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희망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가장 처절한 절망으로 인도한다.
영광의 왕께서 십가자에 처형당하시다니.

그분이야말로 민초들이 생각해볼 수 있는 희망이었다.
그나마 그분이 이 망가진 삶을 고쳐주실 리더가 되실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

하나님의 승리, 하나님의 영광의 승리가 이분을 통해서 이루지고,
내 꼬여있는 삶도 좀 풀려지는 일이 벌어질 수 있겠다는 희망.

그런데, 그 희망이 산산히 부서졌다.

그러니…
고난주간에는 세상의 모든 망가진 것들이,
삶의 모든 어려움들이,
억울함과 고통과 아픔이,
내 뜻대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이 부조리에… 좀 머물러야 하는 것 같다.

이 모든 어그러짐과 깨어짐과 무너짐 이 해결되는 것이 희망이 아니고,
자체를 가지고 십가가에 우리 주님께서 가셨다는 것이 희망인 것.

고난주간과 십가가의 희망은 그래서 참 어이없는(?) 희망이라는 것

풍자

내가 집에서 실시간으로 방송되는 TV를 마지막으로 본것이 언제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충 거의 한 20년쯤 되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내가 그래도 요즘 youtube를 통해서 꽤 자주 보는 TV 프로그램이 있다.
그건 미국의 소위 ‘talk show’들이다.
밤에 코미디언들이 진행하는 것들인데, 내가 좋아하는건 “Jimmy Kimmel Live!”와 “The Late Show with Stephen Colbert” 이다.
그 외에도 “Tonight Show (Jimmy Fallon)”과 “Late Night Show (Seth Meyers)”등도 가끔 본다.

그 프로그램을 다 보는건 아니고, 주로 opening monologue들만 보는 편이다.

아… 이 사람들 참 잘한다.

왜 한국에선 이런 톡톡튀는 풍자, 비판이 잘 되지 않을까?

그러던중 이번 탄핵 사건을 지나면서 보게된 한국의 어떤 프로그램이 있다.

이런 코미디/풍자를 코미디언이 하는것이 아니고 언론쪽 사람들이 하고 있다는 것이 다르긴 하지만, 비슷한 수준의 풍자/비판이 이루어진다. 약간의 조롱이라고 할수도 있겠고.

그러던중 내 youtube feed에 뜬 한 코미디 영상 하나.

난 이런 사람들이 좀 잘되면 좋겠다.

무례함

가끔 여러 경로로 내게 연락해오는 사람들중에 무례한 사람들이 있다.
정말 말도 안되는 무례함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무지에서 비롯된 무례함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무례하다고 내가 느끼는 것이다.)

가령, linkedin을 통해서 연락을 하면서
멋진 기회가 있다. 네가 이 자리에 딱 맞는 사람인것 같다. 6개월짜리 계약직이고, 매우 넉넉한 pay가 제공된다. 시간당 25불이지만 너 같은 훌륭한 사람에게는 시간당 30불도 고려할 수 있다.
관심있으면 연락해라.

처음에는 이 사람들에게 설명과 대답을 해주려고 노력했다. 이 사람들도 알아야 하니까.
나의 지금 자리에 비하면 그 자리는 내게는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더 좋은 사람을 찾아보길 바란다… 뭐 그런 식으로.

그런데 그런 사람들 중 90%는 잘 알았다. 뭐 그런 대답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심지어는 그중 어떤 사람들은 내게 얼마 후에 또 비슷한 연락을 해온다.
그러면 나는 너 지난번에 내게 연락했지않느냐, 나는 이런 이런 이유로 관심 없다…고 답을 해준다.
그러면 또 싹 무시하고는… 또 다시 나중에 비슷한 연락을….

그래서 요즘은 당연히 그런 연락에는 대부분 답을 아예 하지 않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그런 무례함을 피하기 위해서 내가 무례해진것일까 하는 것.

그중 어떤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한 채 진지하게 연락을 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
그런 사람들까지도 도배급으로 너무 내가 무례하게 대하는 것이 아닐까.

정작 문제는,
내가 정말 관심있을 만한 자리에 대한 문의는 linkdin을 통해서 웬만하면 잘 들어오지 않는다는 거… 특히 요즘은 더 그렇다.

경건함 (Piety)

경건함은 참 소중하게 여길만한 자세다.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돌보는 모습. 믿음과 삶에 대한 진지함. 신실함.

