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2013 새해 바람 (12)

벌써 한 1년도 더 지난것 같다.

내가 주일예배를 드릴때 마다,  한편 좋은 가르침에 감사하면서도,

정말 깊이 ‘예배’를 드렸다고 느껴지지 않는…

일종의 갈증이 내게 있어왔다.

정말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주님을 높이는 마음이 들고,

그 주님을 생각하기만 해도 마음이 좋고,

그 주님의 소망이 내 안의 어두움을 몰아고,

주님의 사랑 앞에 흐느껴 우는…

그런 경험에 대한 목마름이 깊이 있었다.

생각을 해보면,

깊은 예배,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영광, 예배의 감격 등등은,

하나님 나라 신학에 근거한 헌신을 강조하는 base로부터 나오기는 어렵고,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분을 깊이 사랑하는 base로부터 나오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설교를 통해 깊은 가르침을 얻는 것이 물론 예배중에 참 여러 유익을 주지만,

‘teaching’에 너무 강조점을 두다보면 ‘worship’을 잃어버리게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사실, 내가 지금 출석하는 교회의 예배에서, 늘 좋은 teaching이 있음에도, worship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깊은 목마름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 그런 이유인 것 같다.

그리고,

복음을 이야기할때,

변증적 가르침이 중요하긴 하지만,

복음을 변증적 가르침에 의존하다보면 선포와 예배등과 같은 초월성을 잃어버리는 것 같다.

새해에는…

어떻게든 정말 깊이 주님을 예배하는 것이 내게도 회복되면 좋겠다.

내 개인적으로도… 그리고 hopefully… 어떻게든 공동체 적으로도.

나의 2013 새해 바람 (11)

작년에,

내가 이 블로그와 eKOSTA에 썼던 글 가운데 하나가 ‘block’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 블로그와 eKOSTA는 모두 daum에서 제공하는 tistory 서비스를 쓰고 있는데, 

내가 썼던 그 글에 등장하는 어떤 분이 그 글을 내려달라고 daum에 요청을 해서 그 글이 내려졌던 것이었다.

그 글은, 소위 ‘교회 개혁’을 주장하는 글이었다.

그리고 그 교회 개혁을 주장하는 글에는, 어떤 ‘큰 목사님’의 아들에 대한 언급이 나왔었다.

그 큰 목사님의 아들 (혹은 그 대리인)이 daum에 그렇게 요청을 한 것이었다.

2001년에 쓴 글이니, 뭐 벌써 10년도 훨씬 전에 쓴 것이다.

eKOSTA를 담당하는 모 형제가 막 분개하면서, daum에 따져서 다시 올리자… 뭐 그렇게 이메일을 써 왔는데, 나는 그렇게 하지 말자고 했다. 물론 그 큰목사님 아들의 행동이 불편한 것은 사실이었다. 내가 쓴 글에 ‘사실’이 아닌 어떤 다른 것이 들어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런데…

나는 2001년에 쓴 내글의 입장에 더 이상 동의하기 어려웠다.

교회개혁이라는 단어는, 참 오랫동안 내 마음을 흔들어놓고 움직여왔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어떤 의미에서 교회개혁을 바란다.

그렇지만,

지금 어떤 사람들이 접근하는 방식대로, 혹은 내가 2001년에 쓴 그 글에서 주장하는 방식대로, 

교회개혁이 이루어질 수 있을지… 사실 회의가 있다.

교회개혁을 주장하면서 싸우는 사람들 가운데 너무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교회개혁 대상자들과 같은 ‘괴물’이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때가 많이 있다.

그분들의 생각과 마음에 깊이 공감하지만…

그분들의 자세와 방법이 궁극적 해결책을 가져다주는데 오히려 방해요소가 될 수 있지는 않을지… 잘 모르겠다.

아니, 최소한,

나는 그런 입장을 가지고 있으면 나 자신이 너무 쉽게 망가지는 것을 경험한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악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나 스스로가 괴물이 되어버리지 않도록 나 자신을 잘 추스리며 살고 싶다.

나의 2013 새해 바람 (10)

어떤 이들은 이야기한다.

기독교 신앙은 doing의 문제가 아니라 being의 문제라고.

무엇을 행함에 앞서 어떤 사람이 되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한편 그런 이야기에 공감을 하면서도,

다른 한편 약간 생각을 달리한다.

