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2013 새해 바람 (extra)

지난 한달의 절반은 ‘아시아’ 어느 나라의 시골에 있는 호텔과 그곳의 공장에서 보냈다.

매일 아침에 6시에 일어나 말씀묵상, 운동, 기도, 아침식사 후에 출근해서, 저녁 8-9시에 퇴근, 호텔방에 돌아오면 10시, 때로는 11시가 넘는 일정 이었다. 그나마 나는 아직 내 project가 본격적으로 launch하지 않았기 때문에 덜 바뻤던 편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이렇게 글을 쓰는게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1월 한달간의 글은,

대충 12월말 휴가 기간동안 생각도 했고, 얼개도 잡아놓았고, 많이 써놓기도 했기에 빼적지 않고 쓰는 것이 가능했는데…

실제로 앞으로도 출장을 많이 다니면서 이렇게 글을 쓰는게 가능할지 모르겠다.

하는데까지는 해보겠지만….

예전과 같이,

‘한번 하기로 했으니, 이를 악물고 해보자’는 식으로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를 악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새해에 내가 새롭게 가려보려는 자세와는 맞지 않는 것 같아… ^^

나의 2013 새해 바람 (21)

전면적 재수정?

다시 20년 전으로 돌아감?

내 새해 바램을 적어놓고 보니,

마치 내가 지난 10-15년 동안 내 신앙의 여정을 다 부정하다시피 하고,

다시 20년전의 내 모습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처럼 쓰여진 것 같다.

그렇지만,

분명히 그건 아니다.

지난 시간동안,

내 모든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참 내게 신실하셨다.

내 모든 발걸음과 함께 해 주셨고,

하나님에 대해 무지한 나같은 사람에게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시는데 쉬지 않으셨다.

그렇지만, 늘 그렇듯이…

나는 하나님의 선하신 의도와는 관계없이 막나가는 성향이 다분한 사람이다.

이제 잘못 나아온 내 궤도의 일부를 수정하고 싶은 것 뿐이다.

이 과정을 지내면서, 겉보기에는 내가 그리 많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또, 이 과정이 생각보다 긴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게 신실하셨던 주님을 바라보면서…

이 transition을 주님께 맡겨본다.

나의 2013 새해 바람 (20)

현재 생각으로는,

내일로 이 시리즈의 허술한(-.-;) 글들을 마무리 지으려고 하고 있다.

그래도 new year’s resolution이라는 차원에서 이 글을 시작했으므로,

금년에 뭔가 새롭게 결심하여 ‘실행’하는 것을 정리해서 적어보기는 해야할 것 같다. ^^

1.

성경 통독에 시간을 더 들이고 있다. 목표는 금년에 최소한 2독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서 성경 전체의 흐름 자체가 내 ‘영혼’을 적시도록 시도하고 있다.

2.

QT 본문을 아주 짧게 잡고, 대신 그 말씀이 마음을 흔들어 놓도록 그 말씀과 함께 더 깊이 머무는 시도를 하고 있다.

3.

가능하면 새벽기도 같은 시간을 떼어 깊이 길게 기도하는 시간을 갖고 싶은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 참 많이 안타깝다. 그렇지만 ‘정기적 기도’를 짧게 정해서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아침에 처음 일어나서, 잠자리 들기 전에, 직장에서 일을 시작하기 전에, 중요한 meeting 전에, 아주 짧게 (3-5분) 기도하는 시도를 하고 있고.

여러가지로 마음이 어려워지거나, 가슴 아픈 소식을 들었다거나, 아니면 특별히 좀 기도해야할 필요를 느끼면, 잠깐동안 이라도 ‘골방’을 찾아들어가 기도하려 한다. 이 골방은,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내 차안이 되기도 하고, 빈 conference room, 심지어는 화장실이 될때도 있다.

4. 

내 감정을 다스리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다.

내 긍정적인 감정, 부정적인 감정이 나를 dictate하지 못하도록 하고,

순간적인 감정의 변화는, 매우 자주, 성령의 이끌림이라기 보다는 내 죄성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자각하는 훈련을 반복하고 있다.