실제로 그 경건함이 현실속에서 나타나는 것은 주로,
개인적인 경건한 활동/종교적 활동 (기도, 예배 등)
나쁜 행동이나 생각으로부터 멀리하는 것
다른 이에 대한 적극적인 사랑
등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때로 현실 속에서 나타나는 경건함은,
이미 자신이 파악하고 있는 종교적 세계관 속에서 그것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더 열심히 기도하고, 더 열심히 성경공부 하고, 더 열심히 종교활동 하고…

나는 이런것들이 경건함의 일부가 될 수 있다고 보지만,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세계관과 가치에 대한 성찰이 없는 경건함은 결국 종교적 고집, 자기 중심성으로 귀결되는 것 같다.

교회에서 소위 ‘경건하다’고 일컬어 지는, 주로 나이 많은 사람들이 때로 그냥 고집만 세고 열심이 있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 그런 것인듯.

그런 의미에서 보면,
차라리 그런 고집을 부릴만한 여유나 힘이 없는 사람이 오히려 건강한 경건함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긍정적 실패

나는 start-up company의 founding member로 일했던 경험도 있고,
교회 개척에 참여해서 도왔던 경험도 있다.
그 외에도 학교나 직장, 지역에서 성경공부를 만들어서 만들었던 경험도 있고, system이 잘 갖추어지지 않은 조직에 들어가서 system을 만드는 일에 참여한 일도 있다.

그중 대다수는 실패했고, 그중 일부는 그나마 약간 성공했다.
실패한 시도들 가운데에도 어떤 것은 절망적이었지만 어떤 것은 그 이후에 새로운 소망을 갖게 된 것도 있었다.

가령,
예전에 교회개척에 참여했지만 그 이후에 흐지부지된 일이 있었다.
그때 그 일이 잘 되지 않았을 때 나는 많이 실망했고, 답답해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 그 일이 실패한 이유가 그때 참여한 대부분의 사람 때문이 아니었고,
원인이 리더중 한 사람에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나서,
나는 새로운 소망을 갖게 되었다.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관여한 시도는 실패했지만,
어쨌든 이 사람들이 다른 기회에 비슷한 시도를 한다면 성공해낼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였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내 실패들을 돌이켜보니, 그저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떤 실패들은 분명히 긍정적 실패, 혹은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실패였다.

시편 10편

12주님, 일어나십시오.
하나님,
손을 들어 악인을 벌하여 주십시오.
고난받는 사람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13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경멸하고,
마음 속으로
“하나님은 벌을 주지 않는다”
하고 말하게 내버려 두십니까?

14주님께서는 학대하는 자의 포악함과
학대받는 자의 억울함을 살피시고
손수 갚아 주려 하시니
가련한 사람이 주님께 의지합니다.
주님께서는 일찍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분이셨습니다.

15악하고 못된 자의 팔을 꺾어 주십시오.
그 악함을 샅샅이 살펴 벌하여 주십시오.

16주님은 영원무궁토록 왕이십니다.
이방 나라들은 주님의 땅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17주님, 주님께서는 불쌍한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그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주시고,
그들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여 주십니다.

18고아와 억눌린 사람을 변호하여 주시고,
다시는 이 땅에 억압하는 자가 없게 하십니다.

오늘 점심은 파를 넣은 파면이다.

풍요와 편리함

내 기억으로 대략 15년쯤 전만 하더라도, 컴퓨터를 사면 그 수명이 한 5년정도였다.
그러니 1~2년 지난 모델을 사는 일을 그렇게 흔하지 않았고 꽤 큰 돈을 주고 사더라도 3년정도 지나면 뭔가 버벅거린다는 느낌이 나곤 했다.

스마트폰도 그렇다.
처음 스마트폰이 나왔을때는 한 2년정도마다 바꾸지 않으면 원하는 기능이 잘 안되는 경우도 많았고, 아주 오래쓰면 3년정도 쓸만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요즘은 아니다.
내가 쓰는 컴퓨터중에서 6~7년 된것도 있는데, 아주 쌩쌩하다.
특별한 문제가 없다면 앞으로도 한동안 쓸 것 같다.

요즘 나는 스마트폰을 살때 최신모델을 사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개 1~2년 지난 모델을 산다. 그래도 충분히 빠르고, 내가 일상적으로 쓰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
대신 가격은 절반가격 수준으로 살 수 있으니 아주 이익이다.

