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읽기와 기도

늘 그러면 참 좋겠는데, 당연히 늘 그렇진 않다.
그냥 성경을 읽다보면 설명하기 어려운 생명력같은 것이 느껴질때가 있다.

대부분,
기도는 내게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내가 깊은 영적 침체에 있을때 기도는 하려고 하면 잘 안되고, 집중하는데 훨씬 더 많은 에너지가 들곤 하는데,
성경은 그냥 시간을 들여서 읽다보면 바짝 마른 밭에 작은 물줄기 하나가 졸졸졸 들어오는 것 같이 느껴질때가 있다.

말하자면,
성경말씀은 내게 힘이되는 양식/음식/보양식 같은 느낌이고,
기도는 그런 생명력이 분출되면서 나를 더 생기있게 만들어주는 느낌이다.

흔히 성경말씀은 영혼의 양식이고,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라고 하는데,
성경 말씀이 그렇게 내게 작동하는 것 같긴 하지만, 기도가 내게 영혼의 호흡과 같이 작동하는 것 같지는 않다.

내 기도가 좀 잘 못되어 있는 걸까?

복음주의자?

스스로를 복음주의자라고 주장하는 어떤 목사님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내 온 몸이 거부하는 것을 느끼곤 한다.
뭐랄까… 내 온 몸의 모든 장기가 고함을 치면서 거부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이번에 새로 로마 가톨릭 교황이 되신 분이 2012년에 한 인터뷰를 들어보았다.
이분…. 거의 대부분의 내용은, 내가 따르고 좋아하고 여전히 믿고 있는 그 ‘복음주의’ 내용이다.

그리고 이야기하는 내용과 tone이 참 지혜롭다.

더 이상 잘 연락하지 않는 오래된 친구

예전에는 아주 가깝고 친했는데 언젠가부터 연락을 해도 그 친구로부터 대답이 없다.
조금 어둡고 힘든 시간을 지나가며 그 친구에게 도움을 청했는데 그 친구가 연락이 없다.
그래서 나도 그 친구에게 더 이상 그렇게 자주 연락하지 않는다.
그 친구와의 좋은 추억도 있고, 그 친구와 절연을 했다거나 그런건 아닌데….
그냥 그 친구와 관계가 서먹서먹한거다.

그 친구는 하나님이다.

사실 요즘 내게 하나님이 그렇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잊은 것도 아닌데,
그 하나님과 좀 서먹서먹하다.

그래서 잘 연락하지 않는 오래된 친구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느껴진것이 내게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매우 자주, 특히 감정의 기복이 지금보다 더 심했던 20-30대에는,
하나님과 소원한 사이를 유지한채 시간을 보냈던 적도 자주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그런 빈도가 많이 줄긴 했지만,
지금 나는 하나님과 좀 그렇다.

예전에 그렇게 하나님과 서먹서먹해졌을때,
그렇게 그렇게 살다보면 어느새 그분이 내게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다시 깨닫곤 했는데…
그냥 요즘은 하나님과 좀… 그렇다.

교회…

그래도 꽤 ‘이상적인’ 모습에 가깝다고 생각되던 교회에 다닌적이 있었다.
작은 교회였고, 나름 여러가지로 균형잡혀 있었고, 그 당시로서 건강한 신학적 신앙적 전통위에 있었다.
교회 구성원 사이의 유대가 튼튼했고, 적극적으로 reach out했다.
그러나 그 교회는 몇년이 지나면서 처음의 그 모습을 점점 잃어갔고, 결국 그 후에 다른 모습의 교회가 되어버렸다.

그후 그 당시 꽤 건강하다고 알려진 대형교회도 다녀 보았고,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 일에도 참여해 보았고,
미국의 학생중심 교회, 이민 교회도 경험해 보았고,
영어를 쓰는 백인중심교회, 그리고 지금은 영어를 쓰는 다양한 민족이 함께 있는 교회에 다니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정말 ‘그나마 이 정도라면 다녀볼만 하겠다’고 생각되는 교회들이 정말 없다. ㅠㅠ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믿은 기독교가 정통 기독교가 아닌걸까?
아니면 현대 교회들이 다 그렇게 많이 망가진걸까?
원래 교회란 다 이렇게까지 형편없는 것일까?