5.

passive하고 vulnerable한 것을 practice 해보고 있다.

이것은 때로 굼뜨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때로 타협하는 것 같아 보이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좀 더 구하려고 한다.

좀 더 있을 수도 있지만,

대충 이정도가 내 new year’s resolution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결국 이렇게 다섯개 딱 쓰면 될걸,

20개나 넘는 글을 주저리 주저리 풀어놓았네… 

나의 2013 새해 바람 (19)

information을 받아들일때,

그것을 너무 shallow하게 받아들여 바로 shallow한 방식으로 적용하는 모습을 벗어버리면 좋겠다.


예를들어…

미라슬라브 볼프의 사상을 매우 제한적이나마 접하면서,

유익을 많이 얻었다.

(그분의 사상과 신학을 내가 이해한다고 감히 이야기할 수준은 전혀 아니다. ^^)

복음을 통해서 용서와 포용이 가능함을 이야기하면서, 복음이 그 내용을 내제적으로 담고 있다는 것은, 특히 현대의 복음주의교회가 경청해야할 message라고 생각했다.

결국 용서를 위해서는 가해자의 행동 자체를 ‘잊어야’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새롭게 다가왔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한국의 보수주의 정치세력과 결혼한 보수주의 교회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자유주의자를, 사회주의자를, 세속주의자를, 무신론자를 용서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아직도 20세기에 살고 있는 그들이 정말 가슴터지도록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서…

나 역시, 그 보수주의자들을, 독재세력을, 친일세력을, 부패한 정경유착 세력을 잊지 못하고 스토킹해가며 미워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 물론, 무조건 그 사람들이 잘못을 다 없던 것으로 하자는 것은 절대 아니다.)

좋은 가르침과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을 information gathering 차원에 그치지 않고,

‘내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내게 빠져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내 눈 안의 들보를 보지 못한채 다른이 눈 안의 티끌이 몹시 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던 것이었다.

공부, 묵상, 생각, 연구 등등의 목적을 점검하고 수정해야할 때가 아닌가 싶다.

나의 2013 새해 바람 (18)

지난 수년간,

내가 속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제는 ‘복음주의자’의 label을 나 자신에게 붙이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었다.

왜 그러냐고?

우선, 일반적으로 ‘복음주의자’라고 이야기되는 사람들의 주장에 나는 별로 동의하기 어렵다. 정치와 종교를 결합시켜놓은 것이라던가, 배타적 전투성, 반지성적 태도 등은 특별히 나를 많이 불편하게 만들었었다. 

그래, 그들이 ‘복음주의자’라는 딱지를 갖고 싶어한다면, 가지라고 그래. 적어도 나는 저들이 믿는 것과는 다른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으니, 내가 복음주의자라는 딱지를 버리지 뭐.

뭐 그런 생각이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것 이외에도 또 다른 이유가 내게 의미있기 다가오고 있다.

그것은,

복음주의가 풀어내지못하는 인간 본연의 문제들이 너무 크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가령,

주님을 잘 따르고자 살아가지만 어쩌다가 심한 우울증에 걸려 힘들어하는 연약한 사람의 고통을, 복음주의는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한다. 

세상 속에서 버겁게 살아가면서,

정복이냐, 변혁이냐, 분리냐, 순교냐 하는 고민을 하는 이들에게,

복음주의는 여전히 할 말이 없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럼 해결책/대안이 뭐냐고?

나도 당연히 모른다.

다만, 복음주의의 좁은 바운더리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낀다고나 해야할까.

아, 나는 물론 (건강한) 복음주의자들이 믿는 것을 깊이 믿고 따른다. 아마 내가 주님을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내게 중요한 신앙고백의 핵심이 될 것이다.

다만… 그것보다 더 무엇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다. 

나의 2013 새해 바람 (17)

성경연구의 근본을,

성경 본문의 역사성에 근거하는 작업은 대단히 powerful 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N.T. Wright 과 같은 신학자의 저작과 주장에 깊이 매료되어 있다.

특히 한국과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이런 접근이 더 많이 이루어져야 건강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mainline denomination은 또 다른 차원에서 성경 text의 역사성을 회복할 필요가 있지만..)

