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Week 묵상 – 고통

어제, 

한국에서 수학여행을 가던 아이들이 탔던 배가 침몰한 뉴스를 들었다.


어찌나 가슴이 막막해지고 힘들던지…

아… 정말 몇번씩이나 탄식이 나왔다.

이건 아닌데…

정말 이런건 아닌데…

세상이 이러면 안되는 건데…

아끼는 친구들의 힘든 모습을 보며,

사랑하는 사람들이 힘들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이런 뉴스를 들으며…

그리고 또… 내가 그런 힘든 상황을 지나기도 하면서…

예수께서 그 고통스러운 세상 속에 소망을 주시기 위해 자신이 그 고통을 짊어지셨음을 생각해본다.

침몰하는 배 속에서 두려워했을 아이들의 두려움 만큼이나 예수의 두려움이 컸을까?

그 아이들을 잃어버린 부모만큼이나 예수께서는 아파하셨을까?

깊은 삶의 절망의 골을 지나고 있는 사람들의 말로 다 할 수 없는 어려운 마음을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앞에두고 가지셨을까?

오늘은…

도무지…

‘고통’이라는 지점으로부터 조금도 생각이 더 움직여지질 않는다.

2 thoughts on “Holy Week 묵상 – 고통”

  1. 수십번은 더 해봤을, 수십번은 더 들어보았을 질문이, 또 내 마음에 드는 것보니, 제가 이전에 찾았던 대답들이 제게는 대답이 되지 못하나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 직접 개입하지 않으시나요? 그분이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데, 역사의 주인이시고, 우리의 삶을 돌보시는 분이신데, 왜 이런일이 일어나나요? 그분의 이땅에서 일하심은 예수를 이땅에 보내셔서 구원사역을 완성하신 것으로 끝인건가요?
    우리가 맨날 노래하는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고, 너는 어느때나 어디서나 주만 바라보라”라고 하는 노래는 무슨 말인가요?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시는 것만 하시는 건가요? 내 살길은 아둥바둥 내가 찾아야하는 것인가요? 그 과정에서 하나님은 마음에 위로와 평안만을 주시는 분인가요?
    일상의 소소한 기도는 들으시는 것같은데 (들으신다고 생각하는데) 이렇게 어렵고 마음아프고 큰 일 가운데서 하나님은 어디에서 일하시나요?

    예수를 통해 하늘을 가르고 우리의 삶 속으로, 우리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주권적으로 들어오신 주님은, 모든 우리의 악함에도 불구하고 왜 지금 이런 상황가운데에는 개입하시지 않으시나요?

    피어보지도 못한 어린 것들, 그 어린것들….
    이제는 저도 나이먹어, 걔네들이 내 딸같고 아들같은 나이가 되었는데,

    날씨가 안좋고 물살이 세어서 선체로 접근하지 못한다는 기사를 읽으며,

    하나님, 조금만 날씨를 좋게해주세요. 날씨는 하나님 하시는 일이시잖아요. 조금만 물살이 약해져서 훈련된 요원들이 선체로 접근할 수 있게 해주세요 라고 마음으로 기도하다가, 너무 너무 속이 상해서, 철없는 아이처럼 아빠되신 하나님께 따져 묻습니다.

    죄송합니다. 여기다가 추태를 부려서…..

    ———-
    조금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추스르고,

    현재 이땅에서의 하나님의 주권과 다스리심은 제한적인가요?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때까지는 여전히 악과 실수와 비극과 함께 거해야 하는 것인가요? 그래서 천국비유들 (씨의 비유들, 밭에뿌린 곡식비유 등)은 점진성을 이야기하는 것이겠죠? 그리고 주기도문에서도 하나님나라의 임하심을 구하는 것이구요.

    근데 다시 원래의 주제로 돌아가보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도 제한적이라고 이해를 해야 하는 것인가요?

    바울의 기도나 예수님의 기도를 살펴보면, 하나님께 우리의 소원을 아뢰고 그분의 공급과 역사하심을 간구하는 청원의 기도전통은 성경에도 나와 있는 것이고, 또한 이천년 기독교 전통에도 면면히 흐르는 것이잖아요?

    일반적으로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에 대한 답으로 하나님의 뜻에 합하지 않았다던가 욕심을 위해 구했다던가 아니면 더 큰 하나님의 뜻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무응답의 응답이다 이런 말씀도 많이들 하시구요.

