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tting things done

미국의 의료비가 참 많이 비싸다.
이건 뭐 워낙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이게 많이 비싼것을 가지고 사람들이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는다.
그러니까 영리를 목적으로하는 병원을 허가하면 안된다고 한국에서 이야기하는 이야기도 듣고,
사설 의료보험이 만악의 근원이라고 이야기하는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그리고 또 미국에서도 결국은 의료보험체제를 개혁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했던 Obama care같은 것도 있었고.

원칙적으로는 나는 동의하는 부분이 많이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미국에서 그걸 하는데는 정말 많은 어려움이 있다. 어쨌든 현실적으로 개인의 자유, 자유로운 영리추구가 훼손되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고, 그런 입장을 가진 major 정치집단이 있는 것이 사실이므로… 원칙과 이상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쉽지는 않은 것 같아 보인다.

적어도 내가 지금 있는 회사에서는 그 문제를 조금 다른 방법으로 풀어보려고 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의료시스템 자체를 더 효율적으로 만들고, 병이 걸렸을때 그것을 치료하는것보다 병이 걸릴 위험을 줄임으로써 그 cost를 줄이는 쪽으로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데에는 결국 새로운 innovation을 일차적으로 받아들여야하는 일선의 병원이나 의료보험회사의 저항이 그렇게 크지 않다.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만들면 결국 병원의 경영에 도움이 되고,
reactive(병을 치료하는 방식으로)하게 문제를 다루지 않고 proactive(병을 사전에 적극적으로 예방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다루어 cost를 낮추는 것은 의료보험회사들이 환영하는 방법인 거다.

그러면 이런 식으로 하면 소위 stakeholder들을 배제시키지 않고 그 사람들을 참여시키는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게 정말 될까?
물론 나도 잘 모른다. 적어도 우리 회사에선 그걸 해보려고 이것저것 노력을 하고 있는 중인거고.

어떤 문제에 대해서 소위 ‘이념적 (idealogical) 접근’을 하는 정치집단을 보면 좀 답답하다고 느낄때가 있다. 이념적 접근을 큰 틀을 짜서 vision casting을 할때는 도움이 될지 모르나, 그 구체적인 실행방안이 부실하면 목소리는 크고 갈등은 키우고 일을 제대로 안되는 일들이 벌어지고 만다.

한국이나 미국에서,
진보진영이든 보수진영이든 모두 이런 우를 범하는 것을 자주 본다.

한국의 경우에는 박근혜 정부때 빛내서 집사라고 했던 거나… 문재인 정부에서 대출규제를 통해서 집값을 잡아보겠다고 하는 것 같은게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싶다.

적어도 무엇인가를 execute하는 사람들은, 그냥 좋은 이상만으로 일이 된다고 생각하며 안된다.
그 이상을 현실적으로 이루어내는 창의적이면서도 혁신적인 실행계획들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제대로 실행해내는 능력도 있어야 한다.

이건 정치나 행정의 영역에서만 보는건 아니다.

교회도 그렇다.

좋은 아이디어를 목소리 높여 이야기하고, 자신과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소위 개혁적인 사람들에게서 자주 그런 아쉬움을 느끼곤 한다.

나도 그 얘기 다 공감하고 동의하는데…
그렇게 원칙만 이야기하지 말고 뭔가 한발작 더 나가는 이야기를 좀 해보면 좋지 않겠나… 싶은 거다.

재미있는 공부

어제 오랜만에 졸업한 학교의 website에 들어가서 뒤져보았더니 박사논문을 다운로드 받을 수 있게 되어있었다.
종이로 프린트 한것을 아마 학교 도서관에서 스캔해서 올려놓은 것 같았다.
(나때만 해도 박사논문을 종이로 프린트해서 내도록 되어 있었다. ^^)

내가 박사논문을 쓴건 반도체 소자를 만드는데 사용되는 플라즈마와 고체 표면사이에 일어나는 현상을 수학적 모델로 설명하고 그 수학적 모델을 실험을 통해서 다시 확인하는 내용이었다.