그러나,

성경본문을 읽어내는 데에는,

역사적 성경읽기이 외에도,

초월적 성경읽기가 병행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나는 물론, 성경 본문이 하나님의 숨결(pneuma)로 쓰여진 것을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본문에는 역사성으로만 풀어낼 수 없는 초월성이 있다고 믿는다.

지난 수년간 역사적 성경읽기를 익혀가며 나는 참 많은 유익을 얻었다.

금년에는, 적어도 금년 상반기에는 초월적 성경읽기를 더 많이 해보고 싶다. 

나의 2013 새해 바람 (16)

복음(gospel)을 가지고 상황(context)을 읽어내는 일은 참 중요하다.

그리고 상황(context)을 통해서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는 일도 참 중요하다.

결국 복음은 상황에서 적용되어야하고, 상황 속에서 살아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건강한 것이라고 믿는다.

내가 많이 추구했던 신앙/신학의 내용은,

복음으로 상황을 해석해내고, 상황 속에서 복음을 적용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복음으로인해 상황을 초월해내는 일 역시 잃어버리지 말아야할 대단히 중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많이 깨어진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에게,

‘big picture’ 혹은 meta narrative를 보여주며, 

이 복음에 궁극적 소망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지만…

때로는,

깨어진 상황속에서 고통받는 사람에게,

이 상황을 뛰어넘는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결국 그들에게 소망을 주는 것이 아닐까.

그 ‘또 다른 세계’가 반드시 내세일 필요는 없다.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라는 식의 또 다른 세계가 될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또 다른 세계는, 이 땅의 현실을 초월하는 본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 고통 받는 사람에게 소망을 준다.

새해에는,

(벌써 1월이 다 지나가고 있어… 이제는 새해라고 쓰기 좀 머시기 하지만…ㅎㅎ)

그런 의미에서의 초월성을 더 추구해보고 싶다.

나의 2013 새해 바람 (15)

나는 내 스스로 캘빈주의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캘빈주의자들의 인간이해가 주는 insight이 참으로 크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인간이 죄로 인해 철저하게 타락해서 망가져버렸다는 것이다.

그것을 해결해보고자 정말 많은 노력을 다 해보지만,

결국 그것으로 이룰 수 있는 한계가 너무나도 명확하다는 것.

그런데,

때로 나는 너무 자주…

사람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것 같이 주장하고 행동했던 것 같다.

그렇게 하다보니,

무언가를 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답답하게 느끼고, 정죄하고, 심지어는 미워하기까지 했다.

종교적 영역에서의 헌신과 관련해서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주장했으며,

사회적 영역에서의 진보와 발전과 관련해서도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주장했었다.

개인적 영역에서의 성장과 성숙 역시 그렇게 보았던 것 같다.

물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참 소중한 존재이고, 어떤 의미에서 위대한 존재이지만,

심하게 망가져 있기 때문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데 말이다.

특별히, 2013년 KOSTA 주제인 freedom과 관련해서,

결국은 ‘죄’의 문제가 더 깊이 이해되고 다루어져야만 자유를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많이 든다.

그저 피상적으로… 죄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아주 깊이있는 복음적 통찰로 죄의 이야기를 풀어내어야… 마침내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에 대한 소망을 볼 수 있지 않을까

나의 2013 새해 바람 (14)

약자를 위한 복음, 약자의 복음.

예전에 이 블로그에 짧게 쓴 글인데 eKOSTA에서 가져가서 거기에도 올랐던 글의 제목이다.

그 글을 쓴 이후 나는, 약자의 복음과 약자를 위한 복음의 차이를 많이 곱씹어서 생각해보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나는 약자의 복음을 믿고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약자를 위한 복음을 믿고 있는지.

또 나는 약자의 복음을 주장할 위치에 있는 것인지, 약자를 위한 복음을 주장할 위치에 있는 것인지.

혹은 더 근본적으로,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은 약자를 위한 복음인지 그렇지 않으면 약자의 복음인지.

아직 이것에 관해 생각이 다 정리되지는 않았지만,

한가지 내게 분명해진 것은 이것이었다.

