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지난주에 쓴 글중,
용서를 위해서는 잊는 것이 필요하다는 글에 대해 많은 분들이 No~를 외쳐 주셨습니다.
이에 대해 몇가지 좀 정리를 한번 해보려고요… ^^
용서는 망각을 필요로 하는가.
아직은 좀 자신이 없는 부분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용서와 망각이 무관하다는 입장으로 아직 후퇴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용서에 망각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 것에 약간의 배경 설명이 더 필요 할 것 같다.
가령,
사기꾼에게 당해서 재산을 몽땅 날린 일이 있다고 하자.
그래서 온 가족이 몇년간 혹독한 고통을 당하고, 온간 수모를 겼었다고 하자.
사랑하는 배우자와 자식들에게 모욕당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이것은 그 사람에게 매우 큰 상처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 상처를 끄집어내어 확인할 때 마다 그 사람은,
그 상처를 입힌 사람을 자꾸만 생각하며 미워하게 될 것이고.
여기에서… 나는 그 사기꾼을 잊어버린다거나, 그 사건을 잊어버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때 그 사건이 일어났을때, 나와 온 가족이 고생과 수모를 겼었던 그 ‘상처’를 잊어버리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때 얼마나 그것이 아팠는지…. 하는 그 생생한 기억이 무디어지고 희미해지는 과정을 통해서,
혹은 그 상처의 기억이 상대화되고 trivialize되는 과정을 통해서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 날카로운 상처의 생생한 기억을 무디게 하는 것은 물론,
오랜 시간이 걸려 이루어 질 수도 있지만,
‘은혜’라는 강력한 해독제가 그 마음 안에 떨어져서,
생생한 상처의 기억을 무디에 만들어서… 혹은 상처의 기억을 상대화시켜서….
용서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어쩌면,
아픈 기억의 상처 자체에 집중하지 않고,
그 상처를 입힌 사람의 ‘인격’을 ‘은혜’의 과정을 통해 보게 될 때에야 비로소 용서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 것이다.
계속 상처 자체에 연연해서 매달리고 있는 한,
그 상처의 생생한 기억을 고이 간직하고 있는 한,
그 상처를 입힌 사람을 용서하기란 쉽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뭐 자신이 없는 생각이긴 하지만서두,
혹시 좋은 comment, feedback 있으면 좀 주시와요. ^^
상처와 그 상처가 준 영향에 대한 망각 — 은혜로 인해 자연스레 망각하게 된다는것에는 동의해요.
이 주제에 대해서는 <배제와 포용>에 다뤄져 있으니 읽어보면 좋을 듯 해요. — 저도 끝까지 다 읽지는 못했는데 읽어야겠네요. 거기서 망각이라는것이 그리 단순치 않다는 걸 잘 설명함. 그리고 민우가 최근 학교에서 읽었던 Elie Wiesel 도 언급됨. (유태인과 아우슈비츠)
또 eKOSTA 의 김정아 교수님의 용서에 대한 글 시리즈에도 잘 다뤄짐.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나의 작은 상처를 통해서 세상의 injustice 를 보게 되고 더 큰 상처로 고통받는 이웃을 보게 된다는것. 나의 이런 작은 상처도 이렇게 아픈데, 이웃의 그 상처는 얼마나 아프고 힘들까?… 그렇게 연결될 수 있지 않을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쬐그만 상처로 은혜를 경험해서 남을 용서한 이가 끔찍한 상처로 고통받는 이에게 가서 용서란 이런거다 설명할 수 있을지?
그게 요즘 제 고민이에요.
위로의 어떤 strategy 를 생각하는거조차 작위적인 느낌이 들긴 하지만
용서의 mechanism 이 어떠한가 이야기해주는것이 더 도움이 될지 그들과 함께 눈물흘리고 함께 아파하는것이 더 도움이 될지 모르겠어요. 예수님의 인류와의 연대성은 두번째 방법으로 완성된것이 아닌지?…
배제와 포용, 당신이 잘 읽고 내게 summary 해주라. ㅎㅎ
내가 ‘초월성’ 이라는 개념에 많이 빠져있는 터라,
용서도 초월적인 것으로 이해해보려는 성향이 커서 그런걸까…
용서라는 것을 뭔가 초월적으로 이해해보려다보니 망각이라는 개념이 도입된 듯…
1. 은혜의 경험과 기억을 통한 아픔의 망각 그리고 이에 대한 용서- 이것이 용서의 ‘과정 중 하나’이다에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이것이 용서의 ‘과정이다’에는 조금 다른 생각이구요.)
2. (1)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의 용서(청원), (2) 돌을 들어 치는자들에 대한 스데반의 용서(청원)에는 망각의 과정이 개입할 시간적 여지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많은 순교자들께서 보여주셨던 극단적(?) 사랑과 용서의 모델에서는 그런 프로세스를 거치지 않은 것 같습니다.
3. 그러나 일반적으로 망각과 무뎌짐은 용서를 쉽게 만들어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 민우어머님께서 말씀해 주셨던 ‘므낫세’의 이야기는 아주 적합한 성경적 예인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나의 아픔을 ) ‘잊음’.
4. 고민되는 부분은 망각이 용서보다 선행하느냐 (망각을 통해 용서하느냐?) 아니면 용서가 망각을 낳느냐 (용서하면 잊게되느냐?)입니다. 대부분이 그렇지만 ‘둘다 맞다’ 아닐까 싶습니다 (너무 비겁한가요?ㅋㅋ).
예전에 므낫세에 대한 큐티를 다른분들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저는 므낫세의 의미가 ‘(아픔을) 잊게 하시는 하나님의 복’이라고 이해하고 나눴습니다. (하나님께서 잊게 하셨다. 그래서 용서하실 수 있게 하셨다.-정도의 뉴앙스; 은혜->망각->용서). 근데 함께 있던 한 형제님께서, 자신은 므낫세라는 이름의 뜻이 “이제는 잊게 해주십시오. 잊고 싶습니다.”라는 결단과 간구가 아닐까라고 묵상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마도 은혜->용서->망각….. 아니면 용서에 대한 반복된 의지적 결단과 그에 뒤따르는 망각의 지속적 상호작용). 그 나눔을 듣고 ‘아~~ 정말 그럴 수 있다’ 생각했습니다. 저는 전혀 그렇게 생각지는 못했는데, 개인에 따라 잊혀지지 않는 깊은 상처를 가진 사람은, 은혜를 경험한 뒤, 여전히 아프고 고통스럽지만 잊겠다고 결심하고, 잊게 도와달라고 하는 간구로 들릴 수 있겠다는 생각.
5. 잊음은 용서에 선행하기도 하고 또 반대로 그 결과로 후행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상처에 따라, 개인에 따라 각각 다른 것같습니다만 확실히 용서와 망각은 연관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6. 사려 깊은 나눔 감사합니다.
애고,
한참 잘 곱씹어가며 댓글을 읽었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는 망각과 trivialize를 같은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훨씬 더 거대하고 위대한 개념 앞에서,
자신의 상처라는 것이 상대화되고, 그래서 그것이 ‘별것 아닌 것이 되는’ (trivialized)… 것이 망각과 본질적으로 같다고 생각한겁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그게 맞는 생각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
어쨌든,
뭐 혼자서 썰 풀어놓은걸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격을 은혜의 과정(혹은 저는 은혜의 시각으로라도 해석)으로 바라보라는 말씀이 최소한 저에게는 많이 다가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