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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

나는

절대적 절망의 상태에서, 깊은 갈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도무지 그것을 어찌 해 볼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은혜와 사랑으로 그런 나를 일방적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이끌어 내어주셨다.

절망도, 갈망도, 은혜도, 사랑도… 도무지 내가 머리로 다 이해해 낼 수 없을 만큼 깊은 것들이지만,

이제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망 역시…

논리로만 설명해 낼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무덤 문이 단단히 닫혀 있고, 예수님의 시신이 그 안에 있다고 사람들이 여기던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어둠을 깨뜨리시고 궁극적 소망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그것을 도무지 이해할수도 믿을 수도 없었다.

그들의 생각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부활의 기븜을 마음에 담으면서,

나는 오늘과 내일 ‘소망’에 더 깊이 머물러 있고 싶다.

나로부터 나오는 싸구려 소망이 아니라,

오히려 나로부터 소망이 없다는 인식에서 출발하는 참된 소망에 머무르고 싶다.

부활절을 넘어서도,

그 부활과 소망의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여서,

그리고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아예 그분과 하나가 되어서…

그렇게 살고 싶다.

소망…

사랑

그분을 십자가에 붙들어 놓고 있었던 것은 대못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사랑이었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온갖 고난을 다 당하시고,

도살장의 양과 같이 그렇게 처절하게 처형당하신 성금요일이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내쉬시는 그 순간,

주님께서 마음에 품으셨던 그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사랑’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몸과 영혼이 찢어지는 처절한 고통 속에서,

주님께서는 무한한 사랑으로 그것을 버티어 내셨을 것이다.

조건이 없는 사랑 이라는 개념은,

세상 에서 찾아볼 수도, 경험해 볼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도 그 ‘조건 없는 사랑’이라는 것을 마음에 품기란 대단히 어렵다.

오늘 하루,

나는 주님의 처절한 고통속에 담겨져 있던…

그 피묻은 사랑을 마음에 더 깊이 담아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 안에 더 머물러 있고자 한다.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은 잠시 좀 제껴두고,

그저 주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 하는 것에 overwhelm 되어보고 싶다.

은혜

은혜란,

정말 말로 안되는 개념이다.

사실… 어떻게 생각하면,

그러면 안되는 개념이다.

왜냐하면 은혜는, 그 이전의 모든 상태를 백지화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런의미에서 불공평하다고 생각할수도 있다. 억지라도 여겨질수도 있다. 비합리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은혜가 아니라면, 

은혜가 아니라면…

도우지 해결할 방법이 없었는데…

도무지 도무지 해결될 방법이 없는 절망의 상태였었는데…

주님께서 그렇게 은혜로 모든 것을 뒤집으셨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는,

우리 쪽에서의 반응 조차도 trivialize 시킨다.

은혜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엎드려 울며 그 은혜에 잠기는 것 뿐이다.

은혜에 걸맞게 살거나,

은혜를 갚거나,

심지어는 은혜를 온전히 누리는 것 조차도… 불가능하다.

오늘 하루는,

정말 특히 그 은혜에 깊이 immerse되어 있고 싶다.

도무지 헤아릴수도 감당할수도 없는 그 은혜에,

내 온 존재를 던져놓아 머무르고 싶다.

갈망

비극적일만큼 절망적인 상태의 인간에게도,

그 존재의 깊은 곳에서 부터 나오는 ‘갈망’이 있기 마련이다.

복음을 알기 전에도,

알지 못하는 어떤 존재, 어떤 소망, 어떤 그 무엇을 향한 깊은 목마름이 있기 마련이고,

복음을 알고 난 후에도,

그 신비를 더 깊이 알고자 하는 끊임 없는 갈망이 있다.

내가 복음을 알기 전,

내 내면 속 깊은 곳에서 외쳐나오던 그 ‘갈망’을 깊이 오늘 하루 마음에 담고자 한다.

내 갈망은 무엇이었던가,

그 갈망을 어떻게 채우려는 헛된 노력을 했던가,

지금… 내 갈망의 내용은 무엇인가.

주님을, 주님을…

바라고 바라고 또 바라는 그 상태에 오래 머물러 보고 싶다.

절망

“하나님 없는 인간은, 절대 절망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 는 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인간의 상태이다.


아직 복음을 깨닫기 전에는,

인간에게 주어진 이 절망의 상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복음을 깨닫기 난 이후에는,

복음을 알기 전 상태가 얼마나 절망적인 것이었는지 망각하기 십상이다.

오늘 하루는,

내 상태가 하나님 없이 얼마나 절망적이었던가 하는 것에 깊이 immerse 되어보고자 한다.