적어도 내가 책에서 읽은 교회들은 그렇지 않은데….
정말 교회들이 영광스러웠는데…

시편 119:92

주님의 법을 내 기쁨으로 삼지 아니하였더라면, 나는 고난을 이기지 못하고 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If Your Law had not been my delight, Then I would have perished in my misery.

이 말씀에서 딱 막혔다.

주님의 법이라는 것은 결국 율법인건데… 그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기쁨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정말 기쁨이라고?
그것이 삶의 방법이고, 그것이 삶의 방향이 되는 것… 그것이 기쁨이라고?

소위 내가 ‘영적 컨디션’이 좋을 때는, 정말 그렇게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을 기쁨으로 알고 살아가는 것 같다.
그러나 내 ‘영적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그것이 기쁨도 아니고, 주님의 뜻대로 잘 살지도 못하는 것 같다.

내가 perish in my misery가 되지 않으려면, 그 하나님의 말씀에 나를 align해서 살아가야 하는 것

역사의 예수님과 신앙의 예수님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예수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은 내 믿음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렇지만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예수가 동일하지 않다는 것 역시 내겐 점점 중요한 것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요즘 내 생각은,
역사의 예수가 중요하지만,
신앙의 예수 없는 역사의 예수는 오히려 온전한 예수가 아니라는 것.

지금의 내게는,
그리고 어쩌면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역사의 예수 이상으로 신앙의 예수가 더 중요해지는 것이 아닐까.

직업과 소명

어제의 글에 이어서…
직업을 소명과 연결짓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직업에서 지나치게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것에 헌신하는 것도,
매우 경건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저 어그러진 욕망의 표현일 경우도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주 최근까지,
전 인류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성에 따라 직업을 선택하지 않았다.
직업은 그저 부모로부터 물려 받는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먹고 살기위한 수단이었다.

그렇게 먹고살기위한 수단, 혹은 고된 노동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하는 노력은 참 좋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자신의 존재 목적이나 삶의 의미를 자신이 하는 노동에서 혹은 직업에서 찾고자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1st world problem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자신에게 먹고살 수 있는 직업/일을 주신 것에 대한 감사가 없다.
그리고 이미 가진 것에 대한 자족이 없다.

소위 AI 혁명으로 새롭게 펼쳐지는 시대에…
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조금 더 다른 관점에서의 일/직업에 대한 관점이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동절

미국에서는 지키지 않지만 오늘은 전 세계 노동자들이 지키는 노동절이다.

내가 처음 노동이라는것을 접했을 때는 한국에서 석사과정에 들어갔을 때였다.
하루에 12시간 이상 실험실에 있어야 했고, 그런 환경에 처음 접하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성실하거나 열심히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물론 그때 당시엔 내가 열심히 한다고 착각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그렇게 쭉 붙어서 일을 한다는 것이 내게 익숙하지도 않았고, 많이 힘들었던 것 같다.

그때쯤 나는 복음에 조금 더 눈을 떠서 배워가는 시기였기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이렇게 고통스럽게 일을 하는데,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렇게 살아가는 의미는 무엇일까 하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것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고 신앙과 일의 의미, 신앙과 학문의 통합이라는 개념을 접하게 되었다.

그후 나는 직장생활과 대학원 생활을 거치면서 계속 일의 의미를 찾으려 노력했다.

그런데 요즘 내 생각은,
기독교세계관적 접근이… 지나치게 일을 glorify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사실 일이라는 것은 그렇게 고통스러운 면이 없지 않고,
가령, 예수님 당시의 아마 99.9% 노동자들은 그 일이 고통이었을 것 같은데….
그 일에서 신앙의 의미를 찾아내는 작업은 그냥 21세기 서구사회에서나 적용 가능한 일종의 사치가 아니겠나 하는 것이다.

일을 하면서 사는 시간이 괘 되어서,
내게 일은 그냥 어느정도 익숙한 삶의 practice가 되어버리긴했지만,
그리고… 나는 감사하게도 일에서 재미를 찾고 의미를 찾는 직업에서 일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것이 모두에게 주어지는 사치는 아니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

노동의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평화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