나는 being이 doing에 앞서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being과 doing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하나를 다른 것으로부터 떼어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being은 doing을 강화시키고, doing은 being을 강화시키는 역할도 있다고 생각한다.

Having said that…

나는 복음에 사로잡힌 후, 초창기에 being의 영역에 거의 내 모든 관심을 기울이며 살았다. 그리고 doing은 그저 being의 부산물이라고 믿었다.

예를 들어보자.

나는 남들의 인정을 받는 것을 무척이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늘 다른이의 인정을 위해 많은 것을 compromise할 준비가 되어 있다.

복음을 받아들인 후 나는, 그것이 내 뿌리깊은 죄성임을 인식했다. 그리고 그것과 정말 미친듯이 싸웠다.

가령, 어떤 노인이 힘들게 짐을 가지고 가는 것을 보면서, 그 노인을 돕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했더라도, 그 주변에 사람들이 있어 내가 그 노인을 돕는 것을 보며 나를 괜찮게 여길 것이다… 라는 인식을 하는 순간 나는 선행 자체를 포기했다. 왜냐하면 주변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자하는 내 죄성과 싸우는 것이 선행보다 더 우선하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그런식의 행동으로는 더 이상 내가 성숙해질 수 없음을 깨달았고,

어떤 의미에서… 다른 이들의 인정을 좀 받는 한이 있더라도 공동체와 타인의 필요에 따라 선행을 하는 쪽을 선택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시간이 더 지나면서…

나는 이제 내 being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은 책 doing에 몰두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진단을 해본다.

이제는 다른 이들의 인정을 받고자하는 내 의도를, 선행을 추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연료’로 활용을 하고 있는 것 같다.

Pendulum이 반대쪽으로 너무 가버린 것이다.

이제 다시 그 pendulum을 중심으로 좀 가지고 와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내 영혼을 돌보며, 내 죄성과 싸우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 안의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라는 말씀을 많이 곱씹어야 할 것 같다.

나의 2013 새해 바람 (9)

은혜없는 신앙과 신학의 왜곡은, 내 정치적 편향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나는 정치적 색깔이 꽤 분명한 편이다.

한국과 마국의 여러가지 선거때에, 내가 지지하는 후보가 누가 되어야 하는지 하는 것을 고민했던 적은 거의 없었다.

사실 내 이런 정치적 입장은, 내가 복음을 받아들여 알게된 이후에 확립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 정치적 입장은 내 신앙/신학에 의해 깊은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내 정치적 편향이 오랜시간 계속되면서,

나와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갖는 정치집단과 그 지지자들에 대한 분노가 마음 속에 많이 쌓였다.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 견해에 따른 이상이 구현될때, 정말 이 땅의 많은 왜곡이 개선될 것이라는 핑크빛 환상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하나님께 두어야할 궁극적 소망을, 정치에 일부 두는 모습을 많이 보였던 것 같다.

정치는 중요하고, 복음은 정치적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내 복음적 양심으로, 내가 반대하는 어떤 정치집단을 지지하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내 정치적 편향이,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에 대한 소망을 약화시키고, 사람이 정치를 통해 이룰 것에 대한 소망을 강화시키는 성향을 만들어 내고 있다면,

그 인본주의적 요소를 재고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나의 2013 새해 바람 (8)

은혜 없는 신앙의 모습은 내게 다양한 부분에서 드러나고 있다.

우선, 내 신학적 이해의 영역.

내가 신학적 통찰이 대단히 깊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꽤 열심히 신학적 소양을 찾추려고 노력을 해왔다. 부족하지만 신학교에서 쓰는 교재들을 구해다가 독학을 하기도 하고, 다소 여럽게 느껴지는 신학자들의 저작들을 읽으며 현대사회에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나름대로 해석해내려고 많이 노력을 하기도 했다.

