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교회를 시작하려 하고 있다.
그야말로,
정말…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것과 같이 시작하고 있는데,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서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은 작업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관심 있는 분들은,
많이들 물어봐주시길… ㅎㅎ
그리고 많이 기도해주시길!
http://www.hanaseed.org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교회를 시작하려 하고 있다.
그야말로,
정말…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것과 같이 시작하고 있는데,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서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은 작업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관심 있는 분들은,
많이들 물어봐주시길…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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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지난 두주 정도 동안,
아침 7시에 집에서 나가서 밤 12시쯤 돌아오는 일정을 계속 반복하였다.
주말에도 내내 빈 office에서 혼자서 일을 해야할만큼 일이 많았다.
이렇게 정신없이 바쁜 중에,
영적인 건강을 유지하는 것은 참 쉽지 않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아주 바쁜 일들중에 그야말로 ‘단순 노동’을 해야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그렇게 단순노동을 하고 있는 중에는,
여러가지 설교, 강의 등등을 들으며 했었는데…
그러던중,
작년 youth KOSTA 세미나 강의중 다 듣지 못한 것들을 마저 들었다.
듣다가,
그 어린 친구들에게 ‘복음’을 이야기해주려고 안간힘을 쓰는 한 강사의 passion이 느껴져서,
혼자서 눈물을 흘렸다.
꿈틀…
(1)번 글에서 썼던 것 같이,
나는 기독교 세계관의 한가지 해석 방법이 복음 전체를 설명해 내는 것과 같이 접근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그런의미에서,
나는 내가 여기서 언급한 초월적 세계관이 복음의 요체이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여전히 어떤 이들에게는 개혁주의적/영역주권론적 세계관이 유용하고,
어떤 이들에게는 평화주의적 세계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여기서 언급한 세계관의 접근이 혹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한채 가슴을 치며 기도하는 어떤 이들에게는…
약간의 가이드를 제공해주는 것이 될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용기를 내어 몇번의 글을 써 보았다.
한가지 더 덧붙일 것은,
아마도 현실을 피하지말고 좀더 현실에 부딛혀야 하는 사람들,
이런 초월적 세계관 보다는 개혁주의적 세계관에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하는 사람들일수록 오히려 이런 식의 현실초월적 세계관을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지나치게 진취적이어서 인본주의적이 되어버린 개혁주의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은,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초월적 세계관에 한번 마음을 담그어보는 것이 더 좋겠지만, 그런 사람들은 이런류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나는 세계관에 대한 논의가,
all-or-nothing 식의 접근이 아니라,
서로 보완적인 겸손한 방법으로 진행되면…
환원주의(reductionism)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고,
더 많은 이들이 복음의 풍성함을 누리게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초월적 세계관을 누리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또 한가지는,
하나님 앞에서 수동적이 되는 자세이다.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vulnerable해져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의 모습을 가지셨던 주님의 자세를 담아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구원자가 될 뿐 아니라 주(Lord)가 되신다는 것을 깊이 인정하고,
그분의 말씀과 의도와 계획은 순종하는 것이 절대적이다.
그리고 예수를 주로 삼고 따르며 사는 것은 또한,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게 움직이는 것을 전제한다.
피동성, Lordship, 성령…
사실,
개인적으로… 대략 10년쯤 전에,
개혁주의적 세계관이 가지는 정복주의적 성경에 많이 마음이 불편하여 대안을 생각하던중에,
나름대로 내가 생각했던 중요한 key concept은 ‘Lordship’ 이었다.
(그래서 여기저기 다니면서 Lordship 얘기를 무지 많이 하고 다녔었다. ㅎㅎ)
어쩌면,
Lordship을 정복주의의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logic의 뒤에는,
이런 초월적 세계관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현실적으로,
그러기 위해서는,
거대담론에 근거한 복음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격적으로 나를 다루시고 사랑하시는 인격적 복음을 깊이 마음속에 담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이것을 반복해서 reminder해주는 좋은 가르침을 통해,
논리적 변증이나 가르침, 설득이 아니라 선포와 경배가 이루어지는 공적 예배를 통해,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것을 반복해서 곱씹는 개인 경건생활을 통해서 깊어지고 유지될 수 있는 것 같다.
십자가와 부활, 죄의 용서, 예수님의 사랑, 하나님의 열심, 광대하신 하나님 등을 깊이 묵상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일정 기간, 예를 들면 사순절 등과 같은 시즌에 이것을 깊이 reminder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겠다.)
그리고 또…
나는 기도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저 자신의 말을 따다닥 뱉어내는 기도가 아니라… (물론 처음 기도는 그렇게 시작하곤 하지만…)
정말 깊이 있는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내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수용해내는 그런 기도 말이다.
그야말로 기도를 통해서 하늘이 열리는 그런 기도.
