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적 희망 (6)

첫째 살아가는 의미에 대한 새로운 발견.

1930년, 시골에서 평범하게 농사를 짓던 청년이 독립투사를 만날 기회를 갖게 되었다.
하룻밤을 지내면서 독립투사가 해주는 역사 이야기, 독립에 대한 소망의 이야기,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냥 평범하게 농사를 짓던 이 청년은 그 독립투사의 이야기를 듣고서 마음에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결국 이 청년은 망설이던 끝에 자신도 조국 해방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이 시골 청년이 새로운 인생의 의미를 갖게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건, 자신이 살고 있는 내러티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더 큰 내러티브가 있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게 새로운 의미를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복음이 제공해주는 것이 이런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냥 삶에 커다른 의미 없이, 그냥 살아가고 있었는데,
복음을 알고 나니 자신이 사는 것이 하나님나라 라는 커다란 내러티브의 일부라는 것을 알게되는 것이다.

이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이야기하는,
“네 마음의 목소리를 찾아라. 네 꿈을 이루어라” 와는 꽤 다른 삶의 방식이다.

오히려 복음을 통해서 파편화되어 있는 삶의 의미를 통합해내는 것이 된다.

내가 만나는 제한된 그룹의 사람들을 보면,
일종의 영적 우울증에 빠져있는 것 같아 보일때가 있다.

우울증은, 감정이 우울한 것이 아니라, motivation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신앙의 motivation 자체를 잃어버린채 살고 있는 것 같아 보이는때가 정말 많다.
그것을 다루기위해 상담도 하고, 공감도 하고, 함께 울어도 주고…
나는 이런것들이 모두 가치있고 때로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더 궁극적으로는 혹은 더 기본적으로는 이런 사람들에게 복음이 이들의 삶을 던질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더 해줄 필요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정말 복음의 내러티브를 알고 나면 그런의미에서 새로운 motivation이 생기게되고,
무기력감으로부터 벗어나서, 전에 없었던 활기를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Tony Camplo가 이런 이야기를 한적이 있다.

젊은이들이 기독교를 떠나는 것은 기독교가 너무 어려워서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기독교를 너무 쉬운 것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나는 정말 동의한다.
이것은 기독교의 교리를 더 복잡하고 어렵게 설명해야한다는 의미가 당연히 아니다.
기독교를 가볍게 여기고 그저 자신의 가벼운 life style 선택정도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삶 전체를 집어삼키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때로…
그 안에서 안정을 찾고 그 내면의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삶 전체를 던져야만하는 더 큰 헌신의 대상을 이야기해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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