“하나님 나라”의 신학을 열정적으로 사람들과 나누고, 여러 신학적 접근을 통해서 현대 기독교가 잘 해내고 있지 못하는 것에대한 대안을 찾으려고 했지만…

그러는 과정 중에서, 내 신학적 지향이 점점 은혜가 없는 영역으로 틀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현대의 문제가 이러 이러한 것으므로, 이런 신학적 접근으로 해결할 수 있다’ 는 식의 접근을 반복하면서, ‘이런 문제에는 이런 논리적 해결책이, 저런 문제에는 저런 논리적 해결책이’ 와 같은 적용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와 세상이 처해있는 문제의 해결이 은혜가 아닌 논리의 메커니즘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내게 가져다 주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 나라의 신학은 건강하고 옳은 것이지만,

그 하나님 나라의 신학을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시대가 열렸으니 이 새로운 movement에 join해라!’ 라는 식으로 외치는 것은,

자칫 새로운 시대의 moral code를 따르도록 강요하는 새로운 형태의 율법주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내게 있어서는,

신앙과 신학에 그리스도의 인격이 다시 회복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주님의 마음, 주님의 가슴, 주님의 심장, 주님의 사랑,

그리고 그 주님을 향한 내 불붙는 사랑…

그 관계 속에서 무제한 제공되는 은혜…

나의 2013 새해 바람 (7)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개종자 한 사람을 만들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하나가 생기면, 그를 너희보다 배나 더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3:15)

이 말씀이 어쩌면 지금 내게 참 아픈 경고의 말씀이 아닌가 싶다.

나는, 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스스로 위선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믿는다. 자신의 종교적 열심으로 최선을 다했던 것이었는데, 그 결과는 위선으로 나타난 것이다.

자신도 지지 못할 멍에를 다른이들에게 지도록 이끌면서 모두 함께 망하게 만드는…

결국 이들이 가졌던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의 노력으로, 은혜 없이, 하나님과 함께 함 없이, 노력하는 열심이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내 열심의 모습은, 이것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더라도, 혹은 이 하나님이 다른 종교적/정치적 열심으로 치환되더라도 그것이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하는데 있어서 아주 큰 문제는,

물론 이런 내 비뚤어진 자세가 나 자신에게 해가 되기도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 대단히 큰 악영향을 끼친다는데 있다.

잠깐 지금 멈추어서, 내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내가 악악거리며 주장하는 신앙에는,

대단히 능력있고, 자기 통제 잘하고, 의지력 강한 사람이 되라고 촉구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끔찍한 생각이 든다.

다시말하면,

그럴만한 능력이 없어 사회에서 loser가 된 사람들은,

내가 추구하는 신앙의 모습에서도 loser가 될 수 밖에 없는 그런 상황인 것이다.

그러다보니,

어쩌다 최근 내 영향을 받은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나는 저 사람이 이야기하는 추구하는 그런 신앙인이 절대로 될수 없다며 실망하고 좌절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내 자세와 일과 섬김과 관계와 마음을 ‘은혜’로 채워넣어,

마치 내가, 인간이, 무엇을 이룰 수 있는 것 같이 살아왔던 모습을 많이 고쳐나가고 싶다.

나의 2013 새해 바람 (6)

주님을 늘 사랑하면서 살고 싶고,
주님을 사랑하면서 사는 것을 추구하지만…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에 비하면 늘 일관되지 못했다.

소위 up & down이 늘 있었다.

흥미롭게도,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내가 주님의 일을 효율적으로 하는 것과의 상관성은 그리 높지 않았던 것 같다. 주님의 일을 효율적으로 하는 것은, 오히려, 교육이나 훈련, 그리고 경험을 통해서 발전되는 영역이었던 것 같다. 다시 말하면 주님을 향한 내 사랑이 식은 기간에도 내가 매우 효율적인 사역자로 일했던 시기가 많이 있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많이 있었고.

주님을 더 깊이 사랑하는 시기에 보이는 독특한 특징은, 내가 주님을 더 깊이 닮아가는 변화를 겪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그런 연관성이 있는가 하는 것을 잘 풀어 설명할만큼 내 생각이 정리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적어도 내 경험상으로는 그랬다.

신앙의 연륜이 쌓이고, 여러가지 일을 하는 사역자로 살면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점점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으로 치환해왔다는 것을 최근 많이 발견하였다.

그러면서,

내가 더 효율적인 사역자가 되기는 했지만,

주님을 닮아가는 변화가 내게서 더 이상 잘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새해에는,

내가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하여 주님을 닮는 과정이 회복되면 좋겠다.

주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보다는, 주님을 닮은 것을 더 많이 바라며…

나의 2013 새해 바람 (5)

지난해 말,
내가 내 가족을 빼고는 가장 아끼는 몇 사람들과 이메일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쓴 적이 있었다.