그러나,
나는 이렇게 기도를 할때,
소위 ‘자신 안에 계시는 주님’을 찾는… 일부 contemplative prayer를 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식의 기도보다는,
초월적 하나님이 우리 밖에서 부터 (extra nos) 공급해주시는 은혜를 사모하는 기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기도가 아주 깊어지면,
밖에서 오는 은혜와 내 안의 성령께서 나를 다스리시는 기도가 만나는 경험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과연 이런 세계관은 세상과의 interaction에 대해 무엇을 이야기해주는가?
그저 세상과 격리된 ‘초월적인 경험’을 통해 세상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을 suggest하는 것인가?
어떤 의미에서 그런 면이 있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기본적으로, 이 세계관에서는,
일반적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혹은 복음이 관심을 가지는 ‘약자’들은,
그들이 세상을 바꿀 힘도, 심지어는 세상을 거스를 힘도 없음을 전제한다.
물론 어떤 특별한 재능을 더 주신 이들이,
세상을 바꾸는 일에 헌신해서 일할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약자들에게는 그럴만한 능력이 없다.
이들이 세상과 소통하는 일차적인 방법은,
자신이 경험하는 초월을 통해서 세상을 trivialize하는 자세를 통해서이다.
그것을 통해, 세상과 다름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 모든 흐름을 바꾸시고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을 갖는 것이다.
내가 모든 것을 바꿀 수도 없고, 바꿀 필요도 없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라는… 어찌보면 passive한 생각과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다.
이렇게 현실 속에서 초월을 경험하면서 사는데에는,
중요한 전제들이 있다.
– 하나님께서는 선하신 분이라는 믿음
– 이 땅에서 경험하는 고통이나 악의 문제가 언젠가는 궁극적으로 해결될 것이라는 소망.
– 지금 해야 하는 일은, 그 궁극적 소망이 이루어 지기 전까지, 선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그리고 그분과 동행하면서 현실을 초월해야 한다는 믿음
따라서 거대담론적 접근 자체가 무용한 것은 당연히 아니다.
오히려 이 초월성이 건강한 바탕위에 서기 위해서는,
거대담론적 접근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질때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인격적 초월성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key는,
‘은혜’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앞에서 언급한 건강하지 못한 초월성을 보이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은혜’를 소홀하게 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현대에,
초월적 세계관을 방해하는 요소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우선, 첫번째로 피상성이다.
복음이 이야기하고 있는 중요한 요소들을 좀더 깊이 곱씹어 그 의미를 체득하기 보다는,
표면적으로 이해하고 휙~ 던져버리는…
마치 30권짜리 만화책을 만화방에서 보는 것과 같은 식으로 신앙을 다루어내는 그런 피상성은 건강한 초월성의 첫번째 적이다.
두번째로,
하나님을 경외함에 대한 무지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부흥의 시기’ 믿음의 선배들과 그 분들을 건강하게 해석해냈던 마틴 로이드-존스 와 같은 분들로부터 배울 것이 대단히 많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정말 제대로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세번째로,
매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분을 바라보는 과정을 겪었다고 해서,
그분과 동행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삶의 여러 여정 속에서 겪는 고통, 좌절, 회복, 소망 등등을 통해 하나님과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는 과정을 끊임없이 배워가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이 과정은, 많은 경우 매우 긴 시간이 걸리게 되는 것 같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것을 넘어서서, 그 하나님께서 내 삶에 관여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을 배우는 과정이라고나 할까.
사실… 이 과정이 매우 지루하고 고통스러울 것 같이 들리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과정은, 신앙생활의 백미와 같은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런 동행의 삶의 과정을 겪고 있어야 초월성을 향한 바른 갈망이 생기게 되고, 그것을 추구하며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네번째로,
shallow한 문화이다.
이건 한가지 예를 좀 들면 좋겠다.
선배중에, 유난히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분이 계시다. 그런데 이분은 결혼생활의 목표를, 행복으로 정의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대단히 불행한 부부생활을 하더라도 그 가운데 ‘하늘이 열리는 경험’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하신다. 그런 과정 속에서 깊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을 배워나가야 한다고.
그런데… 이 선배의 부인은, 오랜 우울증(depression)에 시달리고 계시다.
이 선배의 결혼생활의 여정을 상상해 보면 대충 이랬을 것 같다.
‘건강한 신앙으로 이루어진 가정’이라는 핑크빛 꿈을 가지고 결혼을 했다. 그것도 예수 잘 믿는 사람을 만나서. 그런데 막상 살아보니 이 아내가 우울증 때문에 대단히 어렵다. 감정의 기복등을 감당해내는 것도 어렵고 우울증에 따른 육체적 증상들도 힘들게 만들었을 것이다.
신앙으로 많은 사람들을 섬기겠다고 했던 이 선배의 웅장한 ‘비전’도 마치 이 아내때문에 좌절되는 것 같은 것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또, 나는 내 아내를 이렇게 사랑하니까 이 모든 것을 꿋꿋하게 버티면서 끝까지 의지적으로 사랑을 지켜나가야지…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게 그렇게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제 오래 그렇게 힘든 결혼생활을 지내가면서,
하나님과 씨름도 많이 하고,
자신의 죄인으로서의 모습도 많이 발견하고, 그래서 아파하면서 기도도 하고…
아내를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인격으로서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을 조금씩 배워나갔을 것이다.