내가 실험을 한 경우도 있었고, 이미 발표된 다른 논문에서 얻을 수 있었던 실험결과들도 있었는데…
수학적 모델을 세워놓고 그걸 컴퓨터를 이용해서 풀어서 실험결과와 잘 맞아들어가는 것을 보았을때의 그 짜릿함이란!!!

박사학위를 받은지 이제는 아주 긴 시간이 지났고,
지금 내가 하는 일은 그때 그렇게 열심히 했던 것과는 아주 다른 종류의 일을 하고 있다.

나는 박사공부를 할때 꽤 고집스럽게 hot한 것을 해서 뻔지르르한 뭔가를 만들어내는 종류의 일 보다는, 뭔가 일어나는 현상을 과학적으로 잘 설명해내는 종류의 내용으로 논문을 쓰고 싶었다. 그리고 결국 고지식하게 그렇게 했다.

그런데 요즘은…
박사를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 적어도 공학분야에선 그렇다.
공학분야에서 좋은 박사논문은 보기에 아주 hot한 혹은 sexy한 것을 해내는 것들이다.

내가 hot하거나 sexy한 것을 하는 것보다는 조금 더 근본적인 원리에대해 더 해보고 싶어서 그렇게 고집스럽게 했던 것은 어쩌면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현명한 선택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컬하게도 지금 나는 말하자면 비교적 hot하거나 sexy한 것들을 하면서 밥먹고 살고 있다.
그렇게 고집스럽게 근본적인 원리를 파고 싶었던 내 박사과정때의 고집은… 그냥 그걸로 끝이었다. 나는 그 후로 다시 또 그런 종류의 연구를 하지도 못했고, 심지어 내가 아카데미아로 갔더라도 그런 연구를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요즘 그런 연구에 누가 돈을 대주겠는가…

같은 실험실에 있었던 사람들 몇명을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더니,
그렇게 똑똑하게 아주 재미있는 논문들을 썼던 친구들이 지금은 다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고지식하게 그렇게 공부하고 원리들을 탐구하는 일을 좋아하는 내게,
그나마 박사과정때라도 그걸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이 지금 생각하면 감사한 일인거다.

여러개의 비선형 미분방정식을 컴퓨터로 풀어가며 계산을 했었지만…
지금 나는 간단한 미적분도 어떻게 했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 하다. ㅋㅋ

나이가 많이 들어서 배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중고등학교 검정고시를 보고, 대학을 다니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예전에 보면서 잘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이젠 그런 마음이 이해가 잘 된다.
주말엔 가끔씩 내가 더 공부해보고 싶었던 양자역학 같은거라도 조금씩 공부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The Wall of Shame

예전에 박사과정을 할때,
우리 office 한쪽 벽에는 The Wall of Shame이라는 벽이 있었고, 그곳에는 여러가지로 장식이 되어 있었다.

서로 잘 들어맞지않게 잘못 디자인된 실험장치,
실험이 거의 끝나갈때쯤 실수로 깨뜨려버린 실리콘 웨이퍼,
냉각수 켜는 것을 깜빡한 바람에 태워벅은 실험장비의 사진 등등.

우리끼리 우리의 실수를 희화화하면서 즐거워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때 가끔은 그걸 보면서 아…내가 저렇게 바보같은 실수를 했구나… 하는 것을 되새기며 뭔가 겸손해지는 느낌이 들때도 있었다.

당연히 그 wall of shame에는 내 실수들도 전시되어 있었으니.