아직 복음을 알기 전에, 내가 얼마나 절망적인 상태였던가,

복음을 받아들인 후에도, 끊임 없이 반복되는 죄를 돌이켜보며… 지금도 나는 하나님 없이 얼마나 절망적일 수 밖에 없는 상태인가…

복음의 신비는,

절망의 깊이를 제대로 perceive할때에야 드러나게 되는 것 같다.

고난 주간을 묵상하지 않기 (?)

매년 고난주간에는 나름대로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려고 많이 노력을 했었고,

내게 참 큰 유익이 있었다.

그런데,

금년 고난주간에는,

고난을 묵상하기 보다는, 고난을 그냥 마음에 담는 일을 해보려고 한다.

그게… 좀 설명하자면 어려운데,

말하자면,

고난이 어떤 것일까,

그 고난이 예수님에게 얼마나 아팠을까,

그 고난의 결과로 내게 주어진 구원이 얼마나 큰 것인가..

등등의 ‘묵상’은 결국은 대단히 이성적인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 그 결과로 눈물도 나고 감격도 하고… 그런 의미에서 감성적이 되기도 하지만,

이런 묵상은 본질적으로 이성적 활동이다.

금년 고난주간에는 그런데,

그런 ‘이성적’ 접근보다는…

그저 그 고난을 마음에 ‘담는’ 것을 해보고 싶다. (too post-modern? ㅎㅎ)

이성적 과정이 전혀 배제될 수는 없더라도,

깊은 기도, 삶에서의 절제, 피동적인 자세의 견지, 그리고 성령의 지배에 vulnerable하게 나를 내어놓는 것과 같은 ‘자세 잡기’를 통해서,

그 고난으로부터 내게 주어진 은혜를 머리로 깨닫거나 분석하지 않고,

‘heart’에 담아보려고 한다.

여태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한번도 해보지 않은 것이어서,

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내 마음에 정말 한번 ‘담아’ 보고 싶다.

주님을 정말 그렇게 사랑하니까.

그리고,

적어도 부활의 아침을 묵상하기 까지,

‘내가 어떻게 하리라’와 같은 결심 혹은 ‘내가 어떻게 해야한다’와 같은 당위는 당분간 마음에 담지 않고자 한다.

나의 밖으로 부터 내게 주어진 은혜를 충분히 담기 전에,

결심이나 당위로 연결시키는 것은 내 신앙을 shallow하게 만드는 큰 적인 것 같아…

My Transitions (3)

4.

내 네번째 transition은, 박사과정을 마무리하던 시기였다.

(최근 그것에 대해 좀 쓰기도 했지만..)

대충 2002-2003년 즈음에 그런 transition이 있었는데,

그 주된 내용은, 정복주의적 세계관에 대한 회개, 그리고 Lordship에 대한 재정립 이었다.

MIT라는 유명한 학교에서, 그것도 비교적 유명한 지도교수 밑에서 박사과정을 마쳐가면서,

내가 세속적 성공/명예에 대한 것이 중독되듯이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주로 대략 6개월-1년간의 QT 말씀이 나를 그런 깨달음으로 인도하였던 것 같다.

정말 마음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이 아프고 힘들었었다.

정말 가슴에 불덩어리를 가지고, 주님을 위해 산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결국 나 자신을 위한 것이었고, 오히려 복음의 가치와 충돌하는 방식이었다니…

정복주의적 영역주권론 이라고나 할까…

모든영역에 그리스도의 주권이 선포되어야 하니까 모든 영역을 ‘정복’해 나가야 한다는…

그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역시 일종의 ‘멘붕’이 왔다.

이때 정복주의적 개혁주의 세계관의 대안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갖게 되었고,

공동체, 고난, 순결힘, 산위의 동네… 등등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다.

5.

그리고 지금.

대충 작년즈음 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고, 지금 그 transition이 거의 climax에 올라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하고 있다. (아니면 하나님께서 씨익 웃으시면서, 짜아식.. 아직 멀었다… 얘야 하고 계실른지도 ㅎㅎ)

기본적으로는 내가 내 안에 가지고 있던 ‘불덩어리’가 그겋게 건강하지 않았다는 반성이 이 transition의 가장 기본적인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vulnerable함, passive함, 은혜, 사랑, 약자의 하나님, 초월성, 자유, 순종, 절제, 듣는 기도 등등의 개념들이 나를 사로잡고 있는 것 같다. (아마 시간이 더 지나면 좀 더 잘 정리가 될 것 같다.)

아직 나는 내가 겪고 있는 transition이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는 모른다.

그렇지만 내 과거의 모습에 대해 통렬하게 아파하고 있고, 기존에 생각하지 못하는 것들에 주목하고 있다.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정말 대단히 passive하게 그렇게 이끌려가고 있다.

정말…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Something’s really happening to me…

하나님께서는 나를 또 어떤 모습으로 인도하실까…

My Transitions (2)

3.