    근데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생각해보면, 그래서 이땅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나타나는 것이 점진적이라면 (meaning that 여전히 하나님의 뜻이 통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지금 이땅에서 기도의 응답에서나 하나님의 일하심과 개입/역사하심도 제한적일수 있다고 가정해야 하는 것인가요? (이거는 제게는 어려운 질문인 것이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자비로우심에 대한 (제한적) 도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졸개님 어떻게 생각하세요? 혹시 이 내용으로 글을 쓰실것이면, 제 이름만 가려주신다면..^^ 제가 드린 질문 마음대로 가공하셔서 쓰셔도 괜찮습니다.^^ (이 아침에는 왠지 웃기도 죄스럽고 미안하네요.) 그리고 당장 생각을 나눠 주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시간적으로 좀 여유있을때, 기회가 되면 졸개님의 생각을 한번 들려주세요.

  2. 정말 저도 그게 참 많이 힘듭니다.
    저 나름대로는 몇가지의 해결책(?)을 고민중입니다.
    다음의 몇가지가 서로 exclusive한 것이라기 보다는 전부 혹은 일부가 모두 우리에게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중입니다.

    첫번째로는,
    지금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완전히 통치하고 계시지 않다는 가능성에 대해 열어놓는 것입니다. 소위 open theism이라는 개념과도 상통하는 바가 있을 텐데요…
    저는 open theism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지 하는 것은 자신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세상의 상태가, 선하신 창조주의 의도로부터 벗어나 있고… 지금은 공중의 권세잡은 자의 통치 아래 아직 있는…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로 회복이 선언된… 그런 상태에 있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지금 이런 비극적 상황은 하나님의 섭리라기 보다는 사탄의 조작이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 때문에 그것에 제한적으로 접근하실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겁니다.

    두번째는,
    우리가 도무지 알 지 못하는 어떤 이유로,
    하나님께서 그 일을 허용하고 계시고…
    우리는 그 비밀을 도무지 알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건 어떤 의미에서 전통적 설명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을텐데요…

    욥기를 보면,
    천상의 무대와 지상의 무대… 두개의 무대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천상의 무대에서는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가 이루어지고,
    지상의 무대에서는 욥과 사람들의 상황이 전개되고요.

    그런데 욥기가 끝날 때 까지,
    욥은 천상 무대의 존재에 대해서도, 거기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저 이 땅에서 고통을 겪어낼 뿐이죠.
    욥의 이야기를 통해서 기자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dimension이 있고, 거기서 일어나는 일은 지상에서 알 수 없다… 라는 것일 수 있겠습니다.

    세번째는,
    Already but not yet의 tension 속에 살 수 밖에 없는 우리의 부르심의 nature는,
    고통을 해결하거나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고 선언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겁니다.
    사실 고통의 순간에는 늘 하나님께서 어디 계신가 하는 질문을 할 수 밖에 없는데요,
    그럴때도 나는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전 우주의 창조주이시고, 사랑과 공의의 성품을 가지신 분이시다. 이걸… 이를 악물고, 눈물을 흘리며, 믿으며 버티는 거죠.

    네번째는,
    고대 유대인들은, 소위 ‘말세’가 되기 전에 고통이 점차로 세상에 채워지고 되고,
    세상이 그 고통이 충분히 채워지면 결국 great ending이 이루어진다고 믿었다고 합니다.
    성경을 가만히 보면요, 그런 비슷한 개념들이 좀 스며들어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가령, 요한계시록 6장 같은 곳에도 그런 개념이 있지요.
    만일 이게 사실이라면요,
    결국 채워져야하는 고통의 양이 정해져있다고 할수도 있는데,
    그러면… 내가 고통을 당하게 되면 마치 큰 돼지 저금통에 동전을 채워넣는것 같이 그렇게 contribution한게 됩니다. 그 고통이 겉보기에 전혀 무의미한 것이라 하더라도 말이죠.

    결국,
    고통, 악의 문제는,
    우리에게, 심지어는 성경에도 뚜렷한 해답이 없다고 생각해야하지 않을까 하는게 제 잠정적 생각입니다.

    심한 조울증 환자였던 아내를 두고 오래 고생했던 스탠리 하우어워즈가,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대답을 알지 못한채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
    라고 이야기했었는데요,
    저도 그걸 좀 더 배워가고 있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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