면 관리비 쯤 된다고 하겠다.)

대개 주일날 예배 마치고 우리 세 가족이 샌드위치나 멕시칸 타코 같은 것을 사먹는것 이외에 외식을 거의 잘 하지 않는데도 식비로 어마어마하게 돈이 들어간다. 최근 몇년 인플레이션이 정말 미친 수준이어서 먹는데 돈을 많이 쓰게 된다.
물론 싼 음식이 아닌, 소위 full service restaurant를 가면 한 사람당 20불 아래로는 먹을 수 있는 것이 많이 없고, 최소 30불 정도는 내야 한다.

뭐 사는게 그러니…
정말 엄청나게 돈을 많이 쓰면서 살고 있다.

이렇게까지 돈을 많이 쓰는 세상이니, 그렇게 돈을 벌지 않으면 지속가능하지 않고,
그래서 더더욱 돈에 매달리게 되는 것이기도 하겠다.

High earning – High spending의 사회에서, 초연하게 사는 건 정말 쉽지 않다.

Monday After Easter

부활절 이후의 교회력은 부활절 제 2주, 부활절 제3주 이렇게 계속된다.
부활절 후 2주, 3주가 아니고 부활절 2주, 3주와 같은 식으로 계속된다.

나는 그 내용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부활의 삶이 계속 이어진다는 의미가 아닌가 싶다.

부활절 이후,
나는 새해를 시작하는 것 같이 월요일을 열고 있다.
새롭게 마음을 다지고, 다소 흩어졌던 리듬을 다시 잘 만들려고 하고 있다.

이번 사순절-고난주간-부활절을 지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되었고,
내가 많이 무너져 있음을 보게 되었다.

누구보다도 나는 정말 부활의 주님이 필요한 사람이다.

고난주간: 사랑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이다.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종은 그의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다. 그것은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것은 이것이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복음 15:12-17)

사랑은 이 사실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요한1서 4:10)

하나님의 불타는 사랑 – 그 사랑하는 하나님의 아들을 제물이 되게 하신 것.

만일…
예수님께서 그렇게 고난받고 희생당하지 않으셨다면,
나 같이 눈이 어둡고 마음이 닫혀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이해되었을까.

36년전.
나는 성경을 읽으며 그 하나님의 불타는 사랑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왜 그렇게 이 세상을, 그리고 나를 그토록 사랑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사랑에 압도되어 울고 또 울었다.

그 사랑이 그렇게 내게 다가온 것이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과정이었던것 같지는 않다.
물론 이성적인 부분이 없지는 않았지만,
정말 어떤 순간 그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게 보였다.
다 이해할수는 없었는데 그냥 그렇게 깨달아졌다.

나는,
내가 나중에 우리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 되는날까지,
계속 그 사랑을 더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살게 될것 같다.
그리고 그 깨달아지지 않는 그 사랑에 더 매료되어가길 바란다.

그 침울한 십자가는,
하나님의 궁극적 사랑의 징표다.
오늘 Good Friday.
이해되지 않는 그 사랑이 다시 내게 조금 더 보여지는 하루가 되길.

고난주간: 은혜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았는데,
그분께서 내게 오셨다.

우리 인류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셔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온 세상의 불공평과 고통의 호소들을 잠재울 수 있는 solution은 그 모든 것을 다 능가해버리는 은혜가 그 모든 것에 다 부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님의 처절한 고난과 죽음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십자가의 은혜를 그저 넙죽 감사하다고 받을 수 없는 이유다.

Are you serious?
라고 묻고 묻고 또 물은 후에도 도저히 그것이 이해되지 않아 몹시 불편한 마음으로 그 십자가를 대하는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이루어내지 않은, 내 업적이 아닌… 은혜.
십자가는 은혜다.

고난주간: 자비

우리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시다.
오래 참으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고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하나님.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는데 침묵하셨다.
그분의 고통 속에서 자비의 얼굴을 숨기셨다.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님을 믿는 나는,
나와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고통속에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대하며 살고 있다.
때로 그 자비의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 속에서도 자비의 얼굴을 숨기시는 듯 하다.

그러나,
예수님께 자비를 베푸시지 않았던 그 순간이야말로 하나님의 궁극적 자비가 온 세상에 펼쳐지게 되는 순간이었다.

우리 삶 속에서 일차원적으로 하나님의 자비가 사라진 것 같을 때에도,
우리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곳에 하나님의 자비가 있다는 것을 보게 해준다.

십자가는 정말 역설 투성이다!

고난주간: 믿음

생명의 주인께서,
온 세상의 소망이 되신 분께서,
고통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믿을 수 있는 걸까.

교리적으로,
그것이 내 죄를 사하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나와 온 세상에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라는 설명을 하기 이전에…

아니, 예수님께서 고통 당하시고 돌아가셨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어쩌면,
지금 당장 부활의 영광을 꿈꾸지 못하더라도,
지금 이 십자가가의 고난과 부활이 어쨌든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살리시는 방법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었을까.

성경에서 믿음이란 매우 관계적 단어이다.
어떤 사상에 대한 지적동의, 미래에 대한 긍정적 희망을 표현하는 말이 아니라,
어떤 대상에 대한 신뢰, 그 대상에 충성하는 것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리고,
그 똑같은 단어를 하나님에 쓰기도 하는데 그때는 그것이 ‘신실함’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그러니 하나님의 신실함과 우리의 믿음은 같은 관계안에 들어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물론 부활의 영광을 믿지만, 승리의 부활을 믿지만,
심지어는 그것이 없더라도 그 고난과 아픔의 십자가 속에서 우리 주님과 함께 가는 것…
그 속에서도 그분과 내가 하나라는 것을 알고,
그 관계에 계속 신실하게 머물러 있는 것.
그것이 믿음이 아니겠나.

그리고 십자가에서 들어난 믿음의 본질은,
내가 얼마나 열심히 믿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얼마나 고집스럽게 신실하신가 하는 것.

이 고난주간,
영광의 부활은 아직 멀리 있는 듯 한 그 어두움 속에서의 믿음을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