나는 약자의 복음을 주장하는 것 같이 이야기하지만, 

실상은 약자를 위한 복음을 주장하고 있었다.

사실 이 두가지가 이렇게 이질적으로 구별될 수 있는 것인지도 확실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내가 흔히 생각없이 이야기할 기회가 생기면 이야기했던 방식은 이런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약자를 사랑하신다. 어떤 의미에서 약자를 편애하신다. 그러므로 그런 약자를 위해 이렇게 이렇게 섬기고 사는 것이 복음의 뜻이다. 흔히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싸구려 pseudo-gospel은, 이런 이런 이유에서 성경의 복음과 다르다. 이것을 제대로 깨닫고 그것에 맞추어 헌신해서 사는 것이 우리의 부르심이다.”

음…

얼핏 보면 꽤 설득력있는 것 같이 들리는데…

막상 내가 주장하는 복음을,

약자들이 따라올 수 없는 윤리강령이 되어버린 경우가 많았다.

스스로 자신의 몸을 일으켜 세울 힘조차 잃어버린 사람들,

세상에서 낙오되어 소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내가 이야기하는 ‘복음’을 들으면…

오히려 더 많이 절망하게 될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렇게 헌신할 기운조차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헌신하지 않으면 복음을 제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약자를 위한 복음을 이야기하지만,

막상 그 내용에서 약자가 철저히 배제되는 것이다.

은혜, 사랑, 초월성, 인격성 등과 같은 것이 결국 이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아닐까 싶다.

나의 2013 새해 바람 (13)

내 신학/신앙의 흐름을 보면 대충 다음과 같았던 것 같다.

1.

은혜, 죄사함, 구원, 영접, 성화, 감사, 전도, 성경공부

2.

하나님 나라, 영역주권적 변혁, 기독교 근본주의, 변증, 성경공부, 캘빈주의적 근본주의

3.

부흥, 회개, 죄, 헌신, 개혁, 사회변혁, 신학공부, 탈캘빈주의

4.

새로운 신학, 탈근본주의, 평화주의, new perspective, emergent 

5. 

위의 내용들을… 융합, 포용, integration…? (hopefully) + 공동체

이렇게 정리해놓고 보면,

이런 흐름 속에서, 가장 새롭게 내게 강조점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은 ‘공동체’ 이다.

결국, 이 내용들을 묶어내는 ‘자루(bag)’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공동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지난 연말, 이 ‘공동체’와 관련해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길을 열어주시는 것이 아닐까 싶어 마음이 움직였었다.

내게 참 소중한 사람들에게 깊은 실망을 주고… 지금은 내가 뒤로 물러나 있기 하지만,

어떻게든 새해에는 내가 이 ‘공동채’라는 차원에서 새로운 발견과 경험, 도약과 깨달음이 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소망이 있다.

community, vulnerability, solidarity, suffering, transcendence, hope, love, communal growth, sharing, missional

이런 단어들이 공동체와 관련해서 내가 integrate 해보고 싶은 것들이다. 

아참, 하나만 더.

내 신학과 신앙의 흐름을 보면, 새로 끌리는 어떤 key를 가지고 너무 많은 것을 해석해내려는 시도를 반복했던 것 같다. 일종의 환원주의(reductionism)이다.

역사성 없는 개인 구원,

근본주의적 전투성,

은혜 없는 하나님 나라 신학,

초월성 없는 변증이나 teaching,

개인이 상실된 공동체, 공동체를 잃어버린 개인주의

등등은 모두 reductionism의 산물이 아닐까…. 싶다.

참고로,

얼마전에 이승장 목사님께서 자신의 facebook에 올리신 것을 보면서 참 많이 공감을 했었다.

창세기, 아가서, 야고보서 같은 것 까지도 다 ‘하나님 나라’로만 해석하려 하는 것은 지나친 환원주의인 것 같다고.

오히려 지금 이 시대에는 기독론이 더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냐고.

(사실은 내가 이 생각을 먼저 하고 글도 써 놓았는데 이승장 목사님께서 먼저 facebook에서 선수를 치셨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