내가 나를 과대평가하고 싶을때,
내 인생에도 그런 the wall of shame이 있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내 실수와 실패와 부끄러움을 모으는 일은 어쩌면 내 삶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

그러니,
현재를 살아가면서 의도적으로…the wall of shame을 장식할만한 내 부끄러움에 의도적으로 주목하며 살아가는 것이 참 의미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 삶의 부끄럽고, 어둡고, 당황스러운 순간들…
그런 순간들에 오히려 그 순간을 잘 마음에 새기고 담아내는 일들을 더 의도적으로 해야하겠다는 생각

날씨

보스턴에서 공부할때,
나보다 2년 먼저 졸업한 친구가 이곳 bay area에 직장을 잡았었다.

그 친구와 그때 이메일을 하면서 Sunny California에 사는게 어떠냐, 여기는 오늘도 3ft 눈이 왔다… 해가면서 이야기를 하곤 했었다.
이야기를 그렇게 하긴 했지만, 사실 나는 보스턴 날씨에 그렇게 큰 불만이 없었다.
보스턴 날씨가 좋아서 그런것이라기 보다는, 나는 날씨에 좀 둔감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여태껏 내가 산 지역을 쭉 따져보니, 이곳 bay area에서 산 기간이 제일 길다.
날씨에 둔감한 사람이기도 하고, 이곳에 오래 살고 있기도 해서…
이곳의 날씨를 많이 appreciate하면서 살고 있지 못하는 것 같다.

요 며칠 날씨가 꽤 좋다.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고.

미국 다른 지역에서는 이상한 날씨 때문에 난리가 났는데,
둔감해서 날씨 좋은 것을 감사할줄 모르는 것도 일종의 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희망에 대한 이야기

최근에 Yale의 Center for Faith and Culture에서 하는 podcast를 발견했다.
주로 Miraslav Volf가 이야기를 많이 하는 podcast인데, 그중에 나온 이야기중 몇개를 여기에 옮긴다

미라슬라브볼프는 몰트만을 인용하면서 희망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희망과 낙관론은 다른 것이다.
낙관론은 현재의 상황으로부터 외삽해서(extrapolate)해서 예측할 수 있는 미래에대한 예측이다. 낙관론은 그런 의미에서 논리적이다.
그러나 희망은 현재의 상황으로부터 논리적 사고를 통해서 도달할 수 없는 상태를 바라보는 것이다. 희망은 현재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new thing)이다.

희망은 우리가 그렇게 희망을 가질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지 않을때 갖는 것이다. 희망은 논리에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신뢰(trust)에 근거한다.

희망은 논리적인 흐름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갖게되는 것이다.

평신도 (18)

도대체 나의 부르심은 무엇일까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
나는 세상에서 엄청나게 영향력이 있는 사람도 아니고,
성경이나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좋은 가르침을 주는 사람도 아니고,
세상의 약자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삶은 헌신해서 사는 사람도 아니다.

나는 그냥 2021년에 실리콘밸리에서 살고 있는 엔지니어다.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모습은 그냥 크게 의미가 없는 것일까.
도대체 지금 이 시점에 내가 있는 이 자리에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것이 내가 하는 고민의 요체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렇게 10년도 훨씬 넘게 거의 매일 이 블로그에 글을 써오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것을 위해서 나름대로 책도 읽고, 말씀 묵상도 하고, 사람들과 나누기도 하고, 다른 의견들을 듣기도 한다. 글도 쓰고, 강의도 하고, 토론을 하거나 설득을 할때도 있다.

그런데,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것은…
지금은 다른 어떤때보다 평신도가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때라는 것이다.

예전에 기독교가 assume하던 전제들이 세상에서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이때,
세상의 발전속도가 너무 빨라 기독교가 이제는 한참 뒤쳐져 있는 이때,
하나님 나라의 컨텐츠 자체가 세상을 해석해낼 기능을 상실해버렸다고 느껴지는 이때,

평신가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적용하는 장이 아니라,
하나님나라 복음의 컨텐츠를 만들어내는 장이 된다는 것이다.