나는 이 선배가 얼마나 지금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이 선배가 정말 ‘거룩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혼인관계라는 신비한 연합을 통해, ‘하늘이 열리는’ 초월을 경험하고…
그 초월의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과하면서 비로소 ‘사랑’이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 것이 아닐까.
이걸 너무 쉽게,
상담이라는 미명하에…
정답을 prescribe하는 식의 접근은,
초월과 신비를 통해서만 얻어낼 수 있는 경지를 영영 도달하지 못하게 만드는 road block이 아닐까.
그런의미에서,
나는 현대 복음주의의 shallow함과 가벼움이 몸서리치도록 싫다…
“종교를 민중의 아편” 이라는 말은,
기독교에 대해 대단히 모욕적이다.
자끄엘루가 이야기했던 것 같이,
기독교는 세상을 뒤집는 가치이다.
그 기독교가 민중의 아편으로 전락해 버린 것은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또 한편,
이 땅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악, 죄의 속박 아래에서 대단히 고통스럽게 살고 있다.
개인적인 죄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구조화 되어 있는 사회적인 죄악, 어그러진 피조세계의 질서, 악한 이들의 악한 행동으로부터 나오는 폭압 등을 다 이야기하는 것이다.
심각한 depression, 각종 사회적 injustice, 질병, 마음의 상처, 생계의 압박, 인간 관계의 어려움, 경제적 어려움, 억울한 사고, 깨어지는 가정/관계, 범죄, 자연재해….
실제로 이런 거대한 문제들을,
거대담론의 차원에서 다루고 그것을 풀어나가고자 노력하는 일은 대단히 소중하고,
어떤 이들에게 주어진 소중한 부르심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부르심은 또한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은,
그런 많은 악의 문제, 고통의 문제 등을 다루어 내면서,
그저 그 속에서 견디어 내고,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을 지켜내는 것으로 부름받았을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는,
‘초월성’ 이다.
초월적인 하나님을 경험하기에 세상을 trivialize해내는 초월성 말이다.
사회가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악의 문제가 더 크면 클수록,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요구는 더 커지고, 어떤 이들은 자신의 모든 삶을 던져, 신앙적 양심으로 그것을 해결하고자 투신하게 되지만,
또 깊은 초월성을 추구하면서 상황을 극복해가는 요구 역시 더 커지게 되는 것 같다.
악의 문제를 현실적으로 해결해내려는 시도는 매우 소중하고, 그것인 대단히 복음적일 수 있다.
그렇지만, 특별히 그럴만한 능력이 되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초월성을 통해 주님과 동행하도록 하는 것 역시 대단히 복음적이라고 생각한다.
복음은,
일차적으로 약자의 복음 (Godspel of the poor)이고,
이차적으로 약자를 위한 복음 (Gospel for the poor)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초월성을 추구하는 요소가 있고,
이차적으로는 악의 문제에 대항하는 요소가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약자에게…
세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그저 보통 사람들, 약자들에게…
복음은 세상이 제공해 줄 수 없는 ‘초월성’을 제공해 준다.
초월성을 추구함에 있어서 빠뜨리지 말아야할 중요한 것은,
인격성이다.
인격성을 잃어버린 초월성은,
공허해지고 추상적이 되어버리는 것 같다.
좀 풀어서 설명하자면 이렇다.
하나님을 그저 초월적인 존재로 이해하고,
그분을 목표로 삼아 그분을 추구하고,
그분이 개입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겸손한 자세룰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그분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없다면 초월성이 어그러지게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어떻게 하나님의 선하신 인격을 드러내는 것인지,
십자가에서 마지막 흘리셨을 피와 눈물 한방울이… 나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인지…
등등을 가슴에 절절이 담아,
정말 주님을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사랑하는 것이,
건강한 초월성을 담보하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세상을 살아가다가,
주님이 마음에 사무치도록 보고 싶어서,
눈물을 흘리며 주님을 갈망하는 것이라든지…
하늘의 구름모양이 조금 이상하기라도 하면,
혹시 오늘 주님이 다시 오시려나 하는 기대감에 하늘 저쪽을 바라보는 모습과 같은…
정말 주님의 인격적 존재를 내 모든 실존 속에서 받아들이고,
그분을 마음 깊이 인격적으로 사랑하는 속에서,
그분과의 그런 관계 속에서 초월성을 추구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앞의 두 글에서 쓴 것 처럼,
주님의 목적되심을 잃어버린 것이라든지,
주님의 수단되심을 잃어버린 것 모두…
이런 인격성의 상실로 부터 비롯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첫번째 글에서 쓴,
시집살이에 힘들어하는 그 며느리는,
정말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이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에 감격해서 울고,
그래서 주님을 추구하는 그런 모습을 가진 그런 사람으로 나는 그려보고 싶었다.
그저 신비주의자가 아닌…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