지금 제 모습을 보면, 마치 레드불과 같은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 영향을 받으면 잠시 힘을 반짝 내는데는 도움을 주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몸과 마음을 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돌이켜보면, 한때는 저도 부족하지만, ‘녹용 보약’과 같은 사람이었던 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효능이 좀 딸리는 보약이긴 했지만, 그래도 제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그 마음에 소중한 생명을 담고 살게되는 것을 자주는 아니어도 가끔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 모습은, 몸을 망가뜨려가며 잠시 힘을 내게하는 레드불과 같은 모습입니다. 자극적인 맛과 효능의 레드불 말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내가 최선을 다하되, 하나님께서 열매를 맺으실 것을 기다리는 참을성을 갖지 못하고,

조바심을 가지고 내가 끝장을 보고자 했던 내 자세가 가장 큰 문제가 아니었을까.

새해엔,

내 안에 있는 독성을 빼내고,

덜 자극적이더라도 깊이 있고 영속하는 효능이 있는 녹용 보약과 같은 사람으로 바뀌어가고 싶다.

나의 2013 새해 바람 (4)

나와는 좀 신앙의 컬러가 다른, 그렇지만 내가 참 좋아하는 P형이 있다.

이 형은, 말하자면….. 좀 퇴마사 같은 스타일이다. ^^

한밤중에 자다 일어나서 악한 영을 대적하는 기도를 하다 자기도 하고….

말을 할때도 논리정연하게 설명을 하기 보다는, 불교의 선문답 비슷한 스타일로 이야기한다.

아이로니칼하게도,

개인적으로 나는, 나와 스타일이 매우 다른 이 형으로부터 참 많은 영향을 받았다.

내 신앙의 컬러가 아직 확실히 확립되지조차 않았던 20대.

P형이 언젠가 내게 와서 뜬금없이, 너는 요한복음 스타일의 신앙을 가지고 있구나.

그렇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게 무슨 얘기냐고 물었더니,

내 신앙을 붙들고 있는 가장 중요한 기둥은,

나는 거대담론, 헌신, 변증, 논리 등등의 딱딱한 개념 보다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하는 것과 같은, 예수님과의 사랑의 관계 라는 것이었다.

그때 당시에는 뭐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갔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내 신앙의 컬러가 확립되어 드러나면서 나는 P형의 그 이야기가 참 옳았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돌이켜보면, 나는 위기의 순간에,

복음의 거대담론의 vision이나, 내 헌신의 충성과 같은 것에 의지해서 돌진해 가기 보다는,

주님과 더 가까워지면서 그분의 숨결을 느끼며 그분과 동행하는 것을 통해 힘을 얻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최근 10-15년 동안 대외적으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이야기했던 것은,

주님에 대한 사랑이라기 보다는 거대담론, 헌신, 변증, 논리 등과 같은 딱딱한 개념이었다.

나 역시 그런 개념들로부터 많은 유익을 얻었지만,

그런 시간을 지내면서 내가 신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그 무엇(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을  너무 오래 놓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주님을 위해서 살기 보다는, (물론 이것도 계속 포기하지 말아야 하겠지만)
주님을 사랑하며 사는 삶을 많이 회복하는 한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나의 2013 새해 바람 (3)

지난 여름 정도 였을까.

내가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느끼지’ 못하고 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살긴 하는데, 하나님과 함께 누리며 살고 있지는 못한 것이다.

그런데, 어쩌면 더 큰 문제라고 내가 생각한 것은,

그런 내 상태가 그렇게 많이 불편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사실 하나님이 아주 친밀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기간은, 꽤 자주 있었다.

그렇지만 그럴때 마다 나는 참 많이 괴로워했었다.

하나님이 가까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였다.

그런데,

지난 여름의 나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어차피 하나님을 위해 몸바쳐 살고 있고,

하나님께서 하셔야 할 일은, 

내가 하는 일들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것을 통해 기뻐하시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일들을 하는 나와 함께 하실 필요는 없었다.

내가 하는 회사일이나, 말씀사역, K 운동 관련한 일들… 무엇이건 다 그랬다.

그때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무감각하게 지났는데 (세상에, 어떻게 이걸 무감각하게 지낼 수 있단 말인가. -.-;)

P사에서 A사로 transition하는 기간에 나 자신을 돌아보며 이것이 더욱 심각하게 다가왔다.

새해엔,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나와 함께하는 하나님을 더욱 깊이 경험하고 싶다.

그렇게 내 삶을 바꾸어나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