나름대로 생각도 많고, 쓸 이야기도 많은데,
거의 지난 한달동안 이렇게 쓴 것이 많지 않은 독자들에게 잘 전달할만큼 잘 정리된것 같지는 한다.

그리고 아마도 내가 살아가면서 이 내용들도 더 계속 update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일단 이 이야기는 이 정도에서 정리를 해보려 한다.

평신도 (17)

교회는 여러 삶의 정황속에 있는 평신도들이 세상과 소통한 결과들이 모이는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1. 교회에서 복음이 세상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는 것에 대해 함께 나누고 배운다.
  2. 그 내용을 가지고 각자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세상과 소통한다.
    이것은 일방적으로 내가 옳다고 주장을 하면서 외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겸손하게 세상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야 한다.
  3. 2번에서 세상과 소통하면서 얻어진 결과들을 개인적으로 반추해보고, 그것들을 다시 교회로 가지고 온다.
  4. 함께 모여진 다방면의 삶의 영역에서의 경험과 깨달음을 바탕으로 교회가 세상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는 내용 자체를 update 한다.
  5. 다시 1번으로 돌아가서 그 내용을 서로 나누고 배운다. 그 후 1~5번을 계속해서 반복한다.

나는 이런 과정을 아주 많이 많이 많이 많이 많이 많이 많이 많이 거쳐야만 비로소 지금의 기독교의 무지를 조금이라고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위의 1번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이 “하나님나라 복음의 내용” 이라고 한다면 교회 공동체는 반복해서 그 “하나님나라 복음의 내용, 컨텐츠”를 계속 만들어나가는 작업을 해야한다.

그런 의미에서 평신도의 삶의 정황은 하나님나라 복음을 적용하는 장이 아니다.
하나님나라 복음의 컨텐츠를 만들어 내는 장인 것이다.

평신도 (16)

아주 창의적이면서도 자유로운 생각을 가진 예술가에게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예술에대해서 어떤 인상을 가지고 있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할까?

하루 12시간씩 일을 하면서 프로젝트를 성공시키지 못하면 도태되고 낙오되는 치열함 속에서 살고 있는 월스트릿에 있는 사람에게,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경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할까?

3주앞으로 다가온 product launch에 맞추기 위해서 밤 늦게까지 컨퍼런스 콜을 해가며 아시아에 있는 공장과 이야기를 하고 아침 7시부터 다시 그 아시아쪽의 데이터를 분석해가며 전략을 짜야하는 엔지니어에게, 기독교가 innovation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할까?

도시의 빈곤문제와 범죄에 대해 연구하면서 제한된 resource를 어떻게 분배해야하는가 하는 것을 치열하게 연구하는 공무원에게, 기독교가 빈곤과 범죄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냐고 묻는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대답할까?

아주 난감하지 않은가?

기독교는 그냥 무식하다.ㅠㅠ

기독교가 이렇게 무식한 이유는, 소통할줄 모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문제들에대해 기독교가 종교적 입장에서 해답을 줄 필요는 당연히 없다.
그렇지만 세상의 문제들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한채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이야기하는 교회의 이야기에 누가 귀를 기울이겠는가?

그러니 기독교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에게만 그나마 믿을만한 종교가 되는 것이다.
삶이 치열하지 않아서 그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
절박함 속에서 초월성이라는 곳으로 피신하지 않으면 위안받을 곳이 전혀 없는 사람들,
삶과 기독교를 철저히 분리해서 사는 사람들,
기독교를 자신의 유익을 취하는 도구로 이용하는 사람들…

기독교는 사람들의 삶과 세상을 해석해내는 기능을 잃어버린 것이다.

평신도 (15)

르네상스맨 (한국어로는 르네상스형 인간이라고 하나?)이라는 표현이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 한 사람이 다양한 분야의 일을 다 할 수 있었던, 다재다능한 사람을 이야기한다.

그런 르네상스맨이 지금도 가능할까.
아주 불가능하다고 단정지어서 이야기할수는 없겠지만, 예전보다 훨씬 더 힘들것 같다.
왜냐하면 각각의 분야가 너무 급격히 발전을 해서 그 내용을 이해하는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도 공학을 오래공부했으니,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나 정도쯤 되면 물리학에 대해 뭔가 좀 잘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수도 있겠으나…
가끔 책이나 다른 글들을 읽으며 깜짝깜짝 놀랄때가 있다.
아… 내가 예전에 학교에서 배웠던 물리학의 지식으로부터 이제는 꽤 많이 더 발전된 것들이 있구나…

교회가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는 그래서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소통 채널이 필요하다.
조금 더 뛰어난 사람이라면 자신의 전문분야로부터 조금 더 확장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넓은 분야에서 여러 지식과 경험들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기도 하겠지만,
일반적으로 아주 뛰어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한 사람이 커버할수 있는 영역이 그렇게 넓지 않다.

잘 알지 못한 채 뭔가 아는척 하면서 이야기하다보면…
똥볼을 차는 경우가 꽤 많다. ㅠㅠ
(이런거 요즘 정말 많이 보게되지 않은가!)

가령 예를 들어서…
나는 그냥 엔지니어다. 엔지니어중에서도 요즘 많이 뜨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가 아니고, 어떤 물건들을 만들어내는 엔지니어다.
그런데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과 대화를 해보면,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아주 독특한 방식이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만 형성되는 논리도 있고, 문제도 있는데… 그것이 나 같은 사람에게는 별로 잘 적용되지 않는 것들이 많이 있다.

또, 내가 하는 일이 medical device를 만드는 일이다보니, 의료계에 종사하는 분들과 접촉할 기회들이 조금 있는데, 이 분들은 또 사고방식이 나 같은 엔지니어와는 아주 다르다!

그러니, 예를 들면 예술가, 음악가, 육체노동자, 유치원 교사, 역사학자 등과 같이 내가 살면서 많이 접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과는 얼마나 사고방식이 다르겠는가.

문제는 이 세상은 이 모든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 가고 있고,
세상은 (정치, 기업, 경제, 문화) 이 많은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 가는 복잡한 것을 그래도 꾸역꾸역 해석해가며, 분석해가며, 이용해가며, 그 속에서 살아남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복잡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해석하지 못하면 그 사람들은 도태되니까. 생존을 위해서라면 죽어라고 힘들지만 그걸 해야하는 거다.

그런데 교회는 그러지 못한다.. ㅠㅠ

평신도 (14)

나는 바로 여기에서 지금 평신도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 교회는, 기독교는, 세상을 해석해낼만한 힘 자체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세상을 해석해내는 힘은, 기독교가 그것을 해석해낼만한 충분한 컨텐츠 자체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 기독교인들이 세상을 살면서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매우 크고 심각한 이유는 도대체 그 ‘말씀’이라는게 무엇인지, ‘말씀대로’라는게 무슨 뜻인지 하는 것 자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만 하더라도…
지금 2021년 이곳 실리콘 밸리에서 엔지니어로서 살면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교회에서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건 내가 다니는 교회가 형편없는 교회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냥 지금 기독교가 그걸 가르쳐줄 컨텐츠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이전의 전제들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세상,
그나마도 매우 급속히 바뀌고 있어서 그냥 그것만을 따라가는 것도 벅차게 느껴지는 세상…
그 속에서 교회는, 복음은, 기독교는, 그냥 멍하니 무기력하게 손을 놓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질때가 많다.

(쓰고 싶은 이야기가 정말 무지무지하게 많은데, 하루에 10분남짓씩 시간을 내어서 쪽글로 이렇게 시리즈로 글을 쓰다보니 뭔가 흐름도 자연스럽지도 않고, 논리적 정합성도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다. 그럼에도 할 수 있는한 이 이야기를 계속 조금 더 써보려고 한다. 다음주에 계속)