기술이 많이 발전하니 최고의 물건을 사지 않아도 괜찮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에서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여러가지 문화와 기술의 발전으로 사람들이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풍족함과 편리함을 누리게 되었다면,
그냥 대부분의 웬만한 사람들은 그 최고의 풍족함과 편리함이 아니더라도 대충 살 수 있어야 하는거 아닐까.

1~2년 지난 스마트폰을 사서 쓰더라도 전혀 문제가 없는 것 처럼,
남들이 다 누리는 호사를 누리지 못하더라도 그냥 삶은 이미 충분히 편하고 풍요로운 것이 아닐까.

꼭 그럴 필요가 없는데 괜히 남들이 다 하니까 최신모델 스마트폰을 사는 것처럼,
나도 내 삶의 풍요와 편리함이 꼭 필요하지 않은데 그냥 괜히 흐름에 휩쓸려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착각하면서 사는 것이 정말 많지 않을까.

Help!

지난주, 아는 어떤 사람이 내게 일종의 ‘도움’을 요청해왔다.
자기 친구들중 이제 막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질문들에 도움을 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친구 하나는 오랫동안 교회를 떠나 있었는데 그 친구와도 좀 이야기를 해볼 수 있겠느냐고 했다.

나는 그래서 다 함께 zoom 미팅을 잡았고, 어제 밤에는 그 분들이 질문하고 내가 나름대로 대답을 해주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동부에 사는 4명의, 30대의 여성들이었다.
질문은, 기독교에대해 조금이라고 비판적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할 수 있는 질문들이었고, 또 비기독교적 문화에서 살다가 이제 막 30대에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된 사람이라면 또 궁금해할만한 것들이었다.
한 90분 정도 몇가지 질문을 받고 대답을 해주는 시간을 보냈는데, 했던 몇가지 생각은 이렇다.

  1. 이런 일을 할 때마다 내가 드는 생각은, 어떤 부류의 교회들이 버린 쓰레기통을 내가 청소하는 것 같은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특정 교회들이 벌이는 엽기적인 종교행위에 완전히 질색을 하게 되었고, 도대체 그걸 어떻게 이해해야하느냐는 하소연을 하는 일들이 많이 있다.
    나름대로 내가 대답도 하고, 오해도 풀어주지만, 그런 대형교회들이 커다란 쓰레기더미를 트럭으로 가지고와서 이런 사람들 위에 쏟아놓고 있고, 나는 그 사람들 위에 떨어진 쓰레기를 일일히 손으로 걷어내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2. 실제 이런 분들과 대화를 해보면, 별것 아는 대답에도 참 고마워한다. 어쨌든 기독교에 관심도 있고, 믿어보고 싶기도 한데, 도대체 현대의 기독교를 보면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또 그런 기독교의 일부가 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그럴때 그런 오해들을 좀 풀어주면 진심으로 고마워한다.
    오히려 오래 기독교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보다 이런 사람들이 훨씬 더 시간을 쓰는 것에 고마움을 표시한다. 어떤 기독교인들이 뭘 하더라도 그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것과는 대비가 된다.
  3. 예수님은, 적어도 내가 이해하고 믿고 따르는 예수님은, 그 예수님을 잘 소개하고 전달할때 사람들에게 정말 매력적이다. 기독교의 바운더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예수님에 대해 더 설명하고 소개하는 것이 어떤 잡다한 변증이나 설명이나 대답보다더 훨씬 더 효과적이다.

그렇게 대화한 몇 분들에게는 내 이메일과 카톡 등을 알려주었고, 언제든 더 질문하고 싶은 것을 질문하라고 해 주었다.

만우절

나는 만우절 장난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리고 멋진 만우절 농담/장난을 보면 매우 재미있어 한다.
물론 내가 장난을 하는 대상은 내 아내와 민우.
민우는 속는 일이 거의 없지만, 아내는 잘 속는 편이다.

그런데,
금년엔 영 장난을 칠 기분이 나지 않는다.
그냥 세상이 무겁고 어둡게 느껴진다.
내 마음도 무겁고, 여러가지로 눌리고 힘이든다.

그러나,
그럴때 더 멋진 만우절 농담/장난을 하는 것이 멋지게 이 상황을 살아가는 것일텐데…
전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힘들고 어두운 세상을 살아갈때는,
창의적이고 반짝이는 유머라는 재능이 참 필요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