세번째의 transition은, 96-97년 경이었다.

96년 코스타를 다녀온 전후로, 함께 하던 공동체의 사람들이 갑자기 바뀌기 시작했다.

생명력 없던 모임에 생명력이 공급되었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도의 움직임이 생겼다.

당시 대학원생이던 나는, 새벽에 교회 van을 운전해가며 기도하려는 학생들을 모아 새벽기도를 함께 하는 일을 주도하는 역할의 일부를 담당하였다.

나는 기도에 대해 거의 무지했었는데,

기도를 하다가 방언도 하게 되었고, 일종의 ‘신비체험’등도 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내게 일어난 근본적인 변화는

내가 ‘기도’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한동안은,

매일 한시간씩 온몸이 땀에 젖도록 기도를 했었다.

당시 개인적으로는 많이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내 개인 기도는 하나도 시키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영광’, ‘교회의 부흥’에 대한 기도만을 집중적으로 시키셨다.

정말 눈물을 펑펑 쏟아가며,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를 했었다.

이 transition을 통해서 나는,

기도를 알게 되었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

그리고 하나님의 기준이 결코 인간적인 어떤 것에 제한될 수 없다는 것을 가슴에 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쯤부터 내게,

가슴에 불이 하나 있는 것과 같은 … 그런 상태가 시작되었는데,

그로부터 15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그것은 (비록 기복이 있긴 하지만) 계속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근본적으로 바뀐 것이다.

My Transitions (1)

금년을 시작하면서,

‘새해 결심’ 시리지의 글을 통해서,

내가 일종의 어떤 ‘transition’을 겪고 있는 것 같다고 쓴적이 있었다.

정말, 나는 지금, 확실히 어떤 transition을 겪고 있다.

내가 의도하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아주 일방적으로 나를 drive 해나가시고 계시다는 느낌이다.

몇번의 글을 통해서, 내가 겪었던 transition을 설명하고, 지금 내 transition을 이해해보려는 시도를 해보려고 한다.

1.

내가 겪은 가장 큰 transition은 무엇보다도 회심이었다.

89-90년에 걸쳐 일어났는데,

성경을 연구하다가 겪게 되었다.

은혜, 사랑, 소망, 회복, 하나님 나라, 구원, 성숙 등의 개념등에 사로잡혀,

그야말로 밤낮으로 눈물을 쏟아내었다.

기존에 살았던 가치관이 붕괴되면서 일종의 ‘멘붕’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 아직 새로운 가치관은 제대로 다 세워지지 않았는데, 기존의 가치관은 와르르 무너져내려버렸으니 그럴만도 했다.

2.

두번째로 겪은 transition은, 좀 작은 scale이었는데 92-93년에 일종의 ‘영적 침체’를 겪으면서 였다.

새롭게 받아들이 복음의 뜨거움이 아직 살아 있는데, 하나님이 예전과 같이 생생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 말로 다 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나름대로 말씀 연구, 각종 종교활동등에 열중하기도 했고, 새로운 시도 (신비주의 계열의 기도모임)를 하기도 했었다.

이것은 내 연약함을 잘 깨닫게 된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신앙에는 내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넓은 영역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 속에서 나는 ‘사역자’가 되어갔다.

거대담론의 missing link?

‘고난’과 그 고난 속에서의 ‘소망’에 대해 거대담론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현재의 피조세계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지로부터 벗어나 있는 상태이다.

그 왜곡 때문에 인간을 비롯한 전 피조세계는 고통을 당할 수 밖에 없는 구조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왜곡과 고통을 그냥 두지 않으시고 그 피조세계를 회복/구원시키신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를 이땅에 보내셨고, 예수의 선포와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제는 회복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지금 비록 고통과 왜곡 속에 살지만, 그것은 이제 회복의 역사 속에서 해결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소망이 주어졌다.

음…

그런데,

이거 좋은데…

깨어진 세계, 그 속에서 회복에의 소망… 

그렇다면, 현재 고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냥 이 피조세계의 회복이 이루어 질 것이기 때문에…

그냥 이 고통/왜곡을 견디어내며 살도록 던져진 것인가?

흔히 타락을 회복시키시는 것으로만 복음을 설명할때의 missing link는 ‘현재’이다.

과거(타락)과 미래(회복)은 설명을 해 주는데,

현재가 어중간하게 잘 설명이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결국 복음이 이야기하는 ‘현재’에 대한 스토리는 이것이다.

임마누엘. God with us.

하나님께서 그 고통속의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동행, 그 안에서 그 백성 다운 모습으로 만들어짐, 그리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남 

(그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다는 표현이 이럴땐 더 좋은 것 같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은혜의 복음은, 

하나님께서 그 눈물 속에 함께 